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479)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479화(479/920)
#479
어떻게 할 것인가 (4)
아차.
“형님이 소설을 쓰세요?”
찰나 머릿속이 찌르르하고, 따끔따끔했다. 사실을 말했는데 실수한 기분이 들었다.
“아······. 네. 무협 작가예요.”
“와, 멋있으시다! 저도 어릴 때는 무협 많이 읽었는데.”
가인 씨는 금세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그런 반응은 여간해선 놓치기 힘든 종류였다.
이후로 이어진 문장도 어딘가 어색하고 삐걱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천하의 그녀가 적당한 화제를 찾지 못한 채 대화를 파한 것만 봐도 그랬다.
‘앗, 어머니. 그건 제가 개서 넣을게요.’ 물색 눈망울이 나를 비스듬히 피해서 이자벨에게 향했다.
분명 웃는 얼굴인데 평소와는 인상이 몹시 달랐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나를 등지고 팔랑팔랑 날아갔다.
낯선 움직임이었다.
“딸, 장갑은 안쪽 주머니에 넣었으니 잊으면 안 돼. 초승달의 머리는 제국 북부보다도 춥다고 하니까.”
“저 손 하나도 안 시린 거 아시면서.”
“안 돼. 이건 엄마랑 하는 약속이야.”
이자벨이 부드럽게 웃으며 딸의 양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크리스텔의 피부가 더는 따뜻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언제나 온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고집스러운 태도에 결국 가인 씨도 방긋방긋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품에 티테를 안고, 한 손에는 수첩을 든 채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프물범이 나의 속을 읽었는지 불안하게 꼼틀거렸다.
‘······어머니가 알고 계시더라고요. 제가 ‘크리스텔’이 아닌 거.’
소금 늪에서, 가인 씨가 내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여기는 소설 속이라고 하셨잖아요.’
‘가짜라고는 안 할게요. 그 말은 저도 진심으로 싫고, 후작님도 이렇게 울상 하시니까. 우리 다들 열심히 살았는데 그건 진짜 너무하니까요.’
그리고 그런 말도 했었다. 나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다.
감히 100%라고 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 가인 씨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울지는 조심스레 짐작했다.
나라면 결코 그녀처럼 단단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
그러니 아무래도 심란할 수밖에 없겠지. 그게 당연한 거겠지.
가인 씨는 한동안 내가 이곳의 ‘주인공’ 같은 존재라고 믿었다는데, 그게 다름 아닌 본인이었다면.
평생을 치열하게 산 그녀가 알고 보니 다른 인간의 창조물이라면.
믿을 수 있는 친구라고 여겼던 내가, 실은 그녀와 가장 먼 이방인이었다면.
······그리고 하필이면 우리 형이,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면.
“궁주님.”
나 같아도 정말 찝찝할 거다. 아마 별의별 생각이 다 들 거다.
“궁주님?”
나도 그랬으니까. 나라고 ‘그 가능성’을 고려해보지 않은 건 아니니까.
“예서 궁주님.”
-애우우
“핫.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
나는 양옆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티테가 나를 따라 수염을 요리조리 씰룩거렸다.
요한 경은 여느 때처럼 온화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짐이 별로 없어서 준비가 금방 끝났네요.”
“아이고, 아니에요. 저는 시늉만 했지 거든 것도 없는데······.”
세상에. 내가 잠시 가인 씨와 말을 섞고 상념에 잠겨 허우적거리는 동안, 손 빠른 요한 경은 벌써 자신의 짐을 모두 싸놓고 있었다.
민망하기도 하고 가슴이 싱숭생숭해서 눈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 역시 형의 직업을 똑똑히 들었을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신경 쓰였다.
나는 괜히 바쁘게 움직이며 창밖을 한 번 보고, 살얼음 낀 연못에서 잘 놀고 있는 애물단지들과 영령님을 확인했다.
이따 구호소와 기도실에 들러서 할 일을 중얼중얼 점검하기도 했다.
떠나기 전에 고해성사를 최대한 많이 진행하고 가야겠다.
블레즈 주교님의 마지막 치유도 받고······.
“그러고 보니 페네티안의 ‘길드’ 체계는 잘 모르시겠군요.”
예? 갑작스레 바뀐 화제에 눈이 커졌다.
아기 신수는 나를 따라 까만 눈망울을 똥그랗게 떴다.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던 가인 씨와 이자벨도 요한 경을 돌아보았다.
“길드요?”
-아으우?
길드에 관해 아는 거라고는, 어렸을 때 세계사 시간에 배운 게 전부였다.
나는 게임도 잘 안 해서······.
“네. 제국에는 랑부예 카라반이나 아스 상단 같은 거상이 많고, 대귀족 중에서도 회사나 은행을 운영하는 경우가 있어서 길드는 흔히 보이지 않거든요. 우리는 신국의 용병 길드를 모방할 생각이니 체계를 미리 공부해 두면 좋을 듯해서요.”
“아! 그것도 그러네요. 급하게 떠날 일만 생각하느라······.”
나는 안색을 밝히며 재깍 고개를 주억였다.
이자벨도 ‘요한 선생님은 역시 꼼꼼하세요. 저희 아이가 앞으로도 배울 점이 많겠어요.’ 하며 기꺼워했다.
