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191)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191화(191/920)
#191 시계 종이 여러 번 울릴 때 (2)
해름이었다.
-부스럭, 부스스······
‘여인’은 비틀거리며 드넓은 잔디밭 위에 섰다.
어렵사리 들고 온 바구니는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이제는 정말로 숨을 쉬기가 쉽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무릎이 고꾸라질 듯했으나 버텨 보기로 했다.
견디는 힘이야말로 그녀 영혼의 일부였으므로.
“헉, 허억, 윽······.”
허탈하고, 허망하며, 헛되도다. 그런 텅 빈 문장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육신이 한계를 호소하고 있었다.
주인을 닮아 안온한 서남부의 작은 영지에는, 찬바람이 불지 않았다.
춥지 않은 곳에서 마지막을 맞는 것은 ‘고아’에게 최고의 호사일지 모른다.
빈손으로 와서 맨몸으로 떠나가는 삶이었다.
자신뿐 아니라 광대패의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외로운 죽음은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한데 왜 이리 허무한가.
짧은 세월, 대관절 무엇을 위해 그토록 몸이 부서져라 살았나.
“하. 하하하······.”
여인은 목전에 펼쳐진 광경으로 헛숨을 뱉었다.
리에스테르 제국은 부강한 땅이었다.
현 황제는 백성을 친애하는 자였으며 굳건한 권위를 자랑했다.
제국의 바닥을 사는 광대일지라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들어 알았고, 배워 익혔다.
그러나 황제는 너무나 높은 곳에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흠이었다.
아무리 아랫것들을 사랑하고 노력해도, 군주가 영토의 모든 모퉁이와 구석과 틈을 샅샅이 훑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임금은 인간이지 주신이 아니었다.
“아니, 아니지.”
여인이 중얼거렸다. 오히려 주신이었다면 자신에게 더 냉혹했을지 모른다.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대륙의 유일신은 때로 치가 떨릴 만큼 잔인했다.
“······왜 그리 열심히 기도했을까.”
복수에 성공하지도, 목숨처럼 소중한 이를 지키지도 못했다.
돌이켜보니 살면서 주신의 은혜를 입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랬다면 인생의 끝이, 이렇게 가뭄 든 대지처럼 쩍쩍 갈라질 리 없으니까.
-꽥꽥, 끼루룩!
가까이에서 기러기 떼가 뒤뚱거리며 젖은 발을 털었다. 그 모습이 내심 부러웠다.
여인은 우두커니 서서 욕심껏 다른 존재의 온기를 눈에 담았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도둑질이었다.
그리고 최후를 기다렸다.
*
석양이 넘어간 지평선 근처가 남보라로 물들었다.
어느덧 천공에는 별이 총총 박혀 있었다.
-다그닥, 다각, 다각!
“저기 보입니다, 왕자님. 후작령 신전이에요!”
크리스텔이 마차 창밖을 가리켰다. 나는 율리터의 머리장식을 세게 쥐었다.
우리는 몇 시간 전 쥘리에트 궁에서 정신없이 출발했다.
마차에 뛰어들고 포털에 올랐다 내려오기 바빠, 장식을 상자에 넣을 틈도 없었다.
급한 대로 크리스털 종이 든 안주머니에 소중히 챙겼다.
연락도 없이 황실 마차가 나타나자, 신전을 지키던 두 기사가 깜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워어, 워!”
-히히힝!
세레니테 후작령 어귀에 긴 행렬이 신속히 늘어섰다.
우리는 마부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구르듯 하차했다.
뚝심이도 함께였는데, 녀석은 삽시에 하늘로 솟아올라 모습을 감추었다.
우리의 면면을 확인한 기사 하나가 영주성 방향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시종 총괄인 샹탈에게 말을 전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후닥닥 절을 올렸다.
“세, 세드리크 황태자 전하와 예서 페네티안 후작님을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저기, 그림은 어디 있습니까? 조안의 신작 말입니다. <달의 초상>요.”
내가 급히 물었다. 기사가 대답하려는데,
“어? 꽃송이 후작님 아니야!”
작다란 신전의 주랑 끝에서 반가운 낯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녀를 감시하던 병사 두엇이 우리를 향해 헐레벌떡 묵례했다.
“추워서 내려왔어?”
몰락한 아스 남작가의 첫째, 조안 드 아스였다.
머리를 감싼 화려한 천이 겨울을 맞아 두꺼워졌고, 뺨과 손이 물감으로 얼룩덜룩하다는 것 외에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잘 먹고 잘 지냈는지 연갈색 피부가 건강한 빛으로 반짝거렸다.
기름 냄새를 풍기며 건들건들 팔을 흔들던 그녀는, 뒤늦게 세드리크 태자를 발견하고 식겁해서 엎드렸다.
저 얼굴을 이제 인지한 거냐!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네.”
“······그림은 어디 있지?”
태자가 한숨을 삼키며 물었다.
녀석 또한 조안의 말도 안 되는 태도에 반쯤 적응한 듯했다.
