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142)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142화(142/920)
#142 지상 최대의 쇼! (1)
얼굴만 봐도 배부르다.
두 남녀가 같은 지역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정감이 들었다.
이래서 영화든 소설이든, 주인공 세력이 흩어지는 걸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구나.
이래서 조연들이 주인공만 등장하면 ‘믿고 있었다고!’ 같은 대사를 하는 거야.
나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세드리크 태자를 향해 실실 쪼갰다.
그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옆자리의 엘리자베트 경을 돌아보았다.
“후작이 술을 마셨나?”
“그럴 리가······. 벗이 와서 좋아하시는 거야.”
친우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적이 놀랐던 그녀는, 다비드와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금세 차분해졌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황태자는 일을 끝내고 머리를 식힐 겸 이곳에 내려왔다고 했다.
나는 이유 모를 뿌듯함을 느끼며 해바라기 꽃차를 홀짝거렸다.
크리스텔이 눈에 밟힐 정도로 매력적인 주인공이긴 하지.
정은서도 크리스텔 관련 상품은 전부 사 모았다고.
-♬♩♪······
샹탈이 부른 음악가들이 이번엔 근사한 세레나데를 연주했다.
노을이 내리기 시작한 살롱에서, 나는 수첩을 펼쳐놓고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주연들이 한데 모이니 어쩐지 의욕이 솟았다.
∙ 세레니테 일정
– 영주성 사람들과 인사 ○
– 각종 서류 날인 ○
– 영지 시찰 (샹탈이 스케줄 짜줌)
– 성석 안정화 실험 △ (계속 실패 중)
– 아스 상단 만찬 참석 ○
– 아스 경매장 방문!
혼자라면 경매장에 갈 이유가 없었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크리스텔을 제대로 흔들어놓은 남자가 나타난 이상, 그리고 태자가 세레니테에 행차한 이상 경매 이벤트는 피할 수 없게 됐다.
아스 상단이 주최하는 가장 크고 대표적인 행사라고 하니 공작 가족은 당연히 참석할 터였다.
그렇다면 내 임무는 한 가지였다. 적당한 핑계를 대서 그곳에 태자를 데려가는 것.
“좋아.”
-끼응
-끼으
비장한 혼잣말에 레아와 페리가 재깍 반응했다.
태자의 마차에 동승한 녀석들은 평소보다 더욱 거만하게 애정을 요구했다.
나는 피식하며 무릎 위의 두 신수를 토닥여주었다.
데미는 소백작의 어깨에 빨래처럼 몸을 넌 채 졸고 있었고, 뚝심이는 황자의 가마에서 이따금 유쾌하게 울었다.
– 조안 드 아스 2차 면회
나는 마지막 줄에 추가된 항목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크리스텔은 저녁 식사 전에 돌아올 터였다.
태자가 온 것을 본 공작 부부가 급히 도시로 심부름꾼을 보냈으니 확실했다.
그럼 그전에 조안을 만나서 에밀과 상단에 관한 정보를 얻어야겠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양옆에 자리한 뱅자맹과 가나엘이 찻잔을 채우고 머랭 쿠키를 쌓아주었다.
기운이 팍팍 났다. 앞으로도 열심히 <정예서의 천생연분> 찍어야지.
*
크리스텔 드 사르네즈, 그러니까 함가인은 영업직을 맡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학 생활 4년 내내 역 근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지간한 인간 군상은 그곳에서 다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온갖 진상을 아주 무지갯빛으로, 종류별로 다양하게 목도했다는 뜻이다.
그 뒤 대충 칠팔 년을 회사에서 일했으니 웬만한 미친놈은 섭렵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이런 애는 또 처음 봤다. 어떤 의미론 참신했다.
“아홉 살에 상단 공부를 시작했다니, 대단하시네요.”
“누님이 그때부터 상속자가 되는 걸 거부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누님이야말로 대단한 분입니다. 겨우 열세 살에 자신의 진로를 정한 셈이니까요.”
에밀 드 아스가 미소와 함께 답했다.
보통인이라면 넋을 놓고도 남을 낯짝이었지만 크리스텔은 감흥이 없었다.
그녀가 느끼기엔 예서 왕자님이 웃는 게 월등히 파급력이 컸고, 잘생긴 수준만 놓고 판단해도 태자가 상단주를 압살했다.
후자는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 그랬다.
두 남자를 너무 자주 보는 탓에 평범한 미남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에밀은, 어리고 반반하긴 한데 성장 과정에서 뭐가 많이 결핍된 게 분명했다.
“친구 사귀기 힘들었겠어요. 바쁘셨을 것 같은데.”
크리스텔이 상단 후원의 산책로를 걸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여기도 예쁘긴 하나 친우들과 함께하는 쥘리에트 궁의 정원이 훨씬 좋았다.
