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123)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123화(123/920)
#123 황태자가 되는 곳 100m 전 (3)
“으으······.”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푹신한 침대였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편의적인 전개는 펼쳐지지 않았다.
눈앞에 두 남녀의 얼굴이 보였다.
또랑또랑한 청회색 눈동자와 깊게 가라앉은 주황색 눈동자.
“어?”
놀라서 벌떡 일어나자마자,
-쿵!
크리스텔과 박치기를 했다!
“아윽!”
“아야······.”
크리스텔이 신음하며 이마를 문지르는 동안 나는 엄청난 쇼크에 빠져 나뒹굴었다.
와, 너무 아파. 머리 쪼개지는 것 같아. 진정한 의미의 대갈장군이다!
-끼잉!
-삐르르르!
내 옆에 누워 있던 데미와 뚝심이가 놀라 큰소리를 냈다.
녀석들은 곧장 내 이마에 앞발과 날개를 문질렀다.
어지간히 고통스러워 보인 모양이었다. 너희도 왔구나······.
“다시 기절시킬 셈인가?”
서서 나를 내려보고 있던 세드리크 황자가 크리스텔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그새 충격에서 회복한 우리의 주인공이 그를 쏘아보았다.
나는 뎅뎅 울리는 두개골을 바닥에 비비다가, 그녀의 푸른 재킷이 내 밑에 깔려 있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포털 때문에 기절한 나를 눕혀둔 모양이었다.
“정신 번쩍 나셨을걸요. 벌써 정찰을 다녀오신 겁니까?”
“안개 때문에 멀리 나갈 수 없어.”
두 사람이 아옹다옹했다.
나는 서서히 가라앉는 통증과, 가벼운 멀미 증세를 느끼며 상체를 세웠다.
황자의 말대로 주변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배경은 분명 숲인데 우리가 마지막으로 서 있던 곳과 나무의 종류며 높이가 완전히 달랐다.
그야말로 낯선 장소였다. 나는 데미와 뚝심이를 품에 안고 질문했다.
“저희, 포털로 이동한 겁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요한 경과 헤릿, 에바 공녀도 함께 왔어요. 셋은 길 반대편으로 정찰을 갔습니다.”
크리스텔이 또박또박 답했다. 여섯 명에 두 마리였다!
홀로 이동하게 된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포털이 그렇게 작을 리는 없었다.
나와 가까이 있던 이들은 죄다 옮겨진 듯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도대체 왜 포털이 그런 곳에······.”
“전쟁 시대의 유물이지.”
황자가 낮게 말했다. 사내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준 <암호로 풀어보는 전쟁 시대사>엔, 당시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했는지 등의 디테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짐작 가는 구석은 있었다.
엘리자베트 경과 뒤엠 후작이 황제궁 정원에서 나누던 이야기가 드문드문 떠올랐다.
포털, 군대, 지원.
“군수 물자나 병력 지원을 위해 만든 겁니까?”
“잘 아는군.”
그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포털이 번화지가 아니라 황도로 통하는 길목에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갔다.
그곳에 병력이 부족할 때 다른 길목에서 빠르게 도우러 올 수 있어야 했고, 또 다른 길목이 밀릴 때는 역으로 신속한 지원을 나갈 수 있어야 했겠지.
모든 어귀를 적으로부터 지켜야 했을 테니까.
“그런 식으로 제국 곳곳에 포털이 있었다면······. 대부분을 폐쇄한 건 평시에 쓸모가 없기 때문이군요.”
“혼란만 가중할 뿐이니까. 지금처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이가 절로 갈렸다.
하필이면 그곳에 다친 고라니가 있었고, 그래서 내가 마차에서 내렸고, 그런데 그게 마수의 꾀였고, 결국 황자가 마법을 썼는데, 그의 마나가 지표 밑 포털에 깃들었고, 그 포털이 멀쩡히 작동할 확률이 도대체 얼마나 되겠냐? 응?
나는 작가의 욕이 튀어나오는 것을 애써 억눌렀다.
원작에 몸을 맡기면 작가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거야 그렇다 치는데, 원작과 거리가 있는 행동을 해도 일이 터지는 건 좀 억울했다.
지난번 폴로 경기 때가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두 경우 모두 주인공들이 얽힌 걸 보면 작가가 관여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하······.”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일단 벌어진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작가를 비난한다고 해서 당장 황도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친 고라니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거 물어보실 줄 알았어요.”
내 물음에 크리스텔이 쌕 웃었다.
“다 나았더라고요. 여기 도착하자마자 깡충깡충 뛰어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엔 가족이 없는데 새끼인 녀석이 얼마나 버틸까 싶어 안타까웠다. 그때였다.
-휘이잉!
“전하, 깨어나셨군요.”
하늘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땅안개가 바람과 함께 물러나고, 품에 헤릿을 안은 요한 경이 에바와 사뿐히 내려앉았다.
