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will make you the best soccer player RAW novel - Chapte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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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W 에이전시의 신입 통역, 태현석 (1)
-너 진짜 영국이야?
“응. 방금 도착했어. 히드로 공항 알아? 런던에 있는···.”
-이런 미···.
자연스럽게 말해봤는데, 하나도 소용없었다.
휴대폰을 귀에서 멀찍이 떼 누나의 첫 번째 잔소리파도를 피했다. 귀에서 멀리 떨어뜨려 놨는데도 울려 퍼지는 누나의 목청에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누나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었고, 나는 휴대폰을 다시 귀에 댈 수 있었다.
-···쳤어, 미쳤어, 미쳤어. 아니 그 고생을 해서 들어가 놓고 프리랜서를 하겠다는 게 말이 돼? 너 왜 나한테는 말도 없이···.
“누나한테 말하면 보나마나 반대했을 거 아냐.”
-당연하지!
“그래서 그랬지.”
-너···.
다시 한 번 휴대폰을 멀리했다. 어이쿠, 팔을 최대한 뻗었는데도 아까보다 두 배는 더 큰 목소리가 공항 안을 쩌렁쩌렁 울린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누나의 분노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아버지와 통화하지도 못하고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지하철로 들어가야 했다.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해 누나. 사과랑 변명은 다음에 꼭 할게. 일단 아버지 좀 바꿔줄래? 시간이 없어서···.”
-너···, 너······, 후우·········.
“정말 미안해. 누나. 그리고 제발 아버지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줘···.”
-이미 했어.
누나의 서늘한 목소리에 침을 꼴깍 삼켰다.
미안해요. 아버지.
누나의 목소리가 절대 영도인걸로 미뤄봤을 때, 아버지는 머나먼 군대 시절을 떠올릴 정도로 갈굼 당했을 게 틀림없었다.
막내를 낳고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해야 했던 누나는 우리 가족의 어머니 포지션을 맡고 있었다. 누나의 특기는 걱정을 담은 잔소리하기. 잔소리라고 하기에는 강도가 좀, 아니 많이 세서 아버지와 나, 막내는 누나의 잔소리를 ‘언어구타’라고 부르곤 했었다.
-바꿨다. 잘 도착했냐?
“아버지. 괜찮아요?”
-···피곤하진 않고?
한 템포 느린 대답. 아버지는 누나 눈치를 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네, 괜찮아요. 비행기에서 푹 자서 완전 쌩쌩해요.”
-다행이네.
“네, 너무 걱정 마세요.”
아버지는 잠시 뜸을 들인 후에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미 저질러버린 거, 최선을 다해봐라.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이니 네가 알아서 잘 할 거라 믿는다.
“···고마워요. 누나 많이 화났죠. 죄송해요.”
-음··· 괜찮다. 내가 알아서 하마.
아버지에게서 전우애를 느낄 줄은 몰랐는데. 죄송해요 아버지.
-그리고 다은이가 선물 꼭 보내달라고 전해 달라더라.
“그래요?”
작게 웃었다. 열 살 아래 막내 여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났다.
“알았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지금 지하철 들어가야 돼서 누나한테는 나중에 전화한다고 말해주실래요?”
-그래. 알았다.
“네, 아버지.”
-잘해라.
“예. 힘내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커다란 캐리어 가방을 끌어 엘리베이터를 타, 튜브(Tube)라는 별명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에 들어섰다.
개찰구에서 꾸벅꾸벅 조는 직원에게 오이스터 카드(영국의 교통카드)를 발급받고, 미리 다운받아 놓은 노선도를 살펴 타야 할 열차의 승강장 번호를 찾았다.
열차는 금방 왔다.
서울의 지하철과는 달리 심하게 좁은 열차였다. 새벽이라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키 큰 사람이라면 좌석에 앉았을 때 앞의 사람과 무릎이 닿을까 걱정해야 할 것 같은 넓이였다.