그러고 보니 여태 왕자님과 황궁 온실 구경을 못 해봤다.
“책이 제 벗이었어요. 저에게 세상의 많은 것을 알려주었죠.”
이건 사람 친구가 없었단 뜻이지. 크리스텔이 눈끝을 휘었다.
“소설도 많이 읽어보셨나요? 저는 요즘 <이성과 감성과 신성>에 푹 빠져 있어요.”
“네, 소설이야말로 제 상상력을 넓혀주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덕분에 바다 너머의 세상을 꿈꾸며 무역에 호기심을 가질 수 있었고······.”
야, 적당히 해라. 무슨 면접 처음 보는 이십 대처럼 굴어.
그녀는 속으로만 꿍얼거렸다.
에밀은 이십 대가 맞고, 그것도 파릇파릇한 스물셋이지만 크리스텔은 그가 눈꼴사나웠다.
어릴 적에 공부만 하느라, 책으로 인간관계를 익히다 보니 이렇게 됐다?
물건 파는 두뇌는 좋은데 마음 사는 방법을 몰라서 그렇다?
웃기는 소리였다. 모든 모범생이 남을 모함하는 자로 크진 않았다.
그것도 본인의 배후에서 질 낮은 여우 짓이나 해가며 말이지.
치정 문학을 얼마나 읽고 자란 건지는 몰라도, 크리스텔에겐 에밀을 오냐오냐해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은 왕자님이 아니었다.
“그런데 평민의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대부분은 귀족의 연애나 정치에 관한 내용이잖아요? 방금 말씀하신 <명문가 특급 조연의 재도전>도 호족(豪族)이 나오는 모험담이고요.”
그래서 부드러운 말투로 떠봤다.
세레니테 영주성을 떠나기 전, 엘리자베트 경이 귀띔한 바가 기억에 남아서였다.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조안 드 아스의 진술에 의하면, 아스 상단주는 신분 상승이라는 목표를 갖고 있다더군요. 알아두십시오.’
크리스텔이 알기로, 제국의 평민이 신분 상승을 꾀하는 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어떤 분야에서든 혁혁한 공을 세워 작위를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시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안정적인 시기엔 몹시 드문 경우였다.
작위가 내려지리라는 보장도 없고, 못된 귀족이 평민의 업적을 가로채는 일 또한 비일비재할 터였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하나였다.
귀족과의 혼인.
“그렇긴 합니다. 저도 그 부분이 늘 아쉬웠는데 생각이 통했네요.”
에밀이 슬픈 낯으로 대답했다.
하이고, 이거 맞네. 크리스텔이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맞아요. 비범한 평민이 지위의 한계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중요한 일에서도 배척되는 건 옳지 않죠.”
그녀는 입바른 소리를 하며 에밀의 표정을 관찰했다.
최대한 사랑스럽고 무해해 보이도록, 눈은 크게 뜨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밀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떨리는 레몬색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기회를 포착한 인간 특유의 반색이 엿보였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크리스텔 경? 아니······. 제가 감히 귀하신 분의 성함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목소리도 좋으시니까 저야 기뻐요.”
크리스텔이 수줍게 말했다. 왕자님의 말이 맞았다.
이런 놈보다야 태자의 음성이 나았다.
걔는 몸도 그렇고 뭐든지 좀 과한 경향이 있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 이름도 편히 불러주십시오.”
“그럴게요, 에밀.”
선선히 답해주자 상단주가 화사하게 웃었다.
크리스텔은 마주 생글생글하며 계산을 마쳤다.
신분에 욕심 있는 놈인 건 분명하고, 결혼이 쉬우니까 그쪽 루트를 뚫을 모양이었다.
자신에게 살살 꼬리 치는 걸 보아하니 그중에서도 사르네즈 공작가를 목표로 잡은 듯했다.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긴 한데, 불가능은 아닌데······. 지랄 똥을 싸요.
“어머!”
에라! 크리스텔은 일부러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척했다.
일단 확인 절차는 필요했다.
“크리스텔 경!”
에밀이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받아 안았다. 순식간에 로맨틱한 자세가 됐다!
“아, 아가씨! 세상에.”
열 걸음 밖에서 따라오던 공작가의 시종이 허겁지겁 눈앞을 가리며 뒤돌아섰다.
크리스텔은 에밀의 가슴팍에 손을 짚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연갈색 뺨이 발그레 물든 게, 자신을 그렇고 그런 상대로 보는 건 확실했다.
크리스텔은 한껏 가련한 척하며 입을 가렸다. 네까짓 게 여우처럼 군다고 애써봤자.
“고맙습니다. 후작님께선 한 번도 이렇게 도와주시지 않았는데······.”
“말도 안 됩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분께 어찌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등신아, 성기사가 넘어질 일이 있겠냐.
