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33)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33화(33/920)
#033 소풍이라고 생각하자 (2)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나와 부티에 추기경 둘만 남게 된 상황에 긴장하긴 했지만, 나 역시 그녀에게 할 말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먼저 황자의 이야기를 꺼낸 것도 추기경 쪽이니 내 부담은 적었다.
“뭐든 물어보렴.”
“황자님은 황제 폐하의 유일한 자식인데, 황태자위에 오르기 위해 달리 무언가가 필요한 겁니까?”
깊이 생각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방계 등을 포함하면 제국의 황족도 적은 수가 아니겠지만, 황위를 이을 적통은 세드리크 황자뿐이었다.
본인이 자리를 거부하거나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켜 황실에 먹칠을 하지 않는 한, 황태자위와 제위가 보장된 인간이라는 뜻이다.
사르네즈 공작가와의 혼담이야, 잘 풀리면 꾸준히 정치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이상하지 않다 쳐도······.
“신물 ‘화성의 혜검’과 황태자위가 무슨 관련이 있는 건지······.”
“······.”
그 순간, 어떤 감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불 속성의 신물, 그리고 불 속성 에테르를 쓰는 어린아이.
“설마 세이디를 위해서인가요?”
추기경의 눈동자가 커졌다.
평소 표정을 읽기 힘든 그녀의 얼굴에, 명백한 놀라움과 약간의 당혹이 깃들었다.
“······그 아이가 알려준 이름이니?”
“네, 자기소개는 그렇게 했습니다.”
내 말에 그녀가 묘한 낯을 했다.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이없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얼굴빛을 또 어디서 봤는데 누구였더라.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황태자위는 그저 핑계일 뿐이고, 황자가 신물을 원하는 진짜 이유는 에테르 부족으로 고통 받는 아들 때문인 듯했다.
“전에 저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셨던 어린아이가 그 녀석인 겁니까?”
나는 며칠 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내들었다.
추기경은 자신의 한쪽 관자놀이를 짚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
“······.”
“그리고 그 아이가 네 에테르를 고갈시킨 것도 알고 있었단다. 미안해.”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진심어린 사과를 들었다.
에테르 고갈이라면 내가 세이디를 처음 만난 날, 녀석에게 에테르를 뭉텅이로 털리고 기절한 사건을 의미했다.
깨어났을 때는 곁에 추기경과 엘리자베트 경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추기경은 내게 치유력을 써주기 위해, 엘리자베트 경은 내 경호 책임자로서 유감을 표하기 위해 온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둘 다 세이디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때 그 애에겐 잔소리를 좀 했어. 이후로는 같은 일이 없었지?”
“네, 뭐······. 에테르가 필요하면 서클을 통해 받아가더군요.”
“다행이구나.”
추기경은 정말로 안도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물음표투성이였다.
“녀석에겐 신관 파트너가 없는 겁니까?”
“······그 아이가, 왜 그런 ‘몸 상태’가 됐는지도 네게 말했니?”
저절로 입이 다물렸다.
세이디는 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은 적도, 자신이 먼저 사연을 털어놓은 적도 없었다.
만약 이것이 사적인 문제라면 나는 이 이상 파고들어선 안 됐다.
내 망설임을 읽었는지, 추기경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전부 말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본인이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좋겠구나.”
그녀가 ‘벌써 많이 열린 것 같던데’ 하고 덧붙였다.
그 부분은 잘 모르겠으나, 세이디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더 물어보기가 어려웠다.
나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이제 내 차례네. 조금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거든.”
“하문하십시오.”
추기경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녀는 꼭 새 장난감을 선물 받은 소녀처럼 즐거워보였다.
“세이디가 네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적이 있니?”
“아뇨, 그냥 제가 추측만 하고 있습니다.”
어떤 추측을 하고 있느냐는 물음은 이어지지 않았다.
추기경이 소리 내어 웃더니 남은 커피로 목을 축였다.
나는 찻잔을 붙들고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신물이라는 존재가 ‘퇴계공’ 세계관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이 두 번이나 입증된 지금, 화성의 혜검을 실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건 분명 청신호였다.
물론 소설은 아직 초반이고, 예서 왕자가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서 죽을지 살지 모르는데 신물이 나를 집으로 보내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뭐든 지레 포기하는 것보다는, 시도라도 해보고 나가떨어지는 게 후회 없는 길이었다.
게다가 황자가 ‘마수 대토벌’에서 우승해 혜검을 얻게 도우면, 그건 결국 세이디를 돕는 일이 됐다.