그러자 조안이 고개를 번쩍 들고 우리를 기웃기웃 살폈다.
“내 그림 미리 보러 온 거예요? 후작님이 예술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어?”
‘에스키스 보내길 잘했네.’ 그녀가 꾸러기처럼 씩 웃었다.
하얀 물감이 잔뜩 묻은 얼굴은 황궁에 두고 온 애물단지 삼대장을 떠올리게 했다.
내가 대답 없이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조안이 머쓱하게 코를 훔쳤다.
“완성이야 다 했어. 로비에 걸어놨는데 공개 전에 수정할 수도 있고. 들어가면 바로 보여요.”
“안에 잘 있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나는 즉시 신전 기사에게 요청했다. 그가 믿음직하게 끄덕이고는 로비로 달려갔다.
엘리자베트 경이 턱짓하자 근위대원 일부가 동행했다.
“수상한 자는 없었나?”
부근위대장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가나엘은 피앙세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조안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입을 열었다.
“으음······. 누굴 찾는데? 여긴 신전이잖아. 아무나 온다고. 후작님이 신신당부를 해놓고 가서 진짜 신분 고하 안 가리고 자유롭게 드나들어. 내가 한창 후작님 그릴 때는 동네 사람 다 나와서 구경했다니까.”
“오늘 온 사람은요? 혼자였을 겁니다. 로브로 온몸을 감싼 여성이고, 키는 사르네즈 경만 합니다. 건강이 나쁠지도 모르고요.”
“글쎄. 엇!”
내 물음에 그녀가 입을 뻐끔거렸다. 불쑥 솟은 검지가 허공을 배회했다.
크리스텔은 고구마를 우유 없이 네 개쯤 연달아 먹은 표정으로 ‘뭔데요?’하고 물었다.
화가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게 근데······. 막 수상하진 않았어.”
“그건 우리가 판단할게!”
크리스텔이 격렬한 한국인의 반응을 보였다. 그때였다.
“전하! 후작님!”
로비에 갔던 신전 기사가 황급히 뛰쳐나왔다. 우리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가 고개를 깍듯이 숙이고 상황을 보고했다. 횃불에 아른거리는 낯이 창백했다.
“다, <달의 초상>이 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누군가 작품을 옮기려다 실패한 듯합니다. 현장엔 범인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피가 고여 있습니다. 혈흔은 뒷문까지 이어져 있고, 현재 근위대원들이 신전 주변을 수색 중입니다.”
크리스텔과 나, 태자의 눈길이 빠르게 맞물렸다.
조안이 ‘내 역작!’ 하며 안으로 뛰어갔다. 엘리자베트 경이 재깍 손짓했다.
“두 분의 호위는 나와 헤인스 경이 맡는다. 너희 전원은 빅투아르를 쫓고, 자넨 영주성으로 가서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해. 한 방울의 핏자국도 놓치지 마라!”
“알겠습니다!”
“예, 부근위대장님!”
근위대가 횃불잡이 몇을 따라 와르르 흩어졌다.
우리는 대화하지 않고도 한몸처럼 움직였다.
잽싸게 신전 로비로 들어서자, 바닥에 점점이 뿌려진 핏자국이 보였다.
요한 경이 허리 숙여 혈액을 자세히 관찰했다. 나는 서둘러 그에게 속삭였다.
“요한 경, 이번엔 맛보시면 안 됩니다. 그러다 병에 걸릴 수도 있잖아요.”
“하하. 명심할게요.”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체 고급 용병으로 살면서 무슨 일을 겪은 건지 모르겠다.
눈길을 돌리자, 크리스텔이 조안을 향해 넋 놓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청년 예술가는 자신의 그림 테두리를 쓰다듬으며 안도하고 있었다.
모나리자 정도의 크기일 줄 알았는데, 캔버스 높이가 무슨 태자만 했다!
“큰일 날 뻔했다고, 내가 간만에 공들인 작품인데. 찢어지거나 긁혔어 봐!”
“······다행이네요.”
내가 겨우 답했다.
조안의 새 그림, <달의 초상>은 일전에 받아본 초화와 차원이 다른 완성작이었다.
금빛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시선이 마주치는 보라색 눈동자는 신비로울 만치 생기가 넘쳤다.
조안 앞에서 환하게 웃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저런 표정을 어떻게 상상하고 그렸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엄밀히는 내 얼굴이 아닌데도 이렇게 보니 무진장 민망했다······.
“소장 각이다. 너무 이쁘다.”
크리스텔이 홀린 듯이 중얼댔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예?”
“저한테 팔아요, 아스 씨.”
크리스텔이 단호하게 말했다. 조안이 레몬색 눈동자를 끔뻑였다.
나는 즉각 손을 내저었다.
“사르네즈 경, 여기 온 본분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마담 빅투아르를 잡으려고,”
“옛말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예쁜 건 비싸도 사라. 훗날 후회하더라도 예쁜 게 남는다.”
방금 지어냈잖아!
“화통하시다.”
