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will make you the best soccer player RAW novel - Chapter 203
203
41. 윈터브레이크 (2)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세바스티앙이 입가를 막은 채 키득대고 있다.
오래간만에 보는 레온 또한 세바스티앙의 귓가에 뭐라 속삭이더니 날 대놓고 손가락질하며 자기들끼리 또 킥킥거린다.
이런 분위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참 적응 안 된다.
내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정장 차림의 크리스와 푸른 드레스 차림의 릴리 또한 쑥스러운 듯 한쪽 입꼬리들을 사이좋게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럼, 서약을 낭독하십시오.”
과묵한 데이비드마저도 입가에 웃음기가 서린다.
크리스와 릴리가 각자의 약혼 서약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결혼 전까지 부부나 다름없이 함께할 것이며, 서로를 더 알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무슨 일이 있다 해도 결혼할 것이라는 약속을.
영국의 결혼식은 공무원이 파견돼서 참관하고, 끝날 때 결혼했다는 증명서를 받아야 할 정도로 절차가 복잡하지만, 사실 약혼식은 이렇게 거창한 게 아니었다.
약혼 서약하고, 남자가 약혼반지를 끼워주면 끝난다.
보통 가족 단위, 심하면 본인들 둘이서 끝내는 예도 있었다.
그렇지만 올 사람들의 수를 생각하니 집에서 해결하기 어려워 릴리 말대로 리버풀의 작은 성당을 빌리는 게 가장 합리적이었다.
성당까지 빌렸으니 약혼식을 너무 간소화하기는 뭐 해서 결혼식과 약혼식의 중간 정도로 의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밖에는 업체가 피로연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주례 비슷한 걸 보고 있었다.
이번 약혼식에서 내 역할은 주례 겸 사회자 겸 약혼식의 증인이었다.
크리스가 부탁하자 ‘그 정도야 뭐.’라고 가볍게 답한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정성만, 석대호, 신형욱 같은 한국 사람들은 다른 선수들과 직원들이 왜 웃는지 궁금해하는 기색이었다. 영국 문화에 익숙한 한여름은 제외하고.
영국은 이런 진지한 분위기를 몹시 어색해한다고 한다.
왕실의 결혼식 같은 행사에서마저도 주례자가 대놓고 농담을 하는 게 이 나라 분위기였다.
열심히 약혼 서약문을 읽고 있는 크리스와 릴리 또한 입가를 쉴 틈 없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래도, 서로를 보는 두 눈에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크리스도 릴리의 드레스와 맞춰 살짝 푸른빛이 감도는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크리스가 광고하는 곳에서 협찬해 줬다. 오직 크리스를 위한 정장이다.), 늘 생각하지만, 저렇게 갖춰 입기까지 하니 이 세상 외모가 아닌 것 같았다. 눈앞에서 4D로 할리우드 배우의 결혼식 장면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이따 단체 사진 찍을 때 크리스 바로 옆은 피해야겠다. 오징어 될라.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크리스와 릴리가 선언문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결혼을 약속합니다.”
“···결혼을 약속합니다.”
하아아.
둘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한숨을 쉴 뻔했다.
둘은 끝났지만 나는 시작이었다. 약혼의 증인 겸 주례로서 둘의 축복을 빌어주는 말을 해야 했다.
아직 30살도 안 됐는데.
아무튼, 일단 준비해 온 대로.
“둘이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우리는 쉬어야 할 때 못 쉬네요.”
“하하하하하하.”
영국의 해리 왕자의 결혼식에서 설교자가 했던 농담을 살짝 변형했다.
뻣뻣하던 크리스와 릴리의 얼굴이 풀어지고, 웃음을 꾹 참은 채 엄숙한 행사를 지켜보던 하객들의 얼굴 또한 밝아졌다.
“꼬마들이 어른이 되었어요.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나는 둘을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로 물꼬를 텄다.
크리스를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에린과 함께 만난 릴리와 크리스의 옛 모습 이야기를 하며 추억에 살짝 잠겼다.
그리고 에린에게 들은 둘의 어린 시절 얘기를 쭉 하고, 그동안처럼 앞으로의 행복을 빌어준다는 준비해 온 말을 늘어놓았다.
둘에게 초대받은 약 40여 명의 사람은 입가에 진한 미소들을 그리고 있었다.
특히 크리스와 릴리의 미소가 가장 빛났다.
