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155)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155화(155/920)
#155 짝꿍의 짝꿍 (4)
“어서 오십시오, 왕자님.”
로메로 궁에 들어서자 다비드가 우리를 맞았다.
크리스텔과 나는 곧장 황태자의 침실 곁방으로 안내 받았다.
엄밀히 따지면 크리스텔은 불청객이었지만 누구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따라온 건 그저 친구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고, 혹시 모를 태자의 에테르 폭주에 대비한 것임을 암묵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요한 경이 있다면 더 좋겠으나 그는 세드리크 태자의 ‘몸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사르네즈 경께서도, 마수 대토벌에서 태자 전하의 또 다른 모습을 보셨겠지요.”
다비드가 침실 문 앞에서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크리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중년인을 보며 급히 속닥였다.
“세이디로 변할 만큼 상태가 나쁘진 않았는데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혜검은요?”
“조식을 드시고, 화요일에 있을 성기사 서임식에 관한 최종 보고를 받으셨습니다. 이후 목욕을 위해 검을 풀어두신 동안······.”
그가 말끝을 흐렸다. 우리는 귀를 기울였다.
“이것은 저의 우견일 뿐이니 부디 흘려들어 주십시오. 전하께서는 아무래도······. 정식으로 성기사가 되는 것에 중압감을 느끼시는 듯합니다.”
그 순간, 몇 달 전의 기억이 머릿속에 전구처럼 탁 켜졌다.
마수 대토벌 우승 축하연에서 들었던 황제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아들을 보며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네가 성기사 서임에 관심이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힘을 바르게 쓰는 방법마저 회피할 생각은 마라.’
뒤늦은 깨달음이 번졌다. 태자는 성기사가 되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크리스텔의 낯이 딱딱히 굳었다. 시종은 침통하게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지니신 힘은 분명 위대하고 성스럽지요. 허나 당신께서는 오랫동안 그리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
그는 갓난아기 때부터 에테르 고갈에 시달렸고, 자칫 폭주를 일으키면 목에 구속구를 찬 채 독방에 갇혀야만 했다.
그런 유년 시절을 거쳤으니 자신의 능력을 좋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태자는 말수가 극도로 적었고 자신의 이야기는 더더욱 하지 않았다.
타고난 성격을 나무랄 수는 없어 그저 안타까웠다. 그가 스스로를 그런 식으로 몰아세우는 건 아무도 원치 않았다.
나는 발코니로 눈길을 던졌다.
큼직한 유리문과 테이블까지 확인한 뒤에야, 이곳이 내가 생일 선물을 놔둔 공간임을 알았다.
다비드의 해설이 이어졌다.
“게다가 8월부터 줄곧 한 달 치 정무를 몰아서 보고 계십니다. 수면을 보충하셔야 한다고 여러 번 간언 드렸으나······. 듣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친구분들과 함께할 시간을 버시기 위함이겠지요.”
내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크리스텔도 당황했는지 ‘허’ 하고 헛숨을 뱉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태자 책봉식 후로 계속 무리하고 계셨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왕자님.”
“폐하와 오렐리 전하께선 이 사실을 아시고요?”
“참고 계시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왕자님께서 로메로에 오신 것도 지금쯤 보고가 올라갔을 겁니다.”
시종이 작게 말했다. 우리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고개를 기울였다.
“태자 전하께서는 어릴 때부터 고집이 남다르셨습니다. 달리다 넘어져도 홀로 일어나는 성정이셨고, 당신이 먼저 도움을 청하기 전엔 누구의 손길도 거부하셨지요. 하여 웃전에서는······. 두 번까지는 보고도 넘기시게 되었습니다.”
“힘들어하는 것 같아도 두 번까진 참고, 세 번째에 나서신다는 건가요?”
“예.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사실입니다.”
다비드가 크리스텔에게 한숨 섞인 답변을 내놓았다.
아이가 원치 않는다면, 더구나 태자 정도의 성미라면 저항을 꺾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어른들이 몇 걸음 물러나서 타협한 결과가 두 차례의 인내라는 말이었다.
나는 심호흡과 함께 마른세수를 했다. 꼬마 황자는 진짜로 바보였다.
어린애가 어린애처럼 구는 게 뭐가 나쁘다고. 권리이자 의무인데.
당연한 거란 말이다.
“······들어가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다비드가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덧붙였다.
달칵, 문이 열렸다.
*
나와 크리스텔은 한동안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섰다.
넓다 못해 광활한 태자의 침실은 대낮인데도 해름처럼 어두웠다.
군데군데 켜진 촛불이 없었다면 발을 헛디뎠을 게 분명했다.
