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will make you the best soccer player RAW novel - Chapter 221
221
45. 유로 2020 (7)
경기 시작 전, 나는 데스크에서 캐스터 존 러너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어제 앨런은 정말 대단했어요.”
친아들이 칭찬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입술이 제멋대로 실룩샐룩한다.
“전화통화 했죠?”
존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첫 경기일 뿐이라고 하더라고요.”
“이야··· 해트트릭을 하고도 그렇게 침착하다니, 마인드부터가 다르네요. 이러다 유로 득점왕까지 하는 거 아니에요?”
“에이, 설마요.”
그랬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속내를 적당히만 내비쳤다.
“사실 좀 기대되긴 해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미스터 태도 기분 좋고, 우리도 기분 좋을 테니까요.”
우리 선수가 잘하는 만큼 내 해설 계약이 늘어난다. 존은 이걸 돌려 말하고 있는 거였다.
“준비는 잘하셨어요?”
“열심히 해 왔어요.”
해설자들과 캐스터들은 여러 방식으로 선수들의 이름과 특징을 기억하는데 나는 우리나라의 해설자들과 캐스터들이 주로 이용하는 선수별로 포스트잇 만들기를 통해 선수들을 정리했다.
A4용지 한 장에 포스트잇을 여러 장 붙여 감독, 팀의 전반적 특징, 팀이 주로 사용하는 전술, 선수별 발음과 장점, 단점, 특이사항까지 간략하게 적어서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들었고, 세부 자료는 다른 서류 묶음으로 준비해 왔다.
존은 내가 꺼낸 자료집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미스터 태는 정말 프로페셔널하네요.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 줄 줄은 몰랐어요.”
존의 느닷없는 극찬에 나는 손을 내저었다.
“당연히 해야죠. 저는 선출도 아닌데요.”
더 기특하다는 눈으로 보는 존의 눈이 부담스러워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존이 화제를 돌려줬다.
“로드리게스 얘기를 하면서 나왔던 악성 댓글을 지양해달라고 했던 말 있잖아요?”
“아, 네.”
“그게 꽤 화제가 돼서 SNS에서 ‘x신고 누르기’ 운동이 퍼지고 있어요. 덕분에 스카이스포츠 이미지가 좋아지고 있다고, 요즘 디렉터가 입에 웃음을 달고 삽니다.”
“그런가요.”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날뛸 정도로 기쁘지도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냥 내 말을 듣고 팬 분들께서 조심해주시겠다고 하는 게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잘됐네요. 적어도 우리 선수들한테는 악성 댓글이 덜 달리겠네요.”
“확실히 그렇겠죠?”
다른 선수들도 덜 달리면 좋겠지만, 중요한 건 내 선수들뿐이었다.
“운동이 퍼지면서 스페인전과 웨일즈전 다시 보기 횟수도 늘어나고 있어요. 앞으로도 미스터 태가 방송할 때 시청률이 계속 오르지 않겠냐고,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고 디렉터가 그러더라고요. 사실 저도 보너스 받을 생각에 기분이 좋고요. 고맙습니다. 태.”
“어휴, 아니에요.”
쑥스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국내 반응도 좋다고 그러더라. 스카이스포츠 해설을 하는 한국인이라는 타이틀로 기사 몇 개 나갔다고 했다.
예전에는 이런 소식을 전해 들으면 들떴었는데, 이제는 익숙해진 건지 꽤 덤덤했다.
그렇기에 금세 이런 유명세에서 벗어나고, 내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건 딱 하나였다.
“경기 시작 전에 자료 한 번만 다시 읽어볼게요.”
“데이비드 워커, 공을 끊어냈습니다. 역습! ···을 하지 않고 또 한 번 뒤로 패스하네요.”
“무척이나 효율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사우스게이트 감독입니다. 제 선수라서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닌데, 데이비드가 잉글랜드 수비의 중심을 맡고 있어요.”
“오, 그런가요? 어떤 시스템인가요?”
“경기장을 반으로 갈라서, 우측면 전체를 프리롤로 내 준 것 같습니다. 같은 우측 풀백이지만, 쓰리백의 우측 중앙 수비수로 나온 카일 워커와 수시로 스위칭을 하며 수비라인 전체를 제어하고 있어요.”
“아아.”
“자리를 지키는 수비만도 어려운데, 참 굉장하네요.”
잉글랜드는 극단적인 수비 전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첫 경기 상대인 스웨덴은 수비적으로 나오는 잉글랜드를 뚫기 어렵다는 걸 깨닫고, 자신들의 큰 키를 이용한 높은 패스로 잉글랜드를 공략하려 했다.
그러니 잉글랜드는 간격을 벌려 여유 있게 대처했다.
간격을 벌리면 다시 스웨덴은 짧은 패스를 하려 했고, 잉글랜드는 그러면 다시 간격을 좁히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 같은 수비를 보여줬다.
“실시간으로 상대 전술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감독의 지시인지 선수들의 대처인지 대단합니다.”
그런데 말이다.
장장 40분 동안 수비만 하고 있으니 더럽게 지루했다.
