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269)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269화(269/920)
#269
광야로 가는 길 (3)
“저자를 불러올려라.”
베르너르는 마르티어 제일스트라와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일국의 국서가 일개 신관의 시선을 받아내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저이는 엘리서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큰딸에게 언제나 떳떳하고 완벽한 아버지로 남고 싶었다.
자식은 부모 마음대로 자라지 않는다지만, 자식의 마음에 뿌리내리는 이 또한 부모였다.
주인의 미소에서 불길함을 읽은 시종 총괄이 몸을 숙였다.
“전하. 기사들을 불러 끌어내시는 것이······.”
“예까지 들어온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필시 입구에서 보초 여럿을 때려눕혔을 것이다.”
“······.”
“말을 올릴 기회를 주어야겠지.”
그가 쥘부채를 살랑이며 속삭였다.
초콜릿처럼 달큼한 목소리였으나, 그의 음성이 다정할수록 내면의 독기가 강해진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노복은 깊이 절하고 근처의 아랫것에게 손짓했다.
귀족들에게 색색의 퀴라소를 대접하던 시종 몇이 황급히 마르티어에게 다가갔다.
신관은 기다렸다는 듯 국서의 자리로 올라왔다.
-♬♩♪······
-척, 철컹, 철커덩
아리따운 선율 사이로 여인의 갑옷과 군홧발 소음이 찔러 들었다.
주름진 눈매가 형형했다.
작고 다부진 몸에선 노골적인 반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춤과 수다를 즐기던 페네티안 귀족들이 상석을 힐끔거렸다.
베르너르는 보란 듯 근사한 눈웃음을 지었다.
“제일스트라 경, 오랜만이네. 목이 말라 방황하다 연회장까지 왔는가?”
“하하하하!”
가까이 서 있던 귀족들이 폭소했다. 껄껄대다가 술을 쏟아 소란이 일기도 했다.
마르티어는 고요히 국서의 목덜미 부근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베르너르는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물러갔던 취기가 그를 다시 잠식하고 있었다.
“세숫물을 찾아온 것일지도 모르겠군. 민머리가 흙투성이 오리알처럼 보일 지경이니.”
“와하하하!”
“짓궂으십니다!”
귀족들이 장내가 떠나가라 웃었다.
그새 말이 퍼졌는지 멀리 있던 객들도 이쪽을 보며 떠들고 있었다.
베르너르는 이쯤이면 되었겠다 싶어 부채를 접었다.
신관이 분노로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비집어 열었다.
“······백성들이 굶고 있습니다. 이삼월은 전국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입니다.”
“미안하네만, 간언하러 온 것이라면 줄부터 서게. 그런 이야기는 로세하르더 궁정백도 지겹게 하니까.”
탁! 국서는 부채를 내려놓고, 금쟁반에서 아펠플랍(appelflap) 하나를 들어 부드럽게 쪼갰다.
달콤한 사과와 진한 계피 향이 코끝을 찔렀다.
그는 마르티어를 비롯한 상류층의 위선이 소름 끼치게 혐오스러웠다.
똑같은 부와 권력을 누리고 살면서, 자신들은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양 행동하는 것을 보면 절로 결벽이 도지고 속이 메스꺼웠다.
적어도 베르너르 자신은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뿐인가, 그가 쓰는 돈은 전부 왕실 영지에서 걷은 세금이었다.
왕족이 정당하게 얻은 재화를 어디에 쓰든 언감생심 그녀가 참견할 바 아니었다.
아니, 설령 과정이 정당하지 않았다 해도 입을 놀려서는 안 됐다.
건방진 것이 주제도 모르고.
“용건은 그게 끝인가?”
“왕세녀 전하로부터, 국왕 대리의 이름을 돌려받고자 하시지 않았습니까.”
마르티어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덜미와 이마에 울룩불룩 핏대가 선 꼴이 볼 만했다.
국서는 바삭하고 부드러운 페이스트리를 이로 찢었다.
