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42)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42화(42/920)
#042 황궁 탈출 넘버원 (2)
-쿠르르······
포털을 이용할 사람들이 전부 실내로 들어오자, 육중한 문이 다시 닫혔다.
나와 세드리크 황자는 일행의 맨 앞에서 크리스텔을 마주하고 있었다.
“······.”
황자 놈은 크리스텔을 보고도 무표정이었는데, 묘하게 기분이 나빠 보였다.
놀란 기색이 없는 걸 보니 그녀가 포털에 오는 건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또 나만 몰랐지, 또.
“사르네즈 공녀. 여긴 어떻게······.”
아니, 이런 질문은 이제 의미가 없다.
로판의 주인공과 메인 남주가 엮이는 건 당연하다고 스스로를 타이른 게 몇 번이던가.
크리스텔도 ‘마수 대토벌’에 참가한다고 했으니 포털에 온 용건이야 뻔했다.
어차피 두 남녀는 어떻게든 만나게 되어 있다.
내가 잠투정하는 데미를 품에서 어르며 문장을 고쳤다.
“그 채찍은 뭡니까?”
반질반질한 남빛의 가죽이 섬뜩했다.
“아, 위층에서 하나 질렀습니다.”
크리스텔이 채찍 쥔 손을 흔들며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질렀다’는 단어를 이해했다는 티를 내도 괜찮을까 고민하는데, 내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말을 받았다.
“간만에 뵙습니다, 크리스텔 공녀. 채찍은 무기로 쓰시려는 겁니까?”
우리와 여정을 함께하게 된 엘리자베트 경이었다.
그녀는 회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크리스텔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지난번 야외 연무장에서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때 자리가 갑자기 파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을 터였다.
“안녕하세요, 엘리자베트 경.”
“실례가 안 된다면, 채찍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네, 얼마든지요. 제가 평생 근육을 써본 일이 없어서 검이나 창을 갑자기 다루기가 힘들었거든요. 공작령의 기사들을 달달 볶아서 저 같은 사람도 쓸 만한 걸 찾아내도록 했더니, 채찍을 추천하더군요.”
“팔만 잘 관리하신다면 나쁜 선택은 아닙니다. 이 물건도 아주 좋네요.”
“고맙습니다. 다행히 손목 스냅은 괜찮은 편이에요.”
크리스텔이 환한 미소와 함께 채찍을 돌려받았다.
그녀는 새로운 대화 상대가 꽤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엘리자베트 경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 상대가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달라는 대답도 이어졌다.
둘이 잘 지낼 것 같긴 했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듯싶었다.
“잡담은 그만두고 출발하지.”
오순도순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건 황자였다.
나는 조금 안타까운 눈길로 놈을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트 경 말고는 친구가 없다더니 새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너도 크리스텔하고 말 좀 섞어봐라, 치고받기만 하지 말고.
“죄송합니다, 전하. 모두 주목! 호위 절반은 이곳에 남아 마지막으로 이동한다. 나머지 절반은 이쪽으로······.”
엘리자베트 경은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더니, 황자에게 깍듯이 존대하며 근위대원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동행한 시종들과 하인들도 정해진 자리에 줄을 서서 대기했다.
크리스텔이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부근위대장을 보내준 뒤 내 곁에 다가와 섰다.
의도치 않게 주인공들을 양옆에 끼고 서니 벌써 속이 답답한 느낌이었다.
나는 애니멀 세러피의 일환으로 잠든 데미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이윽고 선발대가 포털을 타고 황도의 남부로 사라졌다.
붉은 금속성 빛으로 사람들을 삼키는 마법식과, 먼지처럼 사라지는 이들을 보며 나는 여전한 공포와 경이로움을 느꼈다.
우리 차례가 되었을 때는, 마나 감응력이 아닌 정신력의 문제로 살짝 긴장할 정도였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멀미약 붙이셨어요?”
크리스텔이 내게 자상히 말을 붙였다.
“아, 네.”
“그럼 괜찮겠네요.”
“그럴 겁니다. 임상 시험은 해봤으니까요.”
내가 대답하자, 그녀는 소리 내 웃으며 잘됐다고 격려했다.
우리와 함께 거대한 마법식 위로 올라온 엘리자베트 경, 가나엘, 뱅자맹, 그리고 황자의 시종인 다비드 역시 걱정 마시라며 한 마디씩 얹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도 같았다.
“마법사는 필요 없다.”
작게 미소 짓고 있는데, 냉랭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난감한 얼굴의 르고 포털 전담 마법사와, 그에게 벽을 세우고 있는 황자가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말 그대로. 내 마나를 쓸 테니 다른 마법사는 불필요해.”
