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430)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430화(430/920)
#430
오랫동안 사귀었던 (4)
그 시각.
-쏴아아아······
-후두두두······!
처마 끝에서 빗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창고에서 본채로 장작을 나르던 요한이 고요히 울타리 너머를 살폈다.
물안개가 피어오를 만한 지역도 아닌데, 오직 폭우가 만들어낸 습기로 시야가 온통 뿌옜다.
이 지방에선 흔치 않은 기묘한 날씨였다.
멀리 침엽수림이며 작다란 여염집이 다문다문 눈에 들어왔다.
“······.”
어쩌면 이 또한 ‘주신’의 뜻일지도 몰랐다.
빗발이 잦아들지 않으니 분명 저지대에서는 큰 피해가 발생하고 있을 터였다.
남자는 피부에 달라붙는 소매를 거칠게 걷어붙이고, 장작에 씌운 천을 벗겨냈다.
하얀 머리카락 끝에 투명한 물방울이 맺혔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건너편 창고에선 엘리자베트가 또 다른 장작더미를 등에 짊어지고 나왔다.
주인이 있는 용병과 상사가 있는 군인은, 제법 잘 맞는 구석이 있었다.
둘은 대화가 많지 않은 편이었으나 대충 서로의 행동 방식을 이해했다.
“안에 들어갈 데가 더 있습니까?”
“아뇨. 오늘은 이쯤 해야겠네요. 마구간엔 말들이 있으니 곤란할 거예요.”
요한이 부드럽게 답했다.
‘터억!’ 그 옆에 장작더미를 내려놓은 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채에 남은 공간이 없다면 나머지는 창고에 그대로 두어야 했다.
두 남녀는 가만히 지붕 아래 서서 근육을 풀었다.
다행히 네일리 부부는, 이 집을 지을 때 일부러 고지대를 선택했다고 했다.
이전에 요한과 이웃으로 살던 곳에서 침수 피해를 자주 입었기 때문이다.
요세피나가 세상을 떠난 후, 마을은 깨끗이 망해버렸다.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고 완전히 새로운 직업을 골랐다.
듣자니 이곳 영주는 예전 영주처럼 못된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먼 땅에서 온 영지민을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받아주는 것은, 확실히 드문 일이었다.
다만 머리가 썩 나빴다.
그녀는 세수 확보에 도움만 된다면 누구든 받아들이는 자로, 정치력이 없고 셈도 약해 예리호가 망할 때까지 손 한번 제대로 못 써 봤다고 했다.
‘바보에다 일도 못 하지만······. 적어도 우릴 약탈하거나 괴롭히지는 않아. 의외로 치안도 괜찮은 편이고.’
‘세금도 그때 그놈보다 적게 걷고, 영지 소출이 많으면 영지민들에게 소나 돼지를 잡아다 나눠주기도 해. 본인 기분 좋다고 한턱내는 거지.’
‘그러니 여기선 괜찮아, 요한. 우리도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어.’
그렇게 말한 네일리가 말린 약초를 종이에 싸며 웃었다.
‘왕!’ 반려견 바리가 씩씩하게 한 차례 짖고는 꼬리를 흔들었다.
토비는 아내가 건네준 약초 뭉치에 삐뚤빼뚤한 도장을 찍고, 그것을 커다란 나무상자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그 작업이 끝난 뒤에는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약초 뿌리 상태를 열심히 수첩에 기록했다.
요한은 뜨거운 아니스 우유(anijsmelk)를 마시며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과거엔 몰랐는데, 신국에 돌아와서 다시 맛보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는 이 음료를 제법 좋아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겨우 6년 됐어. 아직도 배울 게 많아. 처음 1년은 열심히 키운 약초를 겨울에 다 버려야 했다니까. 줄줄이 곰팡이가 피는 바람에······.’
‘왜 하필 약종상이야?’
‘설마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요한?’