검은 대리석 바닥, 새카만 벽지, 먹색의 캐노피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곳곳이 금으로 장식되어 있긴 했고 가구들도 무척 화려했지만, 방의 색감을 최대한 빼고자 노력한 것 같았다.
우리는 발소리를 죽여 침대로 향했다.
자연히 속도가 느려지고 서로의 눈치를 보게 됐다.
침대 휘장을 걷을 즈음엔 ‘사르륵’ 하고 천이 스치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이마에 물수건을 얹은, 익숙한 낯의 꼬맹이가 보였다. 까만 머리카락과 하얀 뺨.
“자네요.”
크리스텔이 소곤거렸다. 협탁에 놓인 것은 우아한 물병과 유리잔이 전부였다.
의자도 하나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다비드가 앉아 있었을 자리를 그녀에게 양보하고, 나는 어색하게 침상에 다리를 걸쳤다.
행여 아이가 깰까 봐 무게를 많이 싣지는 못했다.
-사아아아······
그리고 아주 느리게, 밝기와 크기를 줄인 성소를 개방했다.
마음속으로는 실낱처럼 가느다란 물줄기가 꼬마에게 흘러가는 장면을 상상했다.
침대 주위가 어스레한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소년의 콧등이 움찔했다. 이어,
“윽.”
내 허리가 꺾였다. 일순 에테르가 쑥 빠져 나가며 현기증이 밀려온 탓이었다.
놀란 크리스텔이 잽싸게 팔을 잡아 주었다. 우리는 동시에 꼬맹이의 안색을 살폈다.
“······.”
감긴 눈꺼풀은 그대로였다.
아이는 들릴 듯 말 듯 신음하더니 이내 고른 숨과 함께 안정을 되찾았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보호자 손에서 딸랑이 빼앗는 아기도 아니고, 에테르를 아주 확 잡아채던데.
본능적인 반응이었는지 이제는 또 얌전했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생각과 말이 한꺼번에 흘러나왔다.
“어쩌면······. 알렉상드르 국서 전하와 관련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공이 나를 묵묵히 들여다보았다. 내가 조심스레 말꼬리를 붙였다.
“제 추측이지만, 태자님은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큰 상처를 받으신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러고는 입을 닫았다. 나는 당사자나 가족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는 크리스텔에게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로메로 궁 지하에 있는 어둠의 방 앞에서, 부티에 추기경이 들려준 이야기가 귓가를 맴돌았다.
‘이곳을 쓰지 않은 지 12년이 됐어.’
그날이 태자의 생일 전이었으니, 스물넷을 기준으로 하면 열두 살 때부터 밀실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이 됐다.
건강하고 젊었던 알렉상드르 국서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승하 역시 태자가 열두 살 때의 일이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넘기기에는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끝으로 나는 방주 안에서 만났던 흑발의 대마법사를 떠올렸다.
물론 본인은 아니었지만, ‘니키’는 국서에 관해 아는 바가 있었다.
‘그는 아들을 위해······.’
슬프게 웃던 옥면이 생생했다. 이후로는 상황이 긴박해져 끝까지 설명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가 남긴 짧은 말로 하나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알렉상드르 리에스테르는 아들을 낫게 하고자 목숨을 바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힘이 무서워진 거겠죠.”
내가 한참 만에 속삭였다. 사실이 아닐 공산도 컸다.
태자는 단지 피로와 부담감 때문에 컨디션 난조를 겪는 것이고, 평생을 지고 살아온 마음의 상흔 같은 것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정말 다행일 텐데.
“괜찮아.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힘이야. 형이 도울게.”
나는 꼬맹이의 목덜미에 손을 갖다 대며 소곤소곤했다.
아직 가벼운 열이 있지만, 지금 같은 속도라면 곧 떨어질 터였다.
그새 식은땀이 멎어 있었다.
“신수들이 네 불꽃을 엄청 좋아해. 티테는 물 속성이라 피할 것 같긴 한데······.”
말이 꼬였다. 이런 소리를 하려던 게 아니었다.
황실 어른들이 한 번씩 해주셨을 법한 위로 말고, 친구 사이에 할 수 있는 괜찮은 격려를 꺼내고 싶었다.
그런데 왜인지 생각이 빨리빨리 돌아가질 않았다. 약간 졸린 것 같기도 했다.
무거워지는 머리를 들어 크리스텔을 돌아보니, 그녀가 당혹한 얼굴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힘드십니까?”
“아뇨, 이불이 푹신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낮잠은 별로 없는데······.”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핑, 순간적으로 어지러운 감각이 뇌를 휘저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머리께에서 이불이 부스럭거렸다.
‘왕자님!’ 크리스텔의 외침이 멀어졌다.
나는 버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잠에 빠져 들었다.
