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410)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410화(410/920)
#410
사자 회담 (4)
-팟!
그리고 사방의 공기가 막혔다. 새파란 눈알이 빠르게 굴러갔다.
코앞의 추기경이 소리를 차단했음을 깨닫는 데는,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가 저에게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기나긴 막사 골목이 물에 잠긴 양 먹먹해졌다.
남자는 왕세녀에게 깍듯한 절을 올리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떨어진 종이를 줍기 시작했다.
그의 이마를 감싼 서클릿이 가을 햇살을 받아 번뜩이고 있었다.
엘리서를 따르는 병사들이 저편에서 기웃기웃했다.
그녀는 즉시 손을 내저어 도울 필요가 없음을 알렸다.
이 정도 잔일은 원래도 직접 하는 편이었다.
“······.”
-바스락, 바스락
다만 공기 속성의 신물을 가진 자와 공기를 다스리는 자가, 떨어진 종이를 손으로 정리하고 있다는 점은 다소 ‘위험했다.’
누군가에겐 충분히 수상하게 비칠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들에게는 이런 방법뿐이었다.
왕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예기를 허공에 걸어두고 손을 놀렸다.
곧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계속 그렇게 움직이십시오. 말은 저만 하겠습니다.”
“······.”
“돌아오신 뒤로 스네이더르 공작과 대화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현명한 판단입니다. 그자에게는 정보를 흘리지 않을수록 좋습니다. 전하의 눈빛 하나까지도 값을 지니고 있으니 앞으로는 한결 신중을 기하십시오.”
“······.”
“카밍하 대공께서 어디까지 가르치셨는지 모르겠으나, 전하께서 아셔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
“공작을 말로 이기려 들지 마세요.”
남자의 회보라 색 머리칼이 흘러내려 입 모양을 가렸다.
엘리서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묵묵히 종이를 주웠다.
서류에 적힌 글자는 온통 사소한 내용이었다.
또는 시효가 지난 몇 개월 전의 보고서였다.
백작은 일부러 파지를 모아 가져온 것이다. 고작 몇 분간의 밀담을 위하여.
왕세녀는, 그가 스네이더르를 꺾고자 스스로 수명까지 바쳤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논리를 만들어내려 노력하지 마시고, 그자를 정정당당히 이기겠다는 욕심도 버리십시오.”
“······.”
“그렇게 몸부림치실수록 상대는 전하를 더욱 강하게 옭아맬 겁니다.”
그 말엔 입술이 꿈틀거렸다. 그녀에겐 이미 대공과 합의한 이야기가 있었다.
방향을 확고히 정한 상태였으며, 이제는 돌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
이건 무슨 뜻이지? 도대체 로이 백작은 저에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느닷없이 저더러 어쩌란 말인가?
“무슨 뜻으로,”
-탁!
아르노가 왕세녀의 종이 뭉치를 빠르게 빼앗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불경한 태도였다. 그러더니 군더더기 없이 정중한 절을 올렸다.
‘스팟!’ 동시에 귀가 뻥 뚫렸다.
다시 병영의 온갖 소음이 들이닥쳤고, 앞쪽에선 저벅저벅 발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쉬이 속일 만한 병사가 아니라 공작이 양성한 기사들이었다.
엘리서는 그제야 침착한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미남자는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걱둑걱둑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게 끝이었다. 바람이 스치는 찰나에 벌어진 일.
“전하. 협상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기사들은 이상기류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무리 중에 성기사도 없었다.
“스네이더르 공작과 리에스테르 제국의 카롤린 무테 변경백, 세실 블랑케르 공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왕세녀는 차분히 발을 놀렸다. 기사들이 그녀를 호위하여 막사로 이동했다.
-저벅, 저벅, 저벅
“······.”
다만 백작의 조언(또는 경고)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해도 공작을 꺾을 수 없으니 이쯤에서 포기하라는 말인가?
아니, 반격의 서막조차 오르지 않았는데 그럴 리가 없었다.
대공께서 신뢰하는 사람이 그런 발언을 할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논리가 아닌 다른 방법을 쓰라는 의미일까? 무력?
하지만 엘리서는 아무런 빌미 없이 빌헬미나를 칠 수 없었다.
그건 지나치게 위험한 발상이었다.
작금의 상황에서 군사를 따로 모으기도 쉽지 않거니와, 자칫하면 신국의 집안싸움으로 번질 공산이 컸다.
거기다 그녀는 왕족이라는 대의명분을 가지고도 나라를 구하지 못해, 유력 귀족을 살해하고 내전을 발발한 지도자로 영원히 기억될 터였다.
이는 개인의 치욕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페네티안 왕실의 명예가 땅에 처박히고, 나아가 신국 전체의 믿음이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다.
‘군주는 언제나 진중해야 하느니. 모든 언동과 행위에는 마땅한 명분과 까닭이 있어야 하며, 이를 갖출 수 없는 자는 끝내 폭군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 또한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엘리서는 머릿속을 뛰어다니는 거친 생각들을 잡아 누르려 안간힘을 썼다.
