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will make you the best soccer player RAW novel - Chapter 27
27
8. Project revival (1)
아이들은 내가 무서운 건지 인사도 않고 뒤돌아서 도망쳤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허리를 폈다.
“애들이 낯을 많이 가려.”
괜찮다고 말하고 해리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부인분께선···?”
“자고 있어. 내가 거의 집에 없다 보니까 애들한테 쉴 틈 없이 시달려서 말이지. 내가 휴일일 때는 쉬고 그래. 자, 이 방이야.”
“감사합니다.”
최근에 청소한 건지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깨끗한 방이었다. 나는 캐리어를 적당히 구석에 놓고, 바로 주방을 찾았다.
“현석, 진짜 저녁 만들게? 됐어. 내가 대접할게.”
“아니요. 절대로 괜찮습니다. 저녁까지 얻어먹으면 죄책감에 배탈 날지도 몰라요.”
격한 부정에 해리는 알았다고 하며 주방에서 물러났다.
나는 재료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리와의 첫 식사나 크리스의 집에서 당했던 영국 소울 푸드를 또 먹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사 온 거였다. 마트에는 길쭉한 인도 쌀밖에 없어 아쉬웠지만, 적당히 볶으면 맛있을 거다. 고기가 싸서 불고기도 잔뜩 만들 수 있었고.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아이들이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감시하는 게 보인다. 나는 어색하게 웃어주고 저녁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맛있어요!”
다행이다. 미각 자체가 다른 건 아니었구나. 아이들은 이제 나를 경계의 눈에서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바로 자취 8년 경력의 솜씨란다.
“진짜 맛있네요.”
해리의 부인, 제니퍼 왓슨 씨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를 보고 있었다.
“······.”
해리는 충격받은 모양인지 아무 말도 못 하며 정신없이 불고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해리의 대식가 기질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불고기는 잔뜩 해 뒀다.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네요. 함께 식사할 때는 최대한 제가 요리할게요. 공짜로 머무르는 건 정말 죄송해서요.”
해리의 가족들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친 후에, 나는 겉옷을 챙겨 입으며 밖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머(summer) 만나러 가나?”
“네네.”
“너무 늦지 말고 돌아와.”
EW에이전시의 또 다른 한국인, 한여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런던에 왔으니 술이나 한잔하자고 해서 말이다.
얼마 전에 톡이 와서 화면상으로 통성명은 한 사이였다.
나는 카카오톡을 켜 그날의 톡 내용을 살피며 나갈 준비를 계속했다.
한여름 [안녕하세요. EW에이전시 법률팀 소속 한여름이라고 하는데··· (중략) ···진작 연락드렸어야 하는데 너무너무 바빴었어요(우는 이모티콘) ··· (중략) ··· 사무실에서 런던에 좀 머무르실 거라고 들었는데, 한국인들끼리 가볍게 친목회 하는 건 어떨까요? 술은 제가 살게요.]
첫 톡이 온 지 일주일이나 지났다. 처음 연락이 왔을 때는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연락할 때만 썼던 카톡에 같은 직장을 가진 사람이 톡을 보냈다는 사실이 꽤 신선했다. 나는 그날 바로 답했었다.
이렇게.
나 [헉, 안녕하세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이모티콘)]
[얼마든지요. 제가 먼저 연락했어야 하는데…]
한여름 [아니에요! 아무튼, 약속하신 거예요? 언제쯤 올라오세요?]
나 [다음 주쯤에 올라갈 것 같아요. 올라가면 꼭 연락드릴게요.]
한여름 [(춤추는 이모티콘)]
나 [ㅎㅎ]
한여름 [그럼 그때 봐요. 꼭 연락하셔야 돼요.]
나 [네.]
프로필에 손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프로필 사진에는 배우 서현진을 닮은 아리따운 여성분이 계셨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최근 대화까지 내렸다.
나 [런던 왔어요. 세바스티앙도 스페인으로 떠났고요.]
한여름 [그래요? 해리 아저씨 집에서 머무른다고 했죠? 거기 주소가 어떻게 돼요?]
