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17)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17화(17/920)
#017 공작가가 수상하다 (3)
-끼이!
“레서······.”
“마수인 건가요?”
‘레서판다가 왜 여기에’ 따위를 중얼거리려던 나는 가나엘의 물음에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당황하지 않는 뱅자맹이 크게 놀란 것도 그렇고,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이건 마치······.
“이렇게 생긴 동물은 난생 처음 봅니다.”
이 세계에, 레서판다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반응인데.
-끼우웅!
레서판다가 정체불명의 귀여운 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성소를 전개했다.
황금빛의 넓적한 원이 나와 뱅자맹, 가나엘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두 분 다, 일단 움직이지 마세요.”
“네, 왕자님.”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물병도 집어 들었다.
마수는 물과 불에 약하다고 했으니, 여차하면 이걸 뿌리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수가 맞아? ‘퇴계공’에서 레서판다는 마수인 건가?
-끼이이잉!
내 성소를 발견한 레서판다가, 두 뒷다리로 벌떡 일어나 섰다.
그러더니 앞다리를 팔처럼 허우적거리며 위협하듯 거리를 좁혔다.
고동색 얼굴에 하얗게 찍힌 뺨과 눈썹이 몹시도 흉포해보였다, 미친······.
절로 심장이 아팠다.
“진짜 귀엽다······.”
내 입이 의식의 흐름에 따라 움직였다.
그 사이 레서판다는 겁도 없이 서클 안으로 진입했다.
녀석은 바닥을 밝게 비추는 성소를 유심히 살피며 냄새를 맡고, 문양을 발로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아아······
바람에 풀이 눕는 듯한 소리와 함께, 녀석이 발을 내딛는 곳마다 작은 잡초와 들꽃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맙소사······.”
“주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가나엘이 탄성을 내뱉었다. 뱅자맹이 옆에서 앓듯이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이 레서판다가 마수가 아님을 깨달았다.
발코니를 다시 살피니, 어느새 난간 안쪽까지 풍성하게 자라난 덩굴이 보였다.
-끄르르릉
이윽고 서클의 중심까지 진출한 레서판다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녀석은 호적수를 만난 양, 대단히 먹음직스러운 피식자를 발견한 양 다시 발딱 일어섰다.
이내 균형을 잡기 어려운지 내 무릎에 양발을 턱 대고서는 을러대듯 입을 벌리는데, 그게 꼭 웃는 얼굴 같아 실소가 터졌다.
뭐 좀 내놔 보라는 신호 같았다.
“이 녀석, 신수인가 봅니다.”
내 말에 가나엘이 눈을 감고 뭐라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물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접시에 있는 오렌지 조각을 하나 주워들었다.
몸을 숙이고 먼저 과일 냄새를 맡게 해주니, 레서판다는 작은 주둥이로 조각을 한 입에 넣고는 한참 깨물어 댔다.
“잘 먹네. 더 줄까?”
-끄르르르르!
나는 다른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녀석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반항은 전혀 없었다.
두 번째 오렌지 조각을 물려주니, 또 열심히 짓깨물며 먹는 모습이 가히 파괴적으로 귀여웠다.
“공격할 의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신수라 그런지 사람을 잘 따르네요.”
실상은 그냥 애교 넘치는 레서판다지만. 내가 웃으며 녀석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물, 불, 공기, 대지의 능력을 쓸 수 있는 것은 성기사와 신수뿐이다.
마법사와 마수는 네 가지 성스러운 힘에 결코 접근할 수 없다고 배웠다.
자유자재로 꽃과 풀을 피워내는 걸 보면, 이 녀석은 그중에서도 대지 속성의 신수가 틀림없었다.
세이디가 ‘황궁에 숨겨놓고 낮에는 재워둔다’고 말한 세 마리 가운데 하나인 게 분명했다.
그런데 어쩌다 이 시간에 깨어난 거지? 나머지 둘은?
“왕자님께서는 진정으로 고귀하신 분입니다.”
생각에 빠져 있는데, 뱅자맹이 나를 보며 말했다.
야생동물에게 먹을 것 주기밖에 안 한 나는 일순 머쓱해졌다.
