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will make you the best soccer player RAW novel - Chapter 258
258
53. 대관식 (4)
‘프리롤(free role)을 부탁한다. 수비를 해도 좋고 공격을 해도 좋아. 너라면 팀에 필요한 게 뭔지 알 거라고 믿는다.’
어젯밤 감독 긱스가 했던 말이었다.
프리롤은 선수가 스스로, 알아서 생각하고 판단해 움직이라는 감독의 지시다. 크리스는 수비라인 근처까지 내려와 포르투갈의 공격형 미드필더, 베르나르두 실바와 몸싸움 끝에 공을 빼앗았다.
관중의 야유와 함성은 여전히 경기장으로 쏟아지고 있었고, 이는 곧 무거운 공기가 돼 크리스의 움직임과 두뇌 회전을 둔화시키고 있었다.
리버풀에서였다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을 모든 선수의 위치가 전혀 그려지질 않았다.
‘그렇다면 직접.’
크리스는 공을 한 번 튀기며 고개를 재빠르게 돌렸다. 선수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중앙에 공을 받으러 나온 아론 램지에게 패스하고 최전방으로 달려나갔다.
왼쪽? 오른쪽?
축구는 끊임없는 판단의 게임이다. 국가대표 대항전, 최상의 리그에서의 경기는 이 판단속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빠르게 판단하지 않으면 늦는다. 크리스는 일단 왼쪽으로 뛰자고 마음먹고 달렸고, 램지의 발에서 쏘아진 패스가 아무도 없는 오른쪽으로 향하는 걸 보며 속도를 줄였다.
“···.”
몸의 모든 기관이 왜 평소처럼 움직이지 않는지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무수한 비난, 계속해서 쌓이기만 하는 고통을 기억한 몸이 움직이길 거부하고 있었다.
혹여나 실수라도 한다면, 너는 틀림없이 더 괴로워질 거라고.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그러니까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몸이 늘 파업을 선언하더라도, 경기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공을 잡은 포르투갈의 수비수가 길고 높은 패스를 띄웠다. 웨일즈의 노장 수비수 애쉴리 윌리엄스와 포르투갈의 안드레 실바가 몸싸움했고, 결국 안드레 실바의 머리가 공에 먼저 닿았다.
공은 두둥실 떠서 한 선수의 가슴께로 향했다.
크리스의 눈에 그의 등 번호와 이름이 보인다.
No.7 Ronaldo.
이번 해 세계 최고의 선수. 십 년 넘게 메시와 함께 정상을 지키고 있는 선수.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무게를 짊어지고 있을 그의 몸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을까.
태현석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었는데도, 자신의 몸은 아직도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호날두는 가슴 트래핑을 하고는 공이 떨어지기도 전에 발등에 정확히 갖다 대 강한 슈팅을 날렸다.
공은 위로 떴다가 뚝 떨어져, 웨일즈의 골망을 흔들었다.
전반전 10분 만에 터진 선제골이었다.
호날두가 포효하며 특유의 셀레브레이션을 선보이고 있었다. 총 스코어는 1-4, 웨일즈는 세 골이나 넣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웨일즈 선수들의 얼굴에는 절망이 드리웠고, 경기장에는 포르투갈 원정 팬들의 함성만 울리고 있었다. 경기장은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웨일즈의 팬들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니까.
크리스는 진영으로 천천히 걸어 돌아갔다. 그의 눈은 다시 호날두를 보고 있었다.
셀레브레이션을 마친 호날두의 주변에는 포르투갈 선수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호날두의 어깨를 두들기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하며 호날두의 골을 축하해줬다.
크리스는 센터서클에 돌아왔다. 축하가 완전히 끝난 후, 호날두는 혼자서 자신의 진영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어?’
그 순간, 호날두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한숨으로 보이는 걸 작게 내쉬었다. 다른 선수들이 볼 수 없게, 홀로.
호날두가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는 호날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호날두와 눈을 마주쳤다. 호날두는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입꼬리를 살짝만 올리고는 크리스를 지나 자신의 진영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심판이 공을 갖고 오는 짧은 시간 동안, 크리스는 호날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도 자신처럼 떨고 있었다.
호날두처럼, 메시처럼, 베일처럼 왜 하지 못하냐고 모두가 물었었는데, 그들이 그렇게 물었던 그조차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와닿고 있었다.