소공녀가 상기된 얼굴로 드레스를 잡고 구둣발을 굴렀다.
그 모습을 보니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 나왔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네! 헤인스 경이 저를 붕 띄워줬습니다. 처음에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러는 게 짜증났는데, 해보니까 엄청 재밌었어요!”
잔뜩 바람을 맞은 곱슬머리가 라면처럼 뽀글거렸다.
보아하니 정찰은 요한 경만 하고 에바는 신나게 공중 산책을 즐긴 듯했다.
헤릿도 나를 보며 앙글거렸다. 내 시선에 요한 경이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방에 산이 있고 황도는 보이지 않아요. 가까운 마을은 안개와 바람이 심해 확인이 어렵고요.”
젠장.
“헉.”
에바가 금시초문이라는 듯 놀랐다.
크리스텔이 미간을 찌푸렸고, 황자는 좁은 길 한복판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대기해야겠군.”
“네. 무테 경이 마수를 해치우는 대로 황궁에 보고하겠죠.”
요한 경이 동의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제로 본 건 늑대 마수 한 마리뿐이었고 몇이나 더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엘리자베트 경은 8급 검사였다.
현장엔 기사를 포함한 근위대원도 스무 명이 넘었다.
상황 수습은 어렵지 않을 테니, 곧 황궁에서 마법사를 데려와 사태를 해결할 듯싶었다.
“그럼 서너 시간 정도 기다려 볼까요?”
내가 말했다. 황제에게 알리고 왕복하는 시간을 더하면 그쯤 걸릴 터였다.
황자를 제외한 모두가 머리를 끄덕하며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내 낯빛이 여전히 좋지 않았는지, 크리스텔이 손바닥만 한 물방울을 만들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나는 맑은 물을 꿀꺽꿀꺽 마시며 우뚝 선 황자를 올려다보았다.
두꺼운 안개조차 그의 주변에선 부유스름한 보정 효과로 전락했다.
그래, 사흘 뒤가 저 녀석 책봉식인데······. 아무렴 오늘 안엔 돌아갈 수 있겠지.
*
황제의 집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오렐리 부티에는 작게 한숨을 쉬고 커피를 머금었다.
엘리자베트는 뺨에 묻은 마수의 피를 소매로 쓱쓱 닦으며 멍때렸다.
황태자 책봉식 사흘 전에 이런 사건이 터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실, 세드리크와 예서 왕자님과 크리스텔 공녀가 한데 모이면 대체로 이랬다.
지난 보름 하고 며칠 동안 이상하게 조용했던 것뿐이었다.
“다시 말해 봐.”
프레데리크 리에스테르가 명령했다.
프랑수아 뒤엠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분홍색 눈동자가 비장하게 빛났다.
“제 숨결의 통치자이신 폐하, 그건 어렵겠습니다.”
“왜.”
“다시 말씀드리면 때리실 거잖, 맙소사!”
황제가 벌떡 일어나 검을 집었다. 프랑수아는 후다닥 창가로 몸을 날렸다.
그가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듯 한쪽 다리를 창밖에 걸친 채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황제궁 정원을 오가던 이들이 식겁하며 못 본 척했다.
“프레데리크, 검집으로만.”
오렐리가 나긋하게 말했다.
황제는 계약자의 조언을 받아들여 검집째로 충신을 겨누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억울합니다. 황자 전하께서 포털을 타신 건 제 탓이 아닙니다!”
“네 탓이라고 한 적 없어.”
체리색 눈이 신경질적으로 번뜩였다.
“그 망할 포털이 향하는 곳을 왜 모른다는 거지?”
“기록이 소실됐으니까요?”
-퍽!
결국 남자의 등짝에 검집이 날아갔다.
프랑수아가 허리를 새우처럼 휘며 아야, 아야! 하고 울었다.
“폐하, 제가 불사른 것도 아닌데 너무하십니다!”
“네 녀석이 포털 연구를 한다기에, 전쟁 시대의 포털 사료(史料)는 전부 넘겼다. 그런데 이제 와서 기록이 없다고?”
“셀린 선황께서 모두 태우셨습니다. 윽! 기록이 남아 있어봤자 유출 위험만 높아질 테니까요!”
황제가 동작을 뚝 멈췄다. 어느새 창밖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열심히 맞은 후작의 몸에서 먼지가 흩날렸다. 지존의 목소리가 서느렇게 낮아졌다.
“내 어머니 핑계를 대는 것이냐?”
“주신께 맹세코 사실입니다. 선황 폐하께선 전쟁 시대의 흔적을 끔찍이 싫어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료는 제가 받을 때부터 아주 적었습니다. 끽해야 포털 위치와 이름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지요.”
“······쯧.”
프레데리크는 혀를 차며 검집을 거두었다.
