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18)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18화(18/920)
#018 공작가가 수상하다 (4)
“오늘은 사르네즈 영주성까지 들어가는 거지?”
내 물음에 소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처럼 소리소문 없이 내 방을 야습한 세이디는, 조금 전부터 떡갈나무 서랍장 위에 올라가 종종거리는 레서판다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나는 서클을 통해 소년에게 천천히 에테르를 흘려보내며 질문을 더했다.
“들키면 큰일 나는 거 아니야? 너 내일부터 안 오면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되냐?”
그제야 세이디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렌지색 눈동자가 자신만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신수들이 영주성에서 신물을 감지하면, 내일부터는 그대를 만날 일 없어.”
“그러니까 그게 쉽냐는 거지.”
내가 핀잔을 주었다.
이 꼬맹이는 영주성 가까이에 갔다가 사르네즈 공작의 사병들에게 붙잡히거나, 공격을 받아 죽는 일 따위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그런 일이 절대 생기지 않을 것임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폐하께서 외부 신관을 초빙하신다더라. 엘리자베트 경이 말해줬어. 그냥 그쪽에 부탁하면 안 돼?”
“······부근위대장이 그런 식으로 설명했나?”
소년의 눈이 가늘어졌다. 취조하는 듯한 분위기에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내가 그럴 계획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하던데.”
세이디가 코웃음을 쳤다.
소년이 답을 내놓지도, 고집을 꺾을 것 같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이야기를 잇는 대신 서랍장 위의 레서판다를 바라보았다.
껍질을 벗긴 자몽 한 조각을 내밀자, 녀석이 코끝을 실룩이더니 천천히 카펫 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끼이!
“옳지.”
나를 똑바로 보며 다가온 녀석의 꼬리가 핫도그처럼 토실토실했다.
레서판다는 가볍게 자몽의 냄새를 맡고는, 또 한 입에 꿀꺽 넣고 열심히 깨무는 작업을 시작했다.
의외로 씁쓸한 맛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발밑에 손가락만 한 맨드라미를 피우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러고 있자 세이디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소년과 시선만 마주했다.
숯검정처럼 진한 눈썹 아래, 두 눈이 조금 당황한 것도 같았다.
“신수는 음식을 먹지 않아. 에테르로 충분할 텐데.”
아······. 그랬냐.
“글쎄, 주니까 먹던데.”
내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다시 내려다본 작은 신수는, 우리의 대화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자몽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신수라고 다 똑같진 않겠지. 이 녀석은 먹을 걸 좋아하나 봐.”
“······.”
“그래서 혼자 대낮부터 깨 있었나?”
똑같은 에테르로 봉인했는데, 홀로 잠에서 깨어 정원을 돌아다녔다면 배고픈 것밖에 이유가 더 있겠는가.
심지어 이 녀석은 세 마리의 신수 중 가장 덩치가 작다고 들었다.
에테르든 뭐든, 다른 두 놈에게 밀려 덜 먹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느새 자몽 한 조각을 해치운 레서판다가 내 손바닥에 고개를 박고 수염을 꼼질거렸다.
누가 봐도 더 달라는 뜻이었다.
“세이디, 너도 먹을래?”
소년이 나를 간단하게 무시했다.
녀석의 인성에 놀란 게 한두 번도 아니었으므로 나는 레서판다에게만 자몽을 몇 조각 더 물려주었다.
세이디가 내 에테르를 받아 채우고, 레서판다는 과일로 배를 채우는 시간이 십여 분 정도 이어졌다.
“만약 이 녀석들이 영주성 근처에서도 신물을 감지해내지 못하면, 그땐 어떡하려고?”
“공작가의 해명을 들어봐야겠지.”
신물, ‘창해의 축복’이 사르네즈에 없을 경우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꼬맹이의 눈빛이 단호했다.
세이디는 종종 또래 아이들에게서 보기 힘든 권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말투도 그렇고, 정말로 높은 집안의 귀한 공자님일지도 몰랐다.
“출발할 때가 됐군.”
어느새 소년의 몸에서, 새끼손톱보다 작은 황금빛 알갱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둥실둥실하는 에테르 구슬의 자태는 언제 봐도 신기했다.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세이디는 완충된 핸드폰 충전기를 뽑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곤 했다.
“일이 잘 풀려서, 앞으로 볼 일 없었으면 좋겠네.”
발코니로 향하는 꼬맹이의 뒤를 따르며 내가 말했다.
밤늦게 돌아다닐 일이 없는 게 어린아이에게는 당연히 훨씬 좋았다.
