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424)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424화(424/920)
#424
신과 동화의 나라 (3)
“저에게는 그저 검게 보입니다, 폐하.”
그것이, 모데스트 바카리 군의 대답이었다.
우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조용히 그를 돌아보았다.
동그란 은테 안경이 마법 조명 아래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화로에선 이따금 발간 불길이 날름거렸다.
“일찍이 말씀드렸다시피 쥘리에트 궁주께서는 저의 예지력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이것은 약간의 과장도 없는 진실입니다. 저분의 존재 탓인지, 또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알 수 없으나······. 하늘을 가로지르는 줄은 제 눈에 그저 어둡고 불길하게 비칠 따름입니다. 그 밖에 특별한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그렇게 말한 예언자가 나를 일별했다.
특별한 표정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청소년의 눈빛에서 쉬이 유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괜찮다는 의미로 입꼬리를 올리자 그가 입술을 비죽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뭐가 미안해요, 그게 사실이잖아.
“······쯧.”
-부스럭
그러자 황제가 혀를 차고는, 다시 손에 든 종이를 훑었다.
가나엘이 경계의 신전에서부터 챙겨온 물건이었다.
헤릿이 삐뚤빼뚤한 글씨체(또는 그림체)로 열심히 베낀 퇴계공의 설정들이었다.
아이는 내용을 읽지 못하니, 문장이 이상한 데서 끊긴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단어 몇 개가 통째로 잘려있었다.
중년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종잇장 곳곳에 맺혔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이는 분명 페네티안 신국의 비밀이나 약점을 캐기 위한 작전이었는데, 결국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셈이 됐다.
이자벨이 돋보기를 동원해 살폈지만······.
“황공합니다, 폐하. 두 번째 장에서도 아무런 정보를 얻어낼 수가 없습니다. 하난 폐하께선 본 적이 없는 언어라고 하십니다.”
“그래. 보아하니 신어(神語)도 아니고, 제국의 고대 암호도 아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교황만이 읽을 수 있거나······. 누구도 읽지 못하는 것이겠지. 어느 쪽이든 신의 뜻 아니겠느냐. 결국 짐에게 새로이 주어지는 정보는 없군.”
“······.”
이자벨이 안타까운 얼굴로 깃펜을 만지작거렸다. 황제의 긴 한숨이 이어졌다.
스승님은 그분의 머리카락을 살살 어루만지며 함께 생각을 헤아리셨다.
나는 조심스레 어른들을 살피고, 다시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지금이라면 괜찮을 듯싶었다.
곧 여정을 떠나야 하니 그전에 진실을 말씀드리는 편이 낫기도 했다.
비장한 눈빛으로 가인 씨와 황태자를 마주하자, 두 사람이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둘은 이미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고맙게도.
“저, 폐하.”
“그래. 똥강아지처럼 낑낑대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라.”
제가 언제······. 아닙니다.
“하늘에 정체불명의 하얀 줄이 나타난 것은, 아마도 세계수가 다친 까닭입니다. 성궤의 내용물이 뿌리에 닿으며 무서운 빛을 일으켰다고 들었습니다.”
“안다.”
“그런데 세계수는 생명의 원천이라고 불립니다.”
“그것도 오렐리가 설명한 적이 있는 것 같군. 30년쯤 전에.”
“이는 또한 세계선(世界線)을 보호하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
그 말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눈길을 돌렸다. 이건 모르셨을 것이다.
‘세계선’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시겠지. 나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신수 바구니를 지켜보던 로피가 홀짝 뛰어 이쪽으로 다가왔다.
“죽은 율리터가 가공간을 만들어 태자님 일행을 납치할 수 있었던 건, 세계수가 다쳐 우리 세계선이 취약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생기기 쉬운 환경이었습니다.”
“······금시초문이군. 어째서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황제의 암적색 눈이 가늘어졌고, 스승님의 금빛 단안경도 기울었다.
오직 가인 씨와 세드리크 태자와 요한 경만이 평온했다.
나는 바싹 마르는 입술을 혀로 적셨다. 그게요.
“제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은 두 분께서도 익히 아실 겁니다. 저에게 가족이 있고, 집이 있고, 따로 직업이 있다는 점도요. 그것만으로 큰 혼란을 겪으셨음을 압니다. 당시엔 저희의 귀환과 스타티아 바위 성 사건으로, 이미 수수께끼가 지나치게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때는 내가 친구들에게 진실을 폭로하기 전이었다.
나는 미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홀로 모든 것을 감추고 있었다.
아주 꽁꽁 싸맨 채 누구에게도 속을 내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압박감이 턱밑까지 켜켜이 차오르는데도, 더 급한 건이 있다는 이유로 미련퉁이처럼 줄곧 모른 척했다.
그러다 끝내는 꼴사납게 터져 버렸지.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거다. 이젠 나를 응원해주는 친구들도 있고.
“실은 제가, 그 종이에 쓰인 글씨를 전부 읽을 수 있습니다.”
“뭐?”
“예서?”
