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will make you the best soccer player RAW novel - Chapter 85
85
19. 별 여섯개로 향하는 길 (4)
감각유지 훈련이 끝났는데도 크리스는 훈련을 더 하길 원했다.
“조금만 더 하면 안 돼요?”
“절대 안 돼.”
내 단호한 대답에 크리스는 귀 내린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졌다. 크리스는 미련이 남는 듯 자꾸 정원 쪽을 바라봤지만, 나는 크리스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어 샤워실에 집어넣었다.
씻는 소리가 나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으··· 찝찝해.”
크리스에게 공을 던져주고 차주고 하다 보니 나도 땀이 조금 났다. 2층 샤워실도 있지만 불편할 정도로 땀이 난 건 아니었기에 크리스가 나오면 이어서 샤워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장 목이 말라 부엌으로 향하니, 에린과 다은이 식탁에서 초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다은이는 어느새 편한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다은이는 에린을 배려해서인지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오빠, 오늘 같은 날에도 훈련해?”
“쟤가 요즘 훈련에 꽂혀서 어쩔 수가 없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은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거짓말. 오빠 즐기고 있으면서.”
“뭐?”
“오빠 지금 웃고 있단 말이야.”
얼굴을 만져보니 진짜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표정관리 잘해야 하는데, 집이라 그런지 긴장이 풀렸나 보다. 사실 크리스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게 나쁘지는 않았··· 아니 엄청 좋았다. 왜냐하면.
“성장하는 게 보이니까 기분 좋더라고. 얼마 안 있으면 목표 달성도 할 것 같고···.”
다은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이 아주 잘 만났네. 훈련광 선수에 축구에 미친 에이전트라니. 에린, 너 진짜 고생이겠다.”
다은의 말에 에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뭔 소리야. 에린은 뭐가 고생이고, 내가 얼마나 잘해주는데.”
“오빠는 몰라도 돼.”
다은의 말에 눈썹을 일그러트리니 에린과 다은이 서로 눈을 맞춘 뒤 까르르 웃었다.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친해 보이니 다행이었다.
둘에게서 신경을 끄고 냉장고에서 끓여둔 물을 꺼내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로 익숙하지 않은 말이 들려왔다.
“오빠.”
“왜 다은아··· 응?”
발음이 좀 이상하다 했더니 에린이었다.
“다은이한테 들었어요. Older brother를 오빠라고 부른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삼촌보다는 이 호칭이 더 마음에 들어서요.”
얘네 대체 무슨 얘기를 한 거지.
“그건 그런데···.”
“이렇게 부르면 안 돼요?”
에린의 어깨가 푹 꺼지며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어갔다.
저런 표정에 이길 수는 없다.
“···마음대로 해.”
“진짜요? 고마워요. 오빠.”
에린이 환하게 웃었고 내 심장에 쿵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나는 물을 재빨리 마시고 황급히 부엌에서 벗어나며 생각했다.
저 얼굴은 진짜 반칙이야. 만난 지 1년이 다 돼가는 데 아직도 적응이 안 돼서야···.
그리고 자기 최면도 이어서 했다.
쟤는 내 동생이랑 동갑이다. 쟤는 내 동생이랑 동갑이다···. 쟤는 날 보호자로 생각하고 있다···.
부엌 쪽을 슬쩍 보니 다은과 에린이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었다.
그때 크리스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태, 샤워하세요.”
“알았어.”
크리스가 내 얼굴을 보더니 갸웃한다.
“태, 얼굴이 빨개요. 어디 아파요?”
“조용히 해. 생리현상이니까.”
크리스가 뚱한 얼굴로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평소보다 훨씬 늦게 눈을 떴다.
지금 시각은 오전 10시, 해 둘 게 있어서 새벽 4시에 일어났다가 6시에 다시 잠든 탓이기도 했고, 모처럼의 휴일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크리스의 방은 굳게 닫혀 있었고, 다은이는 문을 살짝 열어놓고 자고 있었다. 다은이는 시차 적응 때문인지 아직도 자고 있었다.
나는 소리를 죽이며 걸어 거실에 나왔다. 거실에는 선객이 있었다.
“일어났어요?”
“좋은 아침이죠, 이자벨?”