그는 외계인이 아닌 인간이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 무게를 견뎌내고 이겨내고 있는 사람이었다.
십 년 넘게 겪어왔음에도 아직도 긴장하는 호날두, 그것이 바로 이 중압감이라는 것의 무서움이었다.
‘내가 여기서 계속 뛰고 싶다면, 그들이 바라는 위대한 선수의 모습을 보여줘야죠. 그렇게 해야죠. 나를 욕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줘야죠. 그러면 모든 게 변하겠죠.’
태현석에게 말했던 자신의 다짐.
크리스는 이렇게 다짐했고, 이렇게 행동하고자 마음먹었지만, 이게 옳은 방법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을 바꿨어도 중압감은 여전했으며, 여전히 경기는 풀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마음속 한구석에 쌓여있던 무언가가 씻겨 내려간 것 같았다.
저 위대한 선수도 중압감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틀림없이, 중압감은 함께해야 하는 존재다. 그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중압감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중압감을 밀어낼 생각보다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 중압감 속에서 제 플레이를 보여줘야 한다는 간단한 질문만 남는다.
그들이 자신처럼 위대한 선수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해서 중압감을 이겨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은, 나는, 크리스 앨런이다.
호날두도 아니고 메시도 아니었다.
그들의 방식을 따를 필요는 없었다. 내 방식대로. 위대한 선수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일념에만 집중해서, 이번 경기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자.
그동안 쌓아온 것이 충분하길 바라면서, 온 힘을 다해보자.
크리스 앨런은 그렇게 생각하며 공을 받았다.
삐익!
센터서클 중앙에 놓인 공은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을 때보다 더 힘차게 아론 램지에게로 향했다.
전반전 10분, 크리스의 본격적인 경기가 시작됐다.
평소보다 한 템포 느린 판단력, 한 템포 느린 발이었지만 그동안처럼 괴롭지는 않았다.
판단이 느리다면 일단 움직였다. 경기장의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 자신만 멈춰있을 수는 없으니까.
실수하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동안 수없이, 자신이 끊임없이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이 몸에 녹아있을 테니까. 그걸 믿었다.
삐익!
“미안, 실수야.”
물론 바로 잘 된 건 아니었다.
공을 빼앗으려 발을 뻗었는데, 반 템포 정도 늦는 바람에 상대의 발을 건드려버렸다.
공중에서 한 바퀴 구른 포르투갈의 수비형 미드필더, 윌리엄 카르발류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크리스의 빠른 사과에 멈칫하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제 갈 길을 갔다.
“앨런! 또 한 번 그런 태클 하면 무조건 경고야.”
“네, 네.”
신사라고 불리는 자신답지 않은 플레이에도 크리스는 침착했다. 주심의 경고를 크리스는 적당히 흘려듣고 있었다.
조금만 더 빨랐으면 닿았을 것 같은데, 크리스는 당장의 플레이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실수하더라도 자신 있게. 크리스는 처음 축구를 배웠을 때의 마음가짐으로 뛰고 있었다. 팬들의 야유와 환성은 어느새 크리스에게 들리지 않고 있었다.
*
시간이 흐를수록 크리스의 몸놀림이 점점 더 날렵해져 갔다.
에린도 릴리도 이자벨도 크리스만 보고 있었지만, 그녀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어, 어어··· 아···.”
잡고 있던 공을 빼앗기는 크리스를 보며 단체로 안타까움의 탄식을 내뱉는다.
방금은 그 누구라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크리스의 잘못처럼만 보이나 보다. 기존 이미지 때문이겠지.
관중들은 야유했지만, 크리스는 신경 쓰지 않고 공을 빼앗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깔끔한 태클로 실바의 공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덤비는 카르발류를 가볍게 제쳐내고 램지에게 패스까지 했다.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꺄아아!”
에린과 릴리가 동시에 기쁨의 비명을 질렀고, 관중의 야유 소리가 줄어들었다.
크리스가 빈공간으로 달려 들어갔고, 램지가 크리스를 향해 공을 찔러줬다. 크리스가 조금은 투박하지만 자신 있게 공을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
점점 감각이 살아나고 있었다.
공이 크리스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헉, 허억.”
거친 숨소리가 바로 뒤에 들려왔다. 유니폼을 잡아채는 손이 느껴졌다. 크리스는 동료 우드번이 좌측에 있을 거라고 믿고 패스하고 계속 달렸다.