주황색 눈동자가 경계심에 젖어 있었다. 남의 마나가 몸에 닿는 게 싫은 듯싶었다.
키는 멀대 같이 커가지고, 스물넷이 아니라 24개월 유아인가 싶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부티에 추기경이 없으니 상황을 수습할 만한 사람은 나뿐인 듯했다.
“······그렇게 하시죠. 죄송합니다, 마법사님. 마나 아낀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내 사과에 황자 놈이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포털 마법사가 절을 올리고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나는 황자에게 당부했다.
“대신 저 마법사님처럼 친절하게 해주셔야 합니다. 셋까지 숫자 세고 마나 주입,”
“지금.”
-지잉!
황자가 예고 없이 붉은 마나를 마법식 위로 흩뿌렸다.
황제궁 지하 포털에서 보여준 건 티저에 불과했는지, 그의 마나는 막 분출된 용암처럼 사정없이 마법식을 집어삼켰다.
크리스텔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엘리자베트 경은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우우우웅!
“이······.”
내가 잇새로 나쁜 말을 뱉는 것보다 포털 작동이 더 빨랐다.
마침 잠에서 깬 데미가 칭얼거렸다.
나는 레서판다를 꼭 끌어안은 채, 새빨간 마나 속으로 불티처럼 사라지는 황자의 눈을 노려보았다.
이어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과 함께, 그의 마나가 내 멱살을 잡아챘다.
문득 시선을 내려 보니 내 손끝과 발끝, 그리고 데미의 꼬리 끝이 가루처럼 바스라지고 있었다.
마법사 씨, 저 속이 안 좋아요······.
*
다행히 속은 멀쩡했다. 뒤엠 후작의 멀미약 효과는 굉장했다!
나는 약간의 어지럼증도 없이 황도 남부에 도착할 수 있었고, 다시 마차에 올라서도 좋은 컨디션을 유지했다.
다만, 이 포털 여행 때문에 다른 의미로 속을 끓인 분이 계셨다는 게 한 가지 마이너스였다.
-끼이!
“어, 놀랐어. 속상했어.”
-끼이이이!
“어, 형이 미리 안 깨우고 갑자기 포털 태워서 화났어.”
-꾸르르르르!
“어, 형이 진짜 잘못했다. 착한 데미가 한 번만 봐주자. 데미는 신수님이고 형은 한낱 인간이잖아.”
“왕자님.”
뱅자맹이 그건 좀 아니라는 듯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나는 그제야 약간 머쓱해져서 데미를 무릎 위로 내려놓았다.
레서판다가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다는 듯 내 손바닥에 박치기를 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뒤엠 후작이 괜찮을 거라고 해서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역시 못 자게 했어야 했나 봅니다.”
내가 말했다.
며칠 전 프랑수아 뒤엠 후작이, 신수는 마나 감응력이 높으니 포털 이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나는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먼저 후작령으로 떠난 신수들은 혹여 문제가 생길까 봐 포털을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후작이 내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제가 신수들을 양팔에 끼고 순간이동을 해봤습니다. 잘 되더군요.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진짜 미친 사람······.
“아니에요, 왕자님. 데미 님은 그렇게 시끄러운 무역소에서도 쿨쿨 주무셨으니, 왕자님께서 깨우시긴 어려웠을 겁니다.”
가나엘이 내 편을 들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라, 나는 웃으며 데미에게 라즈베리 세 알을 내밀었다.
녀석은 조금 뾰로통해 보였지만 결국 풋풋하고 달콤한 향을 거부하지 못했다.
-찹찹찹찹······
“잘 먹네.”
아무튼, 포털이란 큰 고비는 무사히 넘겼다.
이제 남은 건 마수 대토벌에서 나와 데미를 무사히 건사하는 것뿐이었다.
주인공들이야 알아서 잘 할 테고.
*
“왕자님,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쓰읍······.”
나는 입가에 흐르는 침을 빠르게 수습하며 잠에서 깼다.
마차에서 점심으로 염장 건조 소고기와 쿨로미에, 샐러드, 다양한 필링으로 꽉 찬 키슈를 네 개쯤 먹고 그대로 곯아떨어진 것이다.
어렴풋이 창밖 구경을 했던 기억이 있지만, 고속도로 풍경이 5분 지나면 다 똑같은 것처럼 제국의 숲길 풍경 역시 갈수록 비슷비슷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황궁에 비하면 아주 누추한 곳입니다. 하지만 귀족과 황족이 왕왕 머무는 곳이니 기본은 할 겁니다.”