세이디는 커다란 로브를 뒤집어쓰고도 가벼운 몸놀림으로 훌쩍, 난간에 올라섰다.
귀를 팔락거리던 레서판다 역시 떠나는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아장아장 몸을 이쪽으로 움직였다.
“······봄 무도회에는 불참하는 건가?”
“어, 고해 받느라 바쁠 예정이야. 그래도 초청장은 보내주시더라.”
나는 씩 웃으며 레서판다의 귀 사이를 부드럽게 문질러주었다.
세이디는 그런 나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왼팔을 허공에 뻗었다.
그런데 저 녀석도 봄 무도회에 가는 건가?
-딱!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일었다.
깜짝 놀란 나머지 잡념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소년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너······.”
아이의 주황색 눈동자와 같은 빛깔의 화염이, 엄지와 검지 끄트머리에서 주먹만 한 크기로 타오르고 있었다.
세이디의 능력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몰랐다.
어둠을 밝히는 황홀함에, 나는 할 말을 잊고 우두커니 섰다.
-끄르르르
꽃불에 먼저 반응한 것은 레서판다였다.
녀석은 뒷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홀짝 일어서더니, 두 앞발을 내둘러 난간을 붙들었다.
세이디가 따로 명령을 하지 않았는데도 녀석의 발끝에서는 제법 굵직한 나뭇가지가 뻗어 나왔다.
상성이 맞는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보다.
“불 속성이 대지 속성보다 강한 거야?”
“보다시피.”
아주 조금이지만, 꼬마는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자신이 레서판다보다 강하다는 사실이 맘에 든 건지, 아니면 그저 능력을 쓰는 게 좋은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럼.”
-꾸르르!
내가 무슨 말을 더 꺼내기도 전에, 세이디는 발코니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연붉은 불길과 노릇한 에테르 입자가 밤공기 사이를 길게 가르며 멀어졌다.
화닥닥 시선을 낮춰보니, 레서판다는 이미 1층으로 내려가고 없었다.
에테르의 힘으로 막 태어난 나뭇잎이 흔들거렸다.
“화려한 안녕이네.”
내가 중얼거렸다.
귀여운 레서판다와, 그것보단 덜 귀엽지만 아역배우처럼 잘생긴 꼬마는 그렇게 쥘리에트 궁을 떠났다.
*
나흘 후.
가나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황제궁을 나오니, 뱅자맹이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님. 쥘리에트 궁을 비우신 사이, 이자벨 드 사르네즈 공작 부인으로부터 정식으로 알현 요청이 왔었습니다.”
“그래요?”
마차에 오르던 내가 멈칫했다.
오늘은 오렐리 부티에 추기경과의 오전 과외가 잡혀 있는 날이었다.
평소처럼 나를 험하게 굴리며 ‘이론보다 실전’을 몸소 실천한 그녀는, 너덜너덜해진 내가 안쓰러웠는지 수업 후 호화로운 오찬을 대접해주었다.
내가 그 당근과 채찍의 격차에 몸서리치는 동안 공작 부인이 독대를 청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당장 오늘 오후에 뵙고 싶다고 하기에 왕자님의 일정이 꽉 차 있어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왕자님께서 황제궁에 오신 것을 아는 이들이 많아, 편찮으시다는 핑계는 댈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잘하셨어요.”
내가 손사래 쳤다.
아침에 멀쩡한 낯으로 추기경의 가르침을 받으러 간 왕자가 갑자기 아프다고 하면 거짓말로 여길 테니, 더 그럴듯한 구실을 내세운 모양이었다.
그러자 가나엘이 입을 비죽 내밀었다.
“별 이유 없이 거절하셔도 이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왕자님을 상대로 당일 오전에 알현 신청을 하다니, 무례해요.”
“잊어버려, 가나엘.”
어차피 안 만나줄 건데 뭐 어때. 내가 뒷말을 삼키며 싱긋 웃었다.
배알하고 싶다는 편지는 그저 인사치레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다는 게 조금 의외이긴 했다.
“신전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왕자님.”
마차 문을 닫기 전, 황궁의 마부가 목적지를 알리며 절을 올렸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오후의 봄볕이 눈부셨다.
드넓은 황궁 곳곳이 다채로운 꽃과 나무로 한껏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어딜 살펴도 내일모레 있을 봄 무도회를 준비하는 인력이 그득했다.
구석구석 바쁘지 않은 곳이 없어 보였다.
하얀 천으로 감싼 가구를 들고 나르던 몇몇 사람들은, 우리가 탄 마차를 보더니 바닥에 물건을 내려놓고 허리를 숙였다.
