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will make you the best soccer player RAW novel - Chapter 21
21
6. 내 힘으로 (2)
나는 자판기에서 뽑은 샌드위치를 씹으며 크리스의 집으로 향했다.
어제 대화는 새벽 두시에 끝났고, 나는 런던으로 올라오며 잡아둔 도미토리에서 간단히 씻고 눈을 붙였다.
개략적인 계획 모두 크리스와 에린에게 전했지만, 깜빡하고 안 준 게 있어서였다.
일곱 시면 세바스티앙이 눈을 비비고 일어나는 시간이니 여유 있게 만나고 갈 수 있을 거다.
“어?”
그런데 일곱시부터 크리스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너 어디 가냐?”
“훈련장이요.”
“벌써?”
“원래 한 두시간정도 먼저 가요.”
역시 포텐이 있는 선수는 뭔가 다르구나. 감동하면서도 조금 놀랐다.
“다행이네. 엇갈릴 뻔했다.”
크리스가 갸웃한다.
“이거 가져 가.”
나는 세바스티앙 사건 때 쓰던 녹음기를 크리스에게 건네줬다. 꽤 고급이라 옷에 부착도 되고, 방수도 된다. 무게도 엄청 가볍다.
“이렇게 끼우는 거야. 유니폼 바지에 걸쳐놔.”
크리스는 입고 있는 트레이닝복에 녹음기를 끼웠다 뺐다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제 말했던 계획을 짧게 줄여 크리스에게 재 주입시켰다.
용무가 끝났으니 크리스와 함께 훈련장 쪽으로 가다가 지하철역으로 빠지기로 마음먹고 막 가려는데, 크리스의 집 문이 열리며 크리스의 어머니, 이자벨 앨런이 나타났다.
“태··· 현석이라고 했나요?”
“아, 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죠?”
나의 멋쩍은 인사에 이자벨은 어색하게 웃으며 좋은 아침이라고 답해줬다.
이자벨이 말한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깐 들어오시겠어요?”
*
크리스는 훈련장으로 떠났고, 나는 크리스의 집 식탁에 앉아 있었다. 눈짓으로 인사한 에린은 설거지 중이고, 이자벨은 내 앞에 앉아 한숨을 쉬고 있었다.
“저번 주에 오셨을 때, 떠나신 뒤에야 현석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어요. 일단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했네요. 크리스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막아줘서 정말 감사해요. 현석.”
“아, 아닙니다.”
손을 내젓고 있는데 에린이 찻잔을 내 앞에 내려놨다.
“고마워.”
분위기가 어색해질 뻔했는데, 타이밍이 좋다.
에린은 이자벨에게 차를 주고, 자신의 찻잔 앞에 앉았다. 에린이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랬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자벨이 계속 말한다.
“그리고 오늘··· 현석이 어제 와서 5만 파운드를 건넸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우실 것 같은데, 아 우신다. 어떡하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닙니다. 아니에요.”
크리스가 잠재력이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다면 선뜻 그 돈을 건네지 못했을 거라는 찜찜함에 감사를 쉬이 받을 수가 없었다.
에린은 이자벨의 등을 토닥거려주는 중이었다.
“제가 이 모양이라 크리스가 그런 선택을 할 뻔하게 만들고···.”
“엄마! 그런 소리 하지 말랬잖아!”
에린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자벨은 고개를 푹 떨군 채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크리스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도 무작정 탓할 수가 없었어요. 현석의 돈도 필요 없다고 돌려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내 처지가 슬프네요.”
“엄마!”
“위로하려는 건 아닌데요···.”
나는 너무 우울해 하시는 이자벨을 위해 입을 열었다. 내 마음속 찜찜함도 없앨 겸 해서.
“저는 크리스에게 투자한 거예요. 크리스는 최고의 축구선수가 될 거고, 그 때쯤이면 5만 파운드는 하루에 벌 수 있는 돈이 될 거예요. 이건 비즈니스라고요. 부담 가지실 거 없어요.”
“그럼···.”
“다시 받을 생각도 없고요. 화끈하게 투자해야 크리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지 않겠어요?”
내 말에 이자벨은 벙찐 채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거짓 하나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은혜는 은혜에요. 나중에 꼭 갚겠어요. 현석이 투자한 만큼 크리스가 성장하지 못한다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을 게요. 만약에 크리스가 다른 에이전트를 택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못하도록 막을게요.”
“아니 그러실 건 없는데··· 아, 예, 알겠습니다.”