이제 마무리 멘트만 남았다.
“오래오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이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싶지는 않거든요. 기왕이면 듣는 쪽이 되고 싶지.”
“하하하.”
“오오오!”
내 말에 에린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고, 에이전시의 사람들이 마구 손뼉까지 쳐 댔다. 이 사람들이, 지금 주인공은 크리스라고.
“여기 있는 모두가 이 약혼식의 증인이며, 둘이 했던 서약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다시 분위기를 잡으니 크리스와 릴리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나는 크리스와 릴리에게 서약서에 사인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크리스가 릴리에게 반지를 끼워주며, 약혼식이 끝났다.
“···.”
각종 튀김류와 스테이크에 거대한 통돼지, 5단 케이크. 갖가지 종류의 음료들. 그리고 초콜릿 케이크나 마카롱 같은 디저트류까지.
세바스티앙과 석대호는 피로연 음식들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식 내내 가장 열렬하게 나를 비웃었던 세바스티앙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때!”
“재밌었냐? 응?”
“어··· 네. 흠, 흠, ‘서약을 낭독하십시오!’ 웃기잖아요?”
세바스티앙이 엄숙한 표정으로 나를 흉내 냈고 주변에서 웃음들이 터져나왔다.
나는 세바스티앙의 머리를 다시 한번 쥐어박고는 피로연장의 구석으로 걸어가며 이들을 불렀다.
“따라와, 너희가 먹을 건 따로 준비했으니까. 어이! 데이비드! 이쪽이에요!”
따로 준비했다는 말에 잔뜩 기대하는 모습이었던 세바스티앙과 석대호는 테이블에 도착하자마자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복수에요?”
“설마.”
선수용 식단과 일반식단을 따로 준비했다.
영양학적으로 완벽한 세팅이다.
“닭가슴살, 비계 하나 없는 완벽한 살코기, 콩이랑 살찔 걱정 안 해도 되는 파스타··· 밥이 당길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현미밥도 준비했고··· 설탕이나 꿀 같은 건 1티스푼도 안 들어간 드레싱들과 신선한 채소들. 주스로는 보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질 것만 같은 녹색 채소즙과 붉은 채소즙을 준비했어.”
뷔페식으로.
석대호의 얼굴이 모아이 석상처럼 그늘져 있었다.
“형님, 여기에서까지 꼭 그래야 할까요. 파티인데···. 휴가 첫날인데···.”
“···.”
세바스티앙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나는 둘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사실 이건 장난이었다. 이들도 사람이다. 휴식기가 이 주가량 남았으니 오늘 정도는 파티를 즐겨도 괜찮을 것이다.
기쁜 날이니까.
“오! 오늘은 특식입니까. 맛있겠네요.”
혹시라도 이렇게 먹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해서 준비해뒀을 뿐이다.
“맛있게 먹어요.”
마침 도착한 데이비드는 그릇을 집어 들더니 먹을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기 시작했다.
이제 선수들에게 농담이었다고 하고 다시 피로연의 주 음식들이 차려져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세바스티앙과 석대호가 그릇을 집어 들고 음식을 담고 있었다.
둘의 눈이 데이비드를 흘긋대고 있었다.
자극받은 모양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말했다.
“저기, 농담이었어. 이제 파티 음식 먹으러 가자.”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둘은 동시에 답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알았어. 맛있게 먹고, 그럼 난 가볼게.”
맛좋은 튀김의 향연으로. 오늘은 기쁜 날이니까 괜찮겠지. 한동안 데이비드와 함께 지내느라 튀김류가 특히 고팠다. 초콜릿 케이크도 그렇고.
하지만 내 어깨를 붙잡는 손이 있었다.
“어딜 가요?”
세바스티앙이였다.
결국, 난 붙잡혀서 건강식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배가 고파져서 찾아온, 뒤늦게 합류한 크리스도 함께.
“정말 축하해.”
“고마워요. 태. 나중에 결혼식 때도···.”
“아니, 아니. 그때는 클롭 감독님한테 부탁해봐.”
내가 격하게 만류하자 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잘하시던데.”
“민망해 죽는 줄 알았다고.”
우리는 킥킥 대며 웃었다.
“요즘 뭐 문제는 없지?”
“너무 좋아서 탈일 지경이죠. 아, 태가 자주 안 와서 저도 좀 아쉽고, 에린은 훨씬 많이 아쉬워하고.”
