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will make you the best soccer player RAW novel - Chapter 23
23
6. 내 힘으로 (4)
“녹음은 잘했어?”
“···아마도요?”
손을 내밀자 크리스가 녹음기를 건네줬다. 나는 그걸 노트북에 연결해 파일을 옮겼다.
우리는 지금 크리스의 동네에서 열 정거장 정도 떨어진 번화가의 한 카페에 있었다. 로버트 윌슨은 NCA에 들렀다가 다시 합류하겠다고 했고, 나는 크리스를 먼저 만나 녹음한 내용을 들어보려고 하고 있었다.
“어디부터 들어야 해?”
훈련 내내 달고 다녔던 모양인지, 장장 두 시간이 넘는 파일이 만들어져 있었다.
크리스는 고민하다가, 종료 10분 전의 시간을 가리켰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실행 버튼을 눌렀다. 훈련이 막 끝난 시점인지 잡담 등 시끌벅적한 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개리 버틀러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개리 [크리스, 오늘도 고생 많았다!]
크리스 [···.]
개리 [왜 그렇게 똥 씹은 얼굴이냐? 내 얼굴이 좆 같냐?]
크리스 [아, 아뇨.]
말 참 더럽게 하네. 크리스 이 녀석도 연기 좀 잘하라니까. 오프닝부터 괜히 불안해진다.
개리 [내가 큰돈 벌게 도와주는 사람 아니냐. 좀 더 존경하는 눈으로 봐야지.]
크리스 [예, 죄송합니다.]
개리 [그래, 그래. 그렇게 웃어야지. 아무튼, 금요일 오후에 시간 괜찮냐?]
크리스 [예. 괜찮습니다. 그런데 승부조작 날은 언제쯤···.]
개리 [야! 이 새꺄! 그걸 여기서 말하면 어떡해?]
크리스는 내가 말해준 대로 승부조작을 언급했다. 개리 버틀러는 예상대로 당황했고.
크리스 [죄송합니다. 마음이 급해서···.]
개리 [입 조심해. 날짜는 나도 몰라.]
크리스 [···.]
개리 [마일로 그 새끼가 아직도 너 의심하고 있다. 너 진짜 그날 경기장에 나타났던 동양인이랑 아무 관계도 없어?]
크리스 [예. 그때 저도 당황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개리 [흐음···. 그래. 일단 알았다. 그리고 돈이 정말 급하다면, 마일로 한테 잘 얘기해봐. 예~쁜 이자벨이랑 아주 예~쁜 에린 생각해야지. 계약 끝나면 막막하잖아, 그치?]
크리스 [···.]
개리 [어이구, 눈깔 좀 그렇게 뜨지 마라, 무섭잖냐.]
개리 버틀러가 피식 웃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개리 [아무튼, 돈 벌고 싶으면 금요일에 잘 말해야 할 거야.]
그 뒤로는 훈련장 소음뿐이었다.
이어폰을 빼고 맞은편을 바라보자, 크리스가 초조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마치 내 평가를 기다리는 듯.
솔직한 마음으로는, ‘연기 좀 잘하지 불안해 죽는 줄 알았잖아.’ 라고 말하고 싶었다.
짧은 시간 동안 표정 썩어서 개리 버틀러가 반응한 게 두 번이었다. 개리 버틀러가 가볍게 넘겨서 다행이지, 만약 그가 의심 많은 성격이었더라면 상당히 고생할 뻔했다.
금요일도 좀 걱정됐다. 엄마랑 동생 얘기가 크리스의 아킬레스건인지, 조금만 꺼내 들어도 울컥울컥 한다. 저번에 내가 농담했을 때 노려보는 눈빛도 장난 아니었는데 개리 버틀러 같은 놈이 그런 말을 꺼내면 오죽하겠는가. 금요일에도 그럴까 봐 걱정이다.
그래도, 수고한 건 수고한 거고 녹음도 잘해 왔으니까.
“잘했어, 크리스.”
이 정도 칭찬은 괜찮겠지.
나는 주먹을 내밀었고, 크리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주먹을 맞부딪혀왔다.
아직 한 마디 더 남았다. 개리 버틀러의 말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옭아맬 수 있는 증거를 만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증거 하나 더 만들자.”
*
술이나 마약에 취한 사람들이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슬럼가의 새벽. 크리스는 훈련장에 가기 위해 오늘도 일찍부터 그 거리를 걷고 있었다.
태현석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어수룩해 보이는 에이전시의 신참, 딱 그 정도였다. 그리고 기억의 구석으로 자연스럽게 밀려났다.
하지만 두 번째 만남에서는 자신이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경기장에서 온몸을 던진 슈퍼맨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처음으로 마주앉은 그 자리에서 그는 슈퍼 에이전트가 될 거라고 하며 자신의 첫 고객으로 나를 지목했다. 레알 마드리드로 가고 싶다는 꿈을 얘기하니, 포부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 남자였다.
