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will make you the best soccer player RAW novel - Chapter 176
176
35. 스캔들 (2)
마주 앉아 있으니 확연하게 느껴진다.
AFC윔블던의 경기장에서 처음 만났던 붉은 머리 주근깨 소녀는 롱 헤어와 캐쥬얼한 복장이 잘 어울리는 대학생으로 성장했다.
크리스와 파르넬라의 스캔들이 터지자마자 건 전화에 릴리는 저녁에 시간이 된다고 했고, 나는 릴리 로즈가 다니고 있는 대학 지역까지 차를 몰고 왔다.
그녀의 대학 캠퍼스 옆 번화가의 카페에서 나는 그녀와 막 만난 참이었다.
창문 밖을 보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녀들이 다양한 복장으로 왁자지껄 떠드는 게 보였다.
어색하던 분위기도 환기할 겸 나는 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학교 다닐 때 생각난다.”
“한국이라고 했죠? 거기 대학교는 어때요?”
“뭐, 똑같지. 과제에 찌든 학생도 있고 꾸미기 좋아하는 학생도 있고···.”
에린에게 들은 바로는 릴리는 공부를 아주 잘 하며, 전액 장학금으로 대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바이오 어쩌구를 배운다고 들었는데 뭐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교수 쪽으로 진로를 잡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도 과에서 압도적인 1위 중이라는 것까지 들으니 릴리에게 대학 시절 과탑이었던 동기 여자애가 겹쳐 보였다.
한 명은 세계 최고의 유망주 중 하나, 한 명은 10대에 회계사 절차를 밟고 있고, 남은 하나는 교수를 지망하고 있다니.
“소꿉친구 셋이 아주 잘 컸네.”
“그렇죠. 특히 에린이 참 예쁘게 컸어요.”
“에린 얘기가 왜 나와?”
대화를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잠깐, 순식간에 릴리에게 페이스를 빼앗겼다. 릴리는 즐거운 듯이 나를 보며 얘기했다.
“태, 나랑 에린이 전화로 무슨 얘기하는지는 알아요?”
능글맞게 고개를 까딱거리는 릴리 앞에 급격히 어깨가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없자 릴리는 핫초코를 한번 홀짝이며 말했다.
“더 잘하라고요. 알았어요?”
이런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었는데. 괜히 목이 타서 아이스티를 단숨에 반이나 들이켰다.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긴장도 빠져나갔다.
편안한 기분이었다.
릴리 로즈는 확실히 좋은 아이였다. 괜히 에린과 크리스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게 아니었다.
마침 릴리 뒤로 깊게 눌러쓴 모자에 후드까지 걸치고 선글라스까지 쓴 아주 수상해 보이는 남자가 다가오는게 보였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팔을 내려 손을 휘휘 저어 그를 멀리 보내버렸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네가 들으면 안 된다고.
수상한 사람은 가까운 테이블에 앉으려다가 내 손짓에 쫓겨나 먼 테이블에 앉았다.
슬슬 얘기해도 되겠다 싶었는데 릴리가 또 선수를 쳤다.
“저 기사 봤어요. 크리스 때문에 온 거죠?”
“어··· 응. 맞아.”
“이것도 봤어요.”
오전에 확인했던 기사의 SNS 계정에는 별의별 댓글이 다 달려 있었다.
Gloryutd) 앨런도 야누자이 각 빠딱 섰다
┖17allen) 어디 야누자이를 앨런에 비비냐?
┖┖Gloryutd) 응 3위~ 다음 경기에서 처 발릴 준비나 해, 니들은 이번 시즌에도 우승 못하니까
Kp) 파르넬라 남자관계도 별로지 않나? 찌라시 엄청 나오던데. 앨런 진짜 실망이다
madeinlondon) 헤세 로드리게스 꼴 날 것 같음
Alwayscity) 어릴 때부터 여자 밝히다 잘 된 선수가 없었지, 앨런 앨런 하더니 리버풀 놈들은 세세뇽이나 빨아야 할듯 LOL
더 늘었네··· 이미 본 내용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비슷한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
“크리스는 괜찮아요?”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랑 같이 다 확인했던 거야. 크리스는 괜찮아.”
“그래요? 다행이다···.”
릴리가 안심하는 모습을 보며 차분하게 기다려줬다.
“아무튼요. 이것 때문에 만나러 온 거 맞죠?”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자 릴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이런 것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 파르넬라랑 크리스가 정말로 만나고 있고, 크리스가 날 가지고 놀았다. 그래서 입을 좀 다물어 달라.”
“뭐?”
그게 무슨 막장 드라마야.
