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13)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13화(13/920)
#013 꼬마 손님 (3)
차이점은 이렇다.
쥘리에트 궁에 있는 내 방은 대학 캠퍼스의 중앙도서관과 비슷하다.
바깥에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나는 실내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점이, 그리고 뱅자맹과 가나엘을 비롯한 시종들이 종종 출입하면서 백색 소음을 내준다는 점이 그렇다.
반면 황궁 신전의 고해소는, 은서가 작년까지 다니던 프리미엄 독서실 같은 느낌이다.
좁고 어둑어둑하긴 하지만 의자가 편하고 파티션이 있다는 점.
소음이라곤 내 숨소리와 옷 스치는 소리밖에 없어서 잠이 엄청 온다는 점이 유사하다.
이놈의 꼬맹이, 왜 안 와. 오늘은 나가린가?
“‘에테르의 흐름을 조절하는 것은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까다롭다면 까다로운 행위이다. 가장 간단한 훈련법은 우선 서클의 크기를 자유자재로 바꾸어······.’ 역시 그건가.”
나는 졸음을 쫓기 위해 방에서 챙겨 온 교과서를 소리 내어 읽었다.
요즘은 내가 로판에 들어온 건지, 학원물에 들어온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최근에 추가된 고해 성사를 제외하면 내가 황궁에서 하는 일이라곤 자고, 밥 먹고, 공부하는 것밖에 없으니까.
물론 그게 싫다는 건 아니다.
팔자에도 없는 연애에 휩쓸렸다가 죽는 것보단 가늘고 조용히, 사치스러운 고시생처럼 사는 게 백 번 천 번 낫다.
그러다보면 집에도 갈 수 있을 거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널찍하게 펼쳐져 고해소 밖으로 잔뜩 삐져나간 내 서클이 보였다.
과외 첫날, 자신의 성소 크기를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하며 나를 압박하던 추기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번 해보자, 어차피 기다리면서 할 일도 없는데.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정신을 한데 모으고, 에테르 수도꼭지를 절반 정도 잠근다고 상상하며 힘을 뺐다.
-츠츠츠······
성소는 마치 의식이 있는 존재처럼, 살짝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다가 천천히 작아졌다.
광원의 직경이 줄어들자, 그늘 없이 환하던 고해소 안이 무드 등을 켜둔 듯 어스름해졌다.
“이게 되네.”
또 쉽게 성공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에테르를 다루는 일에 한해서라면, 내가 의도하는 모든 게 상당히 수월하게 진행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암살자 쌍둥이를 상대할 때도 그랬고, 고해 성사가 잘 풀릴 때도 그랬다.
다른 신관들도 이런가?
어제 뱅자맹에게 듣기로 황궁에 상주하는 신관은 나와 부티에 추기경뿐이라고 했다.
그나마도 정식으로 발령받은 건 나 하나고, 추기경은 황제의 파트너 자격으로 머무는 것이란다.
그럼 주변에 말을 섞어볼 신관이 추기경밖에 없는데, 그녀는 세기의 천재라고 불리던 사람이니 적절한 비교 대상이 아닌 것 같았다.
뭐, 잘하는 게 있으면 좋은 거지.
나쁘게 해석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나는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슬슬 출출해서, 책을 덮고 뱅자맹이 챙겨준 피크닉 바구니를 열었다.
이걸 보면 고해소에 살림 차렸냐고 욕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난 배고프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인간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여기다 넣어줬구나.”
어제 가나엘에게 부탁해놓은 해열제와 소화제가 바구니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동그란 약통에 든 건 정체를 알 수 없어서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찡한 약초 내음이 났다. 찰과상 같은 데 바르는 것 같았다.
먹을 것도 있고, 차도 두 병이나 있고, 약도 있는데.
몇 시간째 아이는커녕 개미 한 마리도 고해소를 방문하지 않는다.
조금 있으면 저녁 시간이니 30분만 더 기다려보고 오늘은 철수할까 싶었다.
“와, 진짜 미쳤다.”
그 와중에 한입 깨문 칼리송이 너무 맛있었다. 나는 거침없이 육성을 토해냈다.
과자에서 과일 맛이 나네. 멜론이 들어간 건가?
여기에 은행잎차를 한 모금 머금으니, 차의 쌉싸름한 끝 맛이 달달함을 잡아주는 게 아주 환상적이었다.
과자와 차에 번갈아 입을 대다, 문득 내 시선이 고해소 왼쪽에 달린 줄을 향했다.
