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20)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20화(20/920)
#020 니가 왜 거기서 나와 (2)
어지간하면 뱅자맹과 가나엘에게는 이런 사정을 터놓을 일이 없기를 바랐다.
두 사람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들에게 상담할 만한 사건이 벌어지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최대한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냥, 볼모 겸 성직자로.
그런데 혼자 힘으로는 한계가 뚜렷했다.
크리스텔이 등장하자마자 나는 저항할 새도 없이 그녀의 서사에 휘말렸다.
마치 작은 시계부속처럼, 주인공의 거대한 이야기에 맞물려 돌아가는 주변의 감각이 선득했다.
오늘의 자리는, 그래서 마련된 것이었다. 내 ‘측근’들에게 손을 벌리기 위해서.
“사르네즈 공작 부인이 추기경 전하께 고해하지 못한다는 건, 아마 국혼 문제 때문일 겁니다.”
뱅자맹이 우아하게 나이프를 움직이며 말했다.
나는 블랑케트 드 보의 송아지 고기를 건져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와 뱅자맹, 가나엘은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자고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려면 식사를 함께해야 한다고 배운 내 고집의 결과였다.
지난번 뱅자맹에게 내린 ‘왕자와 삼시세끼’ 보속은 진작에 다 써버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
“세드리크 황자 전하와 크리스텔 공녀의 혼담 말인가요?”
“그걸 아시는군요, 왕자님.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소문인데요.”
내가 되묻자 가나엘이 놀란 눈을 했다. 나는 스푼을 들고 열없이 웃었다.
너도 로판 읽는 동생 있으면 많은 걸 알게 된다는 소리가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갔다.
뱅자맹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 썬 샤토브리앙 접시를 내 것과 바꿔주었다.
중년의 천사······.
“한때, 사르네즈 공작령에서 보호하는 ‘창해의 축복’이 두 분의 결혼 예물이 될 거라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부티에 추기경 전하께서는 황자 전하의 대모이시니, 그 부분을 당연히 알고 계실 겁니다.”
예물이었구나. 그래서 신물이 ‘퇴계공’ 표지에 나온 거였어.
부지런히 포크질을 하다가도, 뱅자맹과 가나엘이 전해주는 정보를 듣고 있으면 놀라움에 손을 뚝 멈추게 됐다.
두 사람에게 고해소에서 있었던 일을 밝힌 건 현명한 선택 같았다.
벌써 의문이 하나 풀렸지 않은가.
“예물을 함부로 가져다 쓰고 추기경 전하께 고해하면, 혼담이 잘못 흘러갈 수도 있겠네요.”
“네, 추기경 전하와 황제 폐하께선 한마음 한뜻으로 행동하시니까요.”
내 말을 가나엘이 맞받았다.
황제의 ‘정치적 반려’, 알렉상드르 국서는 황자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황제가 아들의 국혼을 논의하고, 혼주석을 공유할 사람은 그녀의 ‘종교적 반려’인 부티에 추기경뿐이었다.
“그리고 미래의 사돈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신물을 사용한 대죄를 덮으려 한다는 말도 나올 겁니다.”
뱅자맹이 나직하게 말했다.
공작 부인이 추기경을 만나는 게 ‘정치적인 행동’이 될 거라던 크리스텔의 말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순수한 신앙심으로 고해하고 싶으니 인척이 될 사람은 피하겠다는 의지였다.
“황도에는 대주교도 있고, 다른 주교도 많을 텐데 굳이 저를 만나겠다는 건······.”
역시 아무 상관없는 외국인이 제일 마음 편하다는 뜻인가.
“왕자님은 왕족 신관이시잖아요. 죄가 죄인 만큼, 가장 고결하신 분께 고백하겠다는 것 같습니다.”
가나엘이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황금색 눈동자가 왜인지 뿌듯해보였다.
이런 말을 들으려고 꺼낸 소리가 아닌지라, 나는 민망해져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 소식을 제가 추기경 전하께 알릴······. 필요는 없겠죠?”
뱅자맹이 포크를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제발 그렇다고 말해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나도 내일모레면 서른인데, 곁에 의지할 만한 어른이 있으니 자연스레 지지를 구하게 됐다.
