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475)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475화(475/920)
#475
할아버지와 사나운 소문 (7)
나는 침착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너무 흔들리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했다.
“······예?”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의수와 의족을 단 남자가 북부에 있다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일단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예, 공자님. 가장, 가장 밝은 보름달에 맹세코······. 전부 사실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공작새처럼 아리따운 남자가······.”
당신이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 있지?
무너진 암시장과 함께 실종된 것 아니었어?
“해, 행색은 비렁뱅이처럼 허름한데, 갈색 눈동자가 몹시 사특했습니다. 머리는, 머리카락은 연한 보랏빛을 띠고······. 아, 눈가엔 호사스러운 문신이 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귀인이었지요.”
아니, 살아서 언제 거기까지 간 거야? 아무런 초능력도 없는 인간이 어떻게?
“한 마리 독사처럼 화려하여······. 차마 잊기 힘든 얼굴이었습니다. 목소리도 뱀처럼 쉬어 있었습니다.”
“······.”
“그자는 텅 빈 수레를 끌고, 칼바람을 맞으며······. 저희 성문 앞까지 왔습니다.”
행정관의 찢어진 입술이 푸르르 떨렸다.
가까운 과거를 회상하는 눈동자는 정처 없이 허공을 방랑할 따름이었다.
소름 끼치는 침묵이 대회의실을 강하게 짓눌렀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우리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내 뒤에 서 있던 가인 씨였다.
“그 사람 이름은 아세요?”
“보제, 보제나(Божена)······.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중립 지대에서나 들어볼 법한······.”
“보제나요?”
그건 또 뭐야? 나는 잠덧 하는 레아를 어르며 눈을 깜빡였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머리는 빠르게 굴러갔다. 그러니까······.
여기가 판타지 소설 기반의 세계선이긴 하지만, 어쨌든 한국인 기준에서 대륙은 서양 언어권에 속했다.
대충 리에스테르 제국(프랑스어)과 코를레오네 제후국(이탈리아어)을 비롯한 대륙 서편이 로망어군, 극동의 페네티안 신국과 그 부속 도서는 게르만 어파(네덜란드어)에 드는 식이었다.
반면 중립 지대에서는 다양한 언어가 두루 쓰였다.
차움 카라반사라이에서 만난 모니카, 인디아, 매리언은 모두 영어 이름이었다.
모레노 카라반사라이의 지배인 곤살로, 그곳에서 악연으로 엮인 카르메는 추측건대 에스파냐어 이름이고.
기골트 카라반사라이의 창립자였던 랄프 기골트나, 지배인 제로민은 장담하는데 독일어 이름이다.
참고로 하난 루마이얀 폐하의 존함은 아랍어로 쓴다.
“성은요?”
“성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제가, 제가 알 방법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보제나’라는 이름은 생소한데. 우크라이나어 같은 슬라브어파 쪽인가?
그럼 중립 지대에서 쓰일 만한 이름은 맞았다.
하지만 일국의 국서인 베르너르 페네티안이, 그런 가명을 쓸 이유가 있나?
이번엔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당신 거기서 뭐 하는데?
“그자가 언제, 어떻게 행정관님의 고향에 왔습니까?”
“그것이······. 분명히 12월, 2일이었습니다. 하필이면 저희 공자님, 불쌍한 공자님 생신이어서 기억을 합니다.”
여인이 다시 울먹거리며 더듬더듬 답했다. ‘공자님’이라는 사람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황태자와 가인 씨를 돌아보며 빠르게 시선을 나누었다.
우리가 암시장을 무너뜨리고 올라온 것이 11월 25일 새벽이었다.
로피가 베르너르의 투명 로브를 물어뜯은 것도 그날이었다.
그러면 일주일 뒤에 베르너르가 신국 북부까지 나아갔다는 말인데······.
그게 들키지 않고 가능해? 현실적으로?
예리호는 이미 제국군에 점령당한 시점이잖아.
“행정관님, 정확히 어느 지역 출신이라고 하셨죠?”
요한 경이 손끝으로 마편을 쓸며 물었다. 여인은 재깍 머리를 숙였다.
“저, 저희는 바른(Baarn)에서 왔습니다. 나리. 신국 최북단의, 섬으로 이루어진 영지입니다. 본섬도 아주 조그마합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얼마나 걸렸나요?”
“꼬, 꼬박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밤잠도 거의 자지 않고 움직였습니다.”
“교통수단은 무엇을 이용했고, 이동한 이들의 건강 상태와 연령대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네요.”
“스무 명이 탈 수 있는 마차 다섯, 다섯 대가 있고, 나머지는 늙은 당나귀나 조랑말을 타고 왔습니다. 동행한 이들은 대부분······. 열여섯 아래의 아이, 병자, 임산부, 노인들입니다.”