3부 리그의 서드 키퍼로 뛰며, 이번 시즌이 끝나면 방출당할 나를. 1부 리그의 주전 선수가 될 수 있다고 말해줬다. 그의 눈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에린에게는 내가 월드클래스가 될 소질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존경하는 가레스 베일처럼 말이다.
그런 믿음을 받았음에도 돈에 흔들린 나를, 자신에게도 큰돈을 흔쾌히 내주며 다잡아줬다.
어제는 경찰까지 만났다.
승부조작 미수 건도 죄를 묻지 않고, 가족도 보호해준다고 한다. 생각지도 못한 배려였고, 무섭기만 한 형사와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모습에 한 번 더 놀랐다.
태현석이라는 사람이 나타나고, 흔들리기만 했던 삶이 굳건하게 다져졌다. 잡을 수 있는 줄이자, 바라보고 따를 수 있는 빛이 생겼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면 다 해결될 것이다.
어느새 그런 믿음이 생겨 있었다.
크리스는 훈련장에 도착하자마자 골키퍼로서는 필요하지 않은, 드리블과 패스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태현석은 여름 이적 시장에 팀을 구해주겠다고 했고, 그때는 골키퍼가 아닌 다른 포지션에서 뛰어야 한다고 했다.
어차피 떠날 팀, 일찍 온 선수들이나 코치들, 구단관계자들이 이상하게 보든 말든 크리스는 훈련에 매진했다.
정식 훈련 시간이 되고, 선수들을 둘러봤지만 개리 버틀러는 오늘도 지각이었다.
그래서 훈련을 마친 후에야 개리 버틀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태현석이 시킨 일을 하기 위해서.
“더 할 말 있냐?”
개리 버틀러의 험악하다기보다는 흉악한 얼굴이 귀찮음으로 일그러진다. 이번 시즌 내내 봤지만,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인상이었다.
크리스는 태현석이 얘기해준 걸 그대로 읊었다.
“집에서 생각해 봤는데요. 제가 그렇게 수상하면 서류나 각서를 만들어도 된다고 마일로에게 전해주세요. 얼마든지 서명할 테니까요. 돈이 더, 빨리 필요해요.”
순간, 개리 버틀러의 표정에 기묘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크리스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제 목줄을 얼마든지 틀어쥐라고 하세요. 그 정도로 급해요. 저는. 최대한 빨리 일을 치르고 싶어요.”
“얼마나 필요한데?”
“10만 파운드요.”
“하핫?”
개리 버틀러가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나서 뱀 같은 두 눈으로 크리스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크리스는 저 비틀린 웃음을 얼마 전까지도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크리스의 표정에 변화가 없어서인지, 개리 버틀러는 어울리지 않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좋아. 마일로 에게 전할게.”
역시, 태현석이 말대로 됐다.
*
화요일부터 금요일 오전까지, 시간은 돌풍처럼 지나갔다.
NCA의 형사들은 만남 장소에 주변에 잠복하기 위해 동선이나 구조 등을 탐문하고, 갱단 Red Knife를 조사하는 등 바쁘게 보냈다고 했다.
나는 뭐, 판은 다 짜놓았고 마땅히 할 게 없어서 크리스의 연기력을 올리기 위해 에린과 릴리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목요일 밤부터, 로버트 윌슨을 비롯한 몇 형사들과 함께, 크리스의 약속장소 앞 건물에 숨어들어 있었다.
금요일 오후가 된 지금, 크리스와 마일로 코너리가 카페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크리스는 안전하겠죠?”
내 물음에 로버트 윌슨이 답했다.
“예, 마일로 코너리를 놓치는 한이 있어도 보호할 겁니다.”
아니, 그건 안 되는데. 밤에 무서워서 어떻게 자라고.
“계획은 변한 거 없죠?”
“예, 도청으로 마일로 코너리가 승부조작에 가담했다는 증거를 얻고, 각서까지 쓰는 순간 출동합니다. 카페에 손님으로 형사들이 몇 잠입도 해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로버트 윌슨처럼 한쪽에 이어폰을 끼며 창문하나와 유리벽 너머에 있는 카페를 훔쳐봤다.
곧바로 마일로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넘어 들려왔다.
마일로 [개리한테 얘기 들었어. 급하다며?]
크리스 [···예.]
마일로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어허, 우울해하지 마. 이건 비즈니스라고. 죄책감 가질 거 하나 없어.]
크리스 [알겠습니다. 길게 있어서 좋을 거 없으니,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마일로 [좋지. 깔끔하게, 체스터필드와의 경기에서 2실점이야.]
크리스 [알겠습니다.]
