Warrior Grandpa and Grandmaster Daughter RAW novel - Chapter 482
21화 새로운 여정의 시작
무림맹주 황보성은 절벽 아래를 한참이나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지독한 놈. 그 몰골로 이곳까지 뛰어와서 자살할 줄이야.”
옆에서 그를 보좌하던 중년의 무림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죽었을까요?”
“지금껏 내 운룡신장에 맞고 살아남은 자는 없어. 그래도 확실히 하는 게 좋겠지.”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겠습니다.”
“그리하게. 반드시 시체를 찾아서 본보기를 보여야 해.”
“본보기라니요?”
맹주 황보성의 두 눈이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독고현이 지나온 자리로 무수히 많은 시신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마치 한바탕 전쟁이라도 치른 것 같은 참상이었다.
“무림공적 하나 잡자고 너무 큰 희생을 치렀어. 적당한 곳에 시신이라도 걸어놔야 우리도 체면이 서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그나저나 저 소년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황보성의 시선이 주저앉아서 흐느끼는 유연풍을 향했다.
“음. 음양쌍괴의 후계자라면, 더 크기 전에 화근을 제거해야 할 터인데…….”
“하지만 오늘은 보는 눈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아무리 아군들이라도 비밀이 완벽히 보장되리란 법이 없었다.
이곳에서 자칫 그를 죽였다가 음양쌍괴의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그때는 대안이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적당히 타일러서 잘 돌려보내게.”
“알겠습니다, 맹주님.”
한편 유연풍은 생전 처음으로 느껴보는 무기력함에 좌절하고 있었다.
“개자식들…….”
아무리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부은들 이미 벌어진 상황은 되돌릴 수가 없었다.
지인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니.
너무 분해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억울하면 더 강해지라고?’
독고현이 마지막에 남긴 한마디였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더 강했더라면.
누구도 무시 못 할 정도의 고수였다면 이런 무기력함을 느낄 이유는 없었으리라.
유연풍은 각오를 다지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터업-!
유연풍은 두 명의 노인에 의해 강제로 일으켜 세워졌다.
그들의 내공이 워낙 강해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따라오거라.”
“이거 놓으세요!”
“지금은 안 돼. 풀어 주기 전에 우리와 얘기 좀 해야겠다.”
“나는 당신들과 할 얘기가 없습니다.”
“그래야만 할 텐데?”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자신을 데려가서 뭘 할지 훤히 보였다.
음양쌍괴와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자신을 타이르려는 수작이리라.
같이 엮이는 것만으로도 역겨웠지만, 현재로선 방도가 없었다.
“무림맹이 원래 이렇게 비겁한 곳입니까?”
“비겁하다니? 너는 오늘 무림공적을 도왔지만, 우리는 그런 네게 자비를 베풀려는 것이다.”
“살려 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차라리 저도 죽이세요.”
“그럼 안 되지. 네가 우리를 나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오늘 오해를 다 풀어주마.”
유연풍은 힘없이 끌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산의 절반쯤을 내려가고 있었을 때쯤이었다.
“……?”
돌연 선두에서 나아가던 자들이 다급히 걸음을 멈춰 세웠다.
마치 뭔가를 보고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헉!?”
“……?”
“앞에 무슨 일이야?”
한 여인이 뒷짐을 진 채 이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몇몇 원로고수들이 발작을 일으켰다.
“음, 음괴!?”
“음괴가 왜 이곳에…….”
독고현을 배웅하러 갔던 삼촌의 복귀가 늦어지자, 한번 알아보러 나온 유설이었다.
그녀는 무림맹의 원로들에게 붙들린 유연풍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게, 내가 입구까지만 바래다주라고 했지?”
“조카님…….”
뒷짐을 진 유설이 삼촌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맞은편에 있던 무사들은 다급히 좌우로 비켜섰다. 그 모습이 마치 파도가 갈라지는 듯했다.
“모두 물러서!”
천라지망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단 한 명의 등장으로 철암산 전체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즐비했지만,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당황했다.
그때 무림맹의 원로 한 명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청성파의 제일 고수로 알려진 장로 염청이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천하의 악인을 해치웠을 뿐, 절대 유가장과는……. 컥!”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음괴는 그를 직접 타격하지 않았다. 단지 멀리서 한 손을 쭉 내뻗고 있을 뿐이었다.
손을 대지 않고도, 멀리서 기로 목을 틀어쥔 것이다.
“말이 많아.”
“…….”
유설의 한 마디에 주변이 다시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삼촌에게 다가간 그녀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맞았어?”