“농담이에요. 크리스 걔가 파르넬라랑 정말로 만날 애는 아니고··· 진짜 뭣 때문에 왔어요? 우리 이렇게 따로 만난 적 한 번도 없었잖아요.”
릴리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녀의 말에서 크리스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느껴졌다.
웃음이 절로 나와 한참 동안 하하하 웃던 나는 릴리에게 편안하게 물었다.
“일단 확인해야 할 게 있어. 크리스랑 어느 정도 관계야? 오늘 부탁하고 싶은 게 있거든.”
“무슨 관계인지가 중요한 거예요?”
“응.”
헬퍼로는 단편적인 정보밖에는 못 얻었다.
1월쯤인가 얻었던 정보인데
[크리스 앨런]-릴리 로즈와 연인 관계다.
이게 전부였다.
둘의 관계에 관한 다른 정보는 없었다.
한창 연애할 나이니까 만나나 보다 생각만 하고 은근히 놀리는 데에만 써먹었었지.
하지만 오늘 할 얘기는 둘의 관계가 어느 정도로 깊은지가 정말 중요했다.
“둘이 정식으로 사귀는 건 이미 알고 있어. 내가 묻는 건 어느 정도까지 보고 있는지야. 그냥 연인으로 끝? 아니면 결혼까지?”
얘기하다 보니까 내가 시어머니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크리스가 말했어요? 와··· 치사하네. 나보고는 다 숨기라고 하더니.”
그래도 나는 미움 받는 시어머니는 아닌 모양이다. 며느리의 잔소리는 아들놈이 다 받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는 얘기한 적 없어. 내가 워낙 정보수집을 잘하잖아?”
릴리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인다.
“크리스도 자주 얘기했어요. 태는 자기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지난 달인가? 밤에 몰래 초콜릿 집어 먹으려다가 태한테 걸렸다면서요?”
“아.”
릴리가 쿡쿡 웃는 걸 보면서 그때를 잠깐 떠올려봤다.
크리스는 훈련을 좋아하고 프로페셔널 한 선수이긴 하지만 기계는 아니었다.
무리뉴와의 경기 이후 훈련과 몸 관리에만 매진하며 잘 버티던 녀석은 몇 개월 동안 눈에 드러나는 성과가 없다는 사실에 속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그런 스트레스를 쌓으면서도 계속 똑같이 열심히 훈련을 반복해 온 것이다.
그러다 지난달의 아침
-오늘 꼭 초콜릿을 먹을 생각이다
라는 정보가 나오게 된다.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풀고 싶었던 모양이라 그냥 넘어가 줄까 했긴 했다.
하지만 이런 건 한 번 물꼬를 트면 끝이 없다는 걸 알기에 나는 에린의 협조를 받아 부엌에 숨어 있다가 크리스를 현행범으로 붙잡았었다.
다른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라고 해서 크리스는 그날 요리를 해보겠다고 별 이상한 음식들을 잔뜩 만들었었다.
먹는 건 내 몫이었고.
“그런 얘기까지 했구나.”
“우리 사이에 숨기는 건 없으니까요. 파르넬라라는 여자가 계속 연락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내가 대신 디엠 보낸 적도 있는데.”
“거슬리지 않았어?”
너무 태연해 보여 한 물음에 릴리는 당연한 듯이 답해줬다.
“믿으니까요. 걔가 누구한테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잖아요?”
실체가 있을 리 없는 두 사람을 이은 신뢰의 선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나는 곧장 다음 질문을 했다.
“숨기는 게 없다면··· 미래에 대한 얘기도 했을 거 아니야?”
“그렇죠. 애는 몇 낳을까 이런 얘기도 자주 하죠. 크리스 얼굴에 제 붉은 머리를 가진 남자애라면 꽤 멋지지 않겠어요?”
“응?”
갑자기 훅 들어오는 릴리 때문에 순간 머릿속이 휘청했다.
애라니. 내가 아는 크리스는 축구밖에 모르는 바보인데 애를 낳느니 마니 하는 얘기까지도 하고 있었다니···.
“근데 크리스 걔는 너무 소심해요. 내가 이런 얘기 하면 좋다고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는 하는데··· 거기서 끝이에요. 밍숭맹숭해요.”
“···진짜 별의 별 얘기를 다 했구나.”
크리스가 소심하다니.
파르넬라나 다른 사람 앞에서는 할 말 다하는 녀석인데.
릴리 한정으로만 얌전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결혼까지도 생각하고 있다는 거지?”
“네, 관계가 깨질 것도 생각하고 소꿉친구랑 연애를 시작했는데 그 정도 각오는 해야죠.”
“그렇구나. 잠깐만.”
화장실을 갔다 온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전히 수상한 차림으로 우리 쪽을 보던 녀석에게 우리 뒤 테이블을 가리켰다.