“신관이 지닌 에테르가 고결하고 풍족하면, 그 기운이 퍼져 주변인들이 좋은 꿈을 꾸고 건강해진다고 합니다. 저희도 왕자님을 통해 익히 경험한 바 있지요. 그런데 설마 신수까지 불러들이실 거라고는······.”
뱅자맹의 간증에 나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그놈의 꿈 타령이 단순한 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충격 받은 나머지, 그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있다는 것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내가 인간 드림캐처였다니······.
“그, 음. 그렇군요.”
“그럼, 그럼 이 신수, 신수님을 신물이 있는 곳으로 옮겨드려야 하나요?”
가나엘이 더듬더듬 물었다.
신수에 관한 자료가 적긴 했지만, 신수가 나타나면 신물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려면 신력이 있는 사람이 나서야 하는데, 추기경 전하께서는 폐하의 곁을 떠나실 수 없어. 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처지고.”
내가 빠르게 대답했다.
출몰한 장소도 그렇고 능력도 그렇고, 레서판다는 세이디가 책임지고 있는 녀석이 확실했다.
꼬마를 100%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신수 문제 해결을 위해 일시적으로 협조를 약속한 상황인데 상의도 없이 이 녀석을 황궁 밖으로 내보내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혹시 세이디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레서판다 한 마리를 잃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끄르르
“아냐, 괜찮아.”
내 불안을 느낀 것인지 레서판다가 울음소리를 냈다.
나는 송이눈이 쌓인 것 같은 세모꼴의 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에테르도 좀 줄까?”
까맣고 동그란 레서판다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나는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며, 녀석이 나를 따라오는 것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아 서클의 크기를 훅 줄이자, 레서판다는 놀라서 몸을 재차 빨딱 세웠다.
진짜 심각하게 귀엽네.
“일단 굶주린 것 같고, 같이 다니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으니 오늘 하루는 제가 데리고 있어 보겠습니다. 폐하께는 말씀을 전하지 말아주세요.”
내 말에 뱅자맹이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도, 생애 한 번을 보기 힘들다는 신수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일지 몰랐다.
“그럼 저는 신수님이 쓸 물건들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릇이나, 방석 같은 거요. 과일도 잔뜩 챙기겠습니다!”
가나엘이 상기된 표정으로 랩을 하고는 잽싸게 물러갔다.
레서판다도 푹신한 방석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녀석이 하는 걸 보고 있으면 뭔들 싫어할 것 같진 않았다.
“저는 발코니 쪽 넝쿨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정원사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어 뱅자맹이 자리를 비웠다. 나는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찌어찌 시간을 벌긴 했지만, 오늘 밤에 세이디가 오지 않으면 내일은 내게도 다른 선택지가 없을 것이다.
황제에게 사실을 알리고 외부 신관의 도움이라도 받아야겠지.
“넌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냐?”
내가 슬슬 에테르를 풀어내며 물었다.
레서판다는 고개를 갸웃거리곤 내 종아리에 머리를 대고 킁킁거렸다.
체리 하나를 집어 꼭지를 떼고 내미니, 통째로 입에 넣고 아작아작 씹는 모습이 세상 깜찍했다.
이래서 은서가 맨날 유튜브를 붙들고 동물 영상을 봤구나 싶었다.
“소설에 나왔을 것 같진 않은데.”
만약 이런 녀석이 <퇴사했더니 이계 공녀> 원작에 나왔다면, 은서가 어떤 식으로든 나와 형에게 어필을 했을 것이다.
아니, 애당초 표지에 주인공과 남주만 나왔을 리가 없었다.
웹소설에 사랑스러운 펫이 등장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표지에 노출시키는 게 이 바닥의 룰 아니었나?
레서판다쯤 되는 패를 작가가 낭비했을 것 같진 않았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레서판다의 입에 사과 한 조각을 물려주며 응답했다.
“들어오세요.”
“왕자님, 엘리자베트 경이 왔습니다.”
뱅자맹이 한껏 난감한 목소리로 말하며 문을 열었다.
나는 그대로 굳은 채 고개만 겨우 돌려 뱅자맹을 한 번 보고, 삐걱삐걱 시선을 내려 레서판다와 눈을 마주했다.