마일로 [그렇지. 그리고 그때 실패했으니까 1만 파운드 까서 3만 파운드 준다. 협상은 없어.]
창문 너머로 보이는 크리스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인다. 잘하고 있다. 최대한 비참하게 보이게 해서 먹잇감처럼 보여야 한다.
마일로는 그래도 불안한 건지 협박까지 덧붙였다.
마일로 [튀거나 신고하면 알지? 이자벨이랑 에린···.]
젠장.
크리스의 으득, 하는 소리가 도청기를 통해 여기까지 전해져온다. 이빨 부러진 거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많이 화난 모양이었다.
참아라, 제발 참아라.
개리나 이 자식이나 왜 자꾸 가족으로 협박질이야.
마일로 [그래, 그래야지. 아무튼, 전부 해서 10만 파운드 필요하다고 했지?]
나와 로버트 윌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일로가 서류를 꺼내는 게 보였다. 나와 로버트 윌슨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크리스 [이거··· 사채 서류인가요?]
마일로 [그렇지.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급하다며?]
됐다.
첫 녹취록에서 마일로가 의심한다는 얘기를 듣고 생각해낸 전략이었다. 로버트 윌슨에게 얘기하니, 갱단은 브로커 일 뿐만 아니라 사채에도 손대고 있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는 의견을 받았고, 이렇게 진행했다.
크리스가 저걸 받아드는 순간, 이 사채 서류에 언급된 유령 기업까지 해서 갱단 Red knife를 더 옭아맬 수 있게 되는 거다.
로버트 윌슨이 이어폰을 빼며 형사들에게 말했다.
“가자!”
형사들이 뛰쳐나갔다. 로버트 윌슨은 나를 보며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그대로 있으십시오. 몸이 달겠지만, 참아요.”
로버트 윌슨은 처음 만난 날부터 나를 아끼지 않고 몸을 던지는 미친놈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생각하고, 될 만하면 움직일 뿐이다. 좀 과할 때가 있긴 하지만.
오늘은 총이라도 맞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해 얌전히 있을 생각이었다.
“구경만 할게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구경도 위험합니다. 가급적이면 머리 숙이고 얌전히 있어요.”
로버트 윌슨은 걱정 어린 눈으로 날 한번 보고는 뛰어나갔다.
음··· 머리까지 숙이는 건 그렇다. 크리스가 걱정되기도 하고. 나는 눈만 빼꼼 내밀어 일어나는 일을 지켜봤다.
가게로 형사들이 들이닥치자마자 마일로 코너리가 벌떡 일어나 크리스를 노려봤다. 크리스는 마일로가 서류를 뺏어가기 전에 몸에 꾸겨 넣고 형사들 사이로 몸을 던졌다.
잘한다.
근데 그 순간 점원인 줄 알았던 놈이 품속에서 뭘 꺼내 들려 한다. 거뭇거뭇한 게 총인 것 같았는데, 로버트 윌슨이 날아서 복부를 걷어차는 게 먼저라 끝까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카페에 앉아있던 손님 중 일부들도 품속에서 뭘 꺼내 들려 했다. 여기 갱단 소굴이었구나. 주변 건물에서도 소동을 감지했는지 웅성웅성 거린다.
이야. 4D로 실감 나는 액션 느와르 물을 보는 기분이다.
형사들은 갱단들이 덤비기도 전에 선빵을 쳐 하나하나 제압하고 있었다. 마일로 코너리는 눈동자를 정신없이 흔들어대며 빠져나갈 길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밖에도 형사들이 행인처럼 분장하고 있다. 그 형사들도 다른 건물에서 튀어나온 몇 놈들과 싸우고 있었지만.
크으, 영국의 클래식한 건물들과 어우러지니 진짜 영화 같았다. 여기는 SSS급 특등석이고.
모두의 체포라는 해피엔딩을 향해 가는데, 바깥의 싸움이 길어지고, 마일로가 형사들이 없는 공간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게 보였다.
유리벽이긴 하지만 설마···.
젠장!
쨍 소리와 함께 마일로가 탈출했다. 형사들의 당황하는 얼굴을 보고, 나는 선글라스를 끼며 창문을 넘어 도로로 나갔다. 저쪽은 형사들로 막혀있으니 이곳으로 올 거다. 못 도망치게 막고, 숨어야지.
마일로는 정신없이 뛰며 형사들이 쫓아오는지를 보고 있었다.
뛸 때는 앞을 보고 뛰어야지. 그렇게 뛰다가는.
퍽!
나랑 부딪히니까.
어깨와 어깨가 맞부딪혔다. 달려오는 속도에 넘어 질까 봐 나도 속도를 내 뛰어서 부딪혔다. 어깨가 얼얼하다.
바닥에 넘어져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마일로를 보며, 나는 한 마디를 던졌다.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었지?
“눈 좀 뜨고 다녀.”
라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