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360)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360화(360/920)
#360
주신의 동쪽 눈동자 (2)
“워어, 워.”
우리는 제국군의 스타티아 평야 막사에 내렸다. 아직 오전이었다.
“마부! 황실 마차는 잠시 이쪽에 대기해 주시오!”
“변경백님과 단장님께 말씀 전하게! 서둘러!”
“기적을 일으키시는 제국의 달을 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왕자님.”
“공작님, 후작님. 태사님도 환영합니다.”
젊은 기사들이 깍듯이 절하며 우리를 맞았다.
단숨에 수백의 시선이 쏠리니 제풀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프랑수아의 권유로 대례복을 걸치고 왔는데, 이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나는 ‘안녕하세요.’ 하고 웃은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선 사람과 환경에 흥분한 레서판다들이 강동강동 뛰었다.
사방에선 희미한 탄내와 냇내가 났다.
“수레 지나갑니다! 무기 수레 지나가요!”
-덜그럭, 덜커덩!
가을의 쨍한 햇살 아래, 갑옷 군데군데 재를 묻힌 병사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들것과 삽을 챙긴 이들은 협곡 본진과 평야를 교대로 오갔다.
간간이 치유 신관과 마법사들도 보였다.
스승님께선 절대로 전투 지대에 가지 말라고 하셨지만, 이곳은 현재 싸움이 벌어지고 있지 않으니 괜찮을 터였다.
다만 격렬한 충돌의 흔적은 생생했다.
멀지 않은 벌판에선 페네티안 군사들이 실종자를 찾고 있었다.
창기사들은 휴전을 뜻하는 백기와 국기를 함께 펄럭이며 그들을 엄호했다.
아지랑이인지 연기인지 모를 것으로 시야가 부옜다.
들판 곳곳에 박힌 운석과 크고 작은 크레이터를 보니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런 현장에 생존자가 있다는 게 신기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너희라면 괜찮을 거야. 그렇지?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어느 기사가 정중히 우리를 안내했다.
신수들과 내가 앞장섰고, 프랑수아와 파브리스가 뒤를 따랐다.
요한 경은 어김없이 후방에서 우리를 호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작이 은근슬쩍 내게 기대며 지팡이를 짚었다.
어지간히 힘든가보다 싶어서 성의껏 부축했다. 그러자 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세레니테 후작님.”
“네, 뒤엠 후작님.”
“이건 오늘의 주제와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말씀하세요.”
“······제가 꼬마 도련님의 대부가 되어주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밀스럽고 갑작스러운 속삭임에, 긴장이 탁 풀리고 웃음이 났다.
나는 입술을 말아 물며 그를 돌아보았다.
앞머리가 흘러내린 남자는 평소보다 몇 살이나 어리게 보였다.
“훌륭한 생각이네요. 헤릿도 프랑수아 삼촌을 많이 좋아하잖아요. 정식으로 후견인이 되어주신다면 다들 기뻐할 겁니다.”
“과연 도련님의 부친이 동의할까요? 참고로 제 동생들은 만장일치로 찬성했습니다. 뒤엠가의 의사 결정은 대체로 다수결을 통해 이루어지지요.”
그가 심각하게 속닥거렸다.
나는 이러다 정말 큰 소리를 낼 것 같아 필사적으로 슬픈 생각을 했다.
거실에서 레고 밟고 침몰한 날. 의자 등받이에 팔꿈치를 찧었을 때의 고통.
“······저는 요한 경이 언제든 헤릿을 위한 선택을 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프랑수아는 그 아이에게 늘 다정하신 분이죠. 이번에도 헤릿과 친구들을 후작저에 머무르게 해주셨잖아요. 아이도 저택 식구들과 친밀하게 지내니 ‘부친’께서 거절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요.”
“오. 감사합니다.”
‘제겐 그런 격려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후작이 소곤거렸다.
나는 슬쩍 뒤돌아 헤릿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곧장 시선이 닿은 그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설마 우리 대화를 증폭해서 들었다거나······?
에이, 아무렴 요한 경이 그럴 사람은 아니지.
“변경백님. 쥘리에트 궁주이신 예서 왕자님 일행께서 당도하셨습니다.”
그즈음 우리는 반가운 얼굴 앞에 도착했다!
“원, 세상에. 기어코 이리 누추하고 험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후작님.”
