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25)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25화(25/920)
#025 오만과 편견의 커리큘럼 (1)
한 10시간은 잔 것 같다.
주인공 크리스텔이 새 직업을 갖겠노라 선포했고, 세드리크 황자는 내가 아는 누군가를 엄청나게 닮았다.
거기에 신전 신물에 관한 미스터리까지 추가된 상황이었다.
생각할 게 많아서 잠이 올까 싶었는데 씻고 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기절했다.
눈을 떴더니 9시였다.
-짹짹······
“평화로워서 좋군요.”
나는 뱅자맹의 말에 동의하며 시나몬차를 머금었다.
꾸준히 갖던 아침 티타임인데도, 어젯밤이 너무 길었던 탓인지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손님맞이를 위해 평소보다 더욱 공들여 꾸민 정원이 꼭 도서관처럼 조용했다.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앞으로는 무슨 행사가 있으면, 며칠 전부터 몸이 안 좋다고 바람을 잡아야겠습니다.”
내 말에 뱅자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무릎에 앉은 데미의 입에 사과 한 조각을 물려주고, 테이블 위 수첩으로 시선을 내렸다.
뱅자맹은 내가 수첩에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으면 실수로라도 이쪽을 보지 않았다.
이게 ‘어느 볼모의 비극적 수기’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주 틀린 추측도 아니었기에 나는 굳이 바로잡지 않았다.
∙ 경계의 신전에서 도난당한 신물
사라진 게 아니라 누군가 사용했을 가능성
이게 첫 번째 생각할 거리다.
여기서부터는 전부 가정이지만, 일단 가설을 세워두고 움직이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휩쓸리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나는 지난밤 마차 앞에서 사르네즈 공작 부인이 들려준 이야기를 곱씹었다.
아마도 크리스텔을 살리는 데 쓰였어야 할 신전의 신물이, 먼저 다른 이의 소원을 이루어주고 효용을 다했다.
그 바람에 공작 부인은 원작에서 크리스텔과 세드리크 황자의 약혼을 성사시킨 아이템, ‘창해의 축복’을 소모하는 수밖에 없었다.
딴 사람도 아니고 주인공의 노선을 틀어버릴 만큼 강력한 변수였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지금 그런 일을 해낼 만한 외부 요인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나다.
-끼이
“데미, 식탁 위에 올라가는 거 아니야.”
나는 테이블로 발을 뻗는 데미의 까만 배를 안고, 녀석의 입에 청포도 한 알을 넣어주었다.
레서판다가 금세 얌전해졌다.
‘예서 페네티안’은 극중에서 확실히 사망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를 살리기 위한 빙의와 회귀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나는 지금까지 이것이 일종의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왜, 주인공이 책에 빙의하는 웹소설들 중 그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이렇다 할 힘의 간섭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어쩌다 보니 빙의돼버린 케이스 말이다.
빙의가 이루어진 과정보다는 빙의 후의 삶이 더 중요한 이야기들.
어제까지는 나 또한 그런 처지일 거라 믿었다.
신전의 신물 도난 사건이 좀 성가시긴 했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느라 바빠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단순한 도둑질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나’를 살리기 위해 그곳에 소원을 빌었고, 그 결과로 내가 빙의했다.
∙ 경계의 신전에서 도난당한 신물
사라진 게 아니라 누군가 사용했을 가능성
– 누가 소원을 빌었나?
– 다른 신물도 소원을 들어주는 능력이 있는가?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인가.
이건 좀 궁금하긴 한데, 알아도 크게 달라지는 게 없을 듯했다.
미래의 크리스텔이 예서 왕자의 전사 소식을 듣고 그랬다고 해도, 지금의 그녀는 모르는 일이었다.
당연히 은서 생각도 해봤지만 이건 더 답이 없었다.
작품 바깥의 은서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이런 요술을 부릴 수 있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따라서 내게 중요한 건 두 번째였다.
다른 신물에도 그런 능력이 있는가.
신전의 신물은 ‘피의 염원’이니 뭐니 해서 소원을 들어주는 힘이 널리 알려져 있는 모양이지만, 창해의 축복은 아니었다.