“……아닙니다.”
“맞은 것 같은데? 목소리에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자세히 말해봐, 삼촌.”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조카님.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단 말이지…….”
유설은 가슴 아래로 팔짱을 낀 채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왜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겁니까?”
마치 자신이 두들겨 맞았길 바란 듯한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숨죽인 채, 음괴의 반응을 살폈다.
주변을 쓱 둘러보던 그녀가 곧이어 한 사람을 지목했다.
“네가 무림맹주지?”
단번에 무림맹의 수장을 찾아서 짐작해내다니. 황보성이 긴장한 얼굴로 검집을 움켜쥐었다.
“그렇소. 내가 맹주 황보성이오.”
“어쩐지 얍삽하게 생겼더라. 딱 보니 알겠네. 네가 검귀 아저씨를 유인해서 죽인 거지?”
“나를 모욕하지 마시오. 금분세수식을 마친 당신은 강호의 일에 끼어들 자격이 없소이다.”
“나도 알아. 그런데 말이야…….”
“……?”
유설은 자신을 쏘아보는 황보성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눈 예쁘게 안 뜰래? 갑자기 화가 나려고 하네.”
검을 움켜쥔 황보성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일평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치욕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시선을 아래로 회피하고야 말았다.
“우리는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으니, 도발하지 마시오.”
유설이 삼촌을 향해 다시 한번 물었다.
“얘기해, 삼촌. 정말 맞은 데 없어?”
“있어도 얘기 안 할 겁니다. 조카님은 끼어들지 마세요.”
“내가 갚아주겠다는데, 왜 그래?”
“이제부터는 제 싸움입니다. 앞으로 제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유연풍의 눈빛에는 강렬한 기개가 서려 있었다.
뭔가를 단단히 각오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유설이 씩 웃으며 나직이 말했다.
“우리 삼촌 다 컸네.”
“…….”
더는 이곳에서 볼 일은 없었다.
지면에서 떠오른 유설의 신형이 천천히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오늘까지 집으로 돌려보내.”
맹주에게 한 마디를 남긴 그녀는 바람처럼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파아아앙-!!!
* * *
모든 것이 올해 가을의 추억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유연풍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조카님 식사 가져왔습니다.”
원두막에 누워서 악보를 쓰던 유설이 벌떡 일어섰다.
“으응. 어서 먹자.”
“신곡은 완성되었어요?”
“아니, 영감이 잘 안 떠오르네.”
“소소 이모한테 가서 좀 도와달라는 건 어때요?”
그녀는 유설의 음악 스승이기도 했다.
현재는 강호를 통틀어서 한 손에 꼽히는 대가로 평가받고 있었다.
유설이 수저로 국을 뜨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어. 으윽, 짜!”
“어제 싱겁다고 하셔서 소금을 조금 더 넣어봤어요.”
“나한테 다시 배워볼래? 이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멋쩍어진 유연풍은 어색한 웃음으로 화두를 돌렸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무림맹에서 검귀 아저씨의 시신을 아직도 못 찾았대요. 어떻게 된 걸까요?”
“살아 있나 보지, 뭐.”
“정말 그게 가능할까요? 회광반조까지 일어났었는데.”
“그럼 죽었나 보지, 뭐.”
유연풍은 그녀가 자신의 반응을 살펴보면서 장난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휴. 그나저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응? 부탁이 뭔데, 삼촌.”
“나 예명 하나만 지어줄래요?”
앞으로 본명을 대신하여 강호에서 사용할 이름이었다.
유설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예명은 왜?”
“이제부터는 유가장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려고요.”
“뭐야, 삼촌. 지금 우리 가문을 배신하겠다는 거야?”
“아,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이제부터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제힘으로 우뚝 서려는 겁니다. 더는 아버지와 조카님의 그늘에 가려지기 싫다고요.”
“그게, 그거지.”
“어휴. 아니라니까요!”
잠시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유설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가까운 곳에서 뭔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할배 왔다!”
한 호흡이 더 지난 뒤.
젊은 외모의 사내 한 명이 바람처럼 떨어져 내렸다.
유가장의 가주 유진산.
그는 고강한 무공 때문에 손녀와 같은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돌아왔구나, 아가.”
유진산은 몇 년 만에 보게 된 손녀가 무척 반가운 모양이었다.
아들보다도 먼저 찾을 정도로.
“할배. 연풍 삼촌이 우리 가문을 배신하고, 이름을 바꾸겠대.”