공이 사라지니 유니폼을 쥐는 힘도 사라졌다. 그때 우드번에게 건넸던 패스가 다시 돌아왔다.
어느새 패널티박스 근처까지 왔다.
크리스는 오른발로 디딤발을 밟고 왼발을 뒤로 물러 슈팅을 준비하려 했다. 그때 포르투갈의 선수 하나가 옆에 달라붙었다.
꼭 내가 골을 넣어야 할까.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자신에게 어깨를 들이미는 건 거대한 덩치의 윌리엄 카르발류였다. 피지컬의 차이에 눌린 크리스는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 시작했다.
크리스는 그 와중에도 고개를 움직여 공을 받을 사람을 찾았다.
우드번이 왼쪽으로 침투하고 있었고, 뒤에서는 램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거의 완전히 넘어지고 있었다. 슬쩍 본 카르발류는 안심한 얼굴이었다. 크리스는 마치 꼬마가 발버둥 치듯 발을 마구 쳐대서 공을 발끝으로 건드렸다.
추한 모습일 테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담은 공이 램지에 전달됐으니까.
크리스가 공을 건드릴 거라고 생각 못 했던 포르투갈의 선수들은 순간 멈칫했고, 뒤에서 공을 잡은 램지는 그 틈에 한 번 접어 페널티박스 안으로 들어가 단독 찬스를 맞이했다.
뻥 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골망이 철렁이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넘어졌던 크리스는 벌떡 일어나 골대 안을 확인했다. 앞의 골키퍼는 엎어져 골대 안을 보고 있었고, 그곳에는 공이 구르고 있었다.
크리스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자신의 어시스트를 만회 골로 이끈 램지와 하이파이브하고, 램지와 함께 다시 웨일즈의 진영으로 달려갔다.
세레머니는 없었다.
현재스코어 2-4. 앞으로 두 골을 넣어야 했다.
크리스는 어느새 야유 소리가 거의 없어진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됐다!”
“넣었어요!”
나는 에린과 끌어안고 방방 뛰었다.
웨일즈의 관중 사이에서 야유는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큰 환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직 역전할 거라고 생각도 못 하는 거겠지.
그렇지만 나는 크리스를 믿었다.
그리고 크리스는 전반전 종료 직전, 그 믿음에 또 한 번 보답해줬다.
*
조금 올라간 기세나마 눌러버리겠다는 듯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중거리 슛이 또 한 번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골대 위를 빗나갔기에 망정이었다.
한 방, 한 방을 골고루 주고받고 있었다.
웨일즈의 선수들은 역전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저들에게 희망을 주고, 의욕을 불어넣는 건 주장이자 에이스인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전반전 종료까지 앞으로 1분. 조의 패스를 받은 크리스는 바디페인팅으로 실바를 제쳐내고는 필드 전체를 관망했다.
자신의 최고 장점은 오프더볼.
자신의 움직임뿐만이 아닌 같은 팀의 움직임까지 읽어내야만 가능한 기교였다.
크리스는 상대 수비 뒤에서 어슬렁거리던 우드번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램지를 확인했다. 패스를 다시 받으려고 옆으로 오는 조, 포르투갈의 수비진이 자신을 향해 좁혀오는 걸 보았다.
그리고 그사이에는, 살짝 휘어진 길이 보였다.
크리스는 마치 슈팅하는 것처럼 강하게 왼발을 디디고 발등으로 공의 정중앙을 차며 살짝 발목을 틀었다.
“어?”
자신의 앞까지 다가왔던 카르발류가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공은 물 위를 나는 제비처럼 잔디를 스치며 날다가 바닥에 떨어져 살짝 휘어졌고, 수비라인을 깨고 돌진하는 우드번의 발에 정확히 연결됐다.
우드번은 일대일 찬스를 맞았고, 포르투갈의 파트리시우 골키퍼의 다리사이를 노려 깔끔하게 두 번째 골을 넣었다.
아까는 없었던 함성이 군데군데 들려왔다.
총 스코어 3-4.
거의 따라잡았다.
전반전이 끝나고, 크리스는 뛰다시피 해 터널로 돌아갔다. 빨리 드레싱룸으로 돌아가 후반전을 생각해야 했다.
터널 근처에 온 크리스에게 별의별 말이 쏟아졌지만, 크리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1점 차야. 오늘 여기에서 지면 너희들의 4년이 날아가고, 팬들의 희망도 날아간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예!”