책에서 본 바에 의하면 이름 그대로 강력한 물 속성의 신물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크리스텔을 살리는 힘을 발휘한 건 작가의 억지 핸들링이겠으나, 나로서는 미미한 희망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만약 다른 신물도 인간의 소망에 반응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내 바람을 들어줄 수 있을까?
내가 봐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질문이긴 한데······.
“저기 엘리자베트 경이 옵니다, 왕자님.”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수첩에 밑줄과 동그라미가 가득했다.
고개를 들자, 올리브색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씩씩하게 걸어오는 엘리자베트 경의 모습이 보였다.
옆에는 가나엘도 함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예서 왕자님.”
“안녕하세요, 엘리자베트 경.”
큰 이벤트 하나를 무사히 마친 것이 홀가분한지, 부근위대장은 무척 상쾌한 얼굴이었다.
나는 수첩을 닫아 품 안에 집어넣었다.
뱅자맹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의자를 빼주는 동안, 가나엘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티에 추기경 전하께서 뒤엠 후작가에 직접 연통을 넣으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 3시쯤 보는 건 어떠냐고 물으셨습니다.”
“나야 좋은데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는 게 의외네. 고마워, 가나엘.”
가나엘이 전해준 건 데미 관련 소식과, 오전 11시로 예정돼 있던 추기경과의 개인 과외가 오후로 밀렸다는 이야기였다.
늦잠을 잔 데다 정리할 게 많아 오늘 수업을 빼고자 했더니 이런 답이 온 것이다.
뱅자맹은 자신과 가나엘의 빈 잔을 능숙하게 정리한 뒤,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하고는 소년과 함께 쥘리에트 궁으로 향했다.
“바쁘실 텐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는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는 엘리자베트 경의 잔에 직접 시나몬차를 따랐다.
그녀가 씩 웃으며 잔을 받았다. 디저트를 살피는 회색 눈동자가 초롱초롱했다.
“왕자님께서 불러주시면 공식적으로 땡땡이를 칠 수 있으니 저야 언제든 환영입니다. 어젠 딱 죽기 직전까지 일하다가 퇴근했는데, 끝나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요.”
그녀는 차를 마시며 봄 무도회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대부분은 진상 귀족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근위대원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다가 백작가 후계자인 그녀가 나타나면 그제야 몸을 사리는 자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엘리자베트 경이 갑질 현장마다 발품을 팔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고 보니, 왕자님께서도 스트로다 궁에 잠깐 오셨었다고 들었습니다.”
“발코니까지만 갔습니다. 이 녀석 때문에요.”
내가 그렇게 말하며 가슴팍을 등반하기 시작한 데미를 가리켰다.
“저번에 본 그 녀석입니까?”
“네, 떠난 줄 알았는데 궁에 남았더군요. 조만간 다른 신물이 있는 뒤엠 후작가의 영지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끼이이
데미가 작게 울었다. 나는 녀석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입을 벙긋거렸다.
할 얘기가 있어서 아침부터 엘리자베트 경을 불렀는데, 막상 운을 떼려고 하니 쉽지가 않았다.
이걸 진짜 물어봐도 괜찮은 건가 싶으면서, 한편으로는 나 역시 알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왕자님.”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나는 결국,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를 심란하게 한 문장을 입 밖으로 토해냈다.
“제가 최근에 황궁에서 어린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녀석은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이젠 도저히 그렇게 못 할 것 같아서요.”
“네.”
그녀가 찻잔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머리는 까맣고, 눈은 주황색인 남자아이입니다. 키가 요만한······.”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제대로 사레들린 엘리자베트 경이 격한 기침을 시작했다.
놀란 데미가 꼬리를 반짝 들어올렸다.
나는 잽싸게 옆에 놓인 냅킨을 건네고 빈 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괜찮으십니까?”
“계속, 크흠, 계속 말씀하십시오.”
“아, 네. 그 녀석이 저와 조금 인연이 있거든요. 이름은 세이디라고 하는데.”
“하······.”
그녀가 한숨을 내쉬더니 새 냅킨으로 입을 가렸다. 역시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듯했다.
“세드리크 황자님과 많이 닮았습니다. 엘리자베트 경도 직접 보면 그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네······.”