이자벨의 단호한 눈빛에 나는 떨떠름한 마음이었지만 고개는 끄덕였다.
“재계약도 못 따낸 크리스를 이렇게 높게 평가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요. 앞으로도 크리스를 잘 부탁드려요.”
장인어른에게 결혼을 허락받은 사위가 된 기분이었다.
*
여덟시가 다 되어 나는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자벨 앨런이 미혼모인 자기 아래서 크리스와 에린이 얼마나 착하게 자라줬는지에 대해 얘기하는 걸 계속 듣다가, 더 이상 머무르다가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 억지로 말을 끊고 나온 거였다.
“엄마가 너무 극성이죠?”
“아니야, 좋은 분이시던데.”
나는 에린과 함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에린은 크리스의 유니폼을 입은 채였다. 잠깐 말이 없던 에린이 뜬금없이 물었다.
“어제 계획 들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그게 잘 되겠어요?”
“그런 건 생각하는 거 아니야. 되게 만드는 거지.”
“허, 말은 잘하네.”
다시 한 번 말이 없어졌다.
이번에는 침묵이 꽤 길어, 지하철역이 나타날 때까지 말없이 거리를 걸었다. 딱히 더 해줄 말도 없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나 여기서 가봐야겠다. 어제 했던 거 안 잊었지?”
“당연하죠.”
나는 곧장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세 걸음도 못 내려가서 멈춰야 했지만.
“고마워요.”
에린의 목소리였다.
“괜찮은 사람 같긴 했지만, 솔직히 어느 정도 끼어들다가 빠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큰 돈을··· 아, 혹시 부자?”
“아니야. 그거 내 전 재산의 80%가 넘어. 이거 들키면 나 누나한테 죽는다고.”
내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에 에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주먹을 꾹 쥐며 말한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크리스가··· 아니 제가 일해서라도 갚을게요.”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한국에 있는 동생을 연상시켜 나는 계단을 올라와 에린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화난 고양이처럼 눈을 치켜뜰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어찌할 줄 모르는 반응을 보이는 에린이다.
“무슨 짓이에요?”
“고향에 있는 여동생이 생각났다고 하면··· 믿어줄 거야?”
“몇 살인데요.”
“너네랑 동갑.”
“···알았어요.”
“그래, 그럼 가볼게.”
다시 몸을 돌려 내려가려는데 에린의 목소리가 또 내 발걸음을 멈췄다.
“아, 현석··· 아니 삼촌은 너무 겁이 없는 것 같아요. 일단 시키는 대로는 하겠지만, 몸 조심하세요.”
처음 멱살을 잡으려고 했던 모습과는 상반된 모습에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어제 밤에 자꾸 당신, 미스터 태, 현석 등으로 호칭이 왔다갔다 거려서 삼촌으로 통일하라 했는데, 듣기에 나쁘지가 않다.
다시 한 번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지만 참았다.
“공부 방해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나 공부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아···.”
[에린 앨런]-회계사 공부 중.
어제 밤에 크리스와 함께 떴던 정보였다.
헬퍼에 떴다고는 말 못하고, 그냥 크리스에게 들었다고 얼버무렸다. 더 확실히 얼버무리기 위해 계획을 다시금 주지시켰다.
“이상 있으면 꼭 연락해 줘. 그리고 영상 잘 찍어 두고. 영상자료 같은 거 많아서 나쁠 게 하나도 없어. 뭐 찍냐고 관계자가 뭐라고 하면 크리스 프로필 영상 만들고 있다고 하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을 거야. 팀 옮겨야 된다고 말하고, 네가 불쌍한 눈으로 올려다보면 어지간한 남자는 다 들어줄 거다.”
에린의 역할은 브로커들이 나타나거나, 크리스가 통화하기 어려운 상황에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연락해주는 역할이었다.
한 마디로 비상연락망이다.
헌데 그것만 시키기는 뭐 해서, 장기적인 플랜의 일환으로 크리스의 훈련 영상을 찍어달라고 했다. 에이전시에서 배운 게 도움이 되긴 한다.
내가 직접 가서 지켜보고 싶었지만, 개리 버틀러가 동양인을 찾고 있다고 했으니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어려웠다.
나는 에린과 헤어져 지하철을 타고 런던 중심가로 향했다.
일단 이 슬럼가 같은 동네를 벗어나야 한다. 마일로 코너리 무리들과 만나면 큰일날수도 있다. 뭣보다 만날 사람도 있고.