나 [(해리의 집 주소)]
한여름 [좋아요. 여덟 시까지 캐논 스트리트로 나와요. 고고! (맥주를 짠 하는 이모티콘)]
나 [네ㅎㅎ]
앞으로 직장 동료가 될 분이 이렇게 귀여운 분이라니. 후후. 나는 빼먹은게 없나 한번 살피고, 머리를 매만진 후에 해리의 가족에게 인사하고 집을 나서려 했다.
“현석, 열쇠 가져가.”
“아.”
“너무 늦게만 들어오지 마, 내일 서류 정리할 거 산더미다?”
“당연하죠.”
나는 해리의 집에서 나와 10분 거리에 있는 캐논 스트리트로 향했다. 이국에서 동향의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고 쓸 한국말도 좋았고.
그건 한여름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꺄아아! 반가워요.”
“어, 저도요···.”
너무나도 격렬한 반응에 왠지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한여름은 기대보다 훨씬 더 에너자틱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였고 나는 추임새를 섞어 고개만 끄덕여야 했다.
“사실 처음부터 연락하고 싶었는데요. 사무실에서 들어보니까 금방 그만둘게 뻔하다 해서 바로 연락 못 했어요. 그리고 중간에는 정말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고요.”
“아하.”
“근데요, 어떻게 연장계약까지 했어요? 능력 있으신가 봐요!”
“하하.”
“세바스티앙 로드리게스 선수가 통역을 계속 갈아치워서 에이전시 내에서도 골치가 아팠었다 하더라고요. 같은 팀은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요. 아무튼, 그 세바스티앙이 경기에서 대활약을 했을 때 에이전시 사람들 표정이 아주 볼만했었어요.”
한여름은 에이전시 사람들 표정을 흉내 낸 건지,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여름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다 왔어요.”
한여름이 날 이끈 곳은 평범한 펍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술집 안의 냉장고에 이상하게 익숙한 병들이 잔뜩 보였다. 녹색 병들인데 빨간 뚜껑이 달려있고··· 참한 이슬이라고 적혀있는 그것.
한여름의 눈이 그 병들을 훑으며 반짝이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다 보니, 케이티 큐빗이 첫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툭 하면 초과근무 하려 하고, 자꾸 술 마시자고 하는 이상한 여자에요.’
생각해보니 연락하는 내내 술 얘기가 빠지지 않았었지.
음··· 어···.
불안한데.
10분 뒤, 나는 영국에서 절대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카X와 참XX을 섞은 폭탄주 다섯 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펍에 있던 모든 사람은 한여름의 폭탄주 제조 과정을 본 후 열렬한 박수를 보내고 있었고, 한여름은 귀부인처럼 멋들어진 인사를 하고 있었다.
젠장.
“자, 짠!”
한여름은 잔을 부딪친 뒤, 술잔을 한 번에 비웠고, 나도 어쩔 수 없이 한 번에 술잔을 비워야 했다.
크, 소리를 내던 한여름이 내게 묻는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이 물음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편하게 답했다.
“저 91년생이요.”
“오! 동갑이네요! 그럼 혹시···.”
“반말하셔도 돼요. 상관없어요.”
“다행이다!”
한여름은 씩 웃더니 잔을 하나 더 내밀었다.
“그럼 한잔 더!”
허허, 젠장.
다행히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기에, 나는 빠르게 한 잔을 마시고 술에서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왜 미스 한이 아니라 미스 서머라고 부르는 거야?”
“아, 미스 한 소리 들으면 한국에 있는 기분이라 그냥 서머라고 불러달라고 한 거야. 에이전시 사람들은 내 성이 서머고 이름이 한인 줄 알아.”
“아하.”
보면 볼수록 특이한 사람인 것 같다. 한여름은 또 한 잔을 넘기더니 헤헤 웃으며 내 얼굴을 빤히 본다.
“너무 좋다. 여기 사람들 진짜 재미없거든. 맨날 일만 하고 그냥 휑~ 집에 간다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
“그래?”
“응. 일 할 때도 그래, 자기 일 말고는 하나도 관심 없어. 저번 에이전시는 안 그랬는데···, 아오, 생각할 수록 열받네. 삭막해 죽겠어. 짜증 난다고! 그렇게 살 거면 사람 얼굴은 왜 달고 있데? 그냥 기계로 살지.”
“아···.”
