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136)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136화(136/920)
#136 후작과 기사의 여행 준비물 (3)
입 벌려, 데미. 과일 들어간다.
-찹찹찹······
곱게 깎은 배를 신수님 앞에 대령했다.
녀석은 그제야 화가 풀린 얼굴로 내 손목을 잡고 냠냠거렸다.
마차가 부드럽게 흔들렸고, 뱅자맹과 가나엘은 나지막이 크리스텔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레서판다를 보며 차분히 상황을 복기했다.
괜찮아, 정예서. 공식 커플이 왜 공식이겠냐. 어떻게든 결말엔 이어지니까 공식이지.
일단 내가 처음 빙의하던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1. 크리스텔은 사르네즈 공작가의 외동이었다.
2. 따라서 공작의 후계자는 크리스텔이 되어야 했다.
3. 그러나 공작은 황제에 대한 충심으로, 자신의 딸을 세드리크 태자와 혼인시키기로 했다. 그에게 ‘창해의 축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4. 짠! 크리스텔이 창해의 축복을 흡수해버렸다. 약혼은 무산됐다.
5. 황실과의 혼담이 물 건너갔으니, 이제 공작은 딸이 원칙대로 소공작이 되기를 원한다.
“······.”
나는 물수건으로 데미의 입가와 수염을 닦아주며 심각해졌다.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사르네즈 경, 만약 경이 태자님과 약혼을 했다면 공작가의 후계는 누가 잇게 되어 있었습니까?”
“가장 가까운 조카를 입양할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크리스텔이 냉커피를 들이켜다 말고 말했다.
가나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에스테르에서는 모두 그렇게 합니다. 드물지만 외동이 가문을 잇지 않고 다른 집안의 사람이 돼버리는 경우에요. 신국도 그렇지 않습니까, 왕자님?”
나는 모호하게 입꼬리만 끌어올렸다.
신국의 풍습에 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어 확실하지 않았다.
소년을 보니 바깥에서 말을 달리고 있을 부근위대장이 떠올랐다.
가나엘은 칼라마르 자작가의 첫째지만, 동생에게 소가주의 지위를 양보하고 엘리자베트 경과 약혼했다.
크리스텔에게 동생이 있었다면 상황이 지금처럼 복잡하지는 않았을 텐데······.
“경은 소공작이 되는 게 싫으십니까?”
“소공작은 괜찮은데 결혼이 싫습니다.”
내 질문에 크리스텔이 딱 잘라 대답했다. 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원작의 흐름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크리스텔은 소공작이 돼서는 곤란했고 성혼엔 긍정적이어야 했다.
황태자비는 출신 가문이 아닌 황실의 사람이니까. 으음.
“어머니께서는 제가 기억이 돌아올 때쯤 생각해 보는 게 어떠냐고 하시지만, 아버지께선 뜻이 확고하십니다. 지금쯤 좋은 신랑감을 데려와야 가문의 안정을 이룰 수 있대요. 무슨 화첩 같은 걸 펼쳐두고, 괜찮은 남의 집 둘째가 있나 살펴보시고 있어요.”
주인공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고 태자와의 약혼을 준비할 때부터 사르네즈 공작의 성향은 뚜렷했다.
딸이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기억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무려 국혼을 추진한 것이다.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마인드는 전형적인 대귀족에 가까운 듯했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이었다.
“시몽 드 사르네즈 공작이 18세에 혼인했으니, 열아홉인 따님의 미래를 걱정하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뱅자맹의 해설도 내 추측을 뒷받침했다.
나는 심란해 보이는 크리스텔의 옆모습을 살폈다.
그냥 눈 딱 감고 말할까. 떠보기만 하는 건 괜찮을 듯싶은데.
“그, 태자님은 어떠십니까?”
“태자 전하가 왜요?”
내가 조심스레 묻자 크리스텔이 눈을 깜빡였다.
뱅자맹과 가나엘도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분위기 왜 이러지?
“잘생기시지 않았나요? 키 크고, 목소리도 좋고.”
“그렇긴 합니다.”
“······그게 다입니까?”
“뭐가 더 필요한가요?”
크리스텔은 무심히 대꾸하더니, 전병처럼 얇고 노릇하게 구운 튈을 와작와작 깨물어 먹기 시작했다.
부서진 ‘사랑의 우물’ 과자는 진작 해치운 모양이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도움을 청하듯 측근 두 사람을 돌아보았지만, 뱅자맹은 눈을 피했고 가나엘만이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젠장.
*
크리스텔은 우리에게 속을 털어놓은 것만으로 한결 홀가분한 기색이었다.