휑한 좌석의 구석에 앉으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계획대로였다. 이제 레스터 스퀘어(Leicester Square)라는 이름의 역에서 내리기만 하면 된다.
여유가 생겨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공항 역이라 그런지 내가 탄 칸에는 여행객들만 있었다. 두 무리가 있었는데, 한쪽은 중국인, 한쪽은 한국인이었다. 생김새로도 구분이 갔고, 중국어랑 한국어를 쓰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영국에 온지 하루도 안 됐지만, 한국 사람을 보니 알 수 없는 반가움이 생겨 처음에는 말을 걸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두 무리가 기묘한 눈싸움을 시작해서였다.
이유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아스날의 유니폼을 입은 중국인들과 토트넘의 유니폼을 입은 한국인들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스날과 토트넘.
프리미어리그에서 북런던을 대표하는 두 팀은 리버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만큼이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두 팀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무조건 싸움이 나서 매번 경찰력이 투입될 정도였다.
서로의 라이벌 의식이 얼마나 강한지, 아스날의 지역에서 하얀 옷을 입으면 안 되고, 토트넘의 지역에서 붉은 옷을 입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영표 해설위원의 인터뷰를 통해 알려진 사실이기도 한데, 글로 볼 때는 몹시 흥미로운 얘기였다만··· 지금은 전혀 흥미롭지 않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날 것 같은데.
“큼, 크흠.”
일부러 헛기침을 해 팽팽하게 당겨졌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두 무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인지 각 무리는 내 눈치를 보고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말싸움이라도 시작했다면 일본인인 척 하고 도망치려고 했었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게 된 것 같다.
딱딱한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두 무리들 덕분에 런던에 왔다는 실감이 좀 났다. 다른 나라에 살던 사람들끼리도 라이벌 팀의 팬이란 이유로 눈을 부라리다니, 역시 이곳은 축구의 수도다.
시차 적응 때문에 고생할 줄 알았는데, 비행기에서 푹 잔 덕인지 눈이 쌩쌩했다. 나는 크로스백을 뒤적여 너덜너덜한 회화집을 꺼냈다. 영어를 비롯한 다섯 권의 회화집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스페인어를 꺼내들었다.
눈에 잘 들어오는 건 아니었지만, 억지로 혀를 굴려보며 몇 줄 따라 읽어보았다.
오늘 면접을 볼 회사는 EW에이전시. 얼마 전 한 축구매체에서 작성된 기사인 ‘세계에서 가장 큰 에이전시 20위’ 안에 포함된 곳으로 축구 에이전트 업계에서 상당한 위치에 올라 있는 곳이다.
나는 에이전시에 취직하기 위해, 그리고 에이전시에서 경험을 쌓아 에이전트가 되기 위해 영국으로 왔다. 지금은 통역으로 지원하지만, 경험을 쌓아 조르제 멘데스나 미노 라이올라 같은 슈퍼 에이전트가 되는 게 내 목표다.
여러 문제들로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있는 선수들을 찾아 물심양면 지원해 월드 클래스로 만들어내고, 그런 선수들을 하나하나 모아 거대 에이전시를 차리는 것. 그리고 내 선수가 발롱도르, FIFA올해의 선수상을 받으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내 에이전트, 태현석 덕분입니다.’ 라고 말하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아리고 사키, 조세 무리뉴, 안드레 비야스 보아스, 마우로 사리같은 비선출 감독이 되는 걸 생각해봤던 적도 있지만, 감독은 결국 팀을 위하고 구단주에게 치이는 직업이다.
하지만 에이전트는 오직 자기의 선수만을 위할 수 있다. 수많은 이해관계로 얽힌 현대 축구에서 유일하게 선수만을 위할 수 있는 직업이라니.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물론 선수를 자기 돈벌이로만 사용하는 에이전트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돈을 버는 것보다는 선수들이 멋진 경기를 펼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즐거우니까.