“혹시 이미 만나보셨습니까?”
엘리자베트 경이 자포자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사이입니까?”
또다시 끄덕.
“황궁을 시도 때도 없이 마음대로 드나들던데, 그 녀석도 황족인가요?”
한 박자의 망설임, 그리고 이어지는 끄덕.
과연, ‘황자의 절친’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하나의 그림이 완성돼 갔다.
황자를 툭하면 쓰레기라고 부르던 은서의 모습.
오래된 클리셰와 참신한 설정을 섞어 사랑받았다는 소설, <퇴사했더니 이계 공녀>.
아무리 생각해도 참신보다는 막장에 가까운 것 같지만, 확실히 이런 캐릭터가 남주라면 뒷내용이 궁금해서라도 계속 보겠다 싶었다.
“지내는 곳은 따로 마련돼 있는 겁니까? 황자님이 잘 챙겨주시는 거죠?”
“······잘 못 들었습니다?”
그녀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애가 황궁 고해소에 숨기도 하던데, 양육 환경이 너무 열악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 부모나 가족도 아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떨지 모르겠지만······.”
“잠시만요, 왕자님. 죄송합니다.”
엘리자베트 경이 두 손을 내밀며 내 말을 끊었다.
“그, 꼬마가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황자님이 어릴 때 무슨 사고를 쳤든 저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세이디는 신력을 타고났다. 쓰는 법도 배운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으로는 신관도, 성기사도 아니었다.
어느 집안의 자제인지는 물론이고 몇 살인지조차 말하기를 꺼렸다.
동시에 말투는 거만했고 품행에서는 귀티가 흘렀다.
보고 배운 어른이 그런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세레기 그거는, 진짜 지가 크리스텔한테 한 짓을 생각해야 돼. 평생 후회하며 살아야 한다고.’
‘과거 삭제해라, 애송아······.’
은서의 목소리가 사이렌처럼 머릿속을 울렸다.
동생이 말한 ‘과거’는, 어쩌면 그런 의미의 과거일지도 모른다.
“다만 사정이 비슷한 아이를 보니 마음이 쓰입니다. 저도 국왕 폐하와 신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니까요.”
“······.”
“엘리자베트 경께서 잘 챙겨주십시오.”
그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표정 관리가 어려운지 목부터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이 보였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도 같았다.
“데미, 이쑤시개는 뾰족해서 안 돼. 퉤해, 퉤.”
그때쯤 데미가 말썽을 피우기 시작해, 나는 엘리자베트 경에게 더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정의 구현’이나 ‘업보’ 따위의 단어를 중얼거린 듯 했으나 확실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수첩을 정리했고, 엘리자베트 경을 통해 뒤숭숭한 궁금증도 해결했다.
오전 티타임은 언제나 도움이 됐다.
*
“전하, 예서 왕자님이 왔습니다.”
“들어오렴.”
어저께는 그렇게 일분일초가 느리더니, 오늘은 또 시간이 술술 흘렀다.
어느덧 오후 2시 40분이 되어, 나는 추기경 집무실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복장을 점검했다.
부티에 추기경의 시종 나탈리가 ‘단정하십니다.’ 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뒤에 서 있던 뱅자맹과 가나엘이 ‘허리 조심하십시오’, ‘왕자님, 오늘은 조금만 구르세요!’ 등을 속닥거렸다.
격려인지 멕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안녕, 왕자님. 푹 쉬었니?”
“고결하신 추기경 전하를 뵙습니다.”
내가 절하고 고개를 들자, 그녀가 단안경 아래로 눈을 빛내며 집무실의 한편을 가리켰다.
싱긋 웃는 입술이 왜인지 무척 불길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예서 페네티안 왕자님을 뵙습니다.”
여인이 눈부시게 웃으며 내게 예를 차렸다.
스트로다 궁의 발코니 문을 닫기 직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눈동자였다.
청회색의 홍채가 서늘하리만치 선명했다.
어제와 복장이 달랐지만 분홍색 머리를 질끈 묶은 모양만은 그대로였다.
“오늘부터 함께 수업할, 크리스텔 드 사르네즈 공녀란다.”
추기경이 팀플을 선언했다. 강의계획서에는 없던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