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26)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26화(26/920)
#026 오만과 편견의 커리큘럼 (2)
“함께 수업을요?”
내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고 충격적이어서, 크리스텔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였다.
봄 무도회에 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했지만 결국 발끝을 담갔고, 그래도 발끝만이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는데 다음날 주인공과 한 공간에 있게 된 비극이라니.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임시야. 조금 전 교황청에 크리스텔의 교육을 맡아줄 성기사 파견을 요청했거든. 그쪽에서 내 청원을 검토하고, 승인하고, 누군가를 사르네즈 공작령에 발령할 때까지만 내가 가르치기로 했단다.”
부티에 추기경의 답변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러니까, 성기사가 되어 황실에 빚을 갚겠다는 크리스텔의 의지를 추기경과 황제가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약혼은 엎어졌어도 귀한 인재를 놓칠 순 없는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거 일대일 수업 아니었냐고, 전액 환불 받겠다고 떼를 쓰고 싶지만 상대는 학원이 아니라 추기경이었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이 두 학생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내기는 어려울 터였다.
‘공녀를 가르치시는 동안 저는 봄방학을 누리겠다’고 말할 명분도 부족했다.
임시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추기경은 신관이지 성기사가 아니니, 크리스텔에게 기초적이고 이론적인 부분밖에 알려줄 수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르네즈 공녀.”
나는 일부러 딱딱하게 말을 건넸다. 그녀를 성으로 불렀고 웃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착실하게 비호감 포인트나 쌓자는 심정이었다.
“네, 어제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언제 한 번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크리스텔은 조금의 대미지도 입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제라면 봄 무도회 발코니에서 내가 사르네즈 공작 부인의 고해를 들어준 일을 의미했다.
공작 부인은 좋은 사람 같았지만, 주인공 어머니와의 식사라니 부담과 공포로 밥이 넘어가지도 않을 듯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군요.”
내가 기계처럼 대답했다.
볼모라서 황궁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점이 이렇게 다행일 수 없었다.
“일단 앉으렴. 차를 내줄게.”
추기경이 보드랍게 웃으며 나와 크리스텔을 소파로 인도했다.
시종 나탈리를 호출하며 우리를 관찰하는 눈빛이 따뜻하기만 해서 더욱 속이 터졌다.
이 자리에 내가 아니라 황자 놈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럼 두 사람은 오늘이 초면이니?”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크리스텔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뇨, 제가 황궁 신전 고해소를 찾아가 왕자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고해 성사를 부탁하려고요.”
“고해소라니, 성기사다운 선택인걸. 전도유망하구나.”
추기경의 베이지색 눈동자가 곡선을 그렸다.
나와 크리스텔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껌뻑거렸다.
“모든 신전 고해소에는 언제나 일정량의 에테르가 흐르고 있거든. 고백자의 심적 안정과 신앙심 고취를 위해서인데, 성기사에게는 급히 에테르를 보충하기에 그만한 곳이 없단다.”
크리스텔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들어가자마자 긴장이 조금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고도 했다.
그 말에 나는 고해소에서 만났던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어떤 어린아이.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나는······. 고해를 받고 있어. 신관이거든.’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는군.’
하나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 같았다.
세이디를 처음 만났던 날, 그 녀석이 고해소에 급히 숨어든 건 에테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에테르 고갈의 대표적 증상인 발열, 오한, 어지럼증을 고루 겪으면서도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해 그곳까지 내몰린 것이다.
아이를 떠올리니 다시금 마음이 불편해졌다.
은서 말대로 세드리크 황자가 쓰레기이긴 한 것 같았다.
세이디는 본인이 신관도 성기사도 아니라고 하지만, 내게 그런 아들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유능한 신관 하나와 짝을 이루게 했을 것이다.
초등학생도 안 돼 보이는 꼬마를 밤에 혼자 다니게 두는 일도 결코 없었을 테고.
유기, 방임, 이거 진짜 아동 학대잖아.
그간 아이 주변 환경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내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예서 왕자님을 위한 데이지차입니다.”
나탈리가 내 앞에 따뜻한 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언제 들어왔는지, 추기경의 시종이 반듯한 몸놀림으로 우리에게 마실 것을 서빙하고 있었다.