감독 라이언 긱스의 사기충천을 위한 말을 들으며 크리스는 바나나 한 개를 씹었다.
웨일즈 선수들의 눈에는 희망이 보이고 있었다.
“절대 실점하면 안 된다. 한 골을 실점하는 순간 넣을 골이 세 골로 늘어나.”
원정 다득점 규칙을 다시 한번 주지시키며 긱스는 수비수들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긱스는 선수들에게 일일이 세부 전술을 지시해줬다. 다만 크리스에게는 그저 지금처럼만 하라는 말을 했다. 후반전에도 프리롤로 계속 경기를 뛰라는 감독의 간접적인 지시였다.
감독의 전술 지시가 끝나고, 선수단 사이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선수들은 전부 크리스를 보고 있었다.
크리스는 아까부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말을 해 줘야 이들이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
한참의 고민 끝에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한 골 한 골 위태로운 상황에 이들에게는 믿을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평소의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일지라도,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까, 날 믿고 최선을 다해줘. 골만 먹히지 않으면, 내가 기적을 보여줄게. 오늘 내가 어시스트 두 개 한 거 알지? 나 오늘 폼 최고야.”
크리스는 한껏 과장되게 팔을 벌렸고, 심지어 다리까지 꼬았다.
여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몸짓이었다. 평소의 얌전한 크리스와는 다른 자신만만한 모습에 선수들 사이에는 희미한 안심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긴장이 남아 있었기에, 크리스는 의도적으로 농담 한마디를 더 던졌다.
“아론은 그렇다 치고, 벤, 너 아까 골 못 넣었으면 여기서 엄청 뭐라고 하려고 했었는데··· 그걸 굳이 다리 사이로 넣어야 했냐? 그냥 옆으로 감아 찼으면 깔끔했잖아. 슛한 순간 식겁했다니까?”
“넣었으면 됐잖아.”
같은 클럽의 소속인 벤 우드번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고, 선수들은 희미하게 웃기 시작했다.
후반전이 시작되고, 웨일즈의 선수들은 어떻게든 호날두를 막아내기 위해 발악했다.
유니폼을 잡아끌기도 하고, 거칠게 태클하기도 하고.
더러운 플레이라 욕을 먹어도 상관없었다. 옐로카드를 받더라도 상관없었다.
퇴장만 당하지 않으면 승리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웨일즈의 선수들은 한 선수의 등을 보고 있었다.
No.10 크리스
버티면 어떻게든 해 준다. 그 말을 믿어보고자 했다.
크리스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뛰고 또 뛰었다.
활동량이 많기로 유명한 자신이었지만, 이 정도 페이스로 뛰어본 적은 없었다.
토할 것 같고, 실제로 위액이 섞인 침도 몇 번 뱉었지만, 자신은 동료들에게 승리를 안겨줘야 했고,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웨일즈 사람들에게 환희의 감정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위대한 선수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증명하고 싶었다.
후반전 20분.
마라톤 선수처럼 뛰던 크리스는 또 한 번 수비라인까지 깊숙이 내려와 상대방의 패스를 끊었다.
근처에 있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공을 빼앗기 위해 달려들어 왼발바닥으로 공을 굴려 피해냈다. 포르투갈의 산체스가 슬라이딩 태클을 해 오고 있었다. 크리스는 발 앞꿈치로 공을 툭 쳐 공을 띄우고 점프해서 피했다.
내려오자마자 가까워진 거대한 카르발류의 쇄도.
크리스는 그의 벌어진 다리 사이로 공을 차고 팔을 뻗어 카르발류가 유니폼을 못 잡게 한 후 빠져 나왔다.
예전의 투박했던 자신이었더라면 이런 플레이는 못 했을 텐데. 끊임없는 연습은 배신하지 않았고, 중요한 순간에 몸을 움직여주고 있었다.
희미한 환성이 들려왔다. 환청일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는 토기를 억누르며 달리고 달렸다. 미드필더를 다 제쳐낸 덕에 포르투갈의 수비수들은 그저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이대로 달려도 좋은 찬스가 나오겠지만, 크리스의 눈에는 조금 특이한 패스 길이 보였다.
크리스는 또 한 번 벤 우드번과 눈을 마주치고는 크게 소리쳤다. 적어도 입 모양이라도 보이도록.