행정관이 뚝뚝 눈물을 쏟으며 답했다.
두고 온 고향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나는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닦고, 병사들에게 몸의 밧줄을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가나엘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따뜻한 찻잔을 건네주었다. 정말 고마워.
“그건······. 그건 일단 넘어가죠. 행정관님, 아까 말씀하신 ‘그리핀’과 ‘시체’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흐윽, 후우······.”
나는 부드럽게 화제를 돌렸다.
여인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최대한 빨리 사연을 듣고 다른 피난민들과 쉬게 해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좌우간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었다.
베르너르가 어떻게 최북단까지 올라갈 수 있었는지는, 이후에 친구들과 차차 추리해 보고······.
“예에. 공자님. 저희 영지에는······. 매년 겨울이면, 우족 마수 떼가 들이닥칩니다.”
“혹시 그게 그리핀인가요?”
“그랬던 적도, 있다고 합니다. 아주 헛소문은 아닙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마을 어르신들이······. 눈앞에서 보았다는 그리핀 이야기를 하시곤 했지요. 하지만 적어도, 당대 영주님 치세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그건, 다행이다. 우리는 소리 없는 한숨을 삼키며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연중 날이 차고 섬 농사가 워낙 까다로우니, 겨울이면 먹잘 것이 없는 지방입니다. 바른 사람 다수는 어업에 종사하는데······.”
본격적으로 눈보라 치는 계절이 오면, 바른은 바다마저 꽁꽁 얼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영지민들은 문을 이중 삼중으로 걸어 잠근 채 바깥출입을 삼갔다.
그리고 지난 한 해 동안 저장한 과일과 음식을 먹으며 억척스레 겨울을 살아냈다.
이따금 뭍에 붙은 이웃 영지에서 상인이 들어올 때나, 환하게 해가 나는 날에만 바람을 쐰다고 했다.
단단하게 인 지붕과 땅딸막한 돌집은 그들의 보금자리이자 엄폐호(掩蔽壕)였다.
멀리 동해에서부터 날아드는 마수들이, 민가를 사정없이 공격해 대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커다란 부리로 지붕을 쪼고, 월동채소 저장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무섭게 꺽꺽 울며 사람을 잡아먹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영주께서는, 한평생을 그 마수 퇴치에 바친 분이시지요. 참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날짐승들의 종류는 다양하다고 했다.
어느 해엔 상급 마수인 알코노스트(Alkonost)가 네 마리나 영지를 덮쳤으며, 바로 작년엔 하급 마수인 요귀(妖鬼)홍학이 떼로 몰려와 영지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단다.
이런 환경에서 영주인 아네터 바른 자작은,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투쟁한 전사였다.
그녀는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어 영지를 지키고자 온 마음과 영혼을 바쳤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마법에 재능을 보이셨고, 선대 자작님께서는 아낌없이 따님을 지원해 주셨습니다. 장차 왕도에 가서 사실 것도 아닌데 남의 눈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높으신 대주교님들은 마나가 천한 힘이라고 손가락질하신다지만, 그로써 귀한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더는 천한 힘이 아니지요. 영주께서는 아무쪼록 최고의 마법사가 되어서······. 북부의 평안을 도모하려고 하셨습니다.”
지브릴 디오프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영주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겨우 마흔이 넘은 나이에, 그녀는 중병을 얻었다.
행정관의 뺨으로 후드득 물방울이 떨어졌다.
“매일같이 입에서 피를 쏟으시고, 마나는 몹시 쇠약해져······. 아직 어리고 가녀린 아드님께 바로 작위를 물려주려는 마음을 품고 계셨습니다. 최근에는 가까운 수하들조차 알아보지 못하실 정도로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신 참이었습니다.”
“아우, 어떡하냐······.”
어느새 곁에 앉은 가인 씨가 끙끙거렸다. 페리도 무척 뒤숭숭해 보였다.
곧 여인의 낯빛이 딱딱하게 변했다.
“바로 그때, 우리 앞에 보제나가 나타난 것입니다.”
“······.”
행정관의 목소리가 조금씩 빨라졌다.
“초승달의 머리는 폐쇄적인 땅입니다. 외지인이 올 까닭이 없는 곳이지요. 저희는 소문에도 어둡고······. 마수와 싸우느라 전쟁에 차출할 병사도 없었습니다. 하여 그자가 누구인지, 어느 댁 귀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귀인 보제나’는 몇몇 마법사와 용병의 호위를 받으며 영주성에 당도했다.
다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무로 만든 수레만큼은 본인이 직접 끌고 있었노라 했다.
그는 몹시 권위적인 말투로 영주와의 접견을 요구했는데, 태도가 워낙 고압적인 데다 귀티가 있어 누구도 감히 그것을 뿌리치지 못했단다.
