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16)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16화(16/920)
#016 공작가가 수상하다 (2)
“날이 참 예쁘구나. 산책하기 좋지?”
추기경, 오렐리 부티에가 나긋하게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늘 그녀가 로메로 궁 후원까지 행차한 건 사랑하는 대자(代子)와의 소풍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왕 나왔는데 누리지 않을 이유는 또 없었다.
그녀는 묵묵히 자신의 옆을 지키며 걷고 있는 황자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따르는 시종 하나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황자의 산책 시간임을 알고 정원사들도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쪽입니다.”
한참 만에 입을 뗀 청년은, 넓다 못해 광활하게까지 느껴지는 후원의 구석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추기경의 머리 높이까지 오는 관목들이 단정하게 관리되어 있는 곳이었다.
과연, 무언가를 숨기기엔 나쁘지 않은 환경이었다.
“여기 있다는 건 또 누가 알고 있니?”
“폐하께선 아십니다. 카퓌송에게도 일러두었습니다.”
“신기하네. 아직도 네 사람밖에 모른다는 게.”
“보면 이해하실 겁니다.”
단안경 아래, 추기경의 베이지색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어느덧 중년이라고 불리는 나이였으나 신수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신국의 추기경들이나, 지방의 주교들이 몇 차례 목격담을 전해 오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지내는 황궁에는 신수가 곁을 맴돌며 지킬 만한 신물이 없었다.
광막한 제국의 영토를 통틀어도 신물은 고작 넷뿐이었다.
“대모님, 잠시 물러나십시오.”
세드리크가 나직하게 말했다. 추기경은 순순히 두어 걸음을 물렸다.
주변이 고요한 것을 확인한 황자는 스르르 왼손에 끼고 있던 검은 장갑을 벗었다.
-딱!
손가락이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의 손끝에 주황색의 선명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오렐리 부티에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이 아이의 능력은 언제 봐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녀는 이것이 저주가 아닌 축복이라고 믿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화르르!
세드리크가 절도 있는 몸짓으로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꽃봉오리만 했던 광염이, 순식간에 거대한 부채처럼 펼쳐져 바닥으로 낙하했다.
-사아아······
붉은 화화(火花)가 싱그러운 봄풀과 만나 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추기경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이건 결코 평범한 반응이 아니었다.
초록은 뜨거운 불에 검게 타는 대신, 허공에 개나리처럼 노란 덩어리들을 피워내고 있었다.
깨어있지 않았던 것들이, 황자의 에테르에 반응해 발치에서 알알이 차올랐다.
-끼이!
“응······?”
한 덩어리가, ‘신수’라는 거창한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냈다.
추기경은 의아한 얼굴로 황자를 바라보았다. 세드리크는 과묵히 그 시선을 받아냈다.
-꺄으응!
“세이디?”
두 번째 덩어리도 그런 소리를 발했다. 당황한 추기경이 황자를 아명으로 불렀다.
“물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라······.”
오렐리 부티에는, 성스러운 신수가 자신의 눈앞에 강림하는 과정을 다소 황망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더는 광채를 뿜지 않던 두 개의 덩이가, 어느새 천천히 모습을 바꾸어 온전한 동물의 상을 갖추었다.
빛무리가 슬며 형체가 또렷해졌다.
-끼이이!
-끼응!
네 다리는 검은데 몸통은 적갈색을 띈다.
작달막한 체구에 붙은, 딱 그만한 길이의 꼬리가 통통하다.
코끝과 귀 끝은 슈거 파우더를 찍은 것처럼 하얬고, 똥그란 두 눈은 검은콩을 박아놓은 양 까맸다.
전체적으로 북슬북슬하고 귀여운 인상이었다.
“세상에.”
“······.”
용이나 그리핀 같은 모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건 의외여도 너무 의외였다.
두 봉제인형, 아니 두 신수는 자신들을 잠에서 깨운 세드리크가 반가운지 그의 주변을 맴돌며 알은체를 했다.
이내 청년의 늘씬한 흑색 부츠에 흙 자국이 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일 줄은 몰랐네.”
추기경이 몸을 굽혀 짐승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젊은 시절, 황제와 함께 제국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던 그녀 역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생물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난데없이 로메로 궁 후원에 출몰해 황자를 놀라게 한 녀석들이, 황자의 불꽃을 무서워하면서도 꼼짝없이 따른다는 동물들이, 꽃과 풀을 자유자재로 피워냈다던 대지 속성의 신수들이······.
