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will make you the best soccer player RAW novel - Chapter 261
그런 날이 있다.
잘 때 누가 몰래 도핑 약이라도 먹인 것 같은 날, 몸이 날아갈 듯 가볍고,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는 날.
패스도 잘 되고, 트래핑도 잘 되고, 슈팅도 잘 맞고. 그렇게 힘주지 않아도 다 잘되는 날. 심지어는 상대 선수의 움직임마저 다 보이는 날이 있다.
세바스티앙에게는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붉은 유니폼을 입은 상대 팀, 대한민국의 반항은 무척 거셌고, 후반전 10여 분을 지나는 지금까지도 틈을 안 보여주고 있었다.
잘 짜인 팀이었다.
하지만 세바스티앙은 질 것 같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왠지 자신이 골을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소년 시절부터 이런 생각이 드는 날에는 늘 골을 넣었고, 승리했다. 세바스티앙이 가장 확실하게 믿는 미신이 바로 이것이었다.
‘세레머니는··· 역시 그거지?’
몇 년 전 추석 때의 아픔을 씻을 때가 드디어 왔다. 개막전에서 첸웬은 어시스트만 올리는 데 그쳐 세레머니를 하지 못했고, 자신과 석대호가 다음 타자로 나왔다.
올해 초, 크리스의 결혼식 피로연 당시, 세바스티앙은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려봤다.
세바스티앙은 태현석 몰래 선수들을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았었다.
‘우리가 태한테 받은 게 얼마나 많은 지 알지? 그러니까, 이번 월드컵 때 작게나마 보답해보자. 저번에는 레온 하나밖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많으니까. 자 이거 봐.’
선수들의 시선이 모인 곳은 세바스티앙의 손.
세바스티앙은 한 손을 세우고, 그 손의 손끝 위에 손바닥을 수평으로 펴서 얹어놓았다.
‘···T?’
‘응 맞아. 이걸로 세레머니 통일하자. 계속 이것만 하라는 건 아니고, 앞에 짧게만 해도 되고 딱 한 번만 해도 돼. 특히 닉이나 크리스, 대호, 웽웽이는 한두 번만 해도 돼. 너희는 골 많이 넣을 거잖아.’
‘무슨 소리를 하나 했는데, 부끄럽게 이게 무슨 짓이야··· 누가 이런 걸 좋아한다고.’
‘닉, 그럼 넌 빠지든가. 저번 추석 때도 태는 좋아했었어.’
레온이나 조던이 정말 태가 좋아했었나 생각해보며 갸웃했지만, 세바스티앙은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세바스티앙을 잘 따르는 첸웬이 한 손을 번쩍 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월드컵 내내 계속할래요. 멋있는 거 같아요.’
‘그래, 아주 훌륭해.’
세바스티앙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고, 닉은 진짜 태가 좋아하나? 라고 생각하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 중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세바. 태라고 발음할 수 있는 거였어?’
‘처음에는 안 됐는데, 금방 적응되더라고요. 데이브.’
‘속고 있었구나. 현석···.’
데이비드가 중얼거렸고, 이어서 오늘 결혼식을 올린 크리스가 말했다.
크리스는 추석 때 절 세레머니까지 한 전적이 있었으니 답은 당연하게도.
‘저는 찬성이에요.’
‘···그럼 나도.’
크리스가 찬성하자 닉도 지지 않겠다는 듯 이어서 말했다.
‘다 같이 하면 더 재밌을 거 같아요!’
첸웬은 진작부터 세바스티앙의 말에 홀린 상태였다
한국에서는 중2병이라고 불리는 시기의 나이에 있는 소년의 눈에 특별하고 유별나 보이는 행동은 늘 옳다.
별로 하고 싶지 않아 보이는 줄리우와 레온, 조던과 데이비드도 크리스와 닉을 차례차례 보더니 끄덕거렸다.
하지만 한국인 스트라이커와 골키퍼 듀오는 복잡한 얼굴이 되어 세바스티앙을 보고 있었다.
석대호가 물었다.
‘그거 좀 위험할 것 같은데···.’
‘왜?’
‘세바 너 우리랑 처음으로 붙지 않아?’
‘응 근데 그게 왜?’
‘아니야 됐어··· 형욱아 저놈 골 못 넣게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네. 반드시.’
태현석을 지키기 위한 둘의 숭고한 걱정을 세바스티앙은 둘이 자신보다 세레머니를 먼저 하려고 한다고 해석했다.
‘대호 너나 다비드랑 이니고 뚫고 골 넣을 생각 해. 나는 죽어도 첫 경기에서 골 넣을 거야.’