“그렇네요.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크리스의 어머니, 이자벨 앨런은 홍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이자벨이 따라주는 차를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셨다.
밖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창문 밖으로는 한산한 거리가 보였다.
평화롭다.
“올해 크리스마스를 이런 곳에서 보낼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나와 똑같이 밖을 보고 있던 이자벨이 입을 열었다.
“크리스는 선수로 자리를 잡았고, 에린도 이제 취직은 문제없으니 더 바랄 게 없네요.”
시험 방식은 잘 모르겠지만, 에린은 작년 6월부터 시작한 회계사 시험을 이번 달에 최종 과목들까지 패스했다고 했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어려워하는 시험을 10대에 다 패스한 것이니, 여러모로 우월한 집안이었다.
앞으로 3년 동안 회계 법인에서 경력을 쌓아야 자격증이 나온다고 해서 내년 들어가면 바로 취업할 생각이라고 했다.
틈틈이 내 일도 도와주는 걸 잊지 않겠다고 했지만, 무리해서 부를 생각은 없었다.
“다 현석을 만난 덕이네요.”
“아니에요. 크리스랑 에린이 열심히 한 덕이죠.”
내 말에 이자벨은 부드럽게 웃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살이 많이 올라 훨씬 보기 좋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주름도 거의 없어 크리스의 어머니가 아니라 누나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가장 고마운 건, 크리스와 에린이 현석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있다는 거예요. 저는 그게 가장 고마워요. 애들한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쑥스러워서 별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주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이자벨은 찻잔을 든 채로 살살 돌리며 출렁이는 차를 보며 말했다.
“저도 짐으로 남고 싶지 않아서 일을 찾아보고 있는데 직장에서 받아주질 않으니···.”
“어쩔 수 없는 거죠.”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사람을 채용하긴 쉽지 않지.
“크리스가 사업이라도 해 보라고 하는데 그건 안 되죠. 크리스의 돈을 보고 나한테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이자벨은 현명했다.
“될 수 있으면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 외에는 지금처럼 크리스의 뒷바라지나 하려고요.”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그럼 이자벨은 프리랜서라는 말이니···.”
내가 뜸을 들이자 이자벨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뒷말을 이었다.
“가끔 제가 고용해도 될까요?”
이자벨이 싱긋 웃었다.
“그럼 저야 고맙죠.”
어느새 홍차가 다 떨어져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자벨에게 말했다.
“저는 오늘 다은이 데리고 크리스마스 마켓 좀 구경시켜주려고요. 이자벨도 크리스와 에린이랑 얘기도 하시고 마켓 구경도 다니세요. 오늘 훈련은 없거든요. 근데 크리스는 언제쯤 일어나려나···.”
“일어나 있어요. 아침 먹고 들어갔는걸요.”
“네? 이 자식 설마···.”
나는 크리스의 방으로 찾아갔다.
문을 열자마자 크리스가 아이패드를 급히 숨기는 걸 목격했다.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 아이패드를 뺏은 후 영상을 확인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상대 팀 분석 영상이었다.
“차라리 야동을 봐.”
“···.”
“오늘은 쉬라고 했잖아.”
“하하···.”
크리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 시선을 피했다.
“어제는 봐 줬지만, 오늘은 안 돼.”
나는 아이패드의 전원을 끄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태에에···.”
크리스가 어울리지 않게 애교까지 부렸다. 나는 고개를 계속 저으며 말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잖아. 이런 날만큼은 무슨 얘기를 하든 무슨 일을 하든 좋으니 꼭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지.”
“하지만···.”
“오늘은 무조건 쉬어야 해. 훈련 프로그램 자체를 일부러 조정했다고. 오늘 쉬어야지 박싱데이 일정에 맞출 수 있어. 무엇보다 말이야···.”
내가 뜸을 들이자 크리스가 고쳐 앉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녀석의 모범생 같은 모습에 나도 진지한 선생님처럼 말했다.
“축구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가족도 중요하다는 걸 잊으면 안 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나 리오넬 메시도 가족과의 시간만큼은 확실히 보내잖아? 축구에만 매몰되면 잠깐은 좋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안 좋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오늘은 어머니랑 에린이랑 공원이라도 나가.”
“···.”