내가 그들에게 묵례로 응답할 때였다.
“이제 안 오는 걸까요?”
어딘가 시무룩한 가나엘의 목소리에, 나는 아이를 돌아보았다.
벌꿀색 눈동자가 처져 있었다.
“신수님요.”
“음, 그런가 봐. 며칠째 아무 일도 없었으니.”
내가 대답했다.
엊그저께 내 방을 나선 세이디와 레서판다는, 그 후로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무사히 ‘창해의 축복’에 도달했지 싶었다.
“잘된 거야. 신물의 곁을 지키는 게 신수에게도 좋다고 하니까.”
뱅자맹과 가나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간밤에 신수가 궁을 떠났다는 내 말에, 못내 서운한 티를 감추지 못하던 며칠 전의 두 사람이 떠올라 작게 웃음이 터졌다.
“신수를 돕고 보살펴준 자에게는, 행운을 얻고 저주를 쫓는 힘이 생긴다고 합니다. 왕자님께서도 그런 축복을 받으실 겁니다.”
“하하, 말씀만으로도 기분 좋네요.”
뱅자맹의 덕담에 내 입가가 더 크게 벌어졌다.
행운을 얻으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베라가 벌써 피었군요. 정원사들이 수고가 많았겠습니다.”
뱅자맹이 창밖으로 손짓했다.
아는 꽃이 별로 없는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그가 친절하게 한 곳을 짚어주었다.
불꽃처럼 선명한 주황색 송이들이 눈에 띄었다.
······그 녀석은 무사한 거겠지?
“신전에 도착했습니다, 왕자님.”
가나엘의 목소리가 나를 상념에서 깨웠다.
이내 흔들림이 멎고, 마부가 재바른 동작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
“그럼, 저희는 신관실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힘내세요, 왕자님!”
가나엘이 내게 피크닉 바구니를 안겨주며 활짝 웃었다.
신수님이 안 와요, 하면서 울상 지을 때는 언제고 회복이 참 빨랐다.
나는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고해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고해 가능합니다’ 팻말을 걸어놓고, 푹신한 의자에 앉으니 그제야 사위가 고요해졌다.
새삼 이것이 나의 새로운 일상이구나 싶었다.
빙의했지만 서브 남주 역할은 과감히 내다버린, 슬기로운 볼모 생활.
“아직도 안 고쳤네.”
나는 여전히 끝이 잘려 있는 왼쪽의 줄과, 구멍이 뻥 뚫린 오른쪽의 나무창을 번갈아 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봄 무도회가 코앞이니 신전에 투입할 손이 없는 것도 이해가 갔다.
-끼이이익······
그때, 어딘가 음산한 소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정문이나 신관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저 멀리, 신전의 뒤편에서 들려오는 기척.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삼켰다.
-또각, 또각, 또각······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가벼운 구두소리였다.
신전 뒤쪽에서부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오는 사람의 궤적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길 뒷문으로 드나들 사람이 누가 있지?
뱅자맹, 가나엘, 엘리자베트 경과 추기경,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의 얼굴이 차례로 눈앞을 스쳐갔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아닌 것 같았다.
-또각.
오싹했다. 어느덧 발걸음은 내가 있는 고해소 앞에서 멈춰 있었다.
더 망설이지 않고 서클을 전개하는 순간,
-달칵
나는 지레 놀라서 푸드덕거렸다.
옆 칸의 문이 열리고, 고백자의 자리에 들어서는 그림자가 보였다.
쪽팔림이 쓰나미처럼 나를 덮쳐왔다.
“환영합니다, 신자님. 마지막 고해는 언제 하셨습니까?”
그래서 공격적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성소를 연 것은, 쫄아서가 아니라 오직 고해를 받기 위함이었음을 어필하고자 했다.
“고해하러 온 건 아닙니다.”
그러자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고해소를 울렸다. 이유도 없이 가슴이 철렁했다.
누가 들어도 귓가에 꽂히는 음성이라고 일컬을 법한, 매력적인 울림이었다.
“제 어머니의 알현 요청이 거절당했다고 들어서요. 일대일로 다시 부탁드리고자 왔습니다.”
“······.”
여자가 머리에 뒤집어쓴 로브를 벗는 것이 보였다.
세상이 슬로모션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드디어, 이곳을 고쳐놓지 않은 황궁의 목수들을 원망했다.
훤히 뚫린 나무창 틈으로 그녀의 옆얼굴이 보였다.
탐스럽게 물결치는 분홍색 머리칼. 총명하게 반짝이는 청회색의 눈동자.
크리스텔 드 사르네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