그러나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긴 한숨을 쉬다가 머리를 쓸어 넘기곤 했다.
프랑수아는 혹시 몰라 창가를 떠나지 않았다.
오렐리가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네. 프랑수아 네가 직접 가서 포털의 마법식을 분석하는 것.”
“······예. 지표 아래에 있는 포털이어도, 마나를 뿌리면 마법식 자체는 또렷하게 보일 겁니다. 보조할 마법사를 데려간다면 작업은 더욱 빠르겠지요.”
프랑수아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세팅하며 말했다.
그러자 엘리자베트가 주뼛주뼛 자수했다.
“폐하, 전하. 그것에 관해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편히 얘기하렴, 엘리자베트.”
추기경이 상냥하게 말했다. 소백작은 황제의 손에 들린 보검, ‘뒤랑달’을 흘끔거렸다.
“제 검기에 포털이 부서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지.”
그건 조금 전의 보고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엘리자베트는 숲에서 근위대를 이끌고 중급 마수 십여 마리를 상대했다.
8급 검사의 위용을 뽐내며 싸워준 그녀 덕에 사상자는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비록 전투 중 문제의 포털을 부수긴 했으나 살짝 금이 간 정도라면,
“땅이 아예 갈라졌는데요.”
“응?”
오렐리의 음성도 갈라졌다.
“포털이 있던 곳에······. 두 뼘 너비의 균열이 생겼습니다.”
“······.”
엘리자베트가 겨우 말을 맺었다. 쥐죽은 듯한 침묵이 집무실을 휩쓸었다.
황제는 어두운 눈빛으로 소백작을 응시했다. 청년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왔다.
그녀는 마법에 문외한이지만, 그 정도로 손상된 포털은 마나를 부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았다.
“검사가 힘을 쓰다 보면 그럴 수 있지.”
“예?”
“예?”
황제의 말에, 소백작과 후작이 동시에 고개를 반짝 들었다.
프랑수아의 낯에 드라마틱한 절망이 번졌다.
“폐하, 어째서 저만을 핍박하십니까? 이것은 가혹한 형태의 사랑입니까?”
“네가 가서 흙을 파라, 프랑수아.”
프레데리크가 턱짓하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뒤랑달은 자신의 손이 닿는 곳에 아무렇게나 세운 채였다.
후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황명은,”
“마법식 반응조차 없다면 어쩔 도리 있나? 병사들 데리고 가서 삽질 좀 하고, 지표 아래의 포털 마법식을 직접 그려서 분석하도록 해. 사르네즈와 블랑케르 공작가도 협조할 거다. 너라면 내 아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 있겠지.”
황제가 나른하게 말했다. 마지막 문장에 프랑수아의 얼굴이 눈부시게 밝아졌다.
“임께서 저를 믿고, 저를 원하신다면!”
우아한 몸짓으로 창틀에서 내려온 후작이 깊게 절을 올렸다.
그가 엘리자베트와 함께 물러가자, 황제는 실소하며 크라바트를 풀어 던졌다.
오렐리가 부드러이 달랬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애들은 괜찮을 거야.”
“녀석들이야 그렇겠지. 문제는 책봉식이야.”
마음과 달리 퉁명스러운 대꾸였다. 추기경이 짧게 웃었다.
*
서쪽으로 해가 지고 안개가 걷힐 때까지도, 우리를 찾으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내일이면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황제가 사방으로 군사를 풀 테니까.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데미가 키워준 감자를 황자의 단검으로 부지런히 캤다.
저녁 메뉴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후식으로 먹을 과일도 한곳에 잘 모아두었다.
물이 닿으면 빨리 상하니까, 일부만 씻고 나머지는 내일 아침에······.
-터엉!
나는 흠칫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죽은 멧돼지였다!
“아!”
내가 놀란 심장을 부여잡고 오만상을 쓰자, 황자가 불만스런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뭐, 미친놈아. 어쩌라고! 왜 돼지를 잡아와서 여기다 던져?
-끼이이, 끼이, 끼이
“데미?”
그랬더니 데미가 입을 벌리며 내 다리를 잡고 청승맞게 울었다. 당황스러웠다.
이건 녀석이 내게 칭찬을 바랄 때 하는 행동인데, 고맙고 예쁘다는 말은 조금 전에 잔뜩 해줬기 때문이었다.
에테르가 부족한가?
“나는! 자연인이다!”
그때, 크리스텔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를 외치며 상큼상큼 걸어왔다.
등에 자신의 키만 한 사슴을 들쳐 업은 채였다.
새끼 고라니는 놔줘도 어른 사슴에겐 자비가 없었다.
“야영 하루 더 했다간 숲 거덜나겠네······.”
내가 경악해서 중얼거렸다.
칼을 갈며 고기 해체할 준비를 하던 요한 경이 기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