“박스 쪽으로 달려!”
크리스는 차는 발을 측면으로 비스듬히 움직여 공의 아랫부분을 깎듯이 찼다.
공은 말 그대로 두둥실 떠서 포르투갈 수비수들과 골키퍼의 사이 공간으로 날아갔다.
환청일지 아닐지 모를, 아쉬움의 탄식이 들려왔다.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있었다.
지금 궤적대로라면 골대를 버리고 뛰어나오는 골키퍼에게 먼저 닿을 게 뻔하니까.
하지만 공이 떨어지는 순간, 공은 멀리 튀지 않고 조금만 튀었다. 모드리치, 크로스 같은 플레이메이커들이 롱 패스를 할 때 자주 애용하는 백스핀 킥이었다.
크리스를 믿은 우드번은 전력 질주로 뛰었고, 정확히 그의 발에 공이 전달됐다.
나와야 하는가 다시 들어가야 하는가. 양자택일에 몰린 골키퍼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틈에 우드번은 공의 아래를 찼다. 공은 골키퍼의 키를 넘겨 통통 튀겨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크리스는 골이 된 걸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현재 스코어 4-4.
동점이 됐지만, 크리스는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연장전을 노리다가 실점하면 원정 다득점 규칙으로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한 골을 더 넣어야 했다.
관중이 환호하고 있는 게 들려왔지만, 세레머니를 하는 선수들이 보였지만, 크리스는 승리를 결정지은 후 즐기고 싶었다.
기왕이면, 자신의 발로 직접.
크리스 앨런 슈팅 3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슈팅 3회.
후반전 정규시간 종료 25분을 앞두고 나온 웨일즈와 포르투갈의 공격이었다.
두 팀은 모두 골을 넣지 못했고, 추가시간 3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 추가시간마저도 2분이 흘렀고, 웨일즈의 공격 한 번만이 남아 있었다.
다들 연장전을 생각하고 있을 그 타이밍에 크리스는 포르투갈 선수 넷이 둘러싼 공간 안으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패스!”
램지가 홀린 듯 패스를 건넸다.
크리스를 향해 좁혀오는 네 명의 수비수, 크리스는 공을 잡지 않고 흘려 두 명의 선수를 바보로 만들었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두 명의 선수 사이로 바로 슈팅하려는 척을 해 두 선수를 모아놓고는 방향을 꺾어 그대로 달려 두 명을 제쳐냈다.
순식간에 바보가 된 네 명은 크리스의 뒤를 쫓았지만, 크리스는 이미 골키퍼와 일대일로 만나고 있었다.
크리스는 먼 포스트 쪽으로 감아 차는 걸 택했고, 파트리시우 골키퍼가 몸을 기울이며 팔을 뻗어봤지만, 이미 공은 지나간 후였다.
골이 들어가는 순간, 크리스는 드디어 포효할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
모든 걸 쏟아냈고, 결과를 얻어냈다.
아드레날린이 온몸을 돌고 있어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비명 비슷한 환호가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미쳤다. 돌았다는 말이 팬들 사이에서 계속 들려왔다.
크리스는 문득 경기장에 들어왔을 때가 떠올랐다.
크리스는 자기를 덮치려고 뛰어오는 선수들을 피해 입장했던 터널 쪽으로 달렸다. 웨일즈의 선수들은 크리스를 쫓아왔다.
환호가 더 커져만 갔다.
목표했던 지점에 도착한 크리스는 잔뜩 흥분한 동료들에게 손을 내저으며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크리스는 터널 위와 옆 관중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야유를 보냈던 관중이 섞여 있었을 텐데도, 자신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가온 자신에게 열렬한 환호와 키스 세례를 퍼붓는 관중만 있었다.
크리스는 픽 웃고 몸을 돌렸다.
관중은 크리스의 등 번호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크리스는 자신의 손을 뒤로해, 엄지손가락으로 등 번호와 이름을 가리켜 보였다.
끊임없이 커지는 함성.
크리스는 그와 비례해 차오르는 희열에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관중이 폭발할 것 같이 들썩이고 있었다.
그리고 참지 못한 동료들이 달려와 크리스를 하나둘 덮치기 시작했다.
크리스는 벌러덩 하고 누워버렸다.
이제 끝이다.
추가시간은 끝났고, 웨일즈는 월드컵에 갈 것이다.