그렇게 보제나는 병든 영주를 만났다.
그리고 단 며칠 만에,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영주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버렸다.
“저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 그자가 영주님께 무어라고 말했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허나 시종장님과 기사님들께 들은 바는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보제나가, 이웃 영지인 아츠마(Atsma)의 뒷이야기를 하며 영주님의 위기감을 부추겼다고 합니다.”
“이웃 영지?”
깜짝이야.
기척도 없이 다가온 세드리크 녀석이, 고고한 자세로 목을 기울이고 있었다.
행정관은 황급히 고개를 낮추었다.
“예에. 바른으로 들어오는 왕실의 특별 지원은 모두 아츠마를 거쳐야 하는데, 아츠마 남작이······. 중간에서 그것을 반절 이상 빼돌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
“또한 저희 영지민들은, 죽고 나면 아츠마의 묘지에 묻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아츠마 남작가와 바른 자작가 사이의 오랜 약속이지요. 바른은 섬으로 된 영지인지라 매장할 곳이 더는 마땅치 않기 때문입니다. 한데······. 보제나의 말로는······.”
설마. 아니지?
“아츠마로 간 시신이, 이제껏 하나도 묻히지 않았답니다. 남작이 몰래 다른 일에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친.”
가인 씨가 턱을 쩍 벌렸다. 나는 황급히 소매로 입을 가렸다.
솔직히 평소 같았으면 베르너르의 개수작이라고 생각하며 무시했겠지만, 우리는 이미 북부의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빌헬미나의 인체 실험실. 성기사를 만드는 ‘밀실’.
-끼이, 끼잉
“레아, 괜찮아. 형은 멀쩡해. 숨 쉬고 있어.”
설마 베르너르가, 자기 멋대로 누나의 정보를 써먹은 거야? 무슨 생각으로?
“그럼, 바른 영주는 그걸 믿고······.”
“예. 본래 그런 분이 아니신데, 보제나의 이간질과 꾐에 넘어가신 것인지······. 눈빛부터가 달라지셨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마수와의 전쟁이 아니라, 아츠마 남작가와의 전쟁이라고 하시면서······. 침실의 절반을 맨손으로 부술 만큼 분노하셨습니다.”
“죄송한데······. 그러니까 지금 제정신이 아니시라는 거죠?”
가인 씨가 소곤거렸다. 행정관은 슬프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습니다, 공녀님······. 수하들은 아츠마 측의 입장도 들어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쟁을 치른다고 하더라도, 일단 이번 겨울은 무사히 넘기고 생각하시는 게 좋겠다고······. 허나 아무리 간청해도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수에 맞설 군사를, 모조리 영주성으로 불러들이셨지요. 다른 섬에는 한 명도 남기지 않으셔서······.”
“주신 맙소사.”
다비드가 이마를 짚은 채 신을 찾았다. 머리 위에서는 태자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다면 너희를 보낸 건, 영주가 아니라 영주의 아들이겠군.”
“예, 맞습니다······. 공자님이 저희를 야반도주시키셨습니다. 영지의 기사들이 그분을 도와서, 노약자만 전부 대피시키기로 하고, 몰래 성문을 열고······. 이제는 지켜줄 수 없으니, 흑, 어서 달아나라고······.”
‘으흐흐흑.’ 행정관이 참았던 울음을 다시 터뜨렸다.
어느덧 그녀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데 올해는 북풍이 심상치 않습니다. 너무 이르고, 너무 사납습니다. 전설에나 나오던 날씨 같아 두렵습니다. 점쟁이들은 이번에야말로 그리핀이 올 것이라 합니다!”
“행정관님, 진정하세요.”
“차라리 함께 맞서다 죽어야 하는데! 저희는 가엾은 공자님과 마을 청년들을 두고 왔습니다!”
‘아아아아······!’ 여인이 비명과 함께 이마를 바닥에 찧으려 했다.
나는 황급히 치유 서클을 열었다.
-파아아아!
“하······.”
털썩! 여인이 그대로 쓰러져 긴 잠에 빠져들었다.
푸른 에테르 알갱이들이 오르르 줄지어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서둘러 환자의 맥을 확인한 뒤, 황제 폐하를 찾았다.
어른은 내가 최근에 본 것 중 가장 심란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아버지께서 옳았습니다.”
“피 냄새 이야기 말이냐?”
할아버님이 잠긴 목소리로 물으셨다. 폐하는 짤막이 대답했다.
“아니요.”
“······.”
“신국의 국운이 기울고 있다는 말씀 말입니다.”
그런 문장엔, 차마 아무런 말도 보탤 수가 없었다.
끝으로 마주친 요한 경의 눈빛이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