“고마워, 나탈리. 가서 쉬어.”
“예, 전하.”
시종에게 다정히 말을 건네는 추기경을 보고 있으니 문득 궁금해졌다.
사실 오늘 크리스텔만 이 자리에 없었더라면 정말로 물어볼 생각도 하기는 했었다.
나를 일종의 제자로 받아들였던 그 순간, 당신이 했던 말이······.
‘어린아이가 하나 있어.’
‘아이요?’
‘응, 그 애를 도와주었으면 한단다.’
그렇게 말했던 대상이, 내가 만난 꼬마 세이디인지.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던 게, 아이가 어디 아프냐는 물음에 비슷하다고 대답했던 게 에테르 고갈을 의미하는 건지.
세이디가 황자의 사생아라면 내 추측은 거의 확실해 보였다.
황자의 대모인 추기경에게 세이디는 손주뻘일 텐데, 그런 아이가 고생하는 걸 내버려둘 사람은 아니니 급한 대로 내게 손을 뻗을 법도 했다.
다만 궁금한 건······.
“한 명의 성기사는 보통 한 명의 신관과 짝을 이룬단다. 동료로서 서로의 등을 맡기는 사이가 되는 거야. 신관은 성기사에게 에테르를 제공하고, 성기사는 신관을 지킴으로써 주신의 뜻을 받들지.”
왜 아이에게 아직도 신관 파트너가 없느냐는 것이다.
일반 가정집도 아니고 제국의 황실에서 태어나 궁을 멋대로 드나드는 꼬마에게, 어째서 신관을 붙여주지 않았는지.
아무리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황손이라지만, 대주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번듯한 성직자 하나쯤은 곁에 데려다놓을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그렇군요, 재미있는 관계네요.”
크리스텔이 흥미로운 얼굴로 추기경의 말을 경청했다.
나는 찻잔 위에 동동 떠 있는 데이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혹시 세이디가 신관을 원하지 않는 건가? 이것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긴 했다.
조금 전에는 아동 학대가 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만약 본인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고 있는 거라면 나는 그저 조심히 다니라는 말밖에 해줄 게 없었다.
밤에 몰래 거처를 빠져 나와 돌아다니고, 에테르 고갈로 힘들어하면서도 신관을 거부하는 경우엔 어른들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을 테니까.
내가 음식을 좋아하는 걸 황자에게 말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부자지간에 대화가 없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신수들이 영주성에서 신물을 감지하면, 내일부터는 그대를 만날 일 없어.’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실제로 다시 만난 적은 없었다.
비록 데미와는 재회하게 됐지만, 다른 두 녀석은 세이디가 알아서 잘 이끌었을 것이다.
엘리자베트 경도 상황을 알고 있는 마당에 나까지 녀석을 걱정할 이유는······.
“왕자님?”
추기경의 목소리가 나를 콕 찔렀다. 나는 흠칫 놀라 얼굴을 들었다.
“레이디를 둘이나 앞에 두고 딴생각을 하다니, 정말 의외야.”
그녀가 장난스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어느덧 두 사람의 잔은 절반쯤 비어있었다.
“죄송합니다. 어젯밤이 고단했나 봅니다. 잠깐 멍해졌네요.”
나는 찻물에 입을 적시며 되는 대로 내뱉었다. 주인공의 옆에 앉아 다른 생각을 하다니, 긴장감이 너무 없었다.
크리스텔이 나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왕자님께도 짝이 있으신지 여쭈던 참이었습니다.”
“짝이요?”
“네, 성기사 파트너요.”
“저는 없습니다.”
내 대답에 그녀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높이 묶은 분홍색 머리칼이 흔들렸다.
“저는 초보지만, 그래도 왕자님의 에테르가 엄청난 건 느껴지는데요. 아직도 짝이 없으시다니······.”
‘성기사들은 좀 금욕적인가요?’ 그녀가 소곤거렸다. 나와 추기경의 눈이 마주쳤다.
그야 내 에테르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니까.
신국의 성기사들은 얻어낼 게 없는 과거의 예서 왕자와 짝이 되길 원치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허울뿐인 주교’였고, 신국의 국서와 제국의 황제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특히 전자는 나를 죽이기 위해 비교적 약한 암살자들을 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 에테르 보유량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폭증했고, 국서의 시도는 물거품이 됐다.
