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113)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113화(113/920)
#113 신국의 화륜을 이끄는 자 (1)
“올리? 엄마 얘기 듣고 있니?”
크리스텔은 반짝 상념에서 깨어났다.
멍하니 창밖을 보던 시선이 실내로 돌아와, 맞은편에 앉은 ‘어머니’를 향했다.
이자벨 드 사르네즈 공작 부인.
“죄송해요. 잠시 딴생각을 했어요.”
“괜찮아.”
이자벨이 검은 눈동자를 휘며 답했다.
사랑하는 딸과 오랜만에 데이트를 나온 그녀는 몹시 즐거워 보였다.
한껏 차려 입은 외출용 드레스와 장신구는 모두 제국에서 가장 값진 것들이었고, 우아하게 틀어 올린 연둣빛 머리칼은 햇살을 받아 만록(萬綠)처럼 반작였다.
크리스텔은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애써 마주 웃고 찻잔에 입술을 박았다.
차인지 커피인지도 구별하기 힘든 정신머리였지만 여하튼 마시는 시늉은 냈다.
“무슨 일 있는 거지?”
어머니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크리스텔은 침묵했다.
모녀 사이에는 한동안 고급 찻집의 백색 소음만이 감돌았다.
손님들이 담소를 나누는 소리, 점원이 애프터눈 티를 서빙하는 소리와 바깥의 말발굽 소리.
“그, 별건 아닌데요.”
“별거 아니어도 좋아. 엄마는 전부 궁금해.”
다정한 말이었다.
크리스텔은 바로 이자벨의 이런 점 때문에 그녀를 가까이하기 힘들었다.
어머니는 너무 좋은 사람이었고 자신은 그녀의 진짜 딸이 아니었다.
언젠가 이자벨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는 날이 오기라도 하면, 그녀의 고운 얼굴에 드리울 실망과 슬픔을 생각하면 도저히 거리감을 좁힐 수가 없었다.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함가인’은 제 언니 또래의 여성에게 아주 취약했다.
그러니 크리스텔이 ‘어색하지만 상냥한 딸’ 노릇을 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누군가에게는 털어놓고 싶었다.
“제가 왕자님께 잘못을 한 것 같아요.”
“예서 왕자님?”
이자벨이 목을 기울였다. 크리스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어제 저녁에, 왕자님이 저와 황자 전하를 정식 파트너로 받아들이셨어요.”
“어머! 황궁에서 경사가 있었네. 왜 아침에 말해주지 않았어?”
이자벨이 활짝 웃으며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그녀는 크리스텔이 오랫동안 왕자를 파트너로 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자벨 본인도 왕자에 대한 호감이 깊었다.
그는 자신의 무례를 기꺼이 용서하고 곤란한 상황에서도 고해를 받아준 귀인이었다.
딸과 함께 ‘마수 대토벌’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영주성에서 성대한 만찬이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물론, 그가 볼모이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었지만.
“······왕자님이 자발적으로 하신 게 아니거든요.”
“음?”
“상황에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결정하신 거예요. 남을 살리려고, 그리고 본인도 살기 위해서요. 저나 황자 전하가 진심으로 마음에 차서 그러신 건 아니겠죠.”
크리스텔의 음색이 어두워졌다.
이자벨은 어젯밤부터 딸의 안색이 심상치 않았던 이유를 알아챘다.
그녀는 망사 장갑을 벗고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성기사로 각성한 이후 딸의 체온은 쭉 서늘했다. 공작 부인은 그것이 못내 속상했다.
“그래서 화가 났어요. 우리를 봐주신 게 아니니까. 그냥 하나의 패로 이용하신 건가 싶어서요. 그럴 분이 아닌 건 아는데 속상했어요.”
“······.”
“그런데 이불 덮고 누워서 생각을 해보니까······. 저도 얼마 전까지 똑같이 했더라고요.”
이자벨이 딸의 잔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공녀가 말꼬리를 붙였다.
“저는 왕자님의 에테르가 마음에 들어서 접근한 거예요. 좋은 분이시고 같이 있으면 편한 것도 있지만, 처음엔 왕자님을 배려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구나.”
“애처럼 굴었던 거죠. 왕자님은 장난감이 아닌데.”
크리스텔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만찬장에서 부티에 추기경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왕자님, 떠밀리듯이 결정하실 필요는······.’
‘크리스텔, 왕자님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렴.’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 또한 왕자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고자 꺼낸 말이었으니까.
그런데 돌이켜보니, 자신은 진심으로 그에게 여유를 준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저 그의 앞에서 바라는 바를 어필하기 바빴다.
어쩌면 추기경도 그 점을 지적한 것일지 몰랐다.
이자벨은 말없이 딸의 손등을 쓸어주었다.
“그 생각을 하니까 제가 뭐라고 말할 자격이 있나 싶어졌어요. 요즘엔 안 그런다고 해도, 왕자님은 진작 실망하셨을지 모르잖아요.”