뭐, 멋진 척 해봤자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스페인어를 종알거릴수록 침이 바짝 말라붙었다. 아무래도 긴장되는 것 같았다.
그래, 긴장하고 있다. 나는 축구계에서 뭘 해본 경험도 없고, 정식으로 법 같은 걸 배운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스포츠 관력 학과를 나온 것도 아니었다.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건 외국어를 꽤 한다는 거랑 축구를 정말 사랑한다는 거. 그래서 자잘한 축구지식이 가득한 축덕이라는 거다.
외대를 졸업했고, 기업에서 통역 일을 일 년 동안 해 왔기에 읽는 것만이라면 5개 국어가, 말하는 것까지라면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가 가능하다. 한국어 빼고도.
이런 능력을 갖추게 된 것도 다 축구 덕분이었다.
내 또래가 그렇듯 십대 초반에 2002 월드컵을 보고 축구에 홀려버린 나는, 또래보다 훨씬 심하게 축구에 미쳐버렸다. 경기를 보는 건 당연했고, 기사들마저도 잡히는 대로 읽었다. 처음에는 국내 기사로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해외 축구 기사까지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기사를 읽겠다고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사정을 모르는 아버지와 누나는 몹시 기특해 했었다), 더 많이 찾아보려고 스페인어부터 시작해 이탈리아어, 독일어, 포르투갈어까지 건드렸다.
읽는 것만으로 점점 만족할 수가 없게 돼, 다른 사람들이랑 축구 얘기를 하기 위해 해외축구사이트들에 기사들을 번역해 올리곤 했다. 나중에는 기자들과 친분을 쌓을 정도로 나는 ‘진성 축덕’이 돼 있었다.
친구들이 아이돌, 배우, 게임, 만화 등에 관심을 가질 때 내 관심은 오직 축구에 있었다.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축구선수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심지어 군 시절 관물대 사진도 축구선수여서 오해도 많이 받았었다.
자연스럽게 축구계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와 집안 사정 때문에 어학능력 특기를 이용해 외대에 진학해 취미를 계속하며 무난하게 졸업했다.
그리고 이름만 들어도 알 기업에 통역으로 취업해 여러 국가의 바이어들을 상대하며 1년을 일했다. 나쁘진 않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점점 의욕이 없어졌다.
결국 난 사표를 냈다.
직장동료부터 시작해, 친구들, 아버지도 전부 날 말렸다. 대기업의 정규직을 1년 만에 때려 친다니,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짓이라고 모두가 말했다.
하지만 스포츠 에이전시의 세계에 도전해보겠다고 결심한 순간,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의욕의 불씨에 불이 붙었다. 그런 나를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걱정 많은 누나한테는 애초부터 비밀로 했지만.
에이전시 사이트를 돌아보니 나만큼이나 언어가 되는 사람은 외국에서도 드물었다. 나는 자신감을 갖고 모든 곳에 서류를 넣었다.
홀로 에이전트 일을 시작하는 것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축구계에 발끝도 거쳐본 적 없는 사람이 에이전트를 한 다고 하면 어떤 선수가 받아줄까?
에이전트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인맥이라고 한다. 나는 아는 선수나 축구 관계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한국의 몇 기자들과 알고 지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근차근 올라갈 계단이 필요했다. 인맥과 경험을 쌓아줄, 회사 말이다.
여러 곳에서 긍정적인 메일을 받았는데, 고민 끝에 지금 가고 있는 EW 에이전시를 첫 번째로 택했다. 가장 원했던 조르제 멘데스의 제스티푸테만큼은 아니더라도, 선수의 매니지먼트까지 하는 에이전시라 배울 게 많을 것 같았다. 스타 선수도 꽤 있었고, 내 기준에서는 상당히 좋은 회사였다.
-다음 역은 레스터 스퀘어 역입니다.
