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172)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172화(172/920)
#172 허울뿐인 대주교 (2)
침착해, 정예서.
“뱅자맹, 가나엘.”
침착해.
“저 백수 되게 생겼습니다.”
아주 침착하지는 못했다.
사태 파악을 끝낸 나는 신수들을 온몸에 주렁주렁 매단 채 나아가 선언했고, 두 시종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울상이 된 가나엘이 양손을 내저으며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금방 에테르를 되찾으실 거예요!’ 했다.
뱅자맹은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잠깐만.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눈을 깜빡였다.
에테르가 안 나온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둘은 이미 내 컨디션에 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뱅자맹이 소년과 눈길을 교환하더니 어렵사리 운을 뗐다.
“왕자님께서······. 의식을 잃으신 후부터 꿈자리가 예전으로 돌아왔습니다. 쥘리에트 궁 사용인들은 모두 그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지요. 다만 소리 내어 말하는 자는 없습니다.”
아. 그게 있었지, 참.
“갑자기 악몽에 시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왕자님께서 입궁하시기 전의 겨울과 비슷해졌습니다. 먼저 말씀드리면 충격을 받으실 것 같아 함구하고 있었습니다.”
“······..”
“저희는 다시 보통으로 돌아온 것뿐입니다, 왕자님. 유감스러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간 저희가 귀한 분께 신세를 졌지요. 황송합니다.’ 중년인이 인자하게 미소했다.
진짜로 내게서 에테르가 흐르지 않고 있고, 그걸 주변의 평범한 이들도 알았다.
그렇다면 황태자 녀석도 당연히 내 상태를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겨우 턱을 까닥이며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토막생각을 한데 모으려고 애썼다.
내내 당황한 채로 지낼 수는 없었다. 차분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짜야 했다.
“오렐리 전하께서 제게 남기고 가신 게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스승님은 황궁에서 가장 먼저 나를 진찰했을 사람이었다.
이런 특수한 상황을 모를 리 없는 데다, 그녀의 대자(代子)에겐 신관 파트너가 필요하니 어쩌면 나보다 황실이 더욱 절박한 처지였다.
내 질문에 뱅자맹과 가나엘이 일시에 고개를 주억였다. 예상이 적중했다.
“살펴보실 책 몇 권과 편지를 두고 가셨습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또 걸음하시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가나엘이 조심스레 답했다. 나는 등에 업은 하프물범을 어르며 비장하게 입을 악다물었다.
그래, 간만에 환궁했으니 다시 기존의 일정을 소화할 시간이었다.
쥘리에트 고시원에 콕 박혀서 열심히 공부하고 밥도 잘 챙겨 먹어야 했다.
초능력이 사라졌다고 의지까지 꺾여서는 안 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서 집에 돌아가기로 했으니까.
*
그렇게 다음날이 됐다. 꼭 빙의 직후의 3월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무 능력도 없이, 그저 살기 위해 성실한 수험 생활을 하던 첫 일주일.
“‘신관은 사망에 이른다’······. 이건 아니고.”
나는 따스한 가을볕을 받으며 1층 테라스에 나와 있었다.
열풍이 부는 시기를 제외하면 황도는 날씨가 연중 온화한 편이라고 들었는데, 진짜 그랬다.
10월 중순이 되었는데도 해 지기 전까지는 공기가 나름 훈훈했다.
널찍한 테이블엔 간식 접시와 찻잔이 그득했고, <격주간 리에스테르>와 주신교 해설서를 비롯한 온갖 책이 펼쳐져 있었다.
<와장창! 이브의 대모험>을 요약해둔 수첩 페이지가 바람에 일어섰다 눕기를 거듭했다.
스승님이 내게 전한 서신은 중앙에 떡하니 놓였다.
“들어 봐, 티테. 신관이 에테르를 못 쓰게 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래.”
-애으
내가 무릎 위의 하프물범에게 설명했다.
“하나는 심장이 멈추는 거야. 그러면 체내에서 에테르를 더 생성하지 못하게 돼. 죽는단 거지.”
-우우······
꼬마에겐 너무 무서운 얘기였는지, 티테가 까만 눈과 코를 뒤로 쭉 빼고는 누드김밥처럼 납작해졌다.
그러자 테이블 한편에서 책등을 깨물던 레서판다들이 몰려와 폭신한 꼬리로 나를 마구 때렸다.
바깥사람들은 전혀 모르지만, 제국의 신수들은 이토록 포악하고 폭력적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사과했다.
“미안하다, 너희 막내 겁줘서. 일부러 그런 건 아냐.”
-끼응
“반성할게. 그리고 두 번째는, 언약을 어겨서 에테르를 상실하는 거. 이건 성기사와 비슷한 경우야.”
나는 주신교 성직자의 언약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이들은 언약을 저버리면 ‘상실’이라는 페널티를 얻는데, 신관의 그것이 무작위인 데 반해 성기사는 오직 ‘힘의 봉인’이란 신벌을 받았다.