*
나는 광란의 장소와 어울리지 않게 울고 있었다.
아까부터 눈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는 에린도 마찬가지였고, 크리스의 부인 릴리도 마찬가지였고, 크리스의 어머니 이자벨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는 약속대로 증명해냈다.
야유가 끊임없이 귓가에 박히고, 국민이 모두 자신을 바라본다는 큰 부담을 등에 이고 있어도.
그 상태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에 주장으로 나서게 됐는데도···.
나는 크리스 같은 선수들을 무어라 부르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한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끊임없이 맞부닥치고, 아무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일을 어떻게든 해낸다.
불가능한 일을 끊임없이 성취해 내 사람들의 경의를 이끌어내고, 자신을 숭배하는 수많은 사람을 만들어내고,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나간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고, 경기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존재.
우리는 그들을 스타플레이어라고 부른다.
지금 이 순간, 크리스는 필드 위의 그 누구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올해의 선수상을 받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보다 더.
삑, 삑, 삐이이이이이이익!
경기가 종료되자마자 감독과 교체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달려 나왔다.
경기장의 전광판에는 웨일즈 팬들이 하나하나 잡혔는데, 다들 눈이 그렁그렁해져서 목에 핏줄이 바짝 선 채로 웨일즈의 응원가를 부르고 있었다.
크리스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세레머니를 한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특유의 멋진 미소로 자기에게 다가온 후보 선수들, 감독에게 미소지어줬다.
마치 화보 같은 장면이었다.
크리스가 화면에 나오자 팬들은 크리스, 앨런이라는 두 단어를 마구 외쳤다.
웨일즈 팬들은 단 한 명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7만여 명의 팬이 단 한 사람의 이름과 성을 외치고 있었다.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의료진이 크리스의 몸 상태를 점검하는 동안, 크리스는 자유로운 두 손을 머리 위로 손뼉을 쳤다.
더 커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또 한 번 커지는 환호.
크리스는 고개를 든 채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크리스 앨런의 인터뷰는 조금 뒤에 한대.”
“그럼···.”
“저 사람 태현석 아니야?”
기자들의 쑥덕거림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나는 한 사람의 인터뷰가 시작되는 걸 지켜봤다.
“크리스티아누, 유감이네요.”
“위로 고맙습니다. 그래도 슬픈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아는 사이의 기자인지 호날두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늘 생각하지만, 축구라는 스포츠는 알 수가 없어요. 당연히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뒤집혀 버리다니.”
“공감해요. 크리스티아누가 슬퍼할 테지만, 이번 경기의 소감을 물어봐야 하는 제 입장도 아주 슬프네요.”
호날두가 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습니다. 너무 아쉬워요.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경기 결과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데.”
다른 기자가 기회라는 듯 물었다.
“그건 포르투갈 대표팀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선수가 부진하셨다는 얘기인가요?”
“아닙니다. 저희는 잘했습니다. 포르투갈 선수들은 제 실력의 100% 이상을 냈습니다. 문제는 웨일즈가 너무 잘했다는 점이죠. 특히··· 크리스 앨런이.”
기자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호날두가 먼저 크리스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칭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크리스 앨런의 활약은 정말 놀라웠어요. 크리스 앨런이 긴 슬럼프에 빠져있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크리스 앨런이 어떤 부담을 받았을지는 저를 비롯한 소수의 선수만이 알 겁니다. 그런 부담감을 이겨내고 오늘의 경기력을 보여준 건··· 정말 대단하고, 위대한 업적이었습니다. 비록 적으로 만났지만, 저는 축구를 사랑하는 한 선수로서 크리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크리스는 곧 세계 최고를 다투기 시작할 겁니다.”
“그 말은 내년 발롱도르 후보로 크리스 앨런을 예상하신다는 건가요?”
호날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경쟁자가 될 자격을 얻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왕좌를 넘겨줄 생각이 없습니다. 난 은퇴하는 순간까지 최고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요. 다음 유로에도, 다음 월드컵에도 도전할 겁니다. 저는 멈추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니까요.”
호날두의 나이는 현재 만 36세. 폼은 여전했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번 월드컵이 끝일 거라는 기자들과 팬들의 추측이 많았다.
다른 선수였다면 진작 은퇴했을 나이에도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는, 40살이 넘어서도 도전하겠다는 말로 자신이 어떻게 이 자리에 왔는지 증명하고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 졌다더라도 그가 스타플레이어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필드 밖에서도 빛나고 있었다.
