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162)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162화(162/920)
#162 사랑과 스텝은 꼬이지 않게 (2)
“······대박.”
나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리고 급히 입을 닫았다.
심장이 갓 잡은 광어처럼 펄떡였지만, 예언자의 청은색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묵묵히 뒤에 서 있던 요한 경이 옆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음성은 지독히도 가라앉아 있었다.
“단장님, 전하를 경계하는 건 이해하지만 하대는 용납하기 어렵네요. 플뢰르 드 리스가 리에스테르에서 황족 대우를 받던가요?”
-휘이잉!
바람이 날카로운 울음을 내며 어린 예언가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마구 뒤흔들었다.
바카리는 성기사의 노골적인 위협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삭! 예리한 소리와 함께 꼬마의 뺨에 가느다란 상처가 났다.
나는 화들짝하며 요한 경을 만류했다.
“요한 경, 다치게 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죄송해요, 전하. 제가 실수했네요.”
그가 즉시 눈꼬리를 휘며 물러났다.
추기경급 성기사도 힘 조절에 빈틈이 생길 수 있나······?
묘한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치유 서클을 열었다.
우우웅! 하늘빛 에테르의 울림에 단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호의를 받고자 예지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호의로 이러는 거 아닙니다. 친구가 실수를 했으니 책임을 지려는 거예요.”
“······.”
그렇게 대꾸했더니 꼬맹이가 조용해졌다.
상처는 옅었지만 핏방울이 또렷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좀 전에 들은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푸른 에테르 알갱이가 앳된 얼굴에 모여드는 것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사르네즈 경의 운명이 눈앞에 보인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귀하지만, 앞으로 더욱 귀해지실 분입니다.”
“잘 봤네요. 용하십니다.”
내가 홀린 듯이 대답했다. 동그란 안경 아래의 눈매가 와락 구겨졌다.
“즐거워하실 일이 아닙니다. 왕자님께서 곁에 계실 때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왕자님은 모든 계시를 어그러지게 만드시는 존재입니다.”
“······.”
그래서 나를 그렇게 노려봤구나. 앞날이 불투명해서.
음, 중의적이네.
“그러니 선을 알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저는 당사자에게 경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남이 듣기엔 괴이하고 무서운 말이겠지만, 나는 바카리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의 ‘이방인’은 나뿐이었다.
작품 바깥에서 온 존재가 인물들의 운명을 바꾸는 건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다.
게다가 나는 퇴계공의 내용을 세세히 알지 못했다.
주인공들을 이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당장 싫다는 걸 억지로 시킬 순 없으니 한계가 있었다.
와중에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지면 나는 반드시 발을 담갔다.
무시하고 싶어도 노약자나 동물이 얽힌 일이 많아 어쩔 수 없었다.
아마 내가 아닌 누구라도 나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바카리 군.”
그럼 이 녀석은······. 설마 원작 내용이 예언의 형태로 보이는 건가?
소설에 속하지 않은 나 때문에 정확도가 떨어지는 거고?
“실례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저는 의뢰를 받는 직책이 아닙니다.”
“압니다. 하지만 워낙······. 위대한 능력을 지니고 계셔서 그렇습니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그런 특기라면 말이지.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러자 청소년의 눈길이 얕게 찰랑였다.
“혹시 힘든 일이 아니라면, 사르네즈 경이나 태자님이 얽힌 중요한 계시가 있을 때 제게도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
말해놓고 나서야 이게 무리한 요구임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예언도 일종의 개인 정보였다.
비록 적중률이 100%는 아니지만, 어쨌든 누군가의 미래를 담은 지식인데 제3자에게 제공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단장의 낯이 딱딱하게 굳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말을 정정했다.
“폐하께 보고하듯이 말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모든 예언을 듣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두 분의 친우로서······. 위험에 처할 일이 있다면 돕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대로, 제가 빠져야 하는 상황엔 빠져주고 싶기도 하고요.”
“두 분이 원하신다면 말이죠.”
요한 경이 불쑥 말했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어느새 단장의 뺨이 깨끗이 아물어 있었다.
할 일을 마친 서클이 느릿느릿 흐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덧붙였다.
“불편하다면 더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왕자님께선 제게 강요하실 수 없습니다. 저는 황제 폐하의 마도구이니까요.”
바카리가 작게 대답했다.
‘그래, 어떻게 그런 정보를 함부로 얻겠어’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가슴이 철렁했다.
방금 스스로를 마도구라고 칭한 건가?
“도구 취급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미안합니다. 상처 주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사과할게요.”
“······.”
내가 진심으로 말했으나, 단장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고는 나에게 예를 차렸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걸어 자신이 내린 마차에 다시 올라탔다.