왕자님이 고꾸라질 뻔한 걸 자신이 잡아준 적은 있었다.
“그분은······. 다른 의미의 손길을 건네는 분이시죠.”
크리스텔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에밀에게 속삭였다.
그가 왕자에게 ‘손찌검 당한 일’을 뜻하는 것이었다. 에밀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역시 그랬군요. 나쁜 소문들이 진실이었어요. 후작께서, 왕자님께서 크리스텔 경과 태자 전하를 노리개 삼아 양손에 쥐고 흔든다 들었습니다.”
“사실이에요.”
이딴 개소리는 도대체 누가 지껄이고 다니는 걸까.
크리스텔은 연례 기도회에서 봤던 주교 놈들의 면상을 진지하게 떠올렸다.
십중팔구 그날 왕자님을 시샘했던 새끼들이 틀림없었다.
앞에서 못 할 말이면 뒤에서도 닥치고 있을 것이지.
“맙소사. 크리스텔 경, 저는 진심으로······.”
에밀의 커다란 손바닥이 크리스텔의 뺨을 쓰다듬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하품을 두 번이나 참아냄으로써 촉촉한 시선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때였다.
“아가씨! 공작님께서 즉시 돌아오시라고, 아이쿠!”
멀리서 공작가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텔은 부끄러운 장면을 들킨 양 후다닥 에밀에게서 떨어졌다.
상단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그녀를 찾아온 심부름꾼이, 벌게진 낯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폭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크, 크리스텔 아가씨. 영주성에 태자 전하께서 와 계십니다. 공작님과 부인께서 돌아와 인사를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발.”
크리스텔이 가까스로 욕설의 앞 글자를 묵음 처리 했다.
여우 흉내 내는 족제비 한 마리를 상대하고 있었더니 진짜 불여우가 내려왔다.
그녀는 오만상을 쓰며 에밀을 올려다보았다. 놈에겐 무척 슬픈 안색으로 보일 터였다.
“발도 아프고, 저는 이만 가봐야겠어요. 아버지께서 늦는 걸 싫어하시거든요.”
“잠시만요, 크리스텔 경!”
에밀이 덥석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싸가지 봐라.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드라마틱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제발, 재회가 가능하다고 말씀해주십시오.”
“글쎄요. 보내주신 경매 초대권이 있지만, 부모님께선 불명확한 일에 금액을 부르는 걸 좋아하지 않으세요. 아마 불참하시겠죠. 원하시는 물건은 있는 듯싶었는데······.”
크리스텔이 유감스럽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기약은 못 드리겠어요. 그럼 안녕히.”
그러고는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걸음을 옮겼다.
에밀이 힘없이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돌아선 크리스텔은 형형한 눈빛으로 손목을 옷에 문질렀다.
그물은 제대로 던졌다. 저놈이 걸리는 일만 남았다.
이제 토끼 같은 왕자님과 친구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방에서 쉬셔도 되는데······.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나란히 걷고 있는 태자를 올려보며 물었다.
먼 길 왔으니 여독을 풀어도 될 텐데, 굳이 지하 감옥까지 동행하는 까닭을 모르겠다.
그는 나를 내려보고 눈썹을 한 번 까닥일 뿐 별말이 없었다.
설마 ‘같이 움직이자’는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한 건 아닐 테고.
그냥 성 내부를 둘러보고 싶은 듯했다. 집들이가 재밌긴 했다.
-카앙!
또 흠칫했다. 저번처럼 엘리자베트 경이 조안의 철창을 걷어찬 탓이었다.
놀란 레서판다 삼총사가 품속에서 불만을 토했다.
나는 소백작 대신 녀석들의 등을 쓸어주며 사과했다.
“기상. 조안 드 아스. 태자 전하와 후작님께서 면회를 원하신다.”
“아, 미리 말 좀 해······. 아침까지 예술 활동 하다 자서 피곤하다고.”
조안이 눈가를 가리고 있던 천을 걷어 올리며 툴툴거렸다.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를 안대로도 쓰는 모양이었다.
나는 의외의 단어에 목을 갸웃하며 그녀 앞에 섰다. 예술 활동?
“헉!”
“우와······.”
그리고 가나엘과 동시에 입을 떡 벌렸다.
그녀의 감옥 벽면에 커다란 인물화가 그려져 있었다.
하얀 분필로 그린 소년의 얼굴은 섬세하다 못해 살아있는 것 같았다.
나는 쉬지 않고 벽과 가나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진짜 똑같았다.
어마어마한 재능이었다. 가나엘의 볼이 당혹과 쑥스러움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앗, 저기. 왜······.”
-스릉!
엘리자베트 경이 즉각 레이피어를 뽑아들었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후작령은 기대 이상이군.”
태자가 태평하게 그런 소리나 했다. 기름 붓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