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200)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200화(200/920)
#200
보라색 튤립 (7)
“······하하.”
크리스텔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진짜입니다. 뭐든 말씀해 보십시오. 당연히 비밀도 지켜드릴 거예요.”
“네, 압니다.”
그저 재미있다고 느꼈을 뿐이다.
올봄만 해도 크리스텔을 피하겠다고 안간힘을 썼던 나인데, 그녀와 얽히지 않겠다고 몇 차례나 다짐했던 나인데.
이렇듯 나란히 어느 복도에 앉아서 속닥거리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심지어 나는 그녀의 제안대로 목을 가다듬고 있었다.
은서는 대화가 중요하다고 여러 번 강조했으니까.
나 역시 수첩이 아닌 누군가에게 속을 털어놓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상대가 크리스텔이라면, 이건 그냥 나만의 기대일 뿐이지만······.
이곳의 누구보다도 나를 이해해줄 것 같았다.
“별건 아닌데, 혼란스러워서요.”
나는 고백하듯 운을 뗐다. 청회색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내며 다음 문장을 기다렸다.
“여기 오고 나서 제가 정한 몇 가지 규칙이 있었습니다. 저만의 규칙요. 이런 건 하면 안 된다, 저런 것만 하자. 그렇게 결심한 부분들이 있었는데.”
“네.”
“그게 조금씩 무너졌습니다. 물론 돌이켜 보면······. 저도 원칙이 허물어지는 걸 진심으로 싫어하진 않았던 것 같고요.”
내가 입꼬리를 올리자, 크리스텔은 눈꼬리를 접었다.
그녀가 벽에 머리를 기대며 소곤거렸다.
“저도 왕자님하고 친해져서 기쁩니다. 다른 친구들이 많이 생긴 것도, 사방을 쏘다니면서 이상한 일을 겪는 것도 신나요. 항상.”
그 말엔 함박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역시 알고 있었다.
내가 모종의 이유로 자신을 비롯한 이들에게 선을 그었다는 것과, 언제부턴가 그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경계선은, 인제 흐려지다 못해 나조차 분간이 안 될 지경이었다.
“거기까진 좋았고,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앞날 때문에 마음이 복잡합니다.”
내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크리스텔이 나를 응시했다.
“저는······. 언젠가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곳 분들은 자연스럽게 제가 있는 미래를 말씀하세요. 어리석다고 여기셔도 할 말은 없지만, 전 거기까지 고려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럴 겨를도 없었고······.”
뒷말이 흐려졌다.
그래도 소리 내 말하니, 어지럽던 머릿속에 조금이나마 질서가 잡히고 눈앞이 또렷해졌다.
어쩌면 나는 이곳에서의 훗날을 의식적으로 기피했던 것일지 모른다.
그런 걸 구상할 여유는 없다고, 내 목숨 붙여놓기 바쁘다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며 생각하기를 거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원작을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붙들었다.
그것이 내 버팀목이 되고, 나침반 노릇을 해주길 바랐다.
실은 마음 한구석에서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그거 되게 외롭지 않으십니까? 쓸쓸한 기분 들고.”
그때 크리스텔이 물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릎을 세워 끌어안은 주인공이, 나를 향해 씩 웃고 있었다.
“저도 그랬습니다.”
“······.”
“솔직히 지금도 그래요. 이렇게 왕자님하고 오붓한 시간 보내고 있다가, 갑자기 내가 튕겨나가면 어떻게 될까. 예전 크리스텔의 기억이 돌아오고, 나는 당장이라도 여기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러면······. 그때를 대비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의문이 불쑥불쑥 듭니다.”
내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녀가 밝은 낯으로 말을 계속했다.
어떻게 저런 속을 토해내면서,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처음엔 횡재했다 싶었습니다. 예쁘고 어린 몸에서 깨어났으니까, 두 번째 인생 얻은 셈 치면 되겠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땡잡았구나. 그랬습니다.”
‘근데 이틀도 안 돼서 제가 얼마나 등신인지 알았어요.’ 크리스텔이 신랄하게 덧붙이고는 키들거렸다.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오래 앓아 기억을 잃은 귀공녀로 행세하고 있지만, 그녀는 이십 년도 훌쩍 넘게 한국인으로 살았다.
여기가 소설 속임을 초장에 인지한 나와는 기반부터 달랐다.
나는 주연들의 외모, 성향 등에 관해 들은 바가 있었고 원작의 흐름도 아주 대강은 알았다.
그걸 의지 삼아 정신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크리스텔은······.