이 녀석의 귀여움에 정신이 팔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어쩌지?
“예서 왕자님, 쥘리에트 궁에 출몰한 신수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왔습니다.”
그런데 이어진 엘리자베트 경의 목소리는, 내 걱정을 훌쩍 앞서간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
“제가 신수를 데리고 있는 걸, 폐하께서 아신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네. 그런 셈이죠.”
엘리자베트 경이 오늘따라 중언부언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러려니 했다.
봄 무도회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황궁에 드나드는 귀족들이 많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근위대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 정신이 없는 것도 이해가 갔다.
“정원사가 목격했다고요?”
“네. 그······. 오후에 잠깐 꽃을 살피러 왔다가, 신수 한 마리가 쥘리에트 궁의 벽을 오르는 걸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멍하니 카펫 위의 레서판다를 내려다보다가, 내 물음에 로봇처럼 딱딱하게 답변했다.
그러고는 목이 탔는지 차갑게 나온 로즈메리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긴, 뱅자맹 말로는 발코니 덩굴의 두께가 성인 남자 팔뚝만 하다고 했다.
그런 게 순식간에 쑥쑥 자라는데 시선을 끌지 않았을 턱이 없었다.
나는 내 발치를 맴돌며 간식을 내놓으라고 공갈하는 레서판다에게 딸기를 내밀었다.
달콤한 게 마음에 들었는지, 녀석이 발끝에서 쪼그만 민들레를 피워냈다.
“그럼, 제가 언제까지 돌봐주면 될까요? 폐하께선 외부 신관을 초빙하실 계획인 겁니까?”
팔자에도 없던 임시 보호를 하게 생겼네.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자베트 경을 돌아보았다.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던 회색 눈동자가 웬일로 기운이 없어 보였다.
“신관은 이미 있는······. 아뇨, 네. 곧 불러들이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녀가 대답을 이어 나갔다.
“신수가 바깥의 신력에 반응해 언제든지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도록······. 밤에는 발코니를 열어두라는 황명이 계셨습니다. 지난번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황궁 내 모든 시종의 신원조회를 마쳤으니, 내부 위협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조건이 아주 좋았다.
밤에 세이디가 와서 레서판다를 데려가도, 다음날 나는 ‘신수가 신력의 흐름을 느꼈는지 알아서 쥘리에트 궁을 빠져나가더라’하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만족스러운 마음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자 엘리자베트 경이 한숨을 내쉬며 결 좋은 단발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복 재킷의 소매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엘리자베트 경, 옷이 탔는데요.”
“아, 별것 아닙니다.”
그녀가 씩 웃었다. 어쩐지 위험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냥 한 번 찌르고 감옥 갈 것을······.”
“네?”
“왕자님, 전서구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엄청 무서운 말을 들은 것 같았는데, 그녀가 자세를 세우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바람에 기억이 반쯤 흐릿해졌다.
미인의 영향력이 굉장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작년에 북부로 마수 소탕을 간 적이 있습니다.”
“아, 네.”
화제가 급격히 바뀌었다. 아니, 그런가?
“그런데 폭설 때문에 길이 막혀서, 놈들의 본거지로 접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방향을 틀면 일정이 한참 늦어질 상황이었죠. 북부의 피해가 무척 컸기에 저희는 결국 강행군을 결정했습니다. 부하들을 윽박지르고 달래가며 제설을 시작했는데······. 그때 하늘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설 너무 싫다. 차라리 제설 소식을 전하는 저 전서구가 되고 싶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의 심금을 울렸다.
대한민국의 육군 장병 시절을 보낸 사람으로서, 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가 얼마나 혐오스러운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전서구가 되어 보니······. 제설하는 백작가 후계자가 더 낫지 않았나, 그런 마음이 듭니다.”
안쓰러운 마음이 밀물처럼 쏟아졌다.
황궁 일이 얼마나 다망하고 고되면, 사람이 제설기 신세를 그리워한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엘리자베트 경은 훌륭한 부근위대장이십니다. 제대하면······. 아니,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 짤막한 안줏거리가 될 겁니다.”
힘내세요, 하고 덧붙인 말에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찻잔을 치켜들었다.
“그 말씀에 건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