이렇게 깜찍한 아이들일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오늘밤엔 사르네즈 영주성까지 데리고 가볼 거니? 엘리자베트가 그렇게 말하던데.”
추기경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런데 황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미려한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한 마리가 없습니다.”
“뭐?”
겨우 침착함을 되찾은 그녀의 안색이 다시 흔들렸다.
세 마리 중 가장 작은 놈이 보이지 않았다.
세드리크 리에스테르는 혼란한 눈동자를 들어, 정면에 보이는 건물을 응시했다.
쥘리에트 궁은 여느 때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
“그러니까, 언젠가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내용인 거죠?”
가만히 앉아있던 내가 확인 차 물었다. 뱅자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추기경과의 오찬 도중 내게 전달된, 이자벨 드 사르네즈 공작 부인의 편지를 읽어보고 있었다.
나는 그 백지장이 신경 쓰여 고해 성사조차 받으러 가지 못하고 방에 틀어박혀 있던 참이었다.
“글만 봐서는 특별할 게 없습니다. 안부를 여쭌 뒤, 괜찮은 날을 잡아 왕자님을 독대하고 싶다는 말이 있군요. 그게 다입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나도 그렇게 읽기야 했는데, 혹시 리에스테르 귀족 사이에서 그들끼리 통하는 은어 같은 게 있을까 봐 뱅자맹에게도 보여준 것이었다.
인사가 그 인사가 아니라거나, 알현이 그 알현이 아닌 거 아닌가 했는데 다행히 평범한 문장인 모양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요? 다른 귀족들은 저한테 이런 거 보내지 않잖아요.”
내 말에, 뱅자맹의 옆에 서 있던 가나엘이 금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내저었다.
“왕자님, 왕자님께 오는 비공식적인 편지는 아주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가나엘.”
뱅자맹이 근엄하게 말을 끊었다. 소년은 재빨리 입을 합, 하고 다물었다.
보아하니 그동안 황제가 내게 오는 귀족들의 서신을 걸러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송구합니다, 왕자님.”
“용서해주세요, 왕자님.”
“괜찮아요, 괜찮아. 이상한 일도 아닌데요.”
나는 황궁이라는 이름의 리조트에 장기 숙박 중인 손님이 아니다.
비록 팔자 좋게 놀고먹고 공부만 하며 지내고 있다 해도, 일단은 볼모였다.
제국의 높으신 분들이 나와 어떤 이유로든 접촉하려 드는 걸 황제가 기껍게 생각할 리 없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사교계로부터 어떻게든 멀어지고 싶은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황제의 간섭이 배려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사르네즈 공작 부인은 어떻게······. 아, 시종장을 통해서 전달했다고 듣긴 했습니다.”
“시종장을 통해 서찰을 전했다는 건, 황제 폐하의 암묵적인 허락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르네즈 공작은 폐하의 충신이니 그러실 법도 하지요.”
사르네즈 가문에서 나에게 수상한 편지를 보내지 않을 거라고, 황제가 굳게 믿고 있다는 뜻이다.
크리스텔 드 사르네즈 공녀와 세드리크 황자가 약혼으로 먼저 엮인다는 건 빙의하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은서가 ‘나였으면 진작 파혼했다’고 노래를 부르곤 했기 때문에 또렷이 기억했다.
아직 공표된 건 없지만, 물밑으로는 지금쯤 혼담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
공작과 원래 사이가 좋고, 자식들끼리 결혼도 시킬 판이니 황제가 갖는 신뢰는 당연해 보였다.
“그럼 이건 그냥 잊어도 되겠네요.”
내가 공작 부인의 편지를 테이블 구석으로 쭉 밀어버렸다.
별것도 아닌데 더 생각하지 말아야지.
“혹시 공작 부인으로부터 알현 요청이 들어오면, 폐하께서 막지 않으신다고 해도 뱅자맹 선에서 막아주세요. 제가 아프다고 둘러대 주셨으면 합니다.”
“왕자님?”
“사르네즈 공작가 같은 대단한 가문과 엮이고 싶지 않아서요. 첫날 말씀드린 대로,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내가 씩 웃자 뱅자맹이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주억거렸다.
아프다는 핑계는 남용하면 아무도 믿지 않기에 지금까지 아껴왔는데, 공작 부인과의 만남을 피하기엔 적당할 것 같았다.