“모르는 것투성이, 모르는 얼굴투성이, 음식도 동네도 전부 다 낯선 것들. 그런데 적응은 해야 하고, 와중에 주변에서 기대하는 것도 많고, 모두가 저를 아는 양 대하고. 그게 참 힘들었습니다. 늘 배부르고 등 따수운 부잣집 아가씨인데도······.”
그녀는 여기서 철저히 혼자였다. 그냥 난데없이 별세상에 떨어졌다.
게다가 깨어났을 때는 익숙지 않은 초능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물의 힘, ‘창해의 축복’.
“경은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내가 겨우 물었다. 목이 잠겼는데도 크리스텔은 단박에 내 질문을 포착해냈다.
고운 입술이 거침없이 열렸다.
“무데뽀 정신이죠.”
기어코 헛웃음이 흘렀다.
저건 일본어에서 유래한 말이니까, 알아들은 티를 내면 안 되는데 참기가 힘들었다.
크리스텔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했다.
“될 대로 돼라.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 그런 자세가 은근히 큰 힘을 줘요. 왕자님께도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면 현재에 집중할 수 있거든요. 어려운 문제에 너무 골몰하지 않아도 됩니다.”
“······.”
내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가 허공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요. 내가 5초 후에 에바 옆에서 사라지면 어떡하지. 내일 일어났는데 공작저가 아니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을 하는 대신에······. 최선을 다해서 지금을 살기로 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씩씩하게 잘 지내다 간 흔적이라도 남기자는 심정으로요. 언젠가 엘리자베트 경이 결혼할 때 부케는 못 받더라도, 제가 아닌 크리스텔이 참석하게 되더라도······. 그날을 함께 계획하면서 오늘 즐거울 수는 있잖아요.”
‘그날을 함께 계획하면서 오늘 즐거울 수는 있다.’
나는 그 문장을 입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크리스텔이 나직하게 말꼬리를 붙였다.
“기억이 돌아오면, 그날의 저는 분명 지금의 제가 싫을 겁니다. 이상한 짓을 잔뜩 해놨으니까요. 제 딴에는 해도 괜찮은 일만 하려고 노력했는데도, 성격상 그게 안 되고······.”
나는 빙그레 미소했다. 그녀가 활약한 수많은 순간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관 주인에게 물을 끼얹고, 마수를 때려잡고, 궁에 유폐된 나를 몰래 만나러 와주던 왈패 아가씨.
“이런저런 사정 다 재다간 밥숟갈도 제대로 못 뜬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질러버리자! 울컥해서 행동한 겁니다. 무책임하죠, 흐흐.”
‘어른은 개뿔······.’ 크리스텔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숨이 닿을 듯한 그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퇴계공 세계관에서 혈혈단신인 것도 모자라, 그녀는 진짜 크리스텔을 향한 죄책감까지 켜켜이 쌓아가고 있었다.
원치 않은 빙의였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어느 날은 무척 사소한 미안감이겠지만, 어떤 순간엔 말도 못 할 죄의식을 느낄 게 분명했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예서 왕자가 소설의 ‘등장인물’이라는 점을 몰랐다면, 나 또한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을 테니까.
크리스텔은 정말 강한 사람이다.
“······크리스텔은 정말 강한 사람입니다.”
나는 생각을 고스란히 말로 뱉어냈다. 그녀가 놀라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내가 그녀를 이름으로 불렀다는 걸 깨달았다. 성도, 작위도 아닌 이름으로만.
“듣기 좋네요.”
이내 크리스텔이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머쓱해서 입술을 축였다.
그러자 그녀가 천천히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크리스텔은 더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 내게 바싹 다가오더니,
-콩
살짝궁 이마를 맞대고는 멀어졌다.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함가인.”
“······예?”
나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그와 동시에 정은서의 목소리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쏴아아아!
기억에도 버튼이 있다면, 방금 크리스텔이 그중 하나를 제대로 찾아 누른 게 확실했다.
무의식 귀퉁이에 박혀 있던 동생의 음성이 귓가를 생생하게 울렸다.
상의는 교복, 하의는 학교 체육복 차림의 고삼이 소파를 뒹굴며 외치던 말.
‘자, 드가자! 뺨 갈기자! 함 가자, 함가인!’
‘형, 쟤 왜 저래.’
‘일주일 동안 꿀 고구마 먹다가 드디어 스프라이트 샤워.’
‘퇴계공?’
‘그거 말고 또 있겠냐.’
······‘함가인’은, 크리스텔의 몸에 깃들어 있는 주인공의 본명이었다.
나는 충격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금붕어처럼 뻐끔거렸다.
내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못 알아들어서 그런다고 여겼는지, 크리스텔이 파안하며 설명했다.