그녀의 고민을 내가 나누게 되었다는 게 치명적인 문제였지만, 그건 나만 아는 사실이었다.
고로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별일은 없었다.
우리는 ‘르 시프르’보다 작지만 직원들이 훨씬 자유로워 보이는 여관에 짐을 풀었다.
다 같이 풍족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나는 식당을 나서는 공작 부부에게 사례했다.
“동행해주셔서 거듭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예서 왕자님. 제 자식이 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이 정도는 언제든 기쁜 마음으로 도와드릴 수 있지요.”
시몽 드 사르네즈 공작이 정중하게 응수했다.
그는 삼십 대 후반이나 사십 대 초반쯤으로 보였는데, 또래인 프랑수아 뒤엠 후작과 달리 근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인상이 나쁘진 않았으나 만날 때마다 대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포털을 이용하면 반나절 안에 자유 도시 ‘아스’로 갈 수 있는데도, 공작은 선뜻 황명을 받들어 나와 함께 먼 길을 나서주었다.
경호 받는 내 입장에선 무조건 고마운 일이었다.
“그럼, 편히 쉬시고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공작께서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내가 답했다. 공작은 그린 듯한 태도로 절을 올리고 물러갔다.
곁에 서 있던 이자벨 공작 부인은 남편에게 눈짓을 하더니 자리에 남았다.
크리스텔과 엘리자베트 경, 뱅자맹, 가나엘이 우리의 눈치를 살피고는 먼저 계단을 올랐다.
데미와 뚝심이가 발치에서 콩콩거렸다.
“공작 부인께서도 편안한 밤 보내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네, 왕자님. 저······. 지난번에는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부인이 검은 눈동자를 촉촉하게 빛내며 말했다.
말뜻을 이해하는 데는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마 봄 무도회에서 내가 그녀의 고해를 들어준 일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작게 미소했다.
“신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당시엔 튀려고 했지만, 아무튼 그런 것으로 하자.
“아닙니다. 제 불경을 용서하시고 따뜻한 조언을 해주셔서······. 남편과 대화를 나누며 어려움을 잘 풀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자벨은 숄을 고쳐 매며 웃었다. 그때보다 훨씬 낯빛이 좋아 보여 다행이었다.
나는 이대로 그녀를 보내주려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나서 입을 열었다.
크리스텔은 그나마 어머니가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고 했다.
“부인, 따님으로부터 혼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 그 아이가 결국 왕자님께 털어놓았군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습니다.”
그녀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침착하게 단어를 골랐다.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도 최대한 낮췄다.
“저는 사르네즈 경의 벗으로서······. 그토록 중요한 일은 당사자가 직접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머.”
“물론 두 분의 생각은 다르시겠죠. 집안의 대사(大事)에 무례하게 말을 얹어 죄송합니다. 다만 친구의 발언권이 부족한 것 같아 걱정이 됐습니다.”
“아뇨, 맞는 말씀이에요. 저는 조금 놀라서······.”
이자벨이 상기된 낯으로 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팔을 매만지며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왕자님께서는 제 딸의 가까운 교우이시지요.”
가깝다고······. 할 순 있을 것 같았다.
교우인 건 맞고 이제는 공식적인 신관 파트너이기도 하니까.
“그렇습니다.”
“크리스텔은 왕자님께 비밀이나 고민도 쉽게 고백하고요. 딸아이가 왕자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저도 대강 알고 있답니다.”
그녀가 속삭였다. 그야 그럴 법했다.
크리스텔이 새로운 부모님을 어색하게 여기기는 해도, 언니 같은 어머니에게는 썩 약해 보였으니까.
실제로 나를 처음 만난 계기도 부인의 고해 성사 요청을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동안 모녀 사이에 꾸준한 소통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침 왕자님께서는 금일 후작위도 받으셨지요. 제국의 귀족이 되신 것을 감축 드립니다.”
“예? 예, 고맙습니다.”
갑자기 화제가 튀었다.
크리스텔과 나의 관계를 말하다가 왜 난데없이 서작 이야기가 나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어 이자벨은 나를 보며 몹시 흐뭇한 눈빛을 했다.
데자뷔가 느껴져 기억을 더듬어보니, 부티에 추기경도 종종 나를 향해 이런 표정을 지었던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기특한 행동을 하고 다녔나?
“시몽에게는 제가 잘 말해보겠습니다.”
대박. 내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잘됐네요. 따님이 기뻐할 겁니다.”
“네, 왕자님이라면 분명히 그렇겠지요.”
부인은 그렇게 말한 뒤 고아히 예를 차렸다.
마지막 문장이 묘하게 들렸지만, 데미가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호시탐탐 노리는 것 같아 물을 정신이 없었다.