두 주인공이 모두 얽힌 일에 발끝이라도 담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저는, 왕자님께서 나서지 않으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코끝에서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결국 황실과 공작가라는 두 집안의 일입니다. 예물의 문제를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으니, 폐하와 추기경 전하께서 진실을 알아내시는 것도 시간문제지요. 양가의 어른들이 잘 해결하실 겁니다.”
뱅자맹은 친절하게도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가나엘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 황자 전하께서 사나흘 전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로메로 궁 시종들 말로는 봄 무도회에 불참하실지도 모른대요. 어쩌면 이미 ‘창해의 축복’ 소식을 접하신 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뱅자맹이 동의하는 걸 보니, 상황이 꽤 그럴듯해 보였다.
당사자들이 이미 사태를 파악하고 있다면 굳이 내가 나서서 아는 체를 할 이유는 없었다.
일단 부담 하나는 던 셈이다.
“그나저나 크리스텔 공녀가 참으로 대담하네요. 직접 말을 전하기 위해 황궁 신전에 잠입하다니, 쓰러지기 전의 공녀와는 다른 사람 같아요.”
가나엘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중대 스포일러를 입에 올렸다.
나는 떨리는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 냅킨으로 하관을 가렸다.
그야, 그 몸에 다른 사람이 빙의했으니까.
그러자 묵묵히 듣고 있던 뱅자맹이 소년의 의견을 뒷받침했다.
“3년 전의 크리스텔 공녀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유명했습니다. 영주성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고, 자기표현에도 서툴러 사르네즈 공작의 걱정이 컸지요. 성인식과 동시에 사교계 데뷔를 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이건 또 처음 듣는 설정이었다.
은서는 ‘퇴사한 직장인이 빙의된’ 크리스텔에 관해 재잘거렸을 뿐, ‘진짜’ 크리스텔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말한 적이 없었다.
가만 보니 두 크리스텔의 성격 차가 상당한 것 같았다.
나는 디저트로 올라온 담 블랑슈를 크게 한 입 떠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한사코 대화를 거절하자 곧장 능력을 선보이던 쇼맨십이나, 몇 차례 허술함을 노출하면서도 마지막까지 할 말을 쏟아 붓던 모습.
그녀는 한눈에 봐도 주인공 같은······.
‘경계의 신전에서 사라진 신물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어요.’
‘뭐라고요?’
아, 맞다. 그게 있었지.
“다른 신물 얘기도 하더라고요.”
두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경계의 신전’에서 사라진 신물에 관해, 제게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
분위기가 단숨에 흐려졌다.
가나엘은 미간을 찡그렸고, 뱅자맹은 누가 봐도 불쾌한 표정이었다.
처음 보는 낯에 나까지 덩달아 마음이 가라앉았다.
“공작 부인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요. 추기경 전하께서 직접 왕자님의 결백을 선언하셨는데, 어떤 말을 얹겠다는 건지.”
“왕자님이 그 곤경에서 벗어나신 지 얼마나 됐다고, 먼저 언급을 하다니······.”
두 사람이 차례로 한 마디씩 불만을 터뜨렸다.
대충 해석하자면, 그 사건을 미끼삼아 나를 만나고자 하는 게 무척 무례하다는 뜻 같았다.
나로서는 전혀 짐작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저는, 공작 부인이 범인에 대한 단서라도 제공할 생각인가 했습니다. 아니면 그 신물도 자기가 훔쳤다고 고해하려나 했죠.”
내 말에 뱅자맹이 잔을 집어 들었다.
가나엘이 앓는 소리를 내며 그에게 탄산수를 따라주었다.
나는 진짜 별 생각 없는데 둘만 고구마를 먹은 모양새였다.
“전자라면 황실 근위대나 제국군을 찾아갈 일입니다.”
“후자라면, 왕자님이 들어주실 것도 없죠. 부인은 신벌(神罰)을 받게 될 테니까요.”
두 사람이 나를 다그치다시피 했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닫고 두 번째 디저트로 손을 옮겼다.
어디서 많이 겪어본 상황이다 싶었는데, 가끔 형과 은서가 합심해서 나를 이렇게 꾸중하곤 했다.
“그래서, 모레 어떻게 할 계획이세요? 공작 부인을 만나러 가실 겁니까?”
따뜻하게 나온 샤를로트를 디저트 나이프로 자르고 있으니, 가나엘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는 즉각 고개를 내저었다.
“공작 부인을 만나려면 봄 무도회에 가야 하는데, 절대 그러고 싶진 않아. 신전에서 도둑맞은 신물 이야기가 좀 궁금하긴 해도, 어차피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고.”