혜검을 뽑지도 못할 텐데 도대체 무슨 계획인가 싶고, 황자 놈이 우승하는 데 내 힘이 큰 보탬이 될 것 같지도 않지만······.
그놈과 인연을 만드는 일은 절대 하고 싶지 않지만······. 애가 아프다는데.
“그럼, 저도 마수 대토벌에 참가하죠.”
내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쥐고 있던 온기가 사라지며 손바닥이 시원해졌다.
애초에 내게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억지로 가는 것과 능동적으로 가는 건 분명 마음가짐부터 다른 일이었다.
“황자님에게도 협조하겠습니다.”
그렇게 선언하자 추기경이 활짝 웃었다.
오늘따라 그녀의 파안을 많이 보는 듯했다.
*
“황궁에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어요!”
가나엘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뱅자맹이 손으로 가리킨 언덕 너머에서, 시원한 봄바람이 불어와 야트막한 풀들을 사르르 재워놓고 멀어졌다.
근사한 풍경이었다. 은서와 형이 같이 있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뒷산이라고 해서 그냥 산인 줄만 알았는데, 이런 곳이 다 있군요.”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 왕자님.”
앞서 걷던 산지기 아녜스가 내 말에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나는 허리께에 대롱대롱 매달린 데미를 어깨 위로 옮겨 주었다.
“탁 트인 데 오니까 좋지?”
-끼이
녀석이 기분 좋게 울었다.
정원 산책 때마다 데미를 데리고 나가고, 잘 시간이 아니면 늘 발코니에서 함께 바깥 공기를 쐬었지만 그것만으론 분명 부족했을 것이다.
신수라고 해도 일단은 동물이니 답답하겠지.
미안한 마음을 담아 녀석의 복슬복슬한 꼬리를 길게 쓰다듬어주었다.
수요일 오전 11시.
추기경의 ‘그룹 과외’가 있는 시간에 우리가 쥘리에트 궁의 뒷산을 오른 까닭은 명료했다.
“현장 학습이라니, 옛날 생각나네요.”
내 옆에 서서 걷던 크리스텔이 아슬아슬한 대사를 내뱉었다.
이쯤 되니 본인이 빙의한 상태라는 걸 남들에게 들켜도 괜찮은 건가 싶었다.
내 표정이 좀 이상했는지, 그녀는 대충 웃으며 부연했다.
“어릴 때 어머니와 영주성 구릉에서 피크닉을 즐기곤 했습니다.”
나는 턱을 한 번 까닥였다.
변명 좋네요,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 평가는 속으로만 읊었다.
“여긴 오랜만인데, 프레데리크도 한 번 데리고 와야겠어. 못 보던 나무들이 많이 자랐는걸.”
추기경의 목소리에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편한 복장을 한 그녀가, 일행의 후미에서 세드리크 황자에게 팔짱을 낀 채 걷고 있었다.
나는 상황이 이렇게 흘러온 배경을 다시금 상기했다.
그러니까 그제, 월요일. 내가 마수 대토벌에 참가하겠다고 선포한 날.
집무실을 빠져나온 나와 추기경은 크리스텔과 황자 놈보다 조금 늦게 실내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그래봐야 겨우 15분 차이였는데 그 사이에 두 주인공이 일을 냈다.
도착해 보니 연무장 바닥은 홍수가 난 것처럼 물로 흥건했고, 온갖 창검이며 포탄처럼 보이는 것들이 벽과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크리스텔은 자신의 힘을 조절하지 못했는지 쫄딱 젖어 있었던 반면, 황자는 완벽한 헤어 세팅을 자랑하고 있던 게 좀 신기했다.
부티에 추기경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누가 먼저 그랬니?’
하고 온화하게 물었다.
솔직히 나 같으면, 우리 형이 화를 터뜨리기 직전 같은 그 모습에 무조건 잘못했다며 굽히고 들어갔을 것이다.
상대방은 내 장난에 휘말린 것뿐이라고 해명하고, 당장 청소를 시작하겠다고 눈치 봐도 모자랄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과 메인 남주께서는,
‘······.’
‘······.’
‘그렇구나.’
소리 없이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크리스텔이 물을 치운다고 해도, 부서진 곳이 많아서 수리를 해야겠어. 프레데리크가 자주 사용하는 곳인데······.’
추기경이 혼잣말하자, 그제야 크리스텔이 좀 당혹한 얼굴을 했다.
‘송구합니다, 전하. 보수비용은 제가 부담하겠······.’
‘돈을 물 쓰듯 쓰는군.’