한여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뭐, 가족들이나 친구들이랑 노는 게 좋아서 그렇겠지 뭐. 여기 문화가 원래 그런 거고···. 나는 그냥 외로워서 투정부리는 거고···.”
갑작스런 우울한 모습에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한여름은 얼굴에 잔뜩 낀 먹구름을 대번에 밀어내며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앞으로도 술친구 좀 해 주라. 계약 얼마나 남은 거야?”
급격한 표정변화에 나는 느릿하게 답했다.
“···2년.”
“나랑 비슷하네! 좋다, 좋아.”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는 한여름을 보고 나는 픽 웃었다.
“나도 오랜만에 한국어 쓰니까 좋네.”
“그치?”
나는 꽤 늦게까지 한여름과 술을 마셨다.
한여름과의 대화에서 EW에이전시의 자잘한 정보도 꽤 들을 수 있어 나름 유익한 시간이었다. 좀 많이 마셨다는 것만 빼면.
*
“어제 얼마나 마신 거야. 안색 보게.”
“괜찮아요···.”
“감자튀김이라도 먹을래? 이게 해장에 좋은데. 아니면 피자라도.”
“저 그러면 진짜 토해요···.”
나는 해리의 옆에 앉아 선수들의 자료 정리를 돕고 있었다. 해리가 담당하는 선수만 족히 20명은 넘었기에 있는 자료를 정리하는 것만으로 시간이 꽤 걸렸다.
사무실의 정 반대에 앉아있는 한여름은 말짱해 보였다. 정장에 머리까지 깔끔하게 정리하니, 어제의 술고래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모습이다.
마침 한여름이 기지개를 켰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싱그럽게 웃더니 손을 흔든다. 나도 적당히 손을 흔들고, 다시 활자들로 눈을 돌렸다.
“많이 친해 졌나 봐.”
“예. 아무래도 동향 사람이다 보니까···.”
세바스티앙이 휴가를 갔고, 팀 배정도 아직 되지 않은 상태라 나는 해리의 일을 돕고 있었다. 대표가 이탈리아로 가기까지 한 달가량이 비어있어, 한동안은 해리와 함께 일하게 될 것 같았다.
책상에만 파묻혀 있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됐고, 해리는 시즌이 끝난 선수와 식사 약속이 있다고 사무실을 떠났다. 같이 가자고 했는데 내가 거절했다.
도시락 싸 왔거든.
에이전시에는 따로 점심시간이 없다고 했다. 시간이 되면 밖에 나가서 먹고 오든지, 그냥 사무실에 앉아서 먹든지. 일에만 방해되지 않는다면 언제 점심을 먹든 아무런 터치도 없다고 했다.
나는 도시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날 발견한 한여름도 밥 먹는 시늉을 하더니 제 도시락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뭐 싸왔어?”
“불고기. 빨간색.”
아침에는 속이 안 좋아서 해리의 아이들에게만 주고, 남은 걸 좀 싸왔다. 한여름은 내 말에 눈을 반짝이더니 옷깃을 붙잡고 라운지로 끌고 갔다.
그리고 도시락을 연 뒤, 내 불고기를 맛보자마자 한여름 눈에 잠깐 하트가 생겼다 사라졌다.
“너, 나한테 장가올래?”
“···.”
“농담이야.”
한여름은 키득대더니 자기 떡갈비와 불고기를 교환하자고 했다. 그렇게 식사하고 있는데, 커머셜 팀의 디렉터들이 차를 마시러 왔다.
“아디다스에서 온 공문 봤죠? 아깝지 않아요?”
“당연히 아깝죠. 몇 없는 아디다스랑 레알마드리드의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인데. 방송도 나오고.”
“우리 에이전시에 팀 없는 선수만 있었으면 적극적으로 밀어줬을 텐데 말입니다.”
팀 없는 선수? 아디다스? 레알 마드리드?
솔깃한 단어들이 연속해서 터져 나왔다.
나는 식사를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두 디렉터는 테이블에 앉아 다른 얘기를 시작했다.
갑자기 한여름이 묻는다.
“왜? 저게 뭔지 궁금해?”
“어, 응.”
“물어봐 줄게, 기다려봐.”
“응?”
한여름은 벌써 일어나서 디렉터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