나는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격언을 좋아하지 않았다.
딱 한 번 못 피해서 주인공을 만나긴 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은 계속 피할 셈이었다.
그거 잠깐 대면했다고 흔들릴 결심이었으면 처음부터 서브 남주를 때려치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인공이 중심이 될 행사에 얼굴을 비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단호한 내 태도에 뱅자맹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나엘은 잘 생각하셨다며, 디저트까지 드셨으니 다시 고기를 들이겠다고 말했다.
알찬 식사였다.
*
“죽겠다, 집에 가고 싶어······.”
엘리자베트가 소파에 엎어져 죽는 소리를 했다.
작년 여름 부근위대장의 자리에 오를 때만 해도, 그녀는 ‘봄 무도회는 주신께서 대륙에 내리신 지옥’, ‘봄이 그렇게도 좋냐, 멍청이 귀족들아’ 하는 선임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봄 무도회를 하루 앞둔 시점이 되니, 그 모든 탄식이 뼈와 살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내년에도 이 난리를 겪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할 일이, 정말 너무 많았다.
“세이디, 내가 근위대 들어간다고 할 때 말렸어야지······.”
“입궁한 지 두 시간도 안 됐을 텐데.”
황자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엘리자베트는 방석에 파묻고 있던 머리를 번쩍 들었다.
과로에 젖은 회색 눈동자가 부리부리했다.
“네가 출퇴근하는 공무원의 심정을 알아? 국가 행사에 소집된 기사의 심정을 아냐고······.”
“적당히 쉬었으면 나가도록.”
“나 방금 왔거든?”
그녀가 툴툴거리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맞은편에 착석한 세드리크의 안색은 여전히 조금 창백했다.
당장 내일이면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 앞에 서야 할 황자가, 에테르 부족으로 며칠째 골골거리고 있으니 시종들이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무도회 갈 수 있겠어?”
“그래.”
황자가 대답했다.
꽤 어릴 적부터 봐왔지만, 세드리크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면전에서 아프다거나 힘들다는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아마 황제 폐하나 추기경 전하 앞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엘리자베트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어차피 본론은 이것이기도 했다.
“공작가에서 답신은 왔고?”
세드리크가 대답 대신 가볍게 턱짓했다.
눈을 돌리니,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 봉투가 보였다.
“뭐래?”
엘리자베트는 글자라면 이제 꼴도 보기 싫었다.
지난 일주일 간 너무 많은 서류를 검토한 그녀는, 황자에게 당당히 세 줄 요약을 요구했다.
세드리크가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신물은 잘 있다더군.”
좀 심하게 축약된 것 같았지만, 사르네즈 공작의 입장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답변이었다.
“거짓말이잖아.”
엘리자베트의 단언에 세드리크가 고개를 까닥였다.
그는 닷새 전, 신수들을 이끌고 영주성의 지척까지 접근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감지해내지 못한 작은 짐승들이 자신의 발밑을 맴돌고, 수풀을 뒹굴던 모습을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공작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 영지에, 에테르를 지닌 보물은 없었으니까.
“얼굴을 보면 알 수 있겠지.”
그의 중저음이 오늘따라 묵직했다.
봄 무도회에 참석할 사르네즈 공작 부부와, 그들의 하나뿐인 딸.
내일 세 사람을 만나 직접 물으면 진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추기경과 황제가 동석하는 자리에서 감히 거짓을 고하진 못할 터였다.
세드리크는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똑똑
“들어와.”
황자의 응답에, 응접실 문이 열리고 시종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비드 카퓌송이었다.
“전하, 예서 왕자님께서 민들레차를 보내셨습니다.”
“······뭐?”
예상치 못한 이름과, 예상치 못한 명사의 조합이었다.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예서 왕자님께서요? 차는 갑자기 왜 보내셨답니까?”
“······전하께서 편찮으신 것을, 어떻게 아신 모양입니다.”
“······.”
“입단속이 미진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그 왕자는, 로메로 궁에서 세이지차를 보낸 것을 잊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직접 겪은 왕자의 성정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고작 민들레차 때문에 상념이 흐트러졌으나 썩 불쾌하지는 않았다.
“찻물을 올릴까요?”
카퓌송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세드리크가 무언의 긍정을 내놓았다.
부근위대장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