토비가 상처 난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성기사는 가만히 답을 기다렸다.
‘우리 마을엔 부제는커녕 의원도 없었잖아. 기억나?’
‘······.’
‘이게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었어. 그래도 약풀은 조금 알았으니까.’
‘근처에 약 파는 집이 있으면, 아픈 사람이 아무것도 못 해보고 죽진 않을 거야. 우리 같은 사람들이 또 생기면 안 되잖아.’
네일리가 남편의 말을 거들었다.
그리고 슬쩍 토비의 수첩을 들여다보더니, ‘또 날짜 틀리게 적었네!’ 하며 그의 엉덩이를 때렸다.
부부는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킬킬거렸다.
요한은 그런 두 친우의 모습을 보며 목을 울렸다.
그들은 이제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그날로부터 완벽히 낫지는 못했어도, 이따금 흉터를 보며 ‘그땐 참 아팠지’하고 서로를 위로할 정도는 된 것 같았다.
아마 앞으로는 더욱 행복해질 터였다.
저와 헤릿처럼.
‘토비, 방금 봤어? 바리가 왼발하고 오른발을 구분해!’
‘맙소사. 우리 애 천재인가 봐!’
요한은 그것이 못내 기뻤다.
책등이 너덜너덜해진 약초학 서적과, 네일리에게 앞발을 내미는 강아지가 눈에 들어왔다.
부부의 아픔을 조금씩 지워준 존재들.
“그자들이 무엇을 원했습니까?”
“······.”
흠칫. 남자는 새벽의 기억에서 깨어나 눈을 돌렸다.
날렵한 회색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눅눅한 공기에 흙내음과 약풀 냄새가 섞여들었다.
굴뚝에선 뭉게뭉게 느린 연기가 솟아올랐다.
부부가 일행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그간 마수를 잡으러 다녀오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따로 폐하의 밀명을 받으셨겠죠.”
“······아.”
민트색 눈끝이 슬쩍 접혔다. 엘리자베트가 피식했다.
“능청은 됐습니다. 세드리크도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놈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요?”
“글쎄요. 안타깝게도 고문을 해볼 여유는 없었네요. 저도 에테르를 쓰지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
“아아.”
“하지만 태자 전하가 목적인 것은 확실해 보였어요.”
“······.”
그 말엔 눈매가 날카롭게 섰다.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엘리자베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치들이 가끔 있었습니다.”
“······.”
“세드리크는 약했으니까요. 불길한 예언을 받은 적도 있었고.”
“네. 그분의 몸 상태는 대강 알고 있어요. 짐작 가는 이유도 있고, 실제로 본 적도 있죠.”
요한이 지나가듯 대답했다. 그저 ‘비가 빨리 그쳤으면 좋겠네요.’ 하는 투였다.
부근위대장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 역시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감히 제국의 황자를 대놓고 해코지하는 놈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 직전까지 간 세력은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폐하와 국서 전하 선에서 정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황위 계승자의 자리가 위태로웠던 시절이군요.”
“예. 저도 어렸으니 잘은 모르지만······. 아시다시피 제국엔 황족이 많습니다. 아마 스스로 황자를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자도 있었겠지요.”
-싸아아아, 싸아아, 싸아아······
바람을 맞은 빗줄기가 커튼처럼 휘날렸다.
근처의 고목들은 가지를 흔들며 항복을 선언하고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요한을 돌아보았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아뇨. 세드리크와 친구들을 지키는 것은 제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고는 쌕 입꼬리를 올렸다. 요한은 턱을 까닥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곧바로 화제가 바뀌었다.
“새벽에 바른 약은 차도가 좀 있습니까? 괜찮으면 저도 몇 통 사갈까 하는데.”
“황도의 약국에서 파는 것만큼은 못해도, 이만하면 훌륭한 편이에요. 특히 등에 바른 연고는 제가 용병 시절에도 종종 사용했던 제품이거든요. 마수 체액 성분이 들어 있어서 근육통에도 효과가 좋아요.”