누군가 ‘공자님, 저 귀한 왕자님과 아는 사이세요?’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탁! 문이 닫히고 말들이 발을 굴렀다.
나는 영주성 깊숙한 곳으로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반성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단단히 미움 받겠네요.”
나 때문에 계시가 불확실해진다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진 않았을 텐데.
방금 전의 대화로 더 미운털이 박혔겠구나 싶었다.
여느 웹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멋지게 이용해 먹었겠지만, 나는 주인공이 아니고 이곳은 내게 현실이었다.
자신을 도구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뻔뻔하게 굴기는 힘들었다.
“글쎄요.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전하.”
그러자 미풍 같은 목소리가 달래듯 말했다.
성석 구슬은 그새 요한 경의 주먹 안에서 가루가 되어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깨 드셨네.
“단장도 금방이겠어요. 석 달이면 넘어가겠네요.”
“어디로 넘어갑니까?”
그는 내 물음에 답하는 대신 산뜻하게 웃고는 성탑 안으로 손짓했다.
기왕 나온 거 성석 실험을 하고 싶었지만, 심란해서 애물단지들을 보고 싶기도 했다.
나는 순순히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계단을 올랐다.
은서 또래인 녀석에게 못 할 말을 한 것 같아 속이 편치 않았다.
*
이튿날. 9월 30일.
“괜히 일찍 왔나 봅니다. 설레서 식사도 넘어가질 않더군요.”
“봄 무도회도 갔었지만 요번이 더 즐거울 것 같아요. 가장무도회는 가장무도회만의 맛이 있으니까요.”
“소문 들었습니까? 에바 블랑케르 공녀가 오늘 오라비를 밀어내고 소공작이 된다지요.”
귀족들이 블랑케르 영주성의 드넓은 복도를 오가며 목청 높여 떠들었다.
커다란 가면과 장신구를 든 시종들이 그들의 뒤를 다소곳이 따랐다.
이제 1시간 후면, 성안에서 가장 큰 볼룸이 열리고 동부 최대의 사교계 행사가 시작될 터였다.
황태자와 그의 벗들은 물론이고 제국의 내로라하는 대귀족까지 한자리에 모이는 잔치였다.
새로운 염문과 가십을 꿈꾸는 이들로 벌써부터 성내가 후끈거렸다.
하인들은 음식과 술을 차리고, 귀족들의 짐을 나르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
로베르 블랑케르 ‘소공작’은, 바로 그 틈을 타 복도 구석에 고요히 숨어들었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어두웠다.
성의 개구멍을 지키는 이는 없었고, 곳곳이 온갖 소품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덕에 은둔할 공간도 많았다.
영지 귀퉁이의 별장에 갇혀, 하루하루 수치와 분노에 찌들어가던 그가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남자는 유일하게 자신의 곁에 남은 유모 앞에서, 일부러 다리를 크게 절고 서럽게 울었다.
‘동생이 보고 싶다’, ‘내가 이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며 인정에 호소하기도 했다.
심약한 그녀는 철부지 도련님의 눈물바람을 버티지 못했다.
유모는 어스름에 별장 조랑말 한 마리를 빼돌리고, 떠나는 그에게 금화를 몇 개나 쥐여 주었다.
‘자정에는 꼭 자리를 뜨셔요, 도련님. 내일 새벽에 또 기사단장이 올 겁니다요.’
유모의 신신당부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도 잘 알았다.
주에 한 번씩 오던 영지 기사단장은 어제 저녁 난데없이 별장에 들이닥치더니, ‘오늘부터 격일로 소공작님을 뵙게 되었다’고 통보했다.
어머니의 명이라지만 상황은 자명했다.
곧 무도회가 열리니 자신을 더욱 철저히 단속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건······.
“저는 태자 전하도 그렇지만, 역시 예서 왕자님이 몹시 궁금하군요. 그분이 제국에서 참석하시는 첫 무도회 아닌가요?”
“말도 마세요. 무엇으로 가장하셨는지만 알면, 제가 날름 낚아채서 발코니로 모실 겁니다.”
“어머나, 백작님! 드디어 남편을 들이시려고요?”
‘와하하하!’ 복도 저편에서 폭소가 터졌다.
소공작은 텅 빈 전시용 갑옷 뒤에 몸을 구긴 채 이를 악물었다.
그 천한 왕자가, 어머니에게 여우 같은 말을 속살거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적국의 세작이나 마찬가지였다.
태자를 유혹해 자신에게 씻지 못할 불명예와 상흔을 남기고, 동생을 꾀어 저의 자리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부모님과의 사이까지 이간질하려는 것이다.