그러니까, 면접을 잘 봐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릴 준비를 했다. 캐리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를 기분 좋게 들으며 에스컬레이터를 올랐다.
역에서 나와 런던의 클래식한 건물들을 훑고, 휴대폰을 켰다.
지도를 확인하려고 하는데 톡이 하나 와 있었다.
누나 [막내 대학교도 있는데, 너까지 애물단지 되면 죽여 버린다. 너 돈 놓고간 거 아니었으면 내가 영국 가서 너 잡아왔어. 아빠도 말은 안 해서 그렇지 네 걱정 얼마나 많이 하는 줄 알아?]
잠시 후, 메시지가 한 개 더 도착했다.
누나 [그래도 기왕 간 거 잘 해봐. 망하면 당장 돌아오고.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고.]
나는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가려고 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역시 우리 누나다. 말 한마디 없이 결정한 영국행에 엄청나게 화가 나 있을 텐데도 나를 응원해준다. 감사를 담아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나 [고마워 누나. 사랑해♡]
누나 [미쳤냐 태현석.]
나 [진심인데.]
답장은 없었다. 나는 당황했을 누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킥킥대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일곱시,
아홉 시부터 업무를 시작한다는 에이전시에 가기에는 좀 이른 시각이다. 먼저 들를 곳이 있어 이렇게 서둘렀다. 나는 지도 앱을 킨 후 거리를 조금 걸었다.
*
표지판에서 시선을 내려 거리의 전경을 바라봤다.
상가로 가득한 특별할 것 없는 거리다. 이른 아침이라 문을 연 상가도 없어 휑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도 드문드문하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특별한 장소였다.
이곳은 바로, 최초의 축구협회가 만들어진 장소. 바로 현대축구가 시작된 장소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 거리에 있었던 한 가게지만, 그 가게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경기장에 온 것도 아닌데 괜히 두근거렸다.
“여기서 축구 규칙이 만들어지고··· 그게 발전하고 발전해서 지금까지··· 후후.”
축구협회의 시작은 어땠을지, 첫 회의의 모습은 어땠을지 상상하며 거리를 걸었다.
“아.”
기쁨에 잠깐 잊고 있었다. 여기서 해야 할 게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맞잡고 또박또박 말했다.
“좋은 에이전트가 되게 해 주세요.”
바로 소원 빌기다.
축구계에 들어가기 전, 마음을 다지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다시 한 번 목표를 중얼거렸다.
“좋은 에이전트가 되게 해 주세요.”
직장 동료들이 정신 나갔냐는 눈으로 바라볼 때도, 친구 놈들이 ‘미친 새끼’라는 말을 늘어놓을 때도, 아버지가 떨떠름한 얼굴로 만류할 때도, 겉으로는 당당하게 꿈을 찾아 가겠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엄청나게 불안했었다.
물론 지금도 불안하다.
“재능이 있는데도 가난해서 축구 못하는 선수들, 못된 에이전트를 만나서 꼬인 선수들··· 또 뭐가 있을까요. 아무튼, 환경 때문에 재능을 못 발휘하는 일이 없도록, 정말 열심히 할게요.”
망하면 어떡하지, 누나가 날 죽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조금만 도와주세요.”
한참 동안 마음을 다지던 나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영어로 빌어야 하나?”
영어로 방금 했던 말을 쭉 빌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기적 같은 건 없겠지만, 말로 뱉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슬슬 아침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고 거리를 나섰다.
“Give me a little help.”
*
태현석이 롱 에이커 거리를 나서는 순간, 휴대폰이 진동했다. 맥도날드로 향하는 태현석은 그 진동을 느끼지 못했고, 맥모닝을 먹으면서도 면접 준비를 한다고 휴대폰을 보지 못했다.
에이전시로 출발할 시간이 돼 알람이 울릴 때도, 시간만 확인하고 휴대폰은 다시 주머니로 들어갔다.
태현석은 회화집만 뚫어져라 보며 EW에이전시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