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do business in full auto RAW novel - Chapter 35
풀 오토로 사업합니다 035화
035
영국으로(1)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나에게 있어 장모님이란?
다른 사위들은 처가에 가면 대접받는다고 한다. 씨암탉을 잡아 주지는 못할망정 나는 항상 문전박대였다.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영국에 드나든 것이 열댓 번은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리사가 가족과 인연이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장모라는 사람은 나에게 물을 뿌렸다.
그나마 돌아가신 장인은 좀 나았다.
애초에 장인인 할스 코튼은 그 집 데릴사위였다. 어디 백작가 차남이라고 하던데 장모님의 대에서 아들이 없어 할스 코튼이 데릴사위로 들어와 작위를 이었다고 한다. 물론 장모님이 직접 작위를 이을 수도 있었지만,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데릴사위가 작위를 잇기도 한다. 물론 아예 자식이 없을 때는 양자를 들여 작위를 계승하였고 말이다. 코튼가의 경우에는 양자보다는 피가 이어진 캐서린 코튼에게 상속권을 먼저 주었고 가문 회의에서 할스 코튼으로 작위를 결정했다.
장모는 자신이 왕족이자 유서 깊은 귀족가의 실세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직도 영국에는 귀족이 정치에 참여한다.
영국의 상원은 귀족원이라고도 불리며 하원과 독립되어 운영된다.
법 제정과 정부 운영을 감사하는 일에 책임을 하원과 나누며 전 세계에서 아직까지도 귀족들이 힘을 쓰는 유일한 국가라고 할 것이다.
2009년 대법원이 별도로 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귀족원은 영국 사법 제도의 최고 기구였다. 상원의원 일부가 성공회 주교들이라는 점만 놓고 보아도 그들은 종교와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코튼 백작가는 세습되어 내려오는 90명의 귀족의 수좌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방계 왕족 출신으로 정계와 사교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런 특권 때문이라도 나 같은 이방인은 영국 귀족가에서 환영받을 수가 없었다.
오물도 투척 당해 보고 똥물까지 뒤집어쓴 후에야 다시는 찾지 않게 되었다.
“인명은 하늘이 정한다는 동양의 옛말이 있죠. 장모님의 수명도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어쨌든 위독하다고 하니 거기에 대고 안 좋은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제임스의 얼굴이 더욱 씁쓸해진다.
“그래. 그 독한 누나도 죽을 때가 되니 정신을 차린 모양이더라고. 여전히 자네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은 꺾지 않았지만……. 딸이 보고 싶다고 해.”
“리사요?”
“그래.”
“글쎄요? 이미 인연이 끊기지 않았습니까. 아내도 그때 같이 똥물을 뒤집어썼죠. 김치 냄새나는 놈과 붙어먹었다고 벼락같이 노성을 지르셨는데 그게 아직 잊히지 않는군요.”
“알아. 내가 다 이해하지.”
“저희가 가지 않는다고 해도 별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자네 아내의 의중도 그럴까?”
“아내는…….”
“그래. 자네를 따라 가족도 버리고 여기까지 왔지. 그리고 그 모진 세월까지 이겨 냈어.”
“……소식을 들으셨군요?”
“리사는 내가 아끼던 조카이기도 해. 궁금하니 종종 사람을 보내서 알아봤지. 자네가 궁핍할 때 리사를 찾아갔던 적도 있어.”
“……!”
그건 몰랐다.
처가에 손을 벌릴까 말까 수백 번 생각을 했었어도 이미 인연이 끊겼다고 여겼기에 연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제임스가 아내를 찾았었다고?
“10만 달러를 내민 적이 있었지. 나름대로 파운드보다는 달러가 낫겠다고 생각해서 환전까지 해서 가지고 간 거야.”
“아내가 거절했군요.”
“그래. 자네는 반드시 재기할 것이니 이런 돈은 필요 없다고 말이야. 그때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 자네는 모를 걸세.”
“……이해합니다.”
리사의 가족 관계에 대해 나름대로 잘 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내가 아내가 아닌 이상은 자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했다.
친했던 삼촌의 제안을 거절했던 리사의 마음도 이해는 되었다.
“그래도 100달러 지폐 몇 장 강제로 던져 주고 도망쳤는데 그걸 썼는지는 모르겠군.”
“아마 아기 분윳값으로 쓰지 않았나 싶네요. 감사합니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신경을 써 주셨네요.”
“그 이후로도 종종 사람을 보냈지. 그리고 최근 들어 자네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재기했어. 신기할 따름이었지.”
“장모님도 아십니까?”
“알지.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난리를 치기는 했지만 다소 안심하는 표정이었어.”
“하아. 최근 쓰러지셨군요?”
“그래. 급성 심부전이야. 얼마 버티지 못할 거래. 한 달 만에 사람이 뼈만 남아 버렸어.”
다시 술을 들이켜는 제임스.
사람이 쓰러져 죽는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수도 있다.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갑자기 찾아온다.
그 어떤 사람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지만, 그 누구도 자신이 당장 죽을 거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없다.
“내 부탁은 하나야. 가능하면 와 주었으면 좋겠어. 병원에서 본가로 누나를 옮겼지. 그곳으로 오면 된다네.”
“아내가 가겠다고 하면 가겠습니다.”
“자네도 이제 마음 풀기를 바라네.”
“제가 간다고 그 집안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파문인데요.”
“그야 재고가 될 여지는 있지.”
“그걸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냥 지금이 좋아요.”
“언젠가 리사도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는 반드시 후회를 하더군.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말이야.”