소공작은 ‘결투’ 이후 감각을 잃은 오른 주먹을 세게 쥐었다.
바스락. 작은 쪽지가 비명을 질렀다. 거기엔 아주 간결한 전언이 적혀 있었다.
‘복수를 원한다면 가장을 하고 올 것.’
얼마 전, 그의 침대 위에 놓인 발신인 불명의 편지였다.
익숙지 않은 손으로 썼는지 필체가 지렁이처럼 기어 다녔다.
유모와 하인을 전부 들볶았지만 누구도 그런 종이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저 아랫것 중 누군가가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질 낮은 도발을 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벽난로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침대엔 같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세 번째 쪽지엔 낯선 문장이 추가되었다.
‘튤립 뿌리에 좀이 슬도록.’
“나는 바보가 아니야.”
소공작이 중얼댔다. 정말로 그랬다.
그는 잘 배운 가문의 첫째였고, 튤립이 ‘신관’이나 ‘신성’을 의미한다는 것쯤은 상식으로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설욕할 신관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예서 페네티안.
“왕자께선 필시 천사로 분장하시겠지요. 태자 책봉식 전야에 그런 활약을 하셨으니까요.”
“과연 그럴까요? 너무 뻔하지 않습니까.”
“블랑케르 공녀의 파트너로 오신다니 무엇이든 근사한 의상이겠죠.”
귀족들이 헛소리를 하며 멀어졌다. 빠드득. 이가 절로 갈렸다.
-덜컹, 터엉!
인기척이 사라지자마자 그는 거칠게 코앞의 갑옷을 잡아챘다.
가장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것이 희롱이라면 한바탕 놀아나주고, 진정한 기회라면 단숨에 움켜쥘 생각이었다.
*
드디어 무도회 당일이 됐다!
사자와 광대로 요란하게 가장한 가나엘과 엘리자베트 경은 십여 분 전 먼저 본성(本城)으로 향했다.
소백작이 오늘 가나엘의 파트너 겸 샤프롱 역할이라면, 나의 샤프롱은 뱅자맹이었다.
예정대로 호위는 요한 경이 맡아주었다.
-철컥, 철컥
“아이고.”
“괜찮습니다, 왕자님. 옆 사람이 듣기에는 소리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뱅자맹이 격려했다. 나는 민망하게 웃으며 두 사람과 성탑 로비로 내려왔다.
갑옷을 걸친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발소리 적응이 쉽지 않았다.
검은 가면과 베일로 가려진 시야 역시 불편했다.
봄 무도회 때 발코니에서 슬쩍 살핀 것 외에는 무도회 경험이 전무한지라, 떨리기도 엄청 떨렸다.
진짜 사람들이 나를 못 알아볼까? 그런 생각을 하면 또 줏대 없이 입가가 씰룩였다.
-아으우
“우리 티테, 형 알아보네.”
그때, 로비의 수조를 헤엄치던 티테가 물 밖으로 알은체를 했다.
나는 녀석과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방에 있는 뚝심이와 레서판다들은 여러 번 포옹하고 나왔는데, 하프물범은 당장 안아줄 수 없는 게 아쉬웠다.
티테는 똑똑하게도 내게 물을 끼얹지 않고 얌전히 지느러미발을 흔들었다.
잘 놀다 오라는 뜻인 것 같았다.
“응, 일찍 올게. 너도 여기서 물고기들하고 얼음땡 하고, 좋아하는 배영 실컷 하고, 산호도 가지고 놀······.”
내가 산호 너머를 보다가 말끝을 흐렸다.
파랗고 노란 물고기가 헤엄치는 수조 건너편에, 순백의 제복을 입고 하얀 가면을 쓴 사내가 서 있었다.
은색 머리칼이 무척 길었고, 자세히 보니 등에는 희고 커다란 날개가 달려 있었다.
남자 또한 눈앞을 베일로 가리고 있어 눈동자 색은 확인할 수 없었다.
눈높이는 태자만큼 훌쩍 높았는데, 찰나 시선이 얽힌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당황해서 물고기들과 함께 입을 뻐끔거렸다.
“저기, 여긴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되는······.”
아니구나.
신수를 영접하러 오는 귀족들을 위해, 수조 세 걸음 밖까지 로비를 개방했었다.
참방! 티테의 꼬리질 너머로 상대의 한숨이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왕자님, 저 왔습니다! 헙.”
그때, 또랑또랑한 에바의 목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나는 ‘왕자’라는 단어에 놀라 후다닥 몸을 물렸다.
기껏 가장했는데 벌써 천사 하나한테 정체를 들킨 것 같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