잘게 깨물고 혀로 으깨니 황홀한 맛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 않자, 귀족들은 금세 흥미를 잃고 저들끼리 재잘거렸다.
남자는 절반의 조각을 해치운 후에야 갈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아. 내 정치력을 비판하려는 거군.”
깜빡 잊었다는 투였다. 그가 천사처럼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가엾은 비렁뱅이들이 아사하는 동안 국왕을 대리해 무엇을 했느냐 묻고 싶은가 보지?”
“그렇습니다.”
그녀의 흰자위가 터진 실핏줄로 붉게 물들었다.
국서는 귀신처럼 웃음기를 거두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샹들리에 아래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불온하게 반짝거렸다.
“나는 너희가 올린 구빈 정책 서류에 국새를 찍었다.”
“······.”
“세금을 올려 천것들을 돕자기에 받아주었고, 둑을 지어 건땅을 보호하겠다기에 대공사를 승인했지. 네놈들의 위선을 전부 허락한 것이 바로 이 몸이야. 한데 몽매한 것들이 제 앞가림 못하고 죽어 나가는 것을 감히 내 탓으로 돌려!”
탈싹! 그가 마르티어의 얼굴에 남은 아펠플랍을 내던졌다. 장내가 싸늘하게 식었다.
고운 연주가 뚝 멎고, 거나하게 떠들던 귀족들이 석상처럼 굳은 채 둘을 돌아보았다.
베르너르는 이런 식의 눈총과 손가락질이 지긋지긋했다.
평생을 아무리 노력해도,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고양이를 죽였다.
그렇게 하면 그녀가 그깟 미물 대신 자신을 안고 쓰다듬어 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애마를 괴롭혔다.
그리하면 그가 그따위 짐승 대신 자신과 함께 교외로 나가 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누구도 소년을 돌아보거나 가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뒤에서 쑥덕거리고 노골적으로 기피했다.
‘도련님이 악마의 핏줄이래.’
‘말도 마, 어찌나 잔혹하신지. 난 진작 다른 댁으로 가려고 마음먹었다니까.’
‘빌헬미나 아가씨만 고생하시는 거지, 뭐. 주인님은 바깥일로 바쁘시잖아.’
······그런 베르너르를 불쌍히 여긴 것은 오직 베르너르 자신뿐이었다.
하나뿐인 아내도, 생때같은 자식들조차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저깟 초라한 신관이 자신을 지적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가 울컥하고 손을 움직였다.
“감히!”
-콰당탕,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쟁반이 넘어가고 크리스털 병이 깨졌다.
파편에 상처 입은 시동들이 혀를 깨물어 울음을 참았다.
마르티어는 팔뚝의 소름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분노와 증오로 당장이라도 무기를 찾아 쥐려는 양손을, 이를 악물고 제자리에 붙여 놓았다. 온몸이 슬픔에 짓눌려 바들거렸다.
이런 자의 가문이 신국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이런 인간이 오랫동안 크리스타너 폐하를 대신하고 있었다.
악의와 무지로 빚어놓은, 주신의 일그러진 괴물이.
“왕세녀 전하의······. 친서입니다.”
신관이 겨우 말을 꺼냈다.
끈적한 사과 조각과 아몬드 페이스트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소매에서 나온 것은 백금색 용두가 달린 작은 두루마리였다. 그게 끝이었다.
마르티어는 빈말로 사과를 올리지도, 국서 앞에 허리를 굽히지도 않았다.
시종으로부터 서신을 건네받은 남자가 실눈을 떴다.
“국새는 어디에 있느냐.”
“······.”
“대리의 자리를 돌려달라 했으니, 내 아이가 그것도 보냈을 텐데.”
“국새는 없습니다.”
“뭐?”
남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중년인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왕세녀께서 전하의 청을 거부하셨습니다.”
‘세상에.’ 술렁임은 앞에서부터 차례로 퍼져나갔다.
베르너르의 시선에 파문이 일었다.
누님과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가 환청처럼 귓전을 강타했다.