아무리 고품격의 수비를 하더라도 그게 반복되서야 팬들 입장에서는 지루하게 보일 뿐이다.
지금 하는 얘기들도 어찌어찌 포장해보려고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지루해 죽겠네요.”
데니스는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솔직한 해설이 매력적인 데니스는 아까부터 잉글랜드를, 정확히 말하면 감독을 줄곧 비판하고 있었다.
“충분히 공격적으로 나서도 이길 만한 상대인데, 사우스게이트 감독이 너무 소심한 것 같네요.”
“하하.”
우리 에이전시 선수들이 가장 많이 출전할 수 있는 경기라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다.
심지어 레온은 데니스의 아들이기까지 했다.
조던과 레온, 데이비드 모두 선발 명단에 들어있는 걸 보고는 준비해 온 말을 다 못할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썰은 30분 만에 동났다.
왜냐면 방금까지 언급한 대로 경기 해설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루하게 흘러가서, 계속 썰만 풀었기 때문이다.
우리 선수들은 전부 수비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후방 플레이메이커인 레온은 뒤에서 열심히 패스를 돌리고 있었고, 큰 키의 조던은 스웨덴의 제공권을 상대하기 위해 수비라인까지 내려오곤 했다.
데이비드는 수비에 구멍이 날 때마다 메꾸러 다니느라 바빴고.
수비가 대단하다고 설명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경기가 재밌어야 양념을 치든 말든 할 테니까.
공격수들조차도 단순하게 움직였다.
후방에서 공을 돌리다 뻥, 그러면 월드클래스 공격수 해리 케인이 공을 지켜내다가 양쪽으로 쇄도하는 스털링과 래시포드의 빠른 발을 노린다.
강팀 상대로라면 좋은 전술일지 모르겠는데, 스웨덴도 선수비 후 역습을 하는 팀이었기에 마치 아웃복서 둘이 헛주먹질만 하는 것 같은 지루한 경기가 완성된 것이었다.
카메라맨조차도 하품하는 관중을 잡을 정도였다.
삐익!
심판의 휘슬이 울리고, 카메라에는 졸고 있는 친구를 깨우는 관중들이 많이 잡혔다. 곧 데스크의 마이크가 꺼졌고, 데니스의 불평이 들려왔다.
“못 하는 건 아닌데 지겨워 죽겠네.”
나는 그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그러게요. 속 터지는 줄 알았어요.”
“후반전 해설은 어떡해? 할 말 다 떨어지지 않았어.”
“맞아요··· 그렇다고 ‘패스합니다.’, ‘좋은 태클입니다.’, ‘롱패스··· 아아, 막혔네요.’ 이 말만 반복할 수는 없는데···.”
내 투덜거림에 데니스는 45분 만에 킥킥댔다.
“정말 그러면 어떡하지. 어제 사우스게이트 만나지 않았어? 공격하긴 할 것 같아?”
상대적으로 열세인 스웨덴이 공격으로 나설 리가 없었기에 나온 질문이었다.
나는 어제 레온, 조던, 데이비드를 만나러 갔다가 얼결에 이야기를 나눈 사우스게이트의 말을 떠올려봤다.
‘잉글랜드는 늘 수준에 안 맞는 경기를 보여주려다 망했습니다. 이번에는 위치를 자각하고 오직 실리만 취할 겁니다.’
“···안 될 것 같은데요. 무조건 실리만 취할 거라고···.”
“하아···.”
UEFA 최우수 수비수. 데이비드의 일대일 수비력과 위치선정능력을 마침표로 활용해 사우스게이트는 뚫리지 않는 방패를 만들어냈다.
방패는 제 역할을 다했다. 스웨덴은 슈팅을 단 한 개도 하지 못했다.
좋다. 아주 좋다.
잉글랜드도 슈팅을 세 개 밖에 못 했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데니스는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했고, 심심해진 나는 휴대폰이나 만져볼까 했는데 날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미스터 태!”
“아, 안녕하세요.”
스카이스포츠의 중계팀 매니저였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금발 머리 남자인데 싹싹하고 일에 찌들어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호감이 갔다.
오늘 헬퍼에서는 디렉터가 나 영입한 덕에 기분 좋아져서, 덜 갈굼당해서 기분 좋다고 떴었다.
나는 매니저에게 물었다.
“경기가 너무 루즈한데 어떡하죠. 오늘 끝까지 이럴 것 같은데.”
“에이,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매니저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고 내 눈치를 봤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말하세요.”
“예?”
“하고 싶은 말 있으신 것 같은데.”
“아··· 혹시 피곤하지 않다면 실시간으로 한 5분 정도만 대화 좀 해 줄 수 있나 해서요. 유튜브 실시간 방송 중인데 지루하다고 하는 반응이 너무 많아서요.”
나는 잠깐 고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목 혹사도 안 해서 괜찮았고, 지루했는데 잘 됐다.
“안녕하세요. 태현석입니다.”
-오?
-와우.
“경기 시작하면 다시 해설로 돌아가야 해서요. 잠깐 얘기나 나누려고 왔어요.”
채팅이 순식간에 올라와서 정신이 없었다. 나는 매니저가 준비해 준 말을 했다.