드레싱룸으로 돌아가 다음 경기를 준비할 그의 등을 보던 나는, 경기장과 직접 연결된 터널로 향했다.
의료진의 부축을 받아 터널로 들어오는 크리스가 보였다.
관객들은 단 한 명도 이곳을 떠나지 않고, 아직도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으며 크리스는 터널로 들어오는 순간까지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관객들은 크리스가 터널에 들어온 후에도 계속 기립박수와 환호를 보내줬다.
“어?”
날 발견한 크리스가 제자리에 멈췄다. 안면이 있는 의료진이었기에 눈인사했다. 크리스는 의료진들에게 이제 부축 안 해줘도 된다고 먼저 가 있어 달라고 부탁했고, 의료진들은 그리하겠다고 말하며 떠나갔다.
방금까지도 제왕처럼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던 크리스는 천천히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비슷한 키에 비슷한 눈높이.
크리스는 살짝 눈웃음치고는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넘어지려는 걸 받아서 꼭 끌어 안아줬다. 크리스의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말없이 그러고 있었다.
크리스의 팔에 풀리지 않은 주장 완장이 보였다. 그동안은 저주의 부적처럼 보이던 게 지금은 온전히 크리스의 것처럼 보였다.
“태.”
“응?”
“봤어요?”
“응.”
“저 잘했죠?”
“응. 최고였어. 자랑스러웠어.”
울컥하고 올라와 온몸을 찌르르 울린 감정을 그대로 뒀다. 이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크리스는 몇 번이고 봤냐고, 잘했냐고 물어봤다.
나는 그럴 때마다 계속 대단했다고, 최고였다고 답해줬다.
떨리는 몸, 몸으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을 통해 필드 위를 종횡무진하던 크리스가 관중이 없는 곳에서는 나와 비슷한 체격의 사람일 뿐이라는 게 와닿았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너무나도 기특하고 대견스러워서 크리스의 등을 치며 계속 말했다.
“잘했어. 진짜 잘했어···.”
“크리스! 인터뷰해야지!”
“아, 인터뷰.”
스태프의 목소리에 경기의 감동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와 크리스는 떨어졌다. 크리스는 스태프가 손을 흔드는 방향으로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녀석은 언제 떨었냐는 듯 힘찬 걸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크리스의 등을 보며 다시금 인터뷰 장소로 조심스럽게 나갔다.
수없이 많은 플래시 세례가 쏟아지고, 크리스가 데스크에 앉자마자 쏟아지는 질문들.
크리스는 자신을 걱정하는 말에 먼저 대답했다.
“앨런 선수! 몸은 괜찮으신가요!”
“예. 괜찮습니다.”
크리스의 대답이 나오는 동시에 마구잡이로 질문이 쏟아졌다.
그들의 질문 대부분은 하나의 질문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다. 그동안 자신들을 비판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느냐.
크리스는 필드에 있을 때와 같은 제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흔들림 하나 없는 눈으로 기자들을 쭉 둘러보는 크리스. 기자들은 크리스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은 있습니다.”
셔터 소리가 잦아들더니 아예 들리지 않게 됐고, 질문을 던지던 기자들은 크리스의 말이 조금이라도 묻힐까 알아서들 입을 다물었다.
“베일만큼 해 줘야 한다··· 왜 호날두처럼 못하냐··· 많은 사람이 제게 그렇게 말했던 걸 기억합니다.”
기자들의 움직임마저도 멎었다. 크리스가 말하는 많은 사람에 자신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을 테지.
“나는 제2의 베일도 아니고 제2의 호날두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2의 메시는 더더욱 아니죠.”
모두의 눈동자와 수십 개의 카메라가 크리스에게 쏠려있었다. 위대한 경기를 이룩해낸 선수다. 카메라를 통해 크리스를 보고 있을 눈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모두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녹화방송까지도 포함한다면 몇억 이상이 기억해 줄 것이다. 그들의 입을 타고, 각종 매체를 타고, 곧 전 세계가 기억하게 되겠지.
작년 최고의 선수를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꺾어내고, 웨일즈에게 64년 만에 월드컵 진출이라는 기적을 안겨준, 축구계의 역사들과 동등한 자리에 앉을 자격을 갖춘 크리스의 말을.
“나는 크리스 앨런입니다. 그 누구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