‘큰아이는 오롯이 제 손으로 키웠습니다. 결코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피붙이로서 아비를 버리는 것과, 정치적으로 아버지를 배제하는 일이 같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느냐.”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의 완벽한 걸작품이, 엘리서가 저를 배반할 턱이 없었다.
베르너르는 욱신대는 뺨을 의식하지 않으려 기를 썼다.
귀족들이 그를 올려다보며 끊임없이 수런거렸다.
파티가 아니라 어느 전시회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거짓이 아닙니다. 친서의 내용을 보면 아실 것입니다.”
-부스럭부스럭!
국서는 다급한 손길로 두루마리를 풀어헤쳤다.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은 마르티어에게 단단히 고정했다.
예가 어디라고 언감히 허언을 지껄인단 말인가.
아무리 왕세녀의 수족이라 해도 봐주는 데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경을 쳐도 모자랄,
‘하여 국왕 대리의 자리는 왕위 계승자인 제가 유지하겠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중립 지대에서 유의미한 외교적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쪼록 옥체를 살피시고, 2왕녀를 돌보아 주시고, 지금쯤 콩짚과 나무뿌리 죽으로 연명하고 있을 빈민층을 구제하시어······.’
-빠스락!
헉.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베르너르는 두루마리를 빠르게 눈앞에서 치웠다.
벌벌거리는 손을 숨기고자 가운 아래로 주먹을 꽉 쥐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본 것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흡족하던 현실이 별안간 퀴퀴한 보랏빛 악몽으로 변했다.
어디선가 불쾌한 곰팡내가 나는 것만 같았다.
더러운 핏덩이의 냄새.
“······이는 이간질의 결과물이다.”
그가 선언했다. 목청이 미세하게 울렁거렸다.
“왕세녀는 지금껏 나를 아버지로서 깊이 신뢰했지. 왕도에 그를 모르는 자가 있느냐?”
“······.”
용맹한 딸이 국경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지휘하는 동안, 그는 왕성에 앉아 나라를 다스렸다.
적당한 사윗감을 찾느라 수많은 사교장을 몸소 뒤지기도 했다.
국왕을 대신한 이래 하루도 게으르게 산 적이 없었다.
한데 딸아이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등지려 하고 있었다.
상의 한마디 없이, 아비의 얼굴 한번 보지 않고 멋대로 결정하여.
“이 아이의 눈을 가리고 귀를 먹게 하는 존재가 곁에 있는 것이야. 필시 나에 관한 중상을 들었겠지. 다시 가서 전하거라.”
“요사이 왕도의 언어유희가 복잡해졌나 봅니다. 아니면 중상의 의미가 바뀌었는지요?”
마르티어가 그의 말머리를 잘랐다. ‘저런 무례한······!’ 좌중이 일시에 경악했다.
국서는 믿을 수 없는 불경함에 눈을 치떴다.
신관은 뺨에 묻은 음식을 소매로 쓱쓱 닦아냈다.
“중상이 아니었습니다, 전하. 왕세녀께서는 전하께 정당한 의문을 품었고, 이어진 측근과의 상의 끝에 타당한 결론을 얻으셨습니다. 이게 그분의 뜻입니다.”
“대관절 무슨 의문이기에, 한 줄 논의도 없이 이리 결정한단 말이냐.”
문장을 씹어뱉는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얻어맞은 뺨의 아픔은 무의식 뒷자락으로 멀어졌다.
묵묵히 둘의 대화를 듣던 시종이 만류했다.
“전하. 나머지는 자리를 옮겨서 하시는 편이,”
휙! 그가 손을 올렸다. 닥치라는 의미였다. 노복이 침음하며 한걸음 물러났다.
얼음장처럼 굳은 분위기에도 마르티어는 꼿꼿하게 대답했다.
“전하께서 이미 아실 것입니다.”
“아니, 상상조차 못 하겠다. 평생 두 딸만 보고 산 아비에게 왕세녀가 의문을 가질 일이 무에 있어!”
“리에스테르 황제의 친서를 빼돌리시지 않았습니까!”
베르너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주신이시여!”
“방금 들었소?”