추기경의 무릎을 베고 있던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두 어른이 나를 똑바로 보았다.
바카리 군은 물론이고 에르베 경과 다비드 역시 놀란 눈치였다.
재빨리 다가온 가인 씨가 내게 붙었다.
태자는 나를 반쯤 가렸고, 로피는 꼬리를 바짝 들어 올린 채 우리를 등지고 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가 헛숨을 뱉었다.
내가 말을 고르는 동안, 결국 스승님이 먼저 입을 여셨다.
“성궤는 주신의 뜻을 모아둔 기록 상자란다. 위대하신 분의 가장 순결한 의지가 쌓인 공간이지. 헤릿이 접근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신물을 이용해 접촉할 생각을 하지 못한 물건이기도 해.”
“그렇군요.”
“오직 교황만이 열어볼 수 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던 데다······. 대륙엔 신물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지 오래였단다. 그러니 우리에겐 무모한 도박이었어.”
“네.”
“그런데 예서 네가 그것을 막힘없이 읽는단 말이니?”
나는 서둘러 양팔을 내저었다.
“제가 대단한 사람이어서는 아닙니다, 전하. 단지 그것이 저의 모국어고, 본래 이곳에서는 쓰이지 않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짝!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이 성력으로 몇 월 며칠인지도 여쭈고 싶습니다. 여기가 정확히 어디인지도 궁금합니다.】
내가 호닝 마을에 불시착했던 날.
‘소, 송구합니다, 천사님. 무슨 말씀이신지······. 저, 저희는 천하고 무식하여, 하, 하늘에서 쓰시는 말은 알아들을 수가······.’
분명히, 갑작스러운 언어 장벽이 있었다.
나는 휘노와 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둘은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친구들을 찾으러 가야 하는데 기본적인 소통조차 할 수 없으니, 너무나 당혹스러워 눈앞이 캄캄해졌더랬다.
그런 와중에도 어린아이가 건네는 나무딸기를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빨갛게 익은 과실을 입에 넣고 꼭꼭 깨물어 삼켰다.
그게 의외로 대단한 별미여서―
‘와. 진짜 맛있다. 가져다 팔아도 되겠는데?’
‘마, 맙소사! 천사께서 페네티안 말을 하신다! 아이고!’
‘우와아!’
그래, 그랬지!
“여기 돌아와서, 이곳의 음식을 먹었더니 말이 트였습니다. 그전까지는 저 또한 소통이 불가능했습니다.”
“신묘하군. 허면 이것들이 네가 태어난 세상의 문자란 말이냐?”
“그러합니다, 폐하.”
“무엇이라고 쓰여 있니?”
스승님께서 나긋하게 물으셨다. 나는 곧장 입을 뗐다.
“그······.”
그리고 잠시 굳었다. 하지만 정말로 잠깐이었다고 맹세할 수 있다.
주먹을 쥐고 침을 삼키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일련의 과정은, 무척이나 짧고 빨랐다.
내가 다음 문장을 꺼내는 순간―
“되었다.”
“예?”
잘 못 들었습니다?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프레데리크 황제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턱을 한 번 까딱이고 손을 휘저었다.
“그만 네 짝들을 데리고 돌아가서 쉬어라.”
혼란스러웠다. 나는 두 분을 갈마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폐하, 제가 드릴 이야기는······.”
“네 판단이 옳아.”
툭, 그런 말이 날아들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미 수수께끼가 지나치게 많다.”
“······.”
“또한 이 몸에겐 지켜야 할 것이 넘쳐나지.”
깨달음은 아주 느리게 번져나갔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가인 씨와 내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로피가 등을 부풀리며 ‘하악!’하고 위협했지만,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내 핏방울처럼 붉은 눈동자가 지척에서 나를 들여다보았다.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디깊은 시선이었다.
“나중에 들으마.”
“아······.”
그렇구나.
“지금은 양손에 짐이 있어 번거로우니.”
“······.”
이분은 벌써 짐작하고 계시는 거야.
내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았는데도, 앞뒤 정황을 끼워 맞춰 대강의 진실을 파악해 내신 거다.
스승님과 영혼을 공유하는 분이니 통찰력은 배가되고, 나를 관찰하며 얻은 간접적 정보량도 상당했겠지.
그리하여 순식간에 종합적인 판단을 내린 황제는······.
“일단은 간직하고 있어라.”
스스로 무지(無知)를 택했다. 이 세계의 비밀을 ‘모르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위치에서, 군주는 자신의 의지로 정보를 받지 않는 쪽을 골랐다.
그것이 불러일으킬 추가적인 무질서를 당장은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평시가 아닌 전시였다.
오늘은 해넘이 직전까지 평야에 피가 뿌려진 날이었다.
거기다 그녀가 반려를 만나 휴식다운 휴식을 취한 것이, 무려 7개월 만이었다.
그마저도 며칠이면 끝날 터였고, 황제는 다시 온 신경을 나라에 쏟아야 했다.
주신의 정체나 세계의 원리 등에 할애할 정신은 없었다.
“······.”