“저런 면은 본받으면 안 돼, 가나엘. 다들 집중하십시오. 조안이 의심쩍은 자를 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진술을 계속 들어야죠.”
내가 두 아이를 차분히 타일렀다.
조안이 캔버스 끄트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는지 기억이 안 나.”
“아, 시드르 가져올걸.”
크리스텔이 탄식했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누굴 봤는데 아주 수상하진 않았다고 했습니다.”
“맞아! 그래. 구멍 숭숭 난 로브를 뒤집어쓰고 비척거리면서 오길래, 병사들이 신자석까지 부축도 해줬어. 그게 두어 시간 전이야. 많이 아파서 기도하러 왔나 했는데,”
-삐삐삐이!
그때, 뚝심이가 요란하게 울며 실내로 날아들었다.
녀석은 태자의 어깨에 앉아 콩콩 뛰다가, 크리스텔의 팔뚝에서 꼬리를 흔들다가, 마지막으로 내 손금에 착지해 마구 떠들었다.
꼬마의 조그마한 가슴이 바쁘게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진정해, 뚝심. 너 그러다 터지겠다. 왜 그래?”
-삐르르르, 삐삐삐, 삐르르!
내가 녀석의 뱃살을 엄지로 살살 쓸어주었다.
까만 눈동자가 열심히 나를 보며 빤짝였다. 설마.
“빅투아르를 찾기라도 한 거야?”
-삐뽀!
샛노란 부리 안쪽이 힘껏 벌어졌다. 정답!
“요한 경.”
“맡겨주세요.”
내가 다급히 이름을 부르자, 그가 순식간에 말뜻을 이해하고 답을 내놓았다.
민트색 눈매가 휘어짐과 동시에 따스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
······이건 진짜 말도 안 된다.
-펄럭, 펄럭!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후작님, 전혀 안 무겁습니다! 깃털처럼 가벼워요!”
“잘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꾹 닫았다.
그리고 밤하늘의 아무 곳이나 바라보며 얌전히 안겨 있었다.
그래. <퇴사했더니 이계 공녀>의 주인공인 크리스텔 드 사르네즈 씨에게 ‘안겨 있었다’!
난 지금껏 뚝심이가 비렴의 방주로 변하면, 다른 이와 함께 날기 위해 내가 직접 상대를 끌거나 들어 올려야 하는 줄 알았다.
방주가 공기 저항을 확 줄여주긴 하지만 내 힘도 제법 필요한 일이라 믿었다.
그런데 물리 법칙을 무시하고 한 쪽의 날개로 나는 신물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인제 보니, 그냥 나와 떨어지지 않기만 하면 누구든 비행이 가능했다.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안으면 쉽게 날 수 있지 않을까요?’
‘네, 해보겠습니다.’
크리스텔이 제안하기에, 당연히 내가 그녀를 안고 비행하는 쪽이라 생각했다.
결과물은 정반대였다.
뚝심이의 비행 원리를 전혀 모르면서 이런 의견을 낸 크리스텔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날개는 나한테 달렸는데 주인공이 허공답보를 해······.
“흐하하학!”
엘리자베트 경은 이제 폭소를 숨기지도 않았다.
요한 경의 힘으로 비행 중인 소백작과 태자는 산책 나온 것처럼 여유로웠다.
이 파티에서 부끄러운 건 나뿐이었다. 크리스텔이 나를 보며 별님처럼 곱게 웃었다.
뚝심이가 아니라 내 얼굴이 먼저 터지게 생겼다.
-휘이이잉!
그 순간, 방주가 급강하했다. 크리스텔이 기분 좋은 비명을 질렀다.
나는 재빨리 지상을 확인했다. 빅투아르가 있다는 목적지 역시 눈에 익은 곳이었다.
영주성 뒤편, 커다란 호수가 있는 작은 언덕. 우리가 소풍을 나왔던 장소.
그 한복판에 작고 위태로운 인영 하나가 서 있었다.
“피 냄새가 나네요.”
요한 경이 말했다. 우리는 날쌔게 잔디밭에 착지했다.
크리스텔이 조심스레 나를 내려주었다. 그러자 ‘여인’의 등이 여상히 반응했다.
“오셨습니까.”
낡은 로브와 긴 머리칼이 잔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크리스텔을 흉내 냈을 때와는 다르지만, 여전히 맑고 어린 목소리였다.
나는 쓴웃음으로 답했다.
“네. 많이 지치신 듯싶어서요.”
“······.”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폼 할머니.”
“허허허.”
내 말에 여인이 잔잔히 웃기 시작했다.
낭랑하던 음색이 점차 거칠어지고, 꼿꼿하던 허리는 느릿느릿 굽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숨죽여 응시했다.
‘콜록, 콜록!’ 걸걸한 기침으로 들썩이던 몸은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멎었다.
그녀가 야윈 목을 움직여 천천히 우리를 돌아보았다.
달빛 아래, 주름진 눈가가 낯설지 않았다.
“사과를 챙겨왔는데······. 후작님처럼 예쁜 과일이라오. 한입 드셔보시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