스페인의 골키퍼와 수비수의 이름을 언급하며 세바스티앙은 승부욕을 드러냈다.
석대호와 신형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태현석이라고 합니다.’
‘미스터 때라고 부르면 되죠? 때라고 부르거나.’
‘아니, 태요.’
‘때?’
그렇게 처음 만난 통역이었던 태현석은,
‘네가 원하면 도와줄게. 동양의 신비로, 아무도 모르게 말이야.’
자신이 겪고 있었던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해줬으며 자신을 브라이튼에서 도망치지 않도록 확실하게 도와준 정말 ‘요원(Agent)’ 같았다.
그때 스페인으로 도망쳤었더라면, 자신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선수들이 가장 큰 명예로 여기는 월드컵이라는 대회에 스페인이라는 강팀의 유니폼을 입고서.
그는 브라이튼 팬들과 오해도 풀어주었고, 스페인 대표팀에 가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을 위해 발로 뛰어 자신을 AT 마드리드로 돌려보내 줬다.
그러니까!
“으아아!”
세바스티앙이 갑자기 소리치자 한국의 수비수가 순간 움찔했다.
세바스티앙은 잡고 있던 공을 그 수비수의 다리 사이로 뻥 차고, 전력으로 질주했다.
옆에 있던 수비수가 급히 쫓아왔고, 알까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수비수의 얼굴이 붉어지며 세바스티앙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짧고 빠른 발을 이용한 차고 달리기는 세바스티앙의 전매특허.
한 두 번 해본 게 아니었기에 어디쯤으로 손이 올지도 알 수 있었다. 세바스티앙은 여유 있게 수비수의 손을 피했고, 급하게 커버하러 달려온 수비수의 반대 방향으로 방향을 전환해 또 제쳐냈다.
남은 건 에이전시의 동료 신형욱뿐.
미안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니까.
세바스티앙은 급하게 좁혀들어오는 신형욱이 미처 막지 못한 공간, 옆구리를 노려 공을 정확하게 감아 찼다.
스페인 원정 관중과 중국의 중립 관중이 하나 되어 환호성을 질렀다.
좋다.
이제 추석 때의 한을 풀 때가 왔다.
크리스만 하고, 아이디어를 낸 자신은 못 하고.
얼마나 억울했던가.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다.
세바스티앙은 VIP석을 향해 두 손으로 T 모양을 그리며 환하게 웃었다.
1-0으로 스페인이 대한민국에 앞서는 순간이었다.
*
“저건 또 뭐야···.”
멋진 골에 저절로 일어났다가 세레머니를 보자마자 주저앉았다. 그리고 어깨를 움츠렸다.
나를 향한다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분명 나를 향하는 것 같은 저 세레머니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3월 친선경기 당시 우리 에이전시 선수들이 골을 안 넣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기뻐했었는데, 더 큰 시련이 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베이징에서 열린 스페인과 한국의 월드컵 조별예선 1차전.
스페인이 공격을 주도하고 한국은 바짝 좁혀 수비하고 역습하는 양상의 경기가 펼쳐졌다.
유럽 예선에서 전승 가도를 달린 스페인과 6:4 정도의 경기를 펼치는 대한민국을 보며 몹시 자부심을 느끼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세바스티앙의 골에 이은 세레머니.
뭐, 세바스티앙이 골을 넣은 게 기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조직력이 강한 팀을 뚫는 방법 중 하나인 드리블돌파로 훌륭하게 골을 넣었다.
몹시 자랑스럽긴 한데···.
“흠.”
“크흠.”
지금 내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모두 한국 축구협회의 사람들이라는 게 아주아주 큰 문제였다.
저 녀석이 나한테 세레머니를 하는 걸 어찌 알았는지, 경기장 카메라도 날 잡고 있었다.
‘추석 때의 억울함을 풀고야 말겠어요.’
경기 전에 세바스티앙이 했던 말이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내게 복합적으로 엿을 먹이다니. 악의 하나 없는 순수함이라서 더 빡친다.
너무 노골적으로 T잖아···.
이건 커뮤니티에서도 존버 성공이라는 드립으로 체화될 게 아닌데.
친선경기부터 철저히 준비한 4년 만의 월드컵이었다. 기후도 크게 다르지 않은 지역에서 열리는 대회라 국내에서도 큰 기대를 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기대를 받는 대회의 첫 경기에서, 1패를 안겨준 적팀의 선수가 한국인 에이전트를 위한 세레머니를 하고 있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한 상황이란 말인가.