“······.”
“솔직히 왕자님은 이해가 되기도 해요. 볼모 입장에선 더 절박해질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저는 그런 상황도 아니었고.”
절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헤인스 경은 성기사가 무척 외로운 직업이라고 설명했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신관조차도 성기사의 원초적 기갈과 고통을 헤아려주지 못한다고.
성기사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에테르를 욕망하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이는 같은 성기사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왕자에게 자신의 욕구를 알아달라고 주장하는 건 어찌 보면 미련하고 일방적인 짓이었다.
머리로는 아는데 행동이 잘 따라주지 않았다.
“성기사는 늘 에테르를 원한다고 들었어. 영혼이 안정된 순간에도 에테르를 쫓는다고 하더구나.”
크리스텔이 시선을 들었다. 따뜻한 흑색의 눈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물을 마셔도 목이 마르고, 식사를 해도 배가 고픈 것과 같다고. 주신의 사랑을 받는 신관과 달리, 성기사는 주신의 미움을 받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대.”
“그 얘기는 어디서,”
“요한 헤인스 경과 몇 번 편지를 주고받았거든.”
공녀의 청회색 눈동자가 커졌다. 이자벨이 미소 지으며 부연했다.
“딸의 선생님을 제대로 만나 뵙지도 못한 게 걸려서. 인사차 서신을 보냈는데 답장이 왔어. 그래서 이것저것 물어봤지. 내 아이는 힘들고 나쁜 이야기는 하지 않으니까.”
“······.”
“차근차근 해나가면 돼, 올리. 사과하는 것도, 왕자님과 진정한 짝이 되는 것도. 그럼 언젠가는 서로 이해할 수 있어.”
‘엄마도 노력할게’ 하고 이자벨이 덧붙였다.
크리스텔은 순간 울컥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내려다본 어머니의 손은 자신의 손보다 작고 얇았다.
“애처럼 굴었다고 했지만, 너는 아직 애가 맞으니까. 아이들은 실수해도 괜찮아.”
“하하하.”
그 말에는 웃음이 터졌다. 자신은 아이가 아니고, 실수가 용납되는 나이도 아니었다.
인간관계엔 제법 노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냥 가면을 쓰고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진 결과였을까?
함가인은 다른 사람의 몸을 빌리고 나서야 민낯이 되었고, 민낯이 되고 나서야 자신이 덜 큰 철부지임을 깨달았다.
“왕자님하고 이야기해 봐.”
“네.”
“다감하신 분 같았어. 분명 마음을 열어두고 계실 거야.”
그야 그랬다. 자신이 아는 왕자는 남의 과실에 너그럽고 정이 많았다.
게다가 우리는 친구니까.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때였다.
“네, 제 아내가 어제 전령을 받았대요! 왕세녀가 포털 코앞까지 왔다더군요.”
“용맹하고 아름답기가 사자와 같다고 들었습니다.”
“말도 마세요. 황자 전하께서 긴장 좀 하셔야 할 겁니다.”
“내일 새벽이면 황도에 닿을 거라고 하던데요?”
반대편 창가 테이블에서, 대귀족으로 보이는 몇 남녀가 흥분해 목청을 높였다.
크리스텔은 가만히 내일의 일정을 떠올렸다.
그녀는 다시 한번 입궁해, 황실과 왕자의 곁에서 엘리서 페네티안 왕세녀를 맞이하게 될 터였다.
어떤 자일까. 얼마나 강할까.
과연 왕자님과 헤인스 경을 도와줄까?
*
“전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왕세녀 전하께선 내일 오전에 도착하시는 대로 황제궁에서 폐하를 알현한 뒤, 바로 스트로다 궁에 오시게 될 겁니다.”
“······.”
세드리크는 말없이 스트로다 궁의 뒤뜰을 걸었다. 다비드가 뒤를 따랐다.
이곳은 황궁에서 손님을 맞을 때 개방하는 가장 큰 궁이었다.
최근에는 성대한 ‘봄 무도회’가 열렸던 장소이기도 했다.
황자와 사르네즈 공녀를 심사할 추기경으로 엘리서 왕세녀가 온다는 소식은, 제국 사교계는 물론이고 벽지의 평민들까지 들썩이게 했다.
지난 8일간 황궁은 그녀에 대한 의전을 결정하고 채비하느라 분주하게 돌아갔다.
로메로 궁의 시종 총괄인 다비드는 그중에서도 가장 바쁜 축에 속했다.
이번 손님맞이를 담당하게 된 황족이 그의 주인인 황자이기 때문이었다.
“이만 들어가 주무시는 것이 좋지 않을는지요. 이곳 뒤꼍은 황제궁 정원사들이 직접 와서 손을 보았으니 재차 확인하시지 않아도······.”