거꾸로 말하면 신관이 재수 없게 힘의 봉인을 당하는 일도 발생할 수는 있었다.
사서를 들춰 보니, 돈이나 기억을 잃는 대신 에테르를 빼앗기고 일반인으로 돌아간 경우가 실제로 없지는 않았다.
다만 이건 몹시 중대한 언약을 깨뜨렸을 때나 적용되는 듯했다.
“그런데 나는? 언약을 어긴 적이 없지. 그러니까 이것도 아니고.”
내가 수첩에 줄을 죽죽 그었다. 애초에 언약을 한 적도 한 번밖에 없었다.
그게 벌써 5개월 전의 일이었다. 열풍이 다가오던 밤.
[맹세한다.]‘내게 언약을 하는군.’
나는 세이디에게, 신국과 내통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으리라 약속했다.
그걸 어기진 않았으니 페널티로 에테르를 봉인당한 것도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내 몸은 일반적인 케이스에 해당하지 않았다.
부티에 추기경의 편지가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주신의 하늘에 천공이 생기던 날, 왕자님이 에테르 폭주를 일으켰다고 들었어.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폭주인지, 폭주와 유사한 다른 증세였는지는 모르겠구나.’
그날, 엘리자베트 경과 세드리크 태자가 나를 목격했었다.
두 사람은 내 안에 ‘소원의 성반’이 들어있다는 걸 모르니, 그게 에테르 폭주처럼 보이긴 했을 것이다.
강렬한 금빛 에테르 폭발에 뒤따른 각혈과 실신을 생각해보면 타당한 결론이었다.
‘그것이 폭주였다면, 나는 당시 충격의 영향으로 왕자님의 그릇이 잠시 닫힌 게 아닐까 해.’
‘일종의 후유증이라 가정하고 연구를 진행 중이란다. 에테르 폭주로 일정 기간 힘을 잃은 신관이 있었는지도 조사하고 있어.’
후유증······. 나는 목덜미에 데룽데룽 매달린 레아를 쓰다듬으며 입속말했다.
생각을 정리하려는데 페리가 깃펜을 물고 놔주지 않았다.
데미는 수첩에 퍼질러 앉아 미동도 안 했다.
‘형 이제 안 아파, 무리하는 거 아니야. 오늘은 너희 놀이방에서 같이 잘게.’ 그렇게 한참을 달랜 뒤에야 필기구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까만 글씨가 하얀 종이 위를 빠르게 달렸다.
∙ 집으로 가는 ‘게이트’가 열렸다
– 원인1: 네 개의 신물이 한곳에 모여 발동
– 원인2: 네 신물이 한곳에 모여 발동+소원의 성반 발동
······아마 원인2가 진실에 가까운 추리겠지.
나는 그날 본 장면을 한 프레임씩 곱씹었다.
-우우우웅!
먼저 뚝심이를 포함한 네 신물이 빛을 뿜었다.
그러고는 하늘의 중심을 향해 각각 레이저 포인터처럼 똑바른 광선을 쏘았다.
잠시 후 내게서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두근!’
심장이 크게 한 번 박동했고,
‘허억!’
호흡이 힘들어짐과 동시에 무척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거부하는 듯한 감각이 말초신경을 끊임없이 짓눌렀다.
마지막으로 본 건, 내게서 에테르가 터져 나와 허공을 향해 일직선을 그리는 광경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피를 토하고 있었고 창공엔 이미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럼······.
-끼이이!
“미안. 형이 너무 세게 잡았지. 많이 아파? 진짜 미안해.”
나는 레아의 외침에 화들짝하며 회상에서 깨어났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내게 꼭 붙들린 레서판다가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급히 사죄하고 등을 토닥여주니, 녀석이 나 죽는다고 티테 옆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힘없는 임시 보호자는 부지런히 까만 배를 문지르고 ‘호’ 해줄 뿐이었다.
다른 손으로는 수첩에 또박또박 필기를 이었다.
– 게이트 개방 원리(추측): 신물 네 개가 하늘에 닿음 > 무슨 일이 생김 > 성반이 발동함 > 집에 가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줌
“······그럴듯한데? 괜찮아 보이는데.”
내가 중얼댔다.
이게 다 맞는다면, ‘무슨 일이 생김’ 부분이 특히 중요하고 미스터리했다.
지금껏 내 몸속의 성반은 조용했다.
물론 엄청나게 깨끗한 순수 에테르를 다량으로 제공했고, 내 성지가 다른 대주교에 비해 큰 것도 아마 신물 덕분이겠지만 거기까지였다.
녀석은 내 소망이나 마음에 직접적으로 응답한 적이 없었다.
으음. 상상력을 동원해보면.
“나머지 신물 네 개가 일종의 판을 깔아준 거지. 그래서 얌전하던 성반이 발동을 했어. 근데 그 뒤로 에테르가 안 나와.”
-꾸르르
나와 데미가 마주보며 목을 갸웃했다.
“설마 게이트 연다고 힘을 다 써버렸나?”