뱅자맹은 이 화제가 지나갔다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채고, 비어있는 내 찻잔에 레몬그라스차를 다시 따라주었다.
“가나엘, 그 책은 뭐야?”
“아, 부탁하신 대로 그림과 지도가 있는 서적을 준비해 왔습니다.”
꼬마가 환히 웃으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물색 머리카락이 꼭 발코니 바깥의 봄하늘 같았다.
“두꺼워서 무거웠겠다. 수고했어, 고마워.”
“헤헤, 아닙니다.”
나는 책을 받고 아이의 손에 큼직한 클라푸티 한 조각을 건넸다.
가나엘이 파이를 한 입 깨무는 것까지 보고 나서 양장본을 펼치자, 첫 장부터 널찍한 지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제국의 신물 지도군요.”
“네, 궁금해서요. 지난번 신전 도난 사건도 있고 해서.”
뱅자맹의 호기심 어린 말투에 내가 후닥닥 답을 내놓았다. 뭐, 반쯤은 맞는 말이었다.
신물을 도둑맞았다는 경계의 신전이 정확히 어디쯤 있는지 알고 싶긴 했으니까.
하지만 오늘 이 책을 찾은 건, 꼬맹이 세이디가 신수들을 이끌고 어디까지 다녀오는지 궁금해서였다.
본인은 한사코 괜찮다고 하지만, 그렇게 어린 녀석이 밤늦게 홀로 돌아다니는데 걱정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사르네즈 지방은 정말 황도에 딱 붙어 있네요.”
“네, 황도의 서쪽 경계를 넘으면 바로 사르네즈입니다. 영주성은 조금 더 들어가야 나옵니다.”
뱅자맹이 대답했다.
황도와 사르네즈 지방은, 말하자면 서울과 경기도 부천 같은 느낌으로 맞물려 있었다.
나는 ‘사르네즈’라고 적힌 글자 위에 아름답게 장식된 삽화를 꼼꼼히 살폈다.
“이게 사르네즈 공작가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신물이군요.”
“그렇습니다. ‘창해의 축복’입니다.”
“사르네즈까지는, 말을 타고 가면 얼마나 걸리나요?”
“황궁에서 출발하면······. 아무리 길게 잡아도 2시간 안에는 당도할 겁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고, 황도에서 사르네즈까지 일직선을 그렸다.
기억이라는 게 참 신기했다.
첫날 내가 아는 것들을 수첩에 적어 넣을 때만 해도, 내가 <퇴사했더니 이계 공녀> 표지에 관해 기억하는 건 두 주인공의 모습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옷이나 장신구 따위의 모습은 확실치 않았다. 분명 그랬는데······.
반짝이는 청실로 종이에 자수를 놓아 표현한 푸른 보석을 보니, 새롭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왼손에는 커다란 사파이어 목걸이를 든 채, 오른손으로 크리스텔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황자.
그리고 그가 쥔 목걸이를 향해 손을 뻗고 있던 크리스텔.
‘설마’라는 부사를 붙일 것도 없었다.
소설의 표지에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보석이라면, 공작가가 명예를 걸고 지키는 신물이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목걸이를 만들면 아름답겠네요.”
내가 여상하게 중얼거렸다.
-끼이이이!
“······새소린가요?”
그리고 예상치 못한 소음에 멍하니 덧붙였다.
춘풍을 만끽하고자 활짝 열어둔 발코니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바로 뒤에 산이 있는 걸 가벼이 여긴 죄로, 호주에서나 살 법한 대형 벌레를 맞닥뜨리게 된 건가 싶었다.
“왕자님, 이것 좀 보세요.”
가장 먼저 발코니로 나간 가나엘이, 어딘가 신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소년의 뒤를 따르던 뱅자맹은 무언가를 보고 놀란 낯으로 멈춰 섰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오지 말라고 하지 않는 걸 보면, 시각적으로 해로운 것은 아닌 듯했다.
“뭔데 그래?”
못 박힌 듯 서 있는 뱅자맹을 지나쳤을 때, 나는 발코니의 난간을 타고 기어오르는 덩굴을 발견했다.
“허어······.”
마치 자연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넝쿨의 성장 과정이 눈앞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자그마한 손바닥 모양 잎사귀가 빠르게 이곳저곳에서 돋아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끼이이잉!
덩굴을 타고 올라온 작은 동물이, 드디어 이 몸이 등장할 차례라는 듯 용맹하게 포효했다.
레서판다였다. 미친 소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