-철컹, 철컹, 척!
“엘리서 페네티안 왕세녀 전하 드십니다!”
‘펄럭!’ 눈앞에서 하얀 천막이 열렸다. 도착은 순식간이었다.
엘리서가 안으로 들어서자, 빌헬미나 스네이더르와 제국 측 대리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왕세녀는 그들의 절을 받은 후 신국 측 좌석에 앉았다. 실내는 무척 단출했다.
휘장으로 가려진 구역에 널찍한 정방형의 나무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중에서 왕세녀의 의자만 화려했다.
나머지 세 사람은 평범한 나무 의자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병사들이 간단한 주전부리와 물을 내왔다.
음식 역시 절반은 신국식이었고, 절반은 제국식이었다.
“나는 술로 하지.”
그때, 건너편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렸다.
엘리서는 미간을 찌푸리지 않으려 애쓰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구불거리는 암녹색 머리칼의 중년인이, 저와 빌헬미나를 돌아보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제국 북부를 호령하는 것으로 유명한 변경백 카롤린 무테였다.
대검을 솜방망이처럼 가볍게 휘두르며, 평야가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는 자.
소드마스터.
“제가 쉬이 취하는 체질은 아니라. 한잔해야 말이 잘 나오는 성격이기도 합니다. 우리 딸이 누워 있는 마당에 맨정신 차리고 있기도 싫고.”
“······.”
말투며 태도가 불량스럽기 짝이 없었다.
국왕 대리인 엘리서는 울컥하는 감정을 내리누르며 황제의 다른 대리인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세실 블랑케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 중년인의 얼굴엔 표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왕세녀는 다시금 깨달았다.
저를 제외한 누구도, 오늘의 협상을 낙관하지 않는다. 이 또한 황제의 뜻이다.
그녀는 저에게 기회를 주었을 뿐 그 이상의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한 이치이므로.
“······뜻대로 하게.”
“나는 뭐든 얼음 하나 넣어서. 깨물 게 필요하거든. 당신은?”
“됐습니다.”
엘리서가 덤덤한 목소리를 만들어내자, 카롤린과 세실이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주문을 받은 제국 병사는 술을 내오기 위해 다른 구역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옆자리의 빌헬미나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왕세녀는 탁자 아래로 주먹을 꾹 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무트 한 잔을 받은 카롤린이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왕세녀께서 하실 말씀이라는 게 무엇인지요? 제 딴에는 사과가 아니라면 대화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이루어진 과오가 없는데 어찌 사과를 하겠습니까, 변경백.”
그러자 스네이더르가 즉시 반응했다. 아이를 어르듯 온화한 음색이었다.
카롤린은 와락 눈살을 찡그렸다.
“하, 또 시작인가? 이럴 거면 뭐하러 불렀나 싶군. 시간을 끌려는 개수작이오?”
“변경백.”
세실이 간단히 카롤린을 제지했다.
이어 마법사의 흑갈색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신국의 과오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실 요량이라면, 제국의 태도에도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만남 또한 덧없는 시간이 되겠지요.”
“······.”
“허나 우리 땅에서 세 차례의 황족 시해 미수에 준하는 사태가 있었고, 신국의 세작으로 암약하던 대귀족이 내란을 꾀한 사건이 있었으며, 귀국(貴國)의 베르너르 페네티안 국서가 폐하의 총신인 세레니테 후작을 살해하였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덮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결국 신국의 죄업이 아닙니까?”
그러자 빌헬미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블랑케르 공작님의 말씀이 일면 타당하나, 일국의 과오를 지적하려거든 입증하려는 쪽에서 먼저 명명백백한 증좌를 제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서 전하께서는 줄곧 당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계십니다. 귀국은 신국과 왕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증인 또는 증거를 갖추고 있습니까?”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 황실의 태사인 요한 헤인스 경이······.”
“우리 역시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 교황청의 대주교였던 헤인스 경은, 신국에서 악명 높은 지명 수배자였다고 말입니다. 그는 영주를 포함한 수십을 학살하고 폭주하여 자신이 살던 마을마저 파괴한 자입니다. 그자가 페네티안을 떠났을 때, 진실로 그곳의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
“설마 신국의 중죄인이었던 자를 ‘깨끗한’ 증인으로 내세우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로서는 그의 신실함을 믿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자를 이용해 국서 전하를 모함하시려는 저의는 아닙니까?”
“제국이 무슨 연유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귀하신 1왕자 전하를 볼모로 데리고 가셨으니, 뜻만 있다면야 대업을 이루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지요?”
공작의 눈이 음험한 빛을 띠었다. 단숨에 말뜻을 이해한 카롤린이―
-콰아앙!
“이봐! 누가 당신네 같은 생각만 하고 사는 줄 알아?”
탁자 다리를 걷어차며 반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변경백님!’ 사색이 된 백작령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말렸다.