뱅자맹이 이어 설명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가 하룻밤 묵게 될 곳은 여느 귀족의 성이 아니라 ‘여관’이었다.
황자가 있는데 이게 말이 되나 싶지만, 제국 남부인 뒤엠 후작가로 내려가는 길은 꽤 험했다.
도중에 쉬어갈 만한 영주성이 없고, 반드시 그러고 싶다면 방향을 틀어 한참을 옆으로 들어가야 했다.
5성급 호텔 찾다가 시간을 더 버리게 된다는 뜻이었다.
이에 우리는 ‘뤼카’라는 마을에서 첫날밤을 보내게 됐다.
-다각, 다각, 다각
마차가 속력을 늦추더니, 이내 완전히 정지했다.
나는 어느덧 팔팔해진 데미를 어깨 위에 얹어주고 마부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와······.”
분주히 움직이는 황궁의 시종과 하인 사이로, 깨끗한 숙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여관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컸고, 꼭 유럽 시골의 작은 호텔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이곳저곳에 마법 조명이 켜져 있어 어둡거나 위험한 느낌도 없었다.
숙소 전방에는 ‘르 시프르 여관’이라는 팻말이 박혀 있었다.
“왕자님.”
뱅자맹이 작게 나를 불렀다. 나는 반짝 정신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헉.”
작게 숨이 넘어갔다.
천 명 남짓한 뤼카 마을 주민들이, 여관 앞으로 우르르 몰려와 납죽 엎드려 있었다.
황도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보긴 했지만 느낌은 전혀 달랐다.
그곳 사람들의 인사가 황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하는 듯했다면, 지금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경외에 가까웠다.
다수의 등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화, 황자 전하를, 뵙, 습니다······. 해님, 처럼 빛나실······.”
이어 울먹울먹하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세드리크 황자의 앞으로 꽃다발을 들고 나선 소녀가 보였다.
이제 겨우 열 살이나 됐을까 싶은데 마을 대표로 황족에게 환영 인사를 하게 된 모양이었다.
애한테 저런 일을 시킨 어른이 제일 나쁘지만, 나는 일단 지체 없이 황자에게 다가갔다.
혹시 그가 아이를 매몰차게 대할까 걱정이었다. 그런데,
-바스락
황자가 간단한 동작으로 꽃다발을 받아주었다.
아이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나 역시 의외의 전개에 눈을 끔뻑였다.
“······짐을 풀어 나누어주도록.”
“예, 전하.”
황자의 말에 시종들의 움직임이 더욱 부산해졌다.
나는 비로소 그의 짐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를 깨달았다.
열 대나 되는 마차를 전부 포털로 옮긴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처음부터 자신이 쓰려고 가져온 하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5열 종대로 서십시오! 황자 전하의 하사품을 전달하겠습니다.”
“여기에 이름을 쓰고, 여기에는······.”
“황은, 황은이 망극합니다······.”
······‘세레기’ 소리까지 들을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연신 허리를 숙이는 주민들을 한 번 바라보고, 빠른 걸음으로 황자를 따라 숙소 안으로 이동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크리스텔이 황자의 뒷모습을 보며 ‘이열······.’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람 다시 봤다는 말투였다.
“고귀하신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여관 로비로 들어서자, 깔끔하게 차려 입은 직원들과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일제히 절을 했다.
황궁 밖으로 나오니 이런 점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다행히 여관을 통째로 빌린 덕에 실내에서만큼은 편히 지낼 수 있을 것 같았,
-부스럭
“어?”
황자가 내 품으로 꽃다발을 아무렇게나 떠밀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관 주인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올랐다. 이건 또 뭔?
“죄송합니다, 예서 왕자님. 전하께서는 손이 번거로운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제게 주시면 처리하겠습니다.”
황자의 시종인 다비드가 재빨리 내게 다가와 사과했다.
요컨대 저놈이 나한테 꽃다발을 버렸다는 소리였다.
야, 이러니까 정은서가 널 세레기라고 하지······.
“점수를 혼자 쌓고 혼자 깎아 먹는 성격이네요. 참 인생 힘들게 사신다.”
크리스텔이 옆에서 팩트리어트 미사일을 발사했다.
다비드는 분명 들은 눈치였는데도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뒤따라온 엘리자베트 경이 가나엘의 팔을 잡고 흐느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꽃은 제 방에 꽂아놓겠습니다. 이대로 버리긴 미안하고 아까우니까요.”
“그럼 물은 제가 제공하죠.”
내 말에 크리스텔이 빙글빙글 대답했다. 놀리는 건지 응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빨리 저녁 먹고 잠이나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