나는 마주 인사하고 바닥을 뒹구는 신수와 굴뚝새를 재빨리 수습했다.
-삐르르르!
뚝심이가 유쾌하게 울었다. 그래, 작가도 생각이 있는 모양이야.
*
요한 헤인스가 단정히 묶어 내린 백발을 황제의 앞에 숙였다.
성기사의 정보는 그녀가 신국에 심어둔 어느 세작보다도 빨랐다.
프레데리크는 턱을 받치고 앉아 한 손으로 팔걸이 끝을 두드렸다.
그 밖의 소음은 집무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크리스타너 국왕이 이성을 되찾았다고.”
“예. 그간 광증이 찾아오는 주기와 물러가는 주기가 모두 일정치 않았습니다. 특히 이번 병세가 유독 길었고 증상도 심했죠. 왕세녀와 2왕녀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힘겨워한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요한이 답변했다. 제국과 신국의 관계를 고려하자면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비록 단교를 했다고는 하나 양국은 교황청을 통해 이따금 종교적으로 교류했다.
몰래 국경을 넘어오는 신국의 백성 또한 매년 존재했다.
그러므로 황제는 자신의 외교 상대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길 바랐고, 상식적인 반응을 내놓는 자이기를 원했다.
국왕 대리라는 이름 아래 무도한 짓을 벌이는 요물 따위와는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장성한 왕세녀가 있는데 어째서 국서가 대행 노릇을 한단 말인가?
“예서 왕자의 볼모 협상은 왕세녀의 돌발 행동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
“응.”
황제의 혼잣말에 오렐리가 답했다. 협상문에 서명을 한 자도 엘리서 왕세녀였다.
프레데리크는 국왕이 현 상황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애당초 정세를 알고 있기나 한지 의문이었다.
그녀는 왼편의 긴 소파에 홀로 앉은 아들을 보았다.
주황색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중간한 액수로는 녀석을 돌려보내지 않을 거다.”
“······.”
쯧. 황제가 혀를 찼다.
쓸데없는 근심을 덜어주고자 꺼낸 말이었으나 후계자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지는 듯했다.
이후의 논의는 아무래도 자신의 계약자와 따로 진행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모두 물러가라는 의미로 손짓했다.
세드리크가 두 어른에게 묵례하고 요한과 함께 집무실을 벗어났다.
달칵,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곧장 발길을 돌리던 태자를 붙잡은 것은 태사(太師)의 말이었다.
“다음 달 정무까지 미리 보시고 있다 들었는데요, 전하.”
“······로메로에도 정보원이 있나?”
그가 매서운 눈길로 스승을 쏘아보았다. 요한은 동요하지 않았다.
“정보원이랄 것도 없어요. 로메로 궁 시종들은 쥘리에트 궁 시종들과 가깝게 지내고, 쥘리에트 일손들은 저와 친하거든요.”
다비드가 배후에서 들릴 듯 말 듯 탄식했다.
세드리크는 속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불꽃을 억눌렀다.
심장 가까운 곳에 매달린 성석이 달래듯 고요한 온기를 뿜어냈다.
아직 한 번도 흡수하지 않은 금빛 에테르가 그의 제복 아래서 찬란했다.
그러니 버틸 만했다.
“요즘 수업에 오지 않으셔서 사르네즈 경이 서운해 했어요.”
“본론을 말해.”
“친구 분들과 함께하고 싶어서 산더미 같은 일을 일찌감치 끝내놓고, 막상 가보지는 않으시는 건가요?”
그가 눈꼬리를 휘었다. 세드리크의 중저음이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는 경은 왜 황궁에 있지?”
“저는 폐하의 기사니까요.”
“헛소리.”
“네. 주군의 명으로 이곳에 남았어요.”
민트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추기경은 그의 앞에서 가면을 쓰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세드리크는 그에게서 배움을 얻는 데 만족했고 왕자가 선생에게 마음을 쓰는 연유도 대충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다.
태자가 대화를 이어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몸을 돌릴 무렵, 바람 같은 음성이 복도를 울렸다.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실 거예요.”
“······.”
“무테 경은 기민한 검사죠. 전하의 심기를 빠르게 알아차리는 친우예요. 하지만 왕자 전하께서는 달라요.”
“내게 이런 사담을 하는 이유는?”
세드리크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는 모친과 마찬가지로 선문답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태사는 슬슬 제자를 놓아주기로 했다. 오늘은 이 정도면 괜찮은 수업이 된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는 황제궁을 부술 생각이 없었다.
“저는 태자 전하의 선생이니까요. 필요하다면 정서적인 가르침도 기꺼이 드려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