충격은 삽시에 들불처럼 연회장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행사는 이제 고귀한 주최자를 맞은 파티도, 유명한 작품이 걸린 전시회도 아니었다.
“뭐라고······?”
그저 천박한 곡예요 구경거리였다. 베르너르의 입술이 파르르 울렸다.
“프레데리크 리에스테르 황제는 평화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철왕입니다. 국왕 대리인 왕세녀께서 보내신 친서를 무시하고, 국경의 충돌이 날로 격해지는 것을 두고 볼 위인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한데 대축일 기간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연통이 없었습니다!”
베르너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확장된 동공이 미친 듯이 소용돌이쳤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제발 그만하십시오!”
마르티어가 고통스레 외쳤다. 그러나 베르너르는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설 곳도 없었다. 자신은 늘 벼랑 끝에 홀로 남은 아이였다. 얼굴에 열이 쏠렸다.
뒤끓는 억울함과 분통함이 단전에서부터 치솟아 올랐다.
저는 무엇도 빼돌린 적이 없었다. 무고하며 결백했다!
“네가 지금 폐하의 반려인 나를 모함하는 것이냐!”
“전하! 이 늙은것을 봐서라도 고정하십시오!”
시종이 그의 발목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마르티어는 죽음을 각오한 사람처럼 열변을 토했다.
“전하야말로 신국에 무슨 짓을 하고 계시는지 아십니까. 이는 외교 실패로 인한 참사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러다 전쟁이 나면, 숱하게 사라질 목숨은 어찌 책임지려고 이러십니까!”
“이런 미치광이를 보았나······!”
“왕자 전하에 대한 사감으로 나라에 학살을 일으키고자 하십니까!”
“친위대! 왕실 친위대를 들이거라, 어서!”
시종 총괄이 절규하듯 명했다.
기겁한 시동들이 거대한 입구를 열어젖히고 달려 나갔다.
노련한 이들은 장내의 손님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다.
베르너르는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마르티어를 향해 던졌다.
쩽그렁! 와장창! 오색의 술잔과 뜨거운 음식이 여인의 갑옷에 마구잡이로 부딪히고 산산조각 났다.
그래도 수치스러움은 씻을 수 없었다.
일평생 누군가의 등만 보며 살아온 자신에게, 저따위 누명을 씌우려는 것이 분하고 비통하여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왕세녀의 신임을 믿고 이리 구느냐? 그렇다면 그 아이가 오기 전에 내 너를 죽일 것이다!”
“제일스트라 경, 실례하겠습니다!”
우르르! 밀물처럼 달려온 친위대가 마르티어를 급히 포박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끌려갔다.
베르너르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가로 나이프를 쥐었다. 홱! 마지막으로 신관을 노리는 순간,
“이러다 혼절하시겠습니다!”
시종이 눈물 젖은 낯으로 그의 팔을 붙들었다. 챙그랑! 은식기가 찢어지듯 울었다.
국서의 긴 팔다리도 털썩 무너졌다.
“콜록콜록! 쿨럭쿨럭!”
“전하, 전하······! 무엇 하느냐, 태의와 치유 신관을 불러라! 어서!”
“예, 시종 총괄님!”
남아 있던 소수의 일손마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면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베르너르는 가쁜 호흡으로 느릿느릿 고개를 들었다.
한쪽만 길게 내려온 옆머리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텅 빈 연회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실내는 사방에 튄 음식물과 객들이 버리고 간 물건 등으로 지저분했다. 그뿐이었다.
다시 혼자였다.
“······코르넬리서를 데려오거라.”
그가 중얼거렸다. 시종은 귀를 의심했다.
“예?”
“그 아이와 함께 가야겠다.”
“이 시간에 어디로······.”
늦은 새벽이었다. 하지만 베르너르 페네티안은 개의치 않았다.
큰아이가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당장 오해를 풀어야 했다.
맨발로 불타는 모래를 밟는 한이 있더라도.
“내 딸이 방랑하는 사막으로 떠날 것이야.”
엘리서는 그의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