제임스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도 나는 한참이나 자리에 앉아 소주를 들이켰다.
생각지도 못하게 카운터펀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
대리비가 아깝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아내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광주에서 서울까지 약 3시간. 여기에 시내에 들어서면 대략 한 시간 정도가 걸렸기에 총 4시간에 이르는 시간이 소요됐다.
슬슬 술이 깨고 제정신이 들었다.
“20만 원입니다, 손님.”
“여기 있습니다.”
오는 길에 통장에 5억 원이 꽂혔다.
H그룹에서 정말로 나를 밀어주기로 작정을 한 모양인지 계약금은 바로 처리가 됐다.
계획도 세워져 있었으니 실행만 하면 되었고 인양 비용은 아직 협의조차 하지 않았기에 더 많은 돈이 모일 테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난하던 시절에는 전 재산인 적도 있었기에 쉽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님? 놓으셔야죠.”
“하하하. 이거 돈을 내려니 식은땀이 다 나서 말이죠.”
“그보다 급한 일 때문에 부르신 것 같은데 댁에 들어가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아, 예.”
결국, 대리기사는 탁 하고 돈을 낚아챈다.
대리기사가 사라지고 잠시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웠다.
“후. 이거 어려운 문제로구나.”
분명히 아내와 결혼할 때 약속했었다.
영국에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었으며 혹시라도 본가에서 부른다고 해도 외면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건 아내가 울면서 한 다짐이다.
그런데 오늘 처외삼촌 제임스가 와서 통사정을 했다.
캐서린 여사, 그러니까 장모님이 아내를 간곡하게 찾는다는 것이었다.
코튼 성을 찾아가면 아마도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시선이 싸늘하겠지.
그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가는 것이 꺼려지기도 하였고 말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코튼가를 떠난 것도 아내의 의지였으니 찾아가는 것도 아내의 의지겠지.”
결정을 내린 후에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렇게 집에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던 적이 없다. 과연 아내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딩동.
벨을 누른다.
익숙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여보, 나야.”
-어머.
은은하게 미소를 지은 채로 아내가 문을 열었다.
수아는 자는 모양인지 조용하다.
지금 시간은 10시. 하지만 아내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갑자기 찾아오실 줄 몰랐네요. 오늘은 광주에서 주무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지. 그런데 상황이 좀 바뀌었어.”
“급한 일이라도 있으세요?”
“수아는 언제 깨려나?”
“아침에 일어날 거예요. 이제야 좀 자리가 잡혔죠.”
“잠깐 나가서 이야기 좀 하자.”
“네? 집에서 해도 되는데…….”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서 그래. 당신도, 나도 이 이야기에 집중을 할 필요가 있어.”
“알겠어요.”
역시나 두 번을 묻지 않는 아내였다.
그런 아내 때문에 가끔 속을 모를 때가 있었다. 어떤 말을 해도 두 번 이상 하게 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오랜만에 무게를 잡았다.
분위기가 무겁다는 사실을 아내도 캐치하였다.
나와 관계되어 있는 친척이나 지인, 친구들은 하나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아내도 뭔가를 직감한 모양이다.
딸랑딸랑.
오랫동안 장사를 한 흔적이 역력한 조용한 카페였다.
서울에 살면 이런 것이 좋았다. 어디를 가도 24시간 운영하는 카페가 있으니까.
나는 술을 깰 수 있도록 녹차를, 아내는 그 흔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가능하면 좀 비싼 커피 좀 마시라고 하고 싶은데 지금 분위기는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놀라지 말고 들어.”
“놀라지 않을게요.”
“장모님께서 위독하시다고 해.”
“…….”
아내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조금 당혹스러워하다가 그다음에는 연민인지 모를 감정이, 그리고 마지막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범벅이 된 복잡함이 어렸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아내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다. 이건 7년 동안 아내를 보아 왔기에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그렇게 받았기 때문이겠지. 귀족가의 교육이 그렇다던가.
어려워도 내색하지 않고 슬퍼도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뭔가 극단적인 사건이 터져야 비로소 감정을 드러낸다.
지금처럼 말이다.
아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나오지 않는 말을 간신히 끌어 올렸다.
“사실 광주로 처외삼촌이 찾아왔어. 언제 접근을 해야 하나 간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아. 나를 쫓아다닌 지 며칠 되셨겠지. 그리고 어렵게 말을 꺼내더라고.”
“제임스 삼촌과 이야기를 나누셨군요?”
“갑자기 소주 한잔하자고 하시더라고.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는데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어. 장모님이 위독하시고 당신을 그렇게 찾으시더래.”
“이제 와서 저를 찾는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저는 이미 본가와 인연을 끊은 지 오래고 이런 소식을 전해 듣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절연을 하시면서 온갖 욕과 몹쓸 짓을 하셨던 분이 이제 와서 찾으신다니.”
아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아내라면 영국으로 가지 않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나도 딱히 본가에 찾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륜이라는 것이 어디 그리 쉽게 끊어지던가?
반대의 입장이라고 생각해 봤다.
결혼 때문에 내가 집안과 절연했다면? 그러던 와중에 부모님 중 한 분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고 임종을 지켜 달라고 부탁을 받았다면.
“후.”
또 담배 생각이 난다.
어쨌거나 제임스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그대로 전해 주어야겠지. 그래도 거절을 한다면 그게 아내의 뜻인 거다.
“처삼촌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어떤 부모님이라고 해도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을 때 오는 심적인 괴로움은 평생을 간다고 하더군. 그게 설사 자식 버린 부모라고 해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