“네가 나랑 처음으로 만났을 때, 뭘 가장 중요하게 여겼었는지 기억해.”
침묵하던 크리스는 내 마지막 말에 눈동자를 크게 떴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 말이 맞아요. 에린은 모르겠는데 엄마랑은 요즘 제대로 얘기를 한 적이 없네요.”
“그래.”
“그런데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휴대폰 확인해 봐.”
크리스는 바로 자신의 휴대폰을 찾아 내게서 온 메시지를 열었다.
“오오, 태···.”
이럴 줄 알고 런던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들과 시간, 대표 구경거리와 먹거리를 정리한 사이트를 찾아 놨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도시락도 준비해 놨으니까 챙겨 가고.”
크리스는 나를 멍하니 보다가 입술을 꿈틀대며 웃었다.
“준비성이 진짜··· 고마워요. 태.”
크리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걸이를 뒤졌다.
“이 옷이 괜찮을까요?”
“응, 넌 뭘 입어도 되니까 대충 걸쳐 입고 나가. 크리스마스는 생각보다 짧다고.”
“선글라스 꼭 쓰고 다녀야 해. 될 수 있으면 모자도.”
“네.”
독일이라면 모를까 영국은 알아보는 사람이 워낙 많고 접근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아 고생할지도 몰랐다.
“혹시 도움 필요하면 연락하고.”
“네.”
크리스는 이자벨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에린은 다은이와 나랑 함께 다닐 거라고 집에 남았다.
다은이는 일어나자마자 나와 에린에게 끌려 런던 관광에 나섰다.
매장 대부분은 닫았지만, 하이드파크나 사우스뱅크 광장에 있는 크리스마스 마켓은 건재했기에 그곳에서 풍경과 먹거리를 즐기며 크리스마스를 즐겼다.
그리고 석양이 지고, 크리스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다은이가 내게 말했다.
“솔직히 여기 오기 전에는 언니가 걱정하는 것 듣고 어렵게 사는 줄 알았거든?”
“응.”
“전혀 아니네. 에린네 가족도 정말 괜찮은 사람이고, 찾아보니까 크리스도 엄청난 선수고. 언니한테 걱정 덜 해도 되겠다고 말해야겠어.”
“그래 주면 좋지.”
다은이가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한국어로 작게 말했다.
“그리고 에린에게 이 얘기 저 얘기 다 들었어.”
“뭐?”
“오빠가 쬐끔 더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
나는 눈살을 찌푸렸고 다은이는 킥킥대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크리스의 집에 도착해서는 어제만큼 성대한 저녁 식사를 또 했다.
그리고 밤에는 각자 휴식하며 남은 크리스마스 휴일을 즐겼다.
다음 날, 다은이는 내 걱정을 받으면서 여행을 시작했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연락하라고 하는 내게 다은이는 귀찮아하면서도 알겠다고 말해줬다. 에린이 다은이의 가이드를 해 주겠다고 해 조금 안심이 되긴 했다.
그리고 나와 크리스는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예전보다 평온해진 녀석은 마치 기계가 된 것처럼 훈련과 경기를 반복해나갔다.
나는 에이전시 일을 병행하면서도 늘 크리스를 최우선으로 두고 관리했다. 크리스의 체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절해주는 게 최대 과제였는데, 약 열흘간 4경기를 치르는 지옥의 일정 동안 크리스의 경기력은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고, 모든 경기를 풀타임으로 뛰는 성과를 냈다.
크리스의 별은 여전히 다섯 개였지만, 경기력만큼은 크리스가 경쟁심을 불태우던 라이언 세세뇽에 전혀 밀리지 않아 보였다. 별 여섯 개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영국에서의 첫 새해였지만, 일에 치여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새해를 맞이했다. 에이전시에서는 겨울 이적시장이 열려 모든 직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 또한 큰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박싱 데이가 끝나면, 영국 내의 모든 팀이 맞붙는 컵 대회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회인 FA컵의 본선이 열린다. 풀햄 또한 당연히 FA컵에 참가한다.
2부 리그에서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12월 초까지만 해도 어지간한 팀이면 해 볼 만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 추첨 후에는 그런 마음가짐을 싹 지웠다.
왜냐면 상대로 뽑힌 팀이 프리미어리그 3위, 리버풀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