“많이 보이는 질문에 답해줄게요.”
유난히 많이 보이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카메라에서 고개만 벗어나 매니저에게 입 모양으로 솔직히 말해도 되냐고 물었다.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은 이거였다.
-솔직히 지루하지 않나요.
“맞아요. 지루해요. 초보자인 저는 유난히 힘드네요. 대체 어떻게 해설해야 할지 감이 안 와요.”
댓글들이 정신없이 올라왔다.
-역시 재미없는 거 맞구나.
-자기도 지루하면서 왜 자꾸 약 팔아요. 수비가 뛰어난 경기라고 극찬을 하던데.
-오늘 프리뷰 때 맞불 놓는 경기 될 거라고 하더니 이게 뭐에요. 보다가 절반은 잤잖아요.
대체적인 내용은 위의 세 개와 같았다.
첫 댓글 같은 내용에는 답할 필요가 없어 보이고, 나는 아래 댓글부터 차례차례 답했다.
“약 판다니요! 정말 수비가 뛰어난 경기에요. 나중에 데니스가 나오는 분석 프로그램에서 분명히 분석할 거예요.”
“아··· 그건, 나도 이럴 줄은 몰랐다니까요?”
시청자들과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궁금해하는 것들을 이것저것 답해주다 보니 꽤 재밌었다.
‘이제 때린다?’ ‘때릴 거다!’ 하는 허세만 가득 찬 꼬맹이들 싸움 보는 것 같은 경기 해설보다 생동감 넘쳐서 좋았다.
볼일을 보고 돌아온 존과 데니스는 옆에 앉아 내 하는 양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짧은 즐거움은 금세 사라지고, 다시 지루함 속으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마지막 질문만 받을게요.”
내 말과 동시에 가장 많이 뜬 질문은 바로
-언제까지 할 거예요? 목소리 좋아요. 앞으로도 계속해줘요.
였다.
나는 뿌듯함을 느끼며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 대답해줬다.
“우리 선수들 것만 계약했어요. 아마 8강 정도 가면 일이 좀 줄어들지 않을까요? 유로가 만만한 대회는 아니니까.”
하지만 이건 헛된 기대였다.
잉글랜드는 그날 재미없는 경기력을 끝까지 이어가다가, 해리 케인의 어거지 골로 1대 0으로 이겼다.
조별예선은 계속 진행됐고, 스페인은 3승, 웨일즈는 3승, 잉글랜드는 2승 1무라는 성적으로 각 조 1위로 진출했다.
16강에서도 완승을 거뒀다.
가장 빛난 건 크리스였다.
크리스는 프랑스의 음바페를 두 골 차로 따돌리고 득점랭킹 1위를 달리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호날두는 16강에서 우승 후보 벨기에를 만나 떨어지는 바람에 득점왕 레이스에서 조기 탈락했다.
그리고 크리스는 8강에서 포르투갈을 떨어뜨린 벨기에를 상대로 만났다. 크리스는 1골 1어시스트를 달성하며 베일과 함께 벨기에라는 거대한 성을 무너뜨리며 4강에 진출했다. 축구계에는 크리스 앨런이라는 어마어마한 센세이션이 일어나고 있었다.
최근 난 기사는 [베일의 입이 찢어질지도 모른다.]였다. 베일은 정말 입가 근육이 걱정될 정도로 매일같이 실실거리고 있었다.
혼자 짊어지던 부담감을 같이 짊어질 수 있는 동료가 생긴 덕이라고 어림짐작만 하고 있었다.
내가 웨일즈의 조별예선 3차전에서 크리스가 무적 선수일 때부터 베일이 작업해 왔다고 언급했는데, 그것과 합쳐져서 베일의 행복한 심정을 짐작하는 기사가 계속 나왔다.
잉글랜드 또한 조별리그 시작부터 계속한 늪 축구로 8강에서 독일마저 꺾고 4강에 진출했다. 참고로 잉글랜드는 다섯 경기 동안 단 한 번도 실점하지 않았다. 득점이 4득점이지만···.
4강 진출하니까 욕을 바가지로 하던 잉글랜드 언론들이 자기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태세 전환해서 ‘사우스게이트는 역시 명장이다!’. ‘우리는 널 믿었다!’라고 찬양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8강 전은 지금 막 시작된 스페인 대 이탈리아전이었다.
마이크가 켜지고 시청자들에게 인사하자마자, 존이 훅 들어왔다.
“1차전 때까지만 해도 일이 좀 줄어들 거라고 말했었는데, 에이전시 선수들의 선전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미스터 태?”
“···좋으면서··· 좋네요.”
이미 끝났다.
4강에 웨일즈와 잉글랜드가 올라갔고, 웨일즈는 프랑스를, 잉글랜드는 지금 경기의 승자와 상대하게 됐기에 무조건 준결승 두 경기 다 해설하게 생겼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스페인이 이겨서 무조건 결승까지 해설하면 좋겠다고 마음을 다잡은 게 어제 잉글랜드 경기 후였다.
참고로 에린은 추가 휴가를 포기했다. 그냥 정신줄 놓고 웨일즈를 응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