“후작님, 아저씨!”
하얀 천막에서 작전도를 살피던 무테 모녀가, 놀란 낯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플뢰르 드 리스의 모데스트 바카리 단장도 함께였다.
그사이 살이 내린 엘리자베트 경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기쁨의 포옹과 인사를 나눈 뒤 빠르게 탁자를 에워쌌다.
나누고 싶은 말이 많고 챙겨주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당장 급한 건은 감쪽같이 사라진 세 사람을 찾는 일이었다.
부근위대장이 신속하고 차분한 말투로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날렵한 손이 지도 이곳저곳을 짚었다.
그녀는 황태자를 돕겠다는 크리스텔을 말리지 못해 근무지 이탈을 감행했다고 한다.
엘리자베트 경, 은근히 가인 씨에겐 무르다니까.
“평야 대부분은 1차 수색이 마무리됐습니다. 중간중간 안개가 심한 지역은 오늘 오후 2차 수색부터 꼼꼼히 살필 계획입니다. 위니테 강이 이곳 북부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세 분이 제국 방향으로 떠내려갔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막의 본진을 비롯한 후위에서 강변 수색을 진행 중입니다.”
“또한 전투 마법사 일부를 제외한 모든 마법사가 포털 찾기에 동원됐습니다. 들판 아래 고대 마법식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폐하의 고견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기에, 여기 남쪽부터 순차적으로 탐색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실 블랑케르 공작이 지휘를 맡았지요. 그리고······. 태자 전하께서 혜검의 신술을 사용하신 뒤로 저에게 이렇다 할 계시는 없었습니다.”
바카리 군이 침착하게 말을 맺었다. 뭇시선이 그에게 모였다가 흩어졌다.
나는 눈이 마주친 청소년을 향해 싱긋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렇게 입을 움직이자 예언자가 팽 눈길을 돌렸다.
그래도 스스로를 도구 삼고 자책하던 무렵보다는 훨씬 나은 반응이었다.
“일시 휴전 상태이지만, 양국 간 분위기가 평화로운 건 아닙니다. 우리 측에서 합동 수색을 권했는데 신국이 완강히 거절하더군요. 이쪽 황손만 실종된 것도 아니고, 왕위 계승자와 대공까지 사라진 판에 무슨 생각들인지.”
‘능구렁이들 같으니.’ 카롤린 무테 변경백이 투덜거렸다.
나는 파브리스 공작과 눈빛을 교환한 뒤, 찬찬히 우리의 이론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가설이다 보니 억지스러운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내가 듣기에도 조금 허술했다. 하지만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지금은 혹시나 하는 생각 하나하나가 소중했으니까.
“······그래서 잉그리드 베랑 남작의 일기장을 단서로 삼았는데요.”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율리터 스타티아?”
“설마 ‘희대의 악녀’가 귀신이 되어 농간을 부리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게다가 신국이 이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수색보다는 대대적인 퇴마 의식이나 위령(慰靈)을 권하시는 겁니까?”
바카리 군과 카롤린, 엘리자베트 경이 나란히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잔뜩 졸아붙어서 고개를 저었다. 모녀분 눈매가 닮아서 강렬해!
“뭐든 당장은 아닙니다. 유해가 뿌려진 정확한 위치 파악이 먼저니까요. 다만 일기엔 지명이나 위치가 언급되어 있지 않아서, 먼저 세 분께 조언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이미 대부분 지역은 1차 수색을 마치셨다고 하니, 안개 때문에 접근하지 못한 곳을 위주로 짚어보면 되겠네요.”
요한 경이 부드럽게 말했다.
파브리스는 책갈피로 꽂아두었던 부분을 대번에 펼쳐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날’, 율리터를 떠나보내던 날에 잉그리드가 기록한 글줄이었다.
우리는 일기책 위에서 둥글게 머리를 모은 채 끙끙거렸다.
‘······유언도, 사과도, 무엇도 없었다. 동반자도, 조문객도, 아무개도 없었다.
나 혼자 시신을 수습했고, 나 홀로 유품을 거두었다. 비가 내리지 않았으나 뺨이 흠뻑 젖어 들었다. 함성을 지르지 않았건만 목이 짐승처럼 쉬었다. 친애하는 폐하께서 영원히 돌아보지 않으실 땅에, 나는 몰래 그녀를 누였다. 그분께서 평생을 저주하실 하늘에 나는 감히 그녀를 뿌렸다. 지고하신 태양을 피해 한밤의 어둠을 택했고, 고운 머리에 달빛으로 엮은 화환을 씌워 주었다. 나의 숙적이자 자매였던 여인은 그렇게 대륙을 떠나갔다.