*
“이런 짓은 하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크리스텔이 어린 세드리크를 노려보며 말했다.
성소가 사라진 침대맡을 밝힌 것은 금색의 촛대뿐이었다.
의자를 박찬 그녀는 한 팔로 왕자의 등을 감싼 채, 한껏 방어적인 자세로 태자와 대치하고 있었다.
소년은 이불에 흐트러진 금발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잠드는 형태로 의식을 잃긴 했지만, 어쨌든 그의 신관은 기절했다.
꿈결에 너무 많은 에테르를 흡수한 모양이었다.
작은 체구에서 금빛 입자들이 빠르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대들이 왜 여기에 있지?”
“다비드 님이 불렀습니다. 왕자님은 전하의 파트너이시니까요. 저는 왕자님의 파트너고요.”
또박또박한 대답이었다.
그녀는 불경하게 태자를 흘기더니, 머리 숙여 왕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이상 증세는 없었다. 크리스텔이 꿍얼거렸다.
“왕자님은 에테르 주머니가 아니라 사람이에요. 이런 식으로 빨대를 꽂으시면 곤란합니다.”
“······.”
“같은 성기사로서 심정은 이해합니다. 자꾸 받고 싶고, 멈추기 힘든 거요. 그래도 동등한 짝이 되었는데 자제하려는 노력을 해야······.”
그녀는 시선을 들다가 말을 뚝 멈췄다. 벽안이 휘둥그레 커졌다.
“혹시 지금 자라고 계십니까?”
“······.”
소년은, 여전히 소년이긴 하지만 아까처럼 작지 않았다.
세드리크는 이제 열셋이나 열넷 정도로 보였다.
그의 몸뚱어리에서 에테르 구슬들이 비눗방울처럼 솟아났다.
크리스텔은 충격과 경악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태자가 대번에 불쾌한 얼굴을 했다.
“구경났나?”
“네. 아뇨?”
그녀가 재깍 번복했다. 꼬마는 심지어 목소리도 성장하고 있었다.
주황색 눈동자가 분하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눈빛이 왕자에게 닿았다.
“내가 바란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음성은 소년과 청년의 중간쯤이었다.
크리스텔은 그의 말뜻을 명확히 이해했다.
태자는 불의 힘과 멋대로 줄어드는 신체 중 무엇도 소망한 적이 없었다.
모든 게 소위 ‘주신의 뜻’이었으니 감히 거역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녀는 덤덤하게 말을 받았다.
“압니다. 저도 똑같거든요.”
“······.”
“물 속성 에테르 같은 거 갖고 싶었던 적 없습니다. 이런 곳에서 기억 없이 깨어나길 원한 적도 없어요. 아마 인생이 이런 거겠죠. 제 마음대로 안 되고, 이상하게 꼬이고.”
말끝이 조금 떨렸다. 그래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게 무서워서 요 며칠 그렇게 떠신 겁니까? 정식으로 힘을 받아들이는 게 겁이 나서요?”
“그만.”
“그러다 왕자님까지 태울까 봐 두려워서,”
-화르륵!
휘장에 불이 붙었다. 어리디어린 소년은 어느덧 장성한 사내가 되어 있었다.
커다란 가운이 그의 몸에 꼭 맞았다.
-촤아앗!
-치이이익······
크리스텔이 협탁의 물을 휘장으로 쏘아 보냈다. 불씨가 요란한 소음을 내며 스러졌다.
탄내를 느낀 왕자가 몸을 뒤척였다. 성기사는 씩씩하게 창가로 걸어갔다.
“방금도 불사르려고 작정하셨네요.”
“입.”
“‘두려워해도 괜찮습니다.’ 왕자님이라면 무조건 그렇게 말씀하실걸요. 그게 나쁘거나 창피한 거라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고, 인정하셔도 된다고 말입니다.”
“다물어.”
“정말로 겁나기만 하셨어요? 왕자님이 오신 뒤로는 아닐 때도 있었을 텐데.”
“······.”
차르륵! 끼익, 벌컥, 탁! 크리스텔이 야무진 손놀림으로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시원하고 깨끗한 가을바람이 삽시에 폐를 가득 채웠다.
환한 태양빛이 침실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상의 두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전하께서 불 내시면 제가 전력을 다해서 끌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자님은 절대로 다치실 일 없어요. 폐하와 오렐리 전하도, 다른 친구들도 모두.”
높이 묶은 분홍색 머리칼이 휘날렸다. 물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어느새 다가온 그녀가, 태자에게 오른손 주먹을 내밀고 있었다.
“약속하겠습니다, 짝꿍의 짝꿍으로서. 그러니 마음 굳게 잡수세요.”
세드리크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나, 그의 왼손 주먹이 느릿느릿 맞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