“망했다. 망했어··· 이번에는 진짜 한국 못 가···.”
“현석 씨?”
“죄송해요. 여러분···.”
지금까지는 드립이었지만, 이건 월드컵이잖아.
주변에 앉은 협회 분들이 쓰게 웃는 걸 보며 나는 그동안 기도해본 적도 없는 신에게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대호야··· 한 골만 넣어봐 제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손은 세바스티앙을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세바스티앙이 더 활짝 웃는 게 보였다.
착 가라앉은 사람들 속에 외로이 흔들리는 손.
기쁘면서도 서글펐다.
*
“살았다···.”
고통의 일주일이 흘렀다.
일주일 동안 일부러 커뮤니티도 안 보고, 한국 기자들도 피해 다녔다.
‘형님, 죄송합니다. 못 막았어요.’
‘괜찮아 대호야.’
‘저도 넣었어야 했는데.’
‘진짜 괜찮다니까?’
‘정말요? 반응 진짜 세던데···.’
‘큼. 아니, 그건 왜 봤어··· 감독님은 왜 니들 휴대폰 안 걷은 거야···.’
‘코치 형들 걸로 봤어요.’
‘아.’
‘아무튼, 제가 형님 한국 갈 수 있도록 나머지 두 경기에서 꼭 골을 넣어 보겠습니다.’
‘그래, 제발 부탁한다.’
한국은 결국 세바스티앙의 결승 골에 의해 1-0으로 패배했다.
아이러니한 상황에 세바스티앙의 세레머니가 한국인 에이전트를 향했다는 사실이 기사로까지 나왔다.
공중파 뉴스에까지 나왔다고 하니 말 다 했다. 젠장.
세계인의 축제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시청하는 월드컵은 수많은 기사와 이야깃거리들을 양산해내고 있었다.
보통 경기에서 벌어진 일들이 주 화제였지만, 우리 에이전시 소속 선수들이 공통된 세레머니를 하자 월드컵 사이드 스토리로 꽤 많이 다뤄지기도 해 우리 에이전시 이름과 내 얼굴이 팔리는 결과를 만들었다.
크리스도 월드컵 데뷔골을 넣고 카메라 앞에서 손가락으로 간단하게 T 모양을 만들고 제 세레머니를 했고, 대호도 두 번째 경기에서 한 골을 넣고 가볍게 했다.
데이비드도 프리킥으로 월드컵 데뷔골 꽂아 넣고 간단하게 했고, 첸웬은 좀 오바스러워서 세바스티앙만큼 민망했지만, 아무튼 했다.
물론 가장 화제가 된 건 내 아수라 백작 같은 반웃음 반무표정의 사진이 찍힌 세바스티앙의 세레머니였다.
가볍게 하니까 저렇게들 깔끔한데, 왜 나한테 대놓고 해서···.
그런데 니콜라스는 골 넣고도 저 세레머니를 안 해줬다. 네 골이나 넣었는데 말이다.
조금 아쉽더라.
···이게 무슨 심리일까?
아무튼, 대한민국에서 나를 역적으로 모는 분위기는 두 번째 경기가 지나면서 반쯤 사라졌고, 세 번째 경기가 끝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잊혔다.
각성한 형욱이 덕에 페루에게 2-0 승리를 거뒀고, 폭발한 대호 덕에 카메룬에 3-1 승을 거둬 페루에게 1-0으로 일격을 맞은 스페인을 누르고 2002년 이후 처음으로 조별리그 1위를 달성한 대한민국이었다.
이게 다! 훌륭한 팀들과의 친선경기를 잡아주고, 훌륭한 선수들을 발굴해낸 내 덕도 있을 텐데, 아쉽게도 이건 화제가 되지 않았다.
더 큰 화제가 16강전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대표팀이 조별리그 1위로 올라오면서 만나게 된 건, A조 2위로 16강전에 오른 중국이었다.
위의 두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두 나라는 서로를 8강 제물로 보고 있었다.
여러 이해관계가 엮인 이웃 나라였기에 이 떡밥은 더 크게 활활 타올랐고, 틈틈이 10대 소년이지만 중국의 에이스인 첸웬에 관한 기사도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첸웬이 했던 세레머니와 그와 한국인 에이전트와의 관계까지도.
첸웬은 불과 열일곱 살의 나이로 조별리그 총 3경기에서 4골 1어시스트를 하며 센세이셔널한 월드컵 데뷔전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별리그 활약만으로도 도박 사이트에서 이번 월드컵 올해의 영플레이어상 1순위로 지목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