*
런던 중심가에 도착한 나는 카페에서 계획을 정리한 후, 목록에서 [엘리자베스 러셀]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세바스티앙 때와 이번 중 다른 점은, 내가 기자 인맥을 만들었다는 거다. 그것도 꽤 큰 방송사인 ‘스카이스포츠’의 기자를. 나처럼 신참이긴 하지만.
통화음이 세 번 울리고, 엘리자베스 러셀이 전화를 받았다.
-현석, 아침부터 부지런하네요. 혹시 세바스티앙 인터뷰 건 때문이에요?
“아뇨, 그건 그대로 진행하고요. 다른 용건 때문에요.”
-다른 용건이요?
“일단, 지금 어디에요?”
-회사에 있어요. 오후에 출장 있어서 남런던 쪽으로 갈 예정이고요.
“그렇군요, 엘리자베스, 혹시 특종에 관심 있어요?”
-···.
엘리자베스 러셀은 잠시 아무 말도 않다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기자한테 특종에 관심 없냐고 물은 거예요?
당연히 관심 있겠지. 나도 안다.
-미치게 관심 있죠! 지금 어디에요?
“당신 회사 근처요.”
내 위치를 알려주자, 엘리자베스 러셀은 30분도 안 돼서 내가 있는 카페에 나타났다. 얼마나 급했던 건지, 자리에 앉자마자 바람에 쓸려 엉망이 된 머리도 매만지지 않고 질문부터 던진다.
“특종이라는 게 뭐예요?”
“일단 진정하고, 한잔 마셔요.”
나는 홍차를 건네며 말했다.
뜨거운 홍차를 원샷한 엘리자베스 러셀은 또 한 번 물었다.
“특종이라는 게 뭐냐니까요?”
어이고, 방금 나와서 엄청 뜨거울 텐데 그걸 한 번에.
뜸을 들이면 이 열혈 기자에게 한 대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핵심부터 말했다.
주변 사람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승부조작 건이요.”
“승부조작이요? 자세히 말해 봐요.”
“자세히 말하기 전에요, 특종을 대가로 부탁 하나 좀 들어줄 수 있어요? 특종을 완성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인데.”
고개를 양껏 내밀고 있던 엘리자베스가 고쳐 앉더니 팔짱을 낀다.
“그건 특종 수위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다르겠죠. 얼마나 큰 금액이, 얼마나 큰 경기에서, 얼마나 시끄러워질 인물이 엮여있느냐가 중요하겠죠? 일단 원하는 게 뭔데요?”
“영국경찰의 승부조작 조사 관련 부서 실무자랑 만나고 싶어요. 아직 잡은 게 아니라서요.”
“···그 정도야. 이슈화가 될 건이라면 팀장님께 말씀드려 볼 수 있어요.”
“그래요?”
좋다. 나는 엘리자베스 러셀이 불타오를 만한 이름을 꺼냈다.
“전직 국가대표 망나니, 개리 버틀러가 승부조작 브로커로 활동하고 있다. 어때요?”
“그 망나니가요?!”
엘리자베스 러셀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카페 안의 사람들이 우리를 불편한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러셀은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나만 보고 있었다.
“좋은 헤드라인이네요. 좋아요. 그런데 현석은 그걸 어떻게 알아낸 거예요?”
“그건 비밀이에요. 그리고 증거들은 지금 만드는 중이고, 그래서 수사당국의 협조가 필요해요.”
“그으래요?”
엘리자베스 러셀은 눈을 반짝이며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 연결해 줄 수 있어요? 가급적이면 오늘 만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다른 신문사에 정보 안 넘길 거죠?”
“당연하죠. 저랑 가장 친한 기자 이름이 엘리자베스인걸요.”
엘리자베스 러셀은 풋 웃으며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거래해요.”
나는 엘리자베스 러셀의 손을 마주잡았다. 지이잉. 헬퍼의 진동음이 기분 좋게 들린다.
“아, 그런데 현석. 당신이 얻는 건 뭐죠?”
“어··· 그것도 비밀인데요.”
엘리자베스 러셀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역시 재미있는 남자네요. 그 비밀, 캐지는 않을 테니까 앞으로도 이런 거 많이많이 가져다주세요. 역시 내 코는 틀리지 않았어.”
“고마워요.”
악수를 나누던 손을 떼자마자, 엘리자베스는 외투를 다시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 출장 전에 팀장님한테 가서 얘기해야 겠어요. 휴대폰 끄지 말고 있어요. 알았죠?”
“알겠어요.”
나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엘리자베스 러셀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제는 기다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