그저께 소년이 던진 단도에 끄트머리가 잘린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군것질을 멈추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렸다.
칼에 뚫려 구석이 휑한 나무창이 보였다.
그제야 위화감이 들었다.
고해소가 이 지경인데 엘리자베트 경은 왜 별말이 없었던 거지?
설마 아직 모르는 건가?
하지만 왕자가 쓰러졌는데 주변 수색을 하지 않았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다.
건강 문제나 신력 문제로 실신했다 여겼을 수도 있겠으나, 혼자 있던 사람이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르는 상황 아닌가.
부근위대장인 엘리자베트 경이 근처를 둘러보지 않았을 리 없었다.
혹시 알면서도 묻은 건가?
나는 내 생각에 흠칫하며 몸을 굳혔다.
고해소에 칼자국이 있는 걸 모른 척 했다고? 왜?
-똑똑
기습적인 노크에 나는 다시 한 번 식겁했다.
옆 칸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내가 있는 자리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저기, 안에 계시는지요?”
낯선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어째야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문을 열었다.
문밖에 있던 여성은 삼십 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깜짝 놀라 듬직한 체구를 한껏 숙였다.
“아이고, 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저, 저는 설마, 정말 왕자님이 계실 거라고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가 안에 있는 줄은 어떻게······.”
들어올 때 분명 ‘신관이 부재중입니다’ 팻말을 걸어놨는데.
“그게, 바닥에 이것이 보여서······.”
나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조금 전 한껏 줄여놓았던 서클이, 어느새 훌쩍 커져 고해소 밖으로 넘치고 있었다.
칼리송이 너무 맛있어서 주체가 안 됐던 모양이다······.
“아, 그랬죠. 네. 고해 받고 있습니다. 식사는 하셨어요?”
나는 민망해져서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
“황공합니다, 왕자님. 저 같은 것에게 황실의 음식을 주시다니······. 여, 영성체로 여기겠습니다.”
영성체가 뭐더라.
신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성사가 있었는데, 아마 그와 관련된 이야기 같았다.
정확히 어떤 의미로 무엇을 언제 주는 건지는 기억이 흐릿했다.
이것도 제대로 공부해야겠네.
“차도 있습니다.”
나는 여인에게 칼리송을 서너 개 건네고, 가나엘이 챙겨준 조그만 잔에 은행잎차를 따랐다.
부서진 나무창 틈으로 잔을 내미니 그녀가 황급히 받아들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여, 영광입니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세상에나······.”
“편하게 드세요.”
어차피 혼자 먹으려고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
나는 여인이 천천히 과자를 깨무는 소리를 들으며 고해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찻물로 입을 적신 그녀가 운을 뗐다.
“흠흠, 마지막, 마지막 고해는 10년······. 아니, 12년 전인 것 같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저는 남편과 함께 황궁 뒷산의 산지기로 일하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의 은혜로 일이 고되지는 않지요. 가끔 위험한 산짐승이 보이면 잡아 없애고, 나무들 사이에 병이 돌지는 않나 살피고, 수상쩍은 것이 있으면 근위대원 나리들에게 보고도 하고, 그렇습니다.”
“황궁 뒷산이면, 쥘리에트 궁 뒤에 있는 산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네.”
나는 내 방 뒤편, 연무장 너머 보이는 산을 떠올렸다.
처음 봤을 때는 ‘여기 산 있어서 여름에 모기 많겠네.’ 정도의 생각만 했는데, 산지기까지 있는 곳인 줄은 몰랐다.
“그런데 얼마 전에 마수로 보이는 짐승들이 출몰해서, 저희 부부가 겁을 주고 내쫓은 적이 있었습니다.”
“마수가요?”
놀란 내 목소리가 일순 커졌다.
무슨 북한산 인근도 아니고, 이제 야생동물 출현까지 걱정해야 돼?
“아주 드문 일은 아닙니다. 큰 산맥에서 뻗어 나온 작은 산이다 보니, 어쩌다 그쪽 능선을 타고 오는 놈들이 있지요. 황궁 주변으로는 강한 결계가 쳐져 있어서 위험한 놈들은 못 오고, 결계에 걸리지도 않는 토끼만 한 놈들이 잊을 만하면 보이는 정돕니다.”