“오.”
검사가 번쩍 눈을 빛냈다. 근육통에 효과적이라니 솔깃했다.
오늘 새벽, 그녀는 바깥 동태를 확인하러 나왔다가 요한과 약종상 부부를 만났다.
건물 1층에선 작은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연히 성기사의 상처를 발견한 네일리가 약을 발라주겠다고 나섰는데, 요한이 그를 고집스럽게 거절한 탓이었다.
엘리자베트는 세 사람의 실랑이를 보며 낮게 웃었다.
그냥 두었다가는 첫닭이 울 때까지 대치 상태가 이어질 듯싶었다.
‘조용히 약 바르십시오, 헤인스 경. 소중한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도 잘못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가요?’
‘예. 저번에 가나엘이― 읏.’
순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두통이 엘리자베트를 엄습했다.
‘덜커덩!’ 그녀는 이마를 부여잡은 채 크게 비틀거렸다.
마침 계산대 밖에 있던 토비가 허겁지겁 검사를 부축했다.
‘아이고, 블랑크 경!’
‘큿, 머리가······.’
‘머리요? 이를 어째. 나리께서 갑자기 머리가 아프시다는데, 네일리!’
‘애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효과 좋은 약차를 달여오겠습니다!’
속닥속닥, 두 부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서둘러 엘리자베트를 요한 옆에 앉히고, 그녀의 무릎에 담요를 둘렀다.
토비는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사실이다) 긴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한, 다른 약도 좀 가져다줄게. 상비약이랑, 효험 좋은 것들 있어. 지하실에 잔뜩 쌓아 놨거든.’
그리고 우당탕퉁탕 계단을 내려갔다.
황궁에서부터 가져온 약도 한 아름 있었지만, 이제 와 말리기에는 너무 늦은 분위기였다.
엘리자베트는 관자놀이를 짚은 채 오만상을 쓰고 어깨를 출렁거렸다.
아픈데 우습고, 우스운데 아팠다.
이런 와중에도 뇌리를 스쳤던 기억 조각이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그녀의 ‘약혼자’······.
‘빨리 바르고 들어가시죠. 지금 올라가서 가나엘 얼굴을 보면 뭐라도 기억이 날 것 같습니다.’
‘그거 반가운 소식이군요.’
‘예. 경께서도 협조하십시오. 어차피 저 두 사람을 이길 방법도 의지도 없지 않습니까?’
‘반박하기 어렵네요.’ 결국 요한이 셔츠를 벗었다.
엘리자베트는 재바른 손놀림으로 약 뚜껑을 열고, 오랜 흉터 위에 새롭게 생긴 상처를 공략했다.
과연 용병 출신인 그는 상체에 빗금이 가득했다.
부하 중 지방 출신인 녀석들이 간혹 이런 몸을 갖고 있었다.
마수 출몰이 많은 지역일수록, 맨몸으로 싸우게 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헤인스 경의 경우, 상대는 마수보다 인간 쪽이었겠지만.
‘무게 훈련은 보통 어디까지 드십니까? 우리 대장님도 궁금해하십니다.’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빈 오크 통 네 개 중량쯤 드는 것 같아요.’
‘생각보다 많이 안 드시네요.’
엘리자베트가 세 개 중량을 드는 편이었다. 요한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실전형 근육이라 그런 것 같았다.
궁금증을 해결한 부근위대장이 치덕치덕 연고 바르기에 집중했다.
에르베 대장님은 와인이 출렁출렁하는 오크 통 하나로 훈련을 하셨지······.
대충 그런 생각이나 했던 것 같다. 네일리 부부가 돌아오기 전까지.
“드디어 비가 그치네요.”
“아.”
남자의 목소리에, 검사가 눈을 반짝 들었다. 정말이었다!