당시엔 갑작스러운 힘의 원천을 몰랐지만 지금은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일단 저는 외국인이고, 바깥출입이 자유롭지도 않으니 저와 짝이 되면 성기사분이 여러 모로 불편할 겁니다.”
나는 현재를 기준 삼아 그럴듯한 변명을 내놓았다.
크리스텔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쪽은 잘나가는 공작가의 귀한 따님이고 나는 신국에서 내놓은 자식이자 볼모이니, 부디 다른 신관과 행복하시라는 의미였는데 제대로 전달이 됐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 시대가 아니니 에테르가 항상 충만해야 할 필요도 없고, 신관과 성기사가 늘 붙어 다니란 법도 없죠.”
그녀가 똑소리나는 태도로 내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내 얘기는 그냥 듣기만 한 것 같은데······.
“성기사의 수는 항상 신관의 수보다 적단다. 짝이 없는 신관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야.”
부티에 추기경이 부드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리 왕자님은 분명 훌륭한 주교지만, 최근에는 고해의 본분에 충실하고 있으니 성기사를 위한 신관이 되기는 힘들지도 모르고.”
이거······. 이거 나 도와주는 건가? 도와주는 거 맞지?
“그럼 다음 시간에는 마법사를 초빙해서, 성기사와 마법사의 차이점을 알아보도록 할까?”
크리스텔이 뭐라고 말을 이으려는데, 추기경이 나긋나긋 수업의 끝을 알렸다.
나는 방금 전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30분이 지나있었다.
“감사드립니다, 전하. 그럼 모레 뵙겠습니다.”
뭐······. 보통 오리엔테이션은 짧게 하니까.
나는 대충 그렇게 생각하며 추기경에게 예를 올리고, 크리스텔에게도 간단히 인사한 뒤 재빨리 집무실을 탈출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 그녀가 같이 나가자고 할까 봐 서두른 것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추기경이 먼저 점심 식사를 제안하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도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
“내가 너였으면 오늘 당장 쥘리에트 궁 가서 말한다.”
실내 연무장 구석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던 부근위대장이 큰소리로 말했다.
검 끝으로 묵묵히 초식을 그리던 황자가 일순 동작을 멈추었다.
“진짜······. 자세한 건 얘기 안 해줄 건데······. 아무튼 나라면 그런 오해를 사느니 그냥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 받겠어. 그게 백번 나아.”
엘리자베트는 오늘따라 이상했다.
대련 중 황자의 불꽃에 소매가 시커멓게 탔는데도, 황자가 또 자신의 연습용 검을 부러뜨렸는데도 화를 내기는커녕 웃기만 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연무장에 오는 내내 이상했다.
혼자 미친 사람처럼 히죽거리다가도 ‘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천재인가?’ 하며 조금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무언가에 큰 감동을 받은 얼굴과,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이 쉴 새 없이 교차했다.
세드리크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왕자에게 도움 받을 일 없다고 했을 텐데.”
그러자 엘리자베트가 옆으로 풀썩 몸을 눕히고는 흐느꼈다.
황자는 이제 진지하게 태의를 불러야 하나 고민했다.
친구라고 하나 있는 녀석이 벌써 더위를 먹어서야 곤란했다.
마침 연무장 입구에서 시종, 다비드 카퓌송이 걸어오고 있었다.
세드리크가 검을 내리고 그를 맞았다.
“전하.”
“잘 왔군.”
“부티에 추기경 전하의 전언이십니다.”
“······.”
카퓌송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뗐다.
“‘냉궁을 침식하는 파도. 모레 오전 11시, 야외 연무장.’ 이상입니다.”
황자는 말이 없었다.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으레 그렇듯 엘리자베트였다.
“나 구경 가도 돼?”
세드리크가 그녀의 말을 간단히 무시했다.
그는 다시 검 끝을 든 채 연무장의 중앙으로 향했다.
카퓌송이 그런 황자의 뒷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엘리자베트에게 짧게 인사한 후 다시 연무장을 나섰다.
시종은 그저, 자신의 주인이 현명한 선택을 내리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