까닭을 알지 못한 심장이 부서져 내렸다.’
“······으음. 이런 해석은 남편 전공입니다만.”
글자를 뚫어져라 쏘아보던 카롤린이 말했다.
내가 눈을 끔뻑이자, 프랑수아가 크게 속삭거렸다.
“두 분의 연애담은 제법 유명합니다. 황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지요. 젊은 시절 약초와 시집밖에 모르던 미셸 경을 딱 두 번 만난 변경백께서, 세 번째 만남에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보지 않겠느냐’고―”
“죽고 싶니.”
“크흠.”
엘리자베트 경이 모친을 돌아보며 웃었다.
후작은 잽싸게 헛기침하며 표정 관리를 했다.
누구보다 살고 싶은 눈치인 데다 아직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으므로, 내가 그를 돕고자 나섰다.
“‘친애하는 폐하께서 영원히 돌아보지 않으실 땅’. 요 부분이 실마리인가 싶습니다. 예컨대 로메로 선황께서 한 번도 거치신 적이 없는······. 아이고, 아니다. 이건 스타티아 백작령을 뜻하는 문장인 것 같네요.”
“사실 저는 여기가 단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왕자님. ‘지고하신 태양을 피해 한밤의 어둠을 택했고’ 말입니다.”
파브리스가 조심스레 말을 받았다.
그러자 모두의 눈이 커지며 탄성이 흘러나왔다. ‘오오!’
“대단하십니다. 그럼 지도에서 ‘어둠’이나 ‘밤’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지명을 찾으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예. 구(舊) 스타티아 백작령으로 한정하면 범위가 상당히 좁혀질 겁니다.”
“그럴듯하군요.”
엘리자베트 경이 거들었고, 바카리 군이 호응해 주었다.
카롤린의 명을 받은 병사가 신국 단어 사전 몇 권을 찾아왔다.
모두가 오랜만에 책 좀 뒤져보겠다고 소매를 걷어붙이는데―
-똑똑
“실례합니다.”
일행의 유일한 성기사가 점잖게 책상을 두드렸다.
우리의 눈길이 삽시에 한데 모였다. 나는 뒤늦게 입을 떡 벌렸다. 으아악!
“요한 경, 신국 출신이면서 왜 가만히 계셨어요!”
“하하하. 저를 찾으시는 분이 없어서요. 어디까지 가시려나 궁금했는데 사전까지 가져오셨네요.”
“하, 제기랄.”
카롤린이 껄껄 웃으며 사전을 내팽개쳤다. 다들 정말로 정신이 없긴 한가 보다.
우리는 순식간에 요한 경의 곁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지도 한곳 한곳을 짚고, 그의 해석을 받아적고, ‘밤’이나 ‘어둠’이 포함되지 않은 동네는 과감히 목록에서 지워나갔다.
지명에 자주 쓰이는 단어가 아니다 보니 생각보다 진도가 빨랐다.
특히 안개 때문에 수색하지 못한 지역 중에서는―
-지익, 직, 지익!
“뭐야, 이거.”
“어······.”
카롤린과 내가 동시에 당황했다. 마지막 X자가, 마지막 촌락 이름을 덮고 있었다.
목록엔 남은 곳이 없었다.
“잘못 짚었나 봅니다. 공작님, 일기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예.”
파브리스가 잽싸게 필첩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바삐 눈알을 굴리며 단어를 낱낱이 곱씹었다.
뭐지? 설마 ‘그분께서 평생을 저주하실 하늘’인가? 키워드는 ‘하늘’이었어?
-끼이
“응, 데미. 잠깐만.”
-끼이이
“미안. 형이 지금 바빠서, 조금만 기다려주면······.”
-끼이이이
흠칫. 나는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는 장면에 몸을 떨었다.
친구들이 잉그리드의 글을 되새기는 사이, 느릿느릿 데미와 눈을 맞추었다.
레서판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했던 말, 잊지 않았지?’ 마치 그렇게 묻는 것처럼.
“······달.”