“에린한테는 늘 미안하네.”
올해로 스물이 된 크리스는 프리미어리그 득점랭킹 2위를 달리고 있는 리그에서도 상위권 미들라이커가 되어 있었다.
훈련이 잘 이뤄지니 성과도 좋은 것이다.
크리스는 지금 최적의 훈련을 꾸준히 하며 경기장에서 폼을 완성하는 일만 남은 상태였다.
세 경기에 한 번은 일곱 개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니, 특별한 조건 같은 것만 없다면 얼마 안 있으면 별 일곱 개를 달성하는 일도 머지않아 보였다.
“잘되고 있는 선수에게 볼 일이라고는 스폰서와 광고밖에 없지.”
“광고나 더 찍을까요? 그럼?”
농담하는 녀석은 무척 여유로워 보였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약혼을 하고 애를 만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거니··· 이제 크리스 애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에린이 더 쪼겠지.
릴리는 대학교에 다니는 날은 제외하고는 리버풀로 넘어와 크리스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최근에는 지금 크리스가 살고있는 집의 옆 건물을 구매하기 위해 해리에게 도움도 받았다.
“됐어, 광고는 무슨. 이제 유로 6개월 남았으니까, 몸 관리만 잘해. 지금처럼 일이 주에 한 번은 찾아갈 테니까.”
“알겠어요.”
“그리고··· 다시 한번 약혼 축하한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네.”
크리스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저도요.”
크리스와의 이야기 후에는 데이비드를 찾았다.
“데이비드, 잠깐 와볼래요?”
입에 물고 있던 닭가슴살을 꾸역꾸역 넘긴 데이비드는 녹색 주스로 입가심하고 다가왔다.
“재계약 얘기는··· 바이아웃 조항을 없애고 싶다고 저쪽에서 계속 얘기해서··· 이번 시즌 말까지 미루기로 했어요. 겨울에 다른 팀으로 안 옮긴다고 약속했고요.”
“감사합니다.”
돈보다는 경기를 뛰는 걸 우선시하는 데이비드다. 돈을 목표로 한다면 주가가 급격하게 치솟은 지금 다른 구단들의 관심을 이용해 맨유에게 돈을 더 뜯어내거나, 다른 구단으로 이적하는 게 맞다. 하지만 데이비드에게 중요한 건 경기를 뛰며 자기를 발전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하나를 찍었으면 하는데···.”
“예?”
“일단 들어봐요.”
어리둥절하던 데이비드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비드의 성과에 비해 데이비드의 노력이 덜 조명받고 있다.
그렇기에 크리스를 찍었던 팀과 상의 끝에 다큐멘터리를 찍는 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이 팀은 아디다스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디다스와 스폰서 계약도 거의 막바지 단계이니 촬영도 수월할 것이다.
이 방송을 통해 데이비드가 정말 열심히 했다는 걸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본인 동의만 있으면 바로 촬영을 시작할 수 있다.
라고 풀어서 말하자 데이비드가 조심스럽게 자기 의견을 말했다.
“상관없습니다만···.”
“예?”
“다른 사람들이 절 어떻게 보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태가 해야 한다고 하면 하겠습니다.”
뒤늦게 데이비드의 말을 이해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팬들이 데이비드라는 사람을 더 알아줬으면 해서요. 운 좋게 터진 게 아니라 정말 열심히 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
데이비드는 잠깐 멍해졌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뭘 하면···.”
“인터뷰 가끔 하는 것 말고는 없어요. 그 인터뷰도 마지막 촬영 때 몰아서 하자고 했어요. 방해도 안 할 거예요. 크리스 때도 그랬으니까요. 아무튼, 허락했으니 구단에도 말해 둘게요.”
촬영은 챔피언스리그에서 맨유가 탈락할 때까지.
PD는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을 챔피언스리그에서 떨어진 장면으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 시즌에도 데이비드의 도전은 계속된다는 문구를 쓰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시즌제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뭐, 기획이 어떠하든 원하는 것만 방송으로 내 보내 준다면 상관없었기에 나는 거침없이 수락했다.
데이비드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좀 맛있는 것도 먹으라고 말했다.
당연하게도 데이비드는 거절했지만.
약혼식은 별 탈 없이 끝났고, 나는 리찌가 요청한 선수를 찾기 위해 다시 비행기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