화장실까지 다녀온 후 릴리 앞에 앉았다.
“힘들 거야. 크리스랑 함께한다는 건 앞으로 사생활이 절반 이하로 줄어버린다는 거랑 다를 게 없거든.”
“알아요. 괜찮아요.”
“네 생각보다 엄청 힘든 일이거든. 유명인의 삶이라는 게. 크리스가 너한테 대답 못하고 우물쭈물 거렸던 것도 다 그걸 걱정해서 한 걸 거고.”
“그러니까 크리스는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걔는 너무 소심해요. 제가 그런 것도 다 생각 못했을까 봐요?”
“응?”
“아직 경험해 본 건 아니지만, 맞부딪혀볼 용기 정도는 갖고 있어요. 어차피 나랑 계속 살려면 당연히 겪어야 하는 일이잖아요. 계속 뒤로 물러서 뭐 좋을 게 있다고 그래요? 나도 당당하게 손잡고 다니고 싶다고요. 걔한테는 말 못하는데 밤에 몰래 만나는 거, 좋긴 한데 가끔은 이렇게 대낮에 같이 돌아다니고도 싶어요.”
어이가 없어서 웃음부터 나왔다.
내가 크리스에게 했던 말이랑 똑같아서.
“봤지? 나랑 똑같이 말하잖아. 연애할 때는 혼자 생각하고 단정 내리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어.”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그때 수상한 복장의 녀석이 뒤에서 일어났다.
인기척에 릴리가 돌아봤다. 턱선과 비율 정도만 보이는데도 느끼는 잘생김. 밖에서 여기 들어올 때 안 걸린 게 용하다 싶었다.
“야, 뭐야···.”
선글라스를 내리지도 않았는데 릴리는 한눈에 알아본 듯했다.
크리스가 릴리 옆에 앉았다.
“진짜 괜찮겠어?”
“그게 문제야? 너 괜찮아? 기자들이 막 뭐라고 하고 난리도 아니던데···. 생각해보니까 열받네. 문자 한 통 보내고 전화 끄는 게 어딨어? 걱정해서 전화했는데 전화기는 꺼져만 있잖아···.”
“미안··· 전화가 너무 와서.”
크리스의 볼을 만지작대는 릴리. 자연스럽게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는 크리스.
얘들아?
날 잊어버린 듯한 둘의 알콩달콩한 모습에 뭔가 흐뭇하면서도 허전했다.
서로 걱정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뜬금없이 눈물이 핑 돈 릴리를 토닥이는 크리스를 보니 크리스가 처음 만났을 때의 녀석보다 더 자랐다는 게 느껴져 괜히 나도 찡해졌다.
얘도 어른이 되고 있구나.
아니 결혼 어쩌고 하는 걸 보니 나보다 더 어른인가.
나는 손을 입에 대며 기침했다.
“큼큼, 보기 좋긴 한데 시간이 별로 없어서 말이야.”
“아.”
둘은 동시에 소리를 내며 똑같이 나를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닮았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그 정도 각오라면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릴리야.”
“네, 말해보세요.”
“기사를 하나 내도 될까?”
릴리는 설명을 요구하듯 내 다음 말을 기다렸고, 나는 차근차근 계획을 설명했다.
크리스와 릴리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다는 걸 공표할 것이다. 그리고 손상 가기 시작한 크리스의 이미지를 반전시켜 놓을 것이다. 필드 안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로맨티스트인 크리스를 그대로 보여줄 것이다.
“공개 후에는 주변에서 시끄럽더라도 같이 다닐 수는 있을 거야.”
릴리는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내가 파르넬라에게 도움을 받으면 된다고, 그쪽에서 해명 인터뷰를 내게 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하며 릴리에게 신중하게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둘이 만나는 거 찬성이야. 스캔들 같은 것도 적어질 테고··· 뭣보다 이 녀석이 좋아할 테니까.”
“뭐가 좋아한다고 그래요?”
“부끄럽냐? 자식아. 너 릴리랑 하고 싶은 거 많다며.”
“아니, 그걸 말하면 어떡해요?”
크리스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던 릴리가 크게 웃었다.
그리고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내게 말했다.
“진짜, 크리스랑 에린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태를 만난 날일 거예요. 저도 그렇고요.”
느닷없는 말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어. 아무튼 크리스는 앞으로 더 스타가 될 거야. 그만큼 너도 평범한 학생으로는 남을 수 없을 거야. 너는 앞으로 릴리가 아니라 ‘크리스의 애인’으로 불리겠지.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문제가 생긴다면··· 그때는 내가 꼭 도와줄게.”
“든든하네요.”
릴리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우리가 차를 타고 떠날때까지 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