그렇구나. 네가 황제궁 오찬장에서 달을 찾은 건, 고작 하나의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달입니다. 여러분, ‘달’이 포함된 마을이에요!”
“후작님?”
엘리자베트 경이 눈을 깜빡였다. 나는 다급히 손을 뻗어 한 문장을 가리켰다.
‘고운 머리에 달빛으로 엮은 화환을 씌워 주었다.’
“달빛으로 엮은 꽃 장식은 실존할 수 없는 장식물이죠. 아무래도 이게 실마리 같습니다. 데미는 신수이니 분명히 뭔가를 알고 저를 가르치는 거예요. 달, 달빛, 화환. 이런 단어로 이루어진 동네가 있다면 아마······.”
-톡톡
다시금 기다란 손가락이 지도 위를 두드렸다. 요한 경이었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와르르 책상에 엎드려 흉터투성이 손끝을 노려보았다.
‘망크란스(Maankrans) 마을.’
*
크리스텔 랑부예는 절박했다.
“응? 아는 거지? 이모한테만 귓속말해주면 안 될까?”
“으으음······.”
진심이었다. 지금까지 동네 아이란 아이는 전부 한 번씩 붙들고 물어봤으니까.
이 애가 찐_최종_리얼_최후의.kid니까!
“어른들한테는 비밀로 할게.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진짜 이모만 알고 있을게. 망크란스 마을은 주인이 누구야?”
조그만 신전 뒤뜰엔 다행히도 인적이 없었다.
가인은 모르는 소녀 앞에서 냅다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주민들은 입만 웃고 있을 뿐 누구도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상대적으로 순한 아이들을 공략해야 했다.
그녀는 매일매일, 빈집의 벽에 선을 하나씩 그었다.
누가 보면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줄 알겠지만 대충 그거 맞았다.
여기서는 해돋이도 달넘이도 보이지 않았다.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세상은 잿빛으로 흐리터분했다.
모든 감각을 생체 리듬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곳은 무인도나 마찬가지였다.
대충 오랫동안 자고 일어나면 아침이 온 것이라 쳤다.
길게 일하고 모두가 쉬러 들어가면 밤이 되었구나 짐작했다.
마르그리트 디오프 공녀는 성수를 먹여도 쉬이 제정신을 찾지 못했다.
카르메는 그야말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동안 선은 벌써 서른 개가 넘었다. 끔찍했다.
“······이렇게 부탁할게. 이모는 집에 가고 싶거든.”
가인이 절절하게 빌었다.
“여기도 친구가 있지만, 거기는 친구들이 더 많아. 엄마도 있어. 꼭 지켜줘야 하는 가족들이 이모를 찾고 있어. 울면서 기다릴지도 몰라.”
“헉······.”
아이의 눈이 똥그래졌다.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은 소녀는 오래된 엄마 토끼 인형을 꼭 쥐었다.
크리스텔은 이번에야말로 희미한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리고 이모가 좋아하는 예쁜 왕자님이 있는데, 그분하고 헤어질 때 이야기를 많이 못 했어. 왜냐하면 그게 마지막일지 몰랐거든. 이모는······. 그것 때문에 가끔 무서운 꿈을 꿔.”
“그럼 어떡해요······?”
“네가 도와주면 될 것 같아. 정말로. 한마디만 해주면 이모에겐 너무너무 큰 보탬이 돼. 뭐라도 좋아. 이곳에 관한 정보라면 뭐든 대환영이고, 전부 고마울 거야.”
“끄으응······.”
그러자 아이는 한참 안절부절못하고 크리스텔을 바라보았다.
혼자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거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조그만 이마를 구기기도 했다.
가인은 입술을 깨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제발, 제발―
-꾸욱
“어?”
번쩍 눈이 뜨였다. 작고 서늘한 감각이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 멀어졌다. ‘타다다닷―!’
“아가야! 잠깐만!”
소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달려 사라졌다. 그게 끝이었다.
이번에도 얻어낸 거라곤 없었다.
진득한 허탈감이 폐를 무겁게 채우며 가인의 몸뚱이를 끌어내렸다.
‘털썩!’ 그녀는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손등으로 눈가를 가렸다.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청백색의 빛 알갱이가 어두운 눈앞을 반딧불이처럼 유영하고 있었다.
“하아······. 어?”
잠깐, 이게 뭐야? 웬 빛 알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