그러니 당장은 곤란하다고 말씀하시는 거였다. 정말로, 당장은.
나는 큰 숨을 들이켜며 그녀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소파에 앉은 스승님이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계셨다.
두 분은 같은 마음이시구나. 늘 그랬듯이.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기특하군.”
황제가 씩 웃더니, 내 코끝을 두드리고 물러났다.
나는 벌게진 뺨을 소매로 쓱쓱 문질렀다.
설마하니 이런 흐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만큼 프레데리크 리에스테르다운 결정도 없을 것이다.
“폐하, 방금 하신 말씀은······.”
“나중이라고 했다, 에르베. 너도 이만 네 형과 회포를 풀러 가라.”
중년인이 웃음기 섞인 투로 대꾸했다.
멍하니 서 있던 근위대장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물러났다.
그러자 바카리 군이 그에게 인심 쓰듯 빵을 건넸고, 숨죽이고 있던 가나엘 일행은 빵 터져버렸다.
나는 함께 키들거리며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옅은 한숨을 내쉰 태자가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었다. 스치듯 눈이 마주쳤다.
어, 너도 놀랐지?
너희 어머니는 항상 우리 머리 꼭대기에 계신다니까.
*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폐하. 전하.”
“그래. 일찍들 자라.”
“좋은 꿈 꾸렴.”
프레데리크가 대충 손짓했고, 오렐리는 다정한 말을 얹었다.
바리바리 짐을 든 아이들이 곱게 절하고 천막을 벗어났다.
커다란 신수 바구니에 못생긴 짐가방까지 챙기니, 저것이 황족인지 동네 놈팡이 무리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와중에 고양이 신수는 군주의 침대 밑으로 쏙 들어가 깜깜소식이었다.
뒤이어 이자벨과 에르베까지 막사를 떠났다.
황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무섭게 침묵했다.
“······오렐리.”
“응. 신전에는 우리가 찾는 정보가 없어. 예서의 비밀은 논외인 셈이니까.”
곧바로 노랫말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허스키한 목소리는 더욱 낮아졌다.
“천 년 전이든, 일 년 전이든. 페네티안 측이 모조리 쓸어갔다고 보아야겠군.”
“그렇지 않고서야 우니오 멸망기의 기록이 단 한 줄도 없을 리가.”
“······.”
“불리한 증거는 처음부터 남기지 않는 거야. 그게 저들의 방식이야.”
‘이리 지독한 놈들은 처음인데.’ 프레데리크가 술잔 대신 물잔을 빙빙 돌리며 혀를 찼다.
오렐리는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멈추었다.
황제는 못 이기겠다는 양 잔을 내려놓고, 순순히 반려의 머리끈을 풀었다.
다만 벌써 잠들어서는 곤란했다. 한 가지가 더 있었으니까.
리본을 쥔 그녀가 바람을 불렀다.
“태사.”
-······펄럭!
조금 전 웃으며 떠났던 요한 헤인스가, 단 몇 초 만에 천막을 걷고 돌아왔다.
그러나 다비드를 포함한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꼬마들에게는 무엇이라고 둘러댔는지 모르겠으나, 그라면 변명할 필요조차 없을 터였다.
남자는 황제와 추기경 앞에 깍듯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미끈한 낯엔 표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얀 머리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황제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아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면, 이후로 일주일간 나는 어떠한 연통도 띄우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원군도 없다.”
“예.”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지.”
그러자 요한이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민트색 눈동자가 서슬 퍼런 살기를 띠고 있었다.
두 번 세 번 곱씹을 것도 없는 문장이었다.
황제는, 황태자 일행을 신국 깊숙이 파견하겠다는 계획을 모든 지휘관이 듣는 자리에서 공표했다.
내부에 어떤 배신자가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임에도 말이다.
‘시몽 드 사르네즈 공작 사건’ 이후, 리에스테르 지배층의 대부분은 청소가 되었다.
다만 그것으로 만사가 해결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진짜 쥐새끼들이란 본디 꼭꼭 숨어 꼬리조차 보이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모든 욕심을 버리고, 구멍 깊숙이 들어가 오감조차 포기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바퀴벌레보다 끈질긴 명줄을 붙든 채 후대를 도모하는 치들······.
결코 드물지 않은 이야기였다.
“물론입니다. 어떠한 처리를 원하십니까?”
그러니 7일간 황제의 명을 운운하며 따라오는 놈이 있다면, 그자는 죄인이다.
예외는 없다.
“깨끗하게.”
“황명을 받듭니다.”
남자가 정중히 답했다. 오렐리는 머리를 빗으며 상냥하게 덧붙였다.
“늘 수고가 많구나, 요한. 이번에도 애써주렴. 아이들을 잘 부탁해.”
성기사가 설핏 입꼬리를 올렸다. 이는 조금도 수고로운 일이 아니었다.
‘신과 동화의 나라’라 불리는 고향 땅에서, 그는 태어난 이래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울 예정이었다.
쓰레질은 밥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밥 먹기를 좋아하는 그의 주인은 생각이 다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