중년인이 근심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밤 12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황자는 본래도 일정이 적지 않았고, 최근에는 황태자 책봉식과 예서 왕자의 유폐 건으로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어제의 ‘만찬’은 분명 잘 풀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위려한 낯이 줄곧 어두웠다.
다비드는 황자를 보며 조심스레 질문을 얹었다.
“발코니에 문제가 있습니까? 하인을 부를까요?”
황자는 스트로다 궁의 왼쪽 끝 발코니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정문에서 보면 오른쪽 끝이겠지만 뒷문에서 보면 왼쪽이었다.
그곳엔 어둠을 밝히는 마법 조명 외에는 아무것도, 누구도 없었다.
그의 주황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왕자가 신관 파트너 자리를 거래 조건으로 삼으리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는 볼모였고, 제국에서는 거리의 평민보다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황족 시해 미수 혐의를 받는 자를 구하려면 당연히 본인의 능력까지 패로 내걸어야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자신에게도 잘된 일이었다.
언제든 왕자의 에테르를 받아낼 명분이 생겼으므로.
그런데 불쾌했다. 왕자가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니 속에서 화화(花火)가 일었다.
유치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암호를 보내고야 말았다. 어째서?
“······황궁 신전은 내일 새벽부터 다시 문을 열 예정입니다.”
다비드가 화제를 돌렸다.
그는 황자의 부답에 익숙했으며 맡은 일에 충실한 시종이었다.
그의 말에 황자가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사내의 눈이 이번에는 길 건너편, 어둠이 내린 신전에 가닿았다.
“왕세녀 전하와 교황청의 추기경께서 신전을 찾으실 듯해 내부 정돈을 끝냈습니다.”
“잘됐군.”
“예. 고해소의 장식 줄을 비롯해 그간 보수가 미진했던 부분도 모두 손봤다고,”
“신전은 그대로 닫아 두도록.”
그가 짤막하게 명했다. 다비드는 깜짝 놀랐다.
“전하. 그리 하시면 두 분 손님께서 이용할 신전이,”
“황도의 중앙 신전을 방문하면 되겠지.”
황자의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졌다.
단호한 의사 표시였기에 다비드는 그를 더 설득하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드리크는 이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저곳은 황궁의 고해 신관인 왕자를 위해 개방하는 공간이었다.
더구나 수리를 거쳤다면, 다른 성직자가 와서 먼저 편의를 누리는 것은······.
순간, 부싯돌이 번쩍이는 듯한 깨달음이 그를 스쳤다.
“······.”
이번 ‘거래’에서 그는 요한 헤인스보다 뒤섰다.
자신은 1순위가 아니었다. 태어나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왕자는 헤인스 부자를 살리기 위해 감히 황자와의 관계를 이용했다.
또렷한 거슬림이 목뒤를 타고 올랐다.
하지만, 그를 알고도 내버려둔 것은 자신이 아닌가?
“전하?”
다비드가 그를 상념의 늪에서 건져 올렸다.
세드리크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곧장 마차로 향했다. 중년인의 말이 옳았다.
그만 잠을 청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
크리스텔과 황자를 다시 만나지 못한 채로 결전의 날이 밝았다.
아, 결전까진 아닌가. 일단 30초짜리 티저 정도?
“나 어때?”
“평소에도 아름다우신데 오늘은 나라가 기울 지경입니다, 왕자님.”
“아니······. 고맙다. 가족으로서 보기엔 어떤 것 같아? 피죽도 못 얻어먹고 지내는 사람처럼 보여?”
“아뇨! 엊그제부터 다시 잘 드셔서 혈색이 좋으세요.”
가나엘이 환하게 웃으며 내 예복 주름을 가다듬어 주었다. 다행이네.
창밖으로 엘리자베트 경과 대화 중인 뱅자맹이 보였다.
나를 황제궁까지 호위할 황실 마차 여러 대와 근위대원들도 시야에 들어왔다.
유폐 10일차, 드디어 첫 외출이었다.
그것도 무려 왕세녀 일행을 맞이하러 가는 길이었다. 수능 치던 날보다도 더 떨렸다.
그게 벌써 10년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무튼.
“형 다녀올게. 얌전히 놀고 있어.”
-낑
나는 레서판다들을 한 번씩 안아주고, 뚝심이와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숨이 탁 트였다. 수십 명의 일손이 여기저기를 총총 돌아다니고 있었다.
엘리자베트 경이 밝게 인사하며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엘리자베트 경. 며칠 전엔 신세를 졌습니다.”
“별말씀을요. 대장님께 잔소리만 조금 들었습니다.”
부근위대장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이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은 흥분과 혼란으로 어지러웠다.
누님과 전하 중에 무난한 건 ‘전하’겠지. 존댓말 베이스에 전하로 가자.
보는 눈이 많으니까 예를 차린다는 느낌이면 괜찮지 않겠냐.
근데 그 둘은 진짜 화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