-꾸릇?
아니······.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애초에 죽은 예서 왕자에게 두 번째 기회를, 즉 나를 심어 시간을 되돌린 것도 성반의 힘이었다. 적어도 내 짐작은 그랬다.
신물이 일회용이었다면 내가 그토록 막대한 에테르를 고스란히 지닐 순 없었을 것이다. 그냥 살려놓고 땡이었겠지.
게다가 나처럼 신물이 몸에 깃든 크리스텔은 힘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나는 오렌지 껍질 절임을 오징어 다리처럼 씹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 정말로 후유증인가? 언제 낫는데?
-삐르르, 삐삐삐
그때, 오후 산책을 마친 뚝심이가 테라스 난간에 내려앉았다.
나는 굴뚝새에게 인사를 건네려다 식겁했다.
“뚝심, 이리 와. 뭐 물어왔어?”
녀석의 작은 두 발 옆에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황제나 황궁 손님의 보석이라도 털었을까 봐 철렁했다!
-삐
“뒤돌지 말고 가져와. 하나.”
-삐릿
“둘.”
-삐르르
“둘 반.”
-삐뽀!
뚝심이는 못 이기겠다는 듯 나를 홱 돌아보더니, 자신의 몸뚱이만 한 금붙이를 용케 물어서는 내 앞에 툭 뱉어놓았다.
그리고 매우 불만스러운 날갯짓으로 티테의 등에 척 올라탔다.
뭐, 열 받아서 드라이브라도 가시게요?
“너 이렇게 부리 버릇 나빠져서 어떡할래. 응? 누가 이런 거 가르쳤어?”
-삐이
“이러면 남들한테 정 씨네 굴뚝새라고 말도 못 해. 부끄러워서.”
나는 뚝심이가 가져온 반짝이를 유심히 살폈다. 이거 무슨 휘장(徽章) 같은데.
한가운데 리에스테르 황실 문장이, 미친.
“정뚝심, 너 이거······.”
나는 순진한 눈망울의 사고뭉치를 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다급히 테이블에 애물단지들을 내려놓고, 난간으로 다가가 허리를 쭉 내밀었다.
정원 저편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어디서 행사가 있었는지, 예복을 입고 화려한 망토까지 두른 사내가 시종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가슴팍 한 칸이 빈 걸 보니 뚝심이가 저기서 휘장을 훔친 것 같았다. 그의 주황색 시선이 실타래처럼 얽혀들었다.
“······.”
태자는 이쪽으로 다가오지도, 내게 눈인사를 건네지도 않았다.
이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양 곧장 로메로 궁으로 들어가 버렸다.
완벽한 무시였다.
“······사과해야 하는데.”
내가 중얼거렸다.
저 녀석에게 상처를 줬으니 제대로 사과를 하고 싶은데, 당장은 기회조차 만들기 어려워 보였다.
*
“서신 정도는 전해도 되잖아, 세드리크.”
엘리자베트가 불만을 터뜨렸다.
그녀의 옆에 꼭 붙어 앉은 에바는 시종일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었다.
낯빛이 어두운 것은 둘뿐만이 아니었다.
상석에 앉은 세드리크의 오른편에서, 크리스텔이 청회색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냈다.
“보호를 위한 유폐라면 이해합니다. 폐하께서도 엘리서 왕세녀 전하가 왔을 때 그리 하셨고, 왕자님은······. 지금 최고로 무력하신 상황이니까요.”
“······.”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사전에 부티에 추기경의 전언이 있었음에도, 크리스텔은 황궁에 들어서자마자 깊이 절망했다.
쥘리에트의 지척에 있는 로메로 궁까지 왔는데도 왕자의 따뜻하고 맑은 에테르가 느껴지지 않았다.
질 나쁜 속임수나 감쪽같은 마술처럼, 정말이지 흔적조차 없었다.
성기사의 본능은 자연히 좌절하고 슬퍼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예서 왕자는, 그녀의 파트너이기 이전에 친구였다.
“그런데 편지와 선물을 막으신 건 이유를 모르겠네요.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황족의 뜻은 논할 필요가 없어.”
태자가 으르렁거렸다.
이어 그의 에테르가 사납게 날뛰며 크리스텔을 위협하고 겁박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간신히 그의 뜨거운 도발을 버티는 가운데 오만상을 썼다. 이상했다.
태자는 명백히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었고 이건 그답지 않았다.
아무리 보름이나 왕자님의 에테르를 받지 못했다지만······.
“역시 그날 뭐가 있었던 거죠?”
크리스텔이 고개를 기울이며 태자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 또한, 중간에 잠깐 의식을 되찾았을 무렵 본 것이 있었다.
그러나 헛것인지 참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치 찰나였다. 그래서 더 신경 쓰였다.
어쩐지 목이 타고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본 것을, 짝꿍이나 짝꿍의 짝꿍도 보았는지 궁금했다.
시커먼 구멍 너머, 한국으로 보이는 어느 집의 베란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