“허어······.”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남의 연애사에 끼어 죽는 것도 억울하지만, 산책하다가 멧돼지에 물려 죽는 건 더 날벼락 같았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 쪼끄만 놈들이 도망갔다가도 다시 나타나고, 또 나타나길 반복했습니다. 다른 짐승들한테 먹히지도 않았는지, 고것들이 계속 알짱거리는 것이 영 신경 쓰여서······. 그래서 며칠 전에는 불을 피워 쫓아냈지요.”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마수들은 다양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물과 불을 무서워하니 그 점을 적절히 이용하면 쉽게 사냥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뒤로는 보이지 않기에 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오늘, 황궁에서 목수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혹시 그놈들이 신수가 아니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수(神獸)요?”
마수 관련 서적에 덤으로 딸려오듯 쓰여 있었던 구절이 떠올랐다.
‘예로부터 신수가 나타나면, 신력을 지닌 자가 이끌어 신물에 이르게 하였다.’ 대충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신수의 모습을 참고할 만한 삽화도 없어, 나는 그게 그저 구전설화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 신국 왕자님이 오신 뒤로 쥘리에트 궁 시종들이 매일 좋은 꿈만 꾼다는데, 신수라면 그런 기운을 얻어가기 위해 걸음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요.”
“하하······.”
그놈의 꿈 타령이 1절에서 그치지 않고 황궁 구석구석으로 퍼졌다는 소식에 두 뺨이 화끈거렸다.
시종들이 어리다고 아부하는 걸 내버려둬선 안 되는 거였나 보다.
조기 교육이 이래서 중요한데.
“저, 저도 왕자님이 오신 뒤로는 꿈도 꾸지 않고 푹 자거나, 길몽을 꾸곤 합니다. 20년을 산지기로 살았지만 그렇게 생긴 마수는 처음 보기도 했고요. 사람을 유독 따르는 것이, 과연 신수인가 싶기도 해서······.”
여인, 아녜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래서 용서를 받고자 왔습니다. 신수를 괴롭힌 죄는 중하다고, 막심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남편은 아닐 거라고 했지만요.”
막심? 내 팻말 만들어준 목수 이름 아닌가?
[그, 음. 일단 작은 동물들을 해치지 않고 내보낸 점은 잘하셨습니다. 주신께서도 어여쁘게 보셨을 겁니다.]“가, 감사합니다, 왕자님.”
[만약 신수라고 해도, 산지기 내외분께서 달리 하실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신수는 신력을 지닌 자가 아니면 길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니······.]갑자기 말을 지어내려니 레퍼토리가 딸렸다.
서브 남주 때려치우고 전문직으로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용서해드리겠습니다. 황궁의 안위를 위해 하신 일임을 알고 있으니까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반드시 황실 근위대에 가장 먼저 알려주세요. 부근위대장인 엘리자베트 경에게 제 말을 전하셔도 좋습니다. 이것이 제 보속입니다.]내 말에 아녜스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환한 빛 속에서, 그녀가 조금 우는 것 같기도 했다.
*
고해소에서 4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초면에 칼을 던지고 내 에테르까지 훔쳐간 꼬맹이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오늘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은 아녜스였다.
“마수에 관한 책은 많은데.”
그래서 지금의 나는 잠옷 차림으로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뱅자맹, 가나엘과 저녁을 먹고, 씻고 나와 새로운 책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꼬마와는 장기전으로 갈 것 같으니, 쉴 때는 평소처럼 내 공부에 집중하는 게 나았다.
“신수에 관한 책은 거의 없네.”
진짜 전설 속의 동물 같은 건가.
차라리 그쪽이라면 아녜스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팔락, 팔락
커튼이 펄렁이는 소리가 났다. 바람에 책장이 사락사락 넘어갔다.
매일 저녁이면 가나엘이 와서 문단속을 하곤 했는데, 오늘은 웬일로 발코니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깜빡했나 보다.”
나는 직접 발코니 쪽으로 움직여 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그래도 춥진 않았다.
한국은 봄에도 제법 쌀쌀한 날이 많았지만, 이곳은 3월부터 쭉 따뜻하기만 했다.
“그대의 시종은 할 일을 했어.”
······뭐?
“그만한 에테르를 지녔으면서, 둔하기 짝이 없군.”
낭랑한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몸이 삐걱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시야에 작은 몸이 가득 들어찼다.
빛을 받아도 먹물처럼 검은 머리와, 빛으로 더욱 선명해진 자황색 눈동자.
그 망할 꼬맹이가, 내 방 한복판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