-토도독, 토독, 토도독······
일시에 거짓말처럼 멎는 일은 없었지만, 과연 빗줄기가 얇아지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퍼붓던 억수가 드디어 마지막을 향해 달리는 모양새였다.
두 사람은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리 동편에서 조금씩 아침 햇살이 들었다.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비치는 듯했다. 엘리자베트의 입술이 살며시 호선을 그렸다.
그녀의 약혼자도 저런 머리색을 지니고 있었다. 꽤 귀엽던데.
“무테 경! 헤인스 경!”
-우당퉁탕!
생각하기가 무섭게, 당사자의 목소리가 아담한 이층집을 울렸다.
엘리자베트와 요한은 빠르게 눈길을 주고받은 뒤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또 무슨 사건이 발생한 건지―
“헉, 헉. 허억······. 콜록!”
“가나엘?”
“저, 저 두 분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벼락처럼 나타난 연하의 약혼자는, 잠옷 차림이었다.
그를 따라 달려온 쥘리에트 궁주님이 허겁지겁 소년의 등에 담요를 둘러주었다.
두 사람의 뒤를 쫓은 크리스텔이 질세라 궁주님을 담요로 감쌌다.
야무진 그녀는 혼자 가운에 코트까지 걸치고 있었다.
물빛 눈동자가 갓 만든 사탕처럼 초롱초롱했다.
저 뒤편에선, 황태자가 홀로 문가에 기대선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신수들도 펄펄 뛰어댔다. 상황이 아주 심각해 보였다.
또 뭔데, 세드리크?
“저, 무테 경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든 관계없어요.”
“······응?”
엘리자베트가 눈을 크게 떴다. 미안하지만 말뜻을 한 번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나엘의 얼굴은 와인처럼 붉었다.
그녀가 착각한 것이 아니라면 눈물 자국도 보였고, 무엇보다 목이 심하게 잠겨 있었다.
어디 아픈 것인가 싶어 걱정이 덜컥 앞섰다. 요한은 본능적으로 반걸음 물러났다.
“경이 지금 누구를 연모하든 상관이 없다는 말이에요.”
“가나엘, 왜 갑자기 그런 말을―”
“제가 되찾을 거니까요.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반드시.”
“······.”
“왜냐하면 저는 이미 경의 것이잖아요.”
놀란 소백작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관중들은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으아아아!’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짓누른 크리스텔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허리를 꺾었다 숙였다, 위로 솟았다 땅으로 꺼졌다 난리도 아니었다.
저러다간 자신의 머리카락을 다 뽑을 것만 같았다.
궁주께서는 벌겋게 익은 낯으로 갑자기 지평선을 찾는 척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마른세수를 하는 손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대낮부터 이게 다 무슨―
“그러니까, 긴장하셔도 좋아요.”
어느새 약혼자의 눈높이를 벗어난 소년이 선언했다.
애티를 벗은 턱선 아래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찰나 엘리자베트는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마침 비도 그쳤네요. 식사 후 바로 예리호로 떠날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가나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잠깐 침묵이 있었다.
뭐라고 답을 내놓아야 했던 것 같은데, 속이 너무나 울렁거려서 문장을 만들기가 힘들었다.
소년은 엘리자베트의 무반응에 그저 담담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이어서 깍듯이 묵례하더니······.
“······.”
요한과 길게 눈을 마주치고는, 휙 몸을 돌려 또박또박 걸어갔다.
“······.”
“······.”
“······.”
“······으어아아악! 애기야, 가자!”
‘어떡해! 엄마악!’ 철퍼덕 주저앉은 크리스텔이 무고한 땅바닥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요한은 망연한 눈빛으로 그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궁주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제가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니라’, ‘아니’, ‘대박’만을 반복했다.
그리고 소백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
그녀는, 추위 속에서도 뜨거워진 왼손을 꼭 붙들고 서 있었다.
약지의 노란 다이아몬드가 유쾌하게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