술잔이 쏟아져 진한 향이 올라왔고, 엘리서는 카롤린을 보며 호흡을 고르고자 기를 썼다.
세실은 무덤덤한 낯으로 눈을 몇 번 깜빡일 따름이었다.
빌헬미나의 달변은 막힘없이 이어졌다.
“불편한 말씀을 드리게 되어 유감이오나, 앞뒤를 보건대 그러한 추측이 나오기 쉬운 상황이 아닙니까. 왕자 전하를 시해하려 하였다던 아이들이 겨우 열세 살이던가요? 결국 왕실 친위대 소속 기사의 사주를 받았다고 시인했다지요. 어린것들의 증언이 사실이라 쳐도, 일개 기사가 대관절 국서 전하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입니까?”
-덜커덩!
카롤린이 몸을 비틀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무엇보다 분통 터지는 것은, 저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점이었다.
아직도 황도 감옥에 갇혀 있는 쌍둥이 암살자는―단 한 번도 베르너르 페네티안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었다.
황실 근위대가 건진 것은 오직 심증과 정황 증거뿐이었다.
병사들이 소드마스터의 위압에 짓눌린 채 온몸을 벌벌 떨었다.
분통이 터져 입술을 깨무는 이도 여럿이었다.
“명망 높았던 시몽 드 사르네즈 공작의 비극은 저 또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허나 공작이 받았다는 국서 전하의 친서는 어디 있습니까? 국서께서 왕자 전하의 시해를 지시하였다는 분명한 증좌 말입니다. 만약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국왕 대리이신 왕세녀 전하 앞에서 목숨을 걸고 증언할 이는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사르네즈 공작은 이미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습니까. 허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황제 폐하께서 그의 재판을 진행하시고 심판자로 군림하셨습니다. 저를 포함한 다수의 귀족이 방청객과 증인으로서 참석했지요. 그러니 위대한 리에스테르 제국이 곧 증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실이 냉철한 태도로 말을 받았다. 탁자 아래 그녀의 손이 희게 물들어 있었다.
마법사는, 사르네즈 공작 사건으로 아들 로베르를 잃은 사람이었다.
깊이 사랑하지 않았어도 자식은 자식이었다.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어도, 뱃속으로 품은 십 개월은 영원했다.
그러자 빌헬미나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양 눈썹을 늘어뜨렸다.
“착각하시고 있군요, 공작님. 우리는 제국의 속국이나 제후국이 아닙니다. 단지 여러분이 믿으신다는 이유로 국왕의 반려이신 분을 죄인이라 칭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어찌 무례함을 모르십니까?”
-카아앙!
“외제니 케시에, 그 빌어먹을 노친네가 교황청을 통해 세작질을 했다고! 사르네즈와 신관이 네놈들의 간자였다는 걸 모르는 자가 있나?”
“변경백, 유감입니다······. 저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벌떡 일어선 카롤린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고, 빌헬미나는 시종일관 평온했다.
그녀는 막사에 들어온 이래 단 한 차례도 언성을 높이거나 낯빛을 굳힌 적이 없었다.
“허나 증거는 어디 있습니까? 외제니 케시에는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자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자와 내통했다고 주장하시는 추기경 또한 이미 신국의 사람이 아닙니다. 오래전에 국적을 버리고 교황청에 속한 데다, 지난겨울 사막에서 마수를 만나 목숨을 잃었다지요. 산 자가 어찌 망자를 잡아들여 경위를 묻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또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합니까? 참으로 답답하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국이 끊임없이 국서 전하를 살인자라 모함하고, 모든 악업은 신국의 것이라 윽박지르고, 성스러운 나라를 대죄의 요람으로 만드는 모든 과정이······.”
주름진 눈매에 통탄스러운 빛이 맺혔다. 이내 공작의 목소리가 슬픔에 잠겼다.
“결국은 황제 폐하의 흑막이 아닐까 여기는 것이 마땅한 흐름 아니겠습니까? 그분이 진정 대륙을 삼키시려 한다면, 신국으로서는 뭉쳐서 대항하는 편이 유일하고도 합리적인 길입니다.”
-쿠당탕!
“감히 프레데리크 리에스테르를 능멸하는가!”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카롤린이 의자를 집어 던졌다.
위압에 질린 병사들이 눈물을 쏟으며 애원했다.
“변경백님, 제발 따님과 폐하를 생각하셔서······.”
“이거 놓아라! 내 저자를 그냥······!”
“······.”
엘리서는,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아직은.
하지만 거의 다 왔다.
*
-······지이이익.
“이렇게 씁니다.”
나는 나뭇가지를 뚝 멈추고서 밝게 웃었다.
어느덧 연병장 흙바닥엔 커다란 글씨가 석 자나 적혀 있었다.
‘정 예 서’.
“······동그랗군.”
그것이, 황태자의 첫 감상이었다.
가인 씨가 빗자루질을 하다 말고 깔깔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