“제 흔적. 제일 중요한 거니까 왕자님한테만 알려드릴게요. 아직 어머니께도 말씀 못 드렸습니다.”
“흔적이라면,”
“나중에 왕자님이 ‘함가인’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못 알아들으면, 더는 왕자님이 아는 크리스텔이 아닌 거예요.”
“······.”
그렇게 말하는 크리스텔의 얼굴은 강인했고, 푸른 눈빛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나를 덮쳤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뒤늦게 내가 얼마나 배부른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스물아홉이나 먹고 예상치 못한 변수에 도망친 내가 얼마나 나약한 놈인지.
크리스텔보다 훨씬 많은 힌트를 갖고 시작했으면서, 1년도 못 버티고 심란하다며 어리광 부릴 데나 찾는 내가······.
“고맙습니다.”
나는 자책을 이어가는 대신, 마땅히 해야 할 말을 꺼냈다.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름 모를 궁,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 너머로 긴 겨울 볕이 손을 뻗었다.
하늘의 쓰다듬을 받은 주인공의 머리칼이 환하게 빛났다.
이따금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뒷문을 간질이고 지나갔다.
크리스텔은 모를 것이다.
그녀가 존재 자체로 내 동생을 지탱했고, 지금은 나의 닻이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셔서요. 저도 크리스텔의 태도를 배우겠습니다.”
“될 대로 돼라,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는 거요?”
“네, 그것도 포함입니다.”
그러자 크리스텔이 미간을 찌푸렸다. 종달새 같은 종알거림이 이어졌다.
‘제가 또 뭐라고 했죠? 나쁜 거 배우시면 안 되는데.’
나는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
밤이 깊었다.
이젠 괜찮았다.
크리스텔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쥘리에트 궁으로 돌아오니, 속이 뚫리고 머리도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뱅자맹과 가나엘은 자꾸 묘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웃었다.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 것 같은데, 내가 먼저 부정하면 그림이 더 이상할 듯해서 그만두었다.
내일은 황태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자.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돼.
“옳지, 다시 한번 해보자. 여기 그림책에, 페리가 좋아하는 무지개가 있어.”
-끼응!
“레아도 좋아해? 그렇구나. 형도 레아 좋아해.”
지금 나는, 레서판다들과 침실 한복판에 서서 새로운 실험을 진행 중이었다.
‘진로 고민’을 털어냈다고 해도 생존을 위한 노력은 그만둘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정신을 늦게 차렸으니 더욱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집에 돌아가겠다는 목표 또한 확고했다.
그렇다면 더 정확하고, 더 많은 정보야말로 나의 연장이 되어주겠지.
“여기 끝에 있는 색 보여? 이걸 보라색이라고 해.”
갸웃, ‘그래서 뭐?’
“그리고 이건, 아까 데미가 키운 튤립이야.”
킁킁, 냄새 맡기.
“괜찮으면 형한테 이 색깔의 튤립을 피워줄래? 다른 색 말고 이걸로.”
-끼잉!
그러자 데미가 벌떡 일어나 뒷다리로 서더니, 앞발을 허우적거리며 아장아장 걸어왔다.
나는 재빨리 무릎을 꿇고 녀석을 받아 안았다. 오늘의 목표는 하나다.
대지 속성 신수가, 보라색 튤립이나 햇무리초를 자력으로 틔울 수 있는지 확인하기.
“옳지, 똑똑해. 1등으로 보라색 튤립 주려고? 아니, 데미. 형 눈이 보라색인 건 맞는데.”
신수가 내 눈꺼풀이며 뺨을 마구 핥기 시작했다.
나는 순식간에 나머지 둘에게 함락당해 바닥을 나뒹굴었다.
본인의 침대에 들어가 있던 뚝심이와, 내 침대에 누운 티테가 우습다는 듯 재잘거렸다.
반려 인간 살려······.
“페리, 잠깐만. 찬바람 들어온다. 창문 열려 있나 봐.”
-꾸릇
나는 레서판다 목도리, 레서판다 귀마개, 레서판다 허리띠까지 걸치고 겨우 일어섰다.
어디선가 냉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가나엘이 열고 간 적은 없으니 뚝심이나 애물단지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왜 피하지?”
뒤돌아보던 나는 고드름처럼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귀에 익은 아이의 음성. 커다란 주황색 눈동자와 까만 머리카락.
놀라서 턱이 쩍 벌어졌다. 세이디가 난데없이 침실에 찾아와서는 아니었다.
이건 한두 번도 아니니까.
근데, 설마, 지금.
“······너 울어?”
식겁했다. 나는 잽싸게 녀석 앞으로 달려가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