그리고 황자가 그녀의 말을 뚝 끊었다.
그게 꼭 크리스텔의 능력을 빗댄 도발 같아서 내가 웃었는데,
‘······.’
‘죄송합니다, 작게 웃는다고 웃은 건데······.’
세 사람이 나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나는 괜스레 졸아붙어서 입을 닫았다.
추기경은 우리를 찬찬히 훑더니,
‘혈기왕성한 청춘들이라 어쩔 수 없구나. 이런 데 가둬놓고 가르쳐보려 한 내가 어리석었어.’
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이,
‘다음 시간에는 현장 학습을 가볼까?’
그런 것이었다.
싱긋 웃고 있지만 추기경은 분명 골이 나 있었고, 그때쯤엔 크리스텔과 황자 놈도 그녀의 기분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어찌어찌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래서 누구도 그녀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반대 의사를 표하지 않았다.
현장 학습이 아니라 행군이라고 해도 묵묵히 따라야 할 분위기였다.
“이쪽에 자리를 잡으시면 되겠습니다.”
뒷산의 평평한 언덕으로 우리를 안내한 아녜스가 한편을 가리켰다.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가나엘과 뱅자맹을 도와 널찍한 피크닉 매트를 깔았다.
추기경의 시종인 나탈리와 황자의 시종인 다비드 역시, 가져온 짐을 풀고 음료와 간식을 차리느라 분주해졌다.
“꼭 소풍 온 것 같네.”
추기경이 다정한 목소리로 감상을 말했다. 모두가 조용히 긍정하는 듯했다.
출발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완전군장’ 따위의 끔찍한 키워드가 머릿속을 지배했는데, 깔끔하게 꾸며놓은 숲 산책로와 푸르게 펼쳐진 언덕을 보니 절로 가슴이 평화로워졌다.
이윽고 아홉 명과 한 마리의 일행이 편하게 둘러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뱅자맹에게서 따뜻한 퀸아망 한 덩이와 연하게 우린 아티초크차 한 잔을 건네받았다.
빵의 바삭바삭한 표면을 깨물자 캐러멜의 달콤한 맛이 가장 먼저 입 안에 번졌다.
드문드문 박힌 아몬드 조각이 식감과 고소함을 더해주는 가운데, 쫀쫀한 속은 혀에 아주 착 감겼다.
“진짜 맛있다······.”
내가 평소와 같은 시식 평을 토해내자, 뱅자맹과 가나엘은 무척 만족한 얼굴로 자신들의 커피와 딸기 주스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크리스텔이 맑게 소리 높여 웃었다.
“저번에도 생각한 건데, 왕자님께선 정말 복스럽게 잘 드시네요.”
그녀의 말에 추기경이 ‘그렇지?’ 하며 미소했다.
수업이 있는 날마다 내게 주전부리를 날라주는 나탈리 또한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감사합니다.”
원래의 몸으로 살 때도 종종 듣던 칭찬이긴 한데, 그걸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확언 받은 건 또 처음이었다.
나는 괜히 면구스러워 과일 접시로 손을 뻗었다.
-꾸르르
껍질 벗긴 리치 한 알을 데미에게 쥐어주니 비로소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
“용건 있으십니까?”
그러다 맞은편에 앉은 세드리크 황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딘가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는데, 손에 쥔 에스프레소 잔은 조금도 비우지 않은 채였다.
커피가 쓰면 물과 설탕을 타면 될 것을······.
“전혀 못 느끼는 건가?”
그가 불쑥 물었다.
나는 로판의 메인 남주들이 대체로 이렇게 앞뒤 말을 생략하는 건지, 아니면 이놈만 특별한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못 알아듣습니다.”
“그대의 마나 감응력엔 문제가 있어.”
황자 놈이 대뜸 단언하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종 다비드가 그의 잔을 매끄러운 몸놀림으로 받아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시비인가 싶어 눈을 끔뻑거리고 있는데, 크리스텔이 그를 따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내게 맡긴 채였다.
“뭔가 오고 있어요.”
“네?”
크리스텔의 말에 가나엘이 당황했다.
그녀는 황자와 나란히 언덕 너머를 바라보고 섰다.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내게는 딱히 보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대모님.”
황자가 몹시 낮은 목소리로 추기경을 불렀다.
그녀의 베이지색 눈동자가 나를 보며 부드럽게 휘었다.
“소풍 온 것 같다고 했지, 소풍이라고는 안 했잖니.”
-우르릉!
그 순간, 먼 곳에서 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