“나도 방금 오면서 들었다. 이 녀석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유연풍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다급히 외쳤다.
“오, 오해예요, 아버지!”
“오해는 무슨 오해? 네 조카랑 내가 죽을 고생을 해서 겨우 가문을 살려놨는데, 그런 불순한 마음을 먹어?”
“그, 그게 아니라…….”
유연풍은 자신이 또다시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뒤에서 웃음을 참고 있는 조카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근데 할머니는 어디 가고, 할배 혼자서 왔어?”
유진산은 가부좌를 틀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얘기가 좀 길어질 모양이었다.
“사실 일이 좀 있었다. 설이 너를 찾으려고 잠시 돌아온 건데, 마침 잘되었구나.”
“으응?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
유진산 또한 전설적인 경지를 이룬 고수로 손녀를 제외하면 적수를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얼굴이 지금은 다소 무거워져 있었다.
“우리는 바다를 건너서 아주 머나먼 대륙까지 갔었다. 중원만큼이나 거대한 곳이었지.”
“와아~ 거긴 어떤 세상이었어?”
“코 큰 녀석들이 사는 나라였다. 거기도 무림처럼 무법자들의 세계가 존재하더구나.”
말을 마친 유진산은 왼쪽 소매를 걷어서 손녀에게 보여주었다.
두 개의 붉은 흉터가 교차하여 길게 이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이 상처는 뭐야?”
“그곳을 지배하는 놈들과 싸우다가 당했어. 아주 무시무시한 녀석들이었다.”
세상 어딘가에 할아버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자가 또 존재했다니.
매우 고무적인 소식이었다.
그동안 잠들어 있던 전사의 본능이 되살아날 정도로.
모처럼 유설이 흥분한 얼굴로 재차 확인했다.
“……그게 정말이야? 할배만큼 강한 사람이 있었다고?”
“오냐. 아무튼, 설이 네가 할애비 좀 도와줘야겠다. 지금 할머니도 다쳐서 거기에 누워 있어.”
그 순간 유연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머니까지 다치셨다고요? 그럼 저도 같이 가서 돕겠습니다.”
“너는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어머니가 누워 계시다는데, 어찌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발목만 살짝 다친 거니,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다. 그리고 너는 가봐야 도움도 안 돼. 경공도 느리지 않으냐.”
정곡을 찌르는 아버지의 말에 유연풍도 체념하고야 말았다.
그 머나먼 서방세계까지 함께 간다면, 속도가 몇 배나 더 오래 걸릴 테니까.
시무룩해진 그는 아버지와 조카가 작전을 세우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
이튿날 아침.
출발 준비를 마친 조손은 서방세계로 떠날 채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한편 유연풍도 앞마당에 나와서 봇짐을 점검하는 모습이었다.
“아들아. 너는 뭘 그렇게 챙기고 있느냐.”
“저도 수행을 떠나려고요. 성과를 이루기 전까진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기개가 서린 아들의 눈빛에 유진산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설이한테 그간의 일들을 전해 들었다. 처음으로 강호를 경험해 본 소감이 어떻더냐.”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려면, 세상 누구보다 강해져야 한다는 것도요.”
유진산은 아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응원해주었다.
“분명히 그렇게 될 게다. 연풍이 너는 내 자랑스러운 아들이니까.”
“아버지…….”
그때 장원의 입구에서 유설이 그들을 재촉했다.
“빨리 와, 할배! 늦으면 할머니한테 혼난다며!?”
“오냐. 빨리 가야지.”
유설은 마당에 외로이 서 있는 삼촌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이 불쌍해 보였기 때문일까?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뭔가를 제안하기 시작했다.
“삼촌, 갈 데 없지? 소호객잔까지 함께 가서 밥이나 먹고 가.”
소호객잔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주방장의 음식 솜씨가 일품인 것으로 유명했다.
시무룩하던 유연풍의 얼굴이 금세 해맑은 미소를 머금었다.
“정, 정말 그래도 됩니까?”
“응. 빨리 가자구.”
이미 유진산은 그들보다 한발 앞서서 출발한 상태였다.
그가 아들과 손녀를 향해 씩 웃으며 한 마디를 남겼다.
“그럼 음식값은 가장 늦게 도착하는 사람이 내는 거다.”
“너무 합니다, 아버지!”
“히히히.”
그렇게 유가장의 일가족은 새로운 모험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앞으로 어떤 여정이 펼쳐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었지만, 이 순간 모두의 마음엔 설렘과 두근거림이 가득했다.
– 외전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