이상하게 거실의 침묵이 불편하던 참이었는데, 헤릿 아버지가 새로운 화젯거리를 던져 주시니 마음이 놓였다.
아마 그로서는 의도하지 않은 친절이겠지만 말이다.
-달칵!
“황태자 전하 드십니다.”
그즈음, 거실문이 열리며 세드리크 태자와 다비드가 나타났다.
절로 머리가 홱 돌아갔다.
녀석은 오늘도 새하얀 셔츠 차림이었고, 궁술 훈련에 참여하고 오는 길인지 가슴팍과 팔뚝에 두툼한 가드를 착용한 모습이었다.
나는 아주 헤벌레하며 날 듯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야, 왜 이제 오냐!
“태자님!”
“······또 무슨 꿍꿍이지?”
너는 꼭 말을 해도!
“그런 거 없습니다. 요한 경이 출발 전에 길드 관련해서 족집게 강의를 해주신대요. 이건 무조건 같이 들어야죠!”
“······.”
그러자 태자는 공항 세관원 선생님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뜯어보더니, 균형 잡힌 턱을 들어 빠르게 제 짝을 찾았다.
이내 둘의 눈길이 잠시 얽혔다가 흩어졌다.
평소의 가인 씨는 절대로 먼저 그의 눈을 피하지 않는데, 오늘은 그녀가 반 박자 정도 빨리 시선을 뗐다.
그러자 사내의 한쪽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올라갔다.
몇 발짝 떨어진 이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아주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뭐지? 새삼스럽게 반했나?
“······그렇군.”
“예?”
진짜야?
“강의를 진행할 생각이라면 곁들일 식음료가 필요하겠지.”
그러더니 별안간 그런 소리를 했다.
나는 다비드를 일별했다가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요? 저는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전시에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서······.”
“조금 전 수십 마리의 하급 마수를 잡았으니 상관없어.”
“대박. 정말입니까?”
-아르르르!
흥분한 내가 목소리를 높였고, 티테도 신이 나서 강아지처럼 울었다.
이곳에 신물이 여럿 있다 보니 도시 외곽에서 마수들이 모여드는 모양이었다.
철없는 짓인 건 알지만 이때다 싶어서 부탁이 줄줄 나왔다.
모두 얼마 전부터 마음 쓰이던 부분이었다.
“그럼, 키나와 빌럼에게 좀 많이 갖다줘도 될까요? 한창 고기 먹고 자랄 나이인데 혹시나 어른들 눈치 볼까 봐 마음이 쓰입니다. 모르한 씨와 마르그리트 공녀도 아직 회복 중이니 더 챙겨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구호소 신관님들도, 요즘 살이 내리신 듯해서 꼭 같이 드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엘리자베트 경에겐 지난번처럼 씨암탉을 잡아주고 싶은데, 그건 힘들 테니까 이왕이면 제일 기름지고 맛있는 부위로······.”
“다비드.”
“예. 분부 받잡겠습니다, 전하. 궁주님.”
“고맙습니다!”
권력이 좋긴 좋다! 나는 순간적으로 모든 근심 걱정을 잊고 활짝 웃었다.
눈이 마주친 가인 씨는 내게 설핏 미소를 보내더니, 사랑과 정열이 펄펄 끓는 눈빛으로 태자를 겨누었다.
조금 전까지 뒤숭숭했던 심장께가 이제야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아르르, 아르르
“어어. 티테도 맘마 먹어야지. 배 빵빵 하자, 빵빵.”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신수를 어르는데, 문득 손에 쥔 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손톱 끝이 하얗게 질렸다.
자비 없이 닥쳐오는 생각의 해일을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싸아아아······.
‘정예.’
‘왜.’
‘너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어······?’
그날 밤에 닿았던 형의 눈빛이, 오늘따라 유독 생생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불가능했다. 정말로 그럴 수는 없었다.
진작 폐기한 가정 아니었던가.
“······요한 경, 다른 친구들도 부를까요?”
나는 이를 악물고 잡념을 흩뜨렸다.
헤릿 아버지가 긍정의 눈짓으로 화답해 주었다.
*
소공작 에바 블랑케르는, 군영 어딜 가든 주목받는 화제의 인사였다.
“전단 11쇄는 당분간 계획이 없어요. 자원은 충분하지만 마리아와 테레즈 공녀, 그리고 사라 벨리아르 경과 먼저 상의해야 하는 부분이니까요. 폐하께서도 일단은 더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아······.”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 주변을 빙 두르고 있던 기사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무리 뒤편에선 안타까운 신음과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바쁘게 오가던 일손들도 종종 까치발을 들고서 유명인을 구경했다.
소녀는 최근, 황도 사교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대귀족 가문의 후계자였다.
전장이라고 해서 관심이 식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렇군요. 저는 전단을 소장하고 있지 않으니 무척 아쉽습니다.”
“소공작께서 참으로 노고가 크십니다. 그나저나 지난주에 들어온 보급품은 전부 영애를 정치적으로 후원하는 공자들이 보낸 것이라던데, 그게 사실인지요?”
“어허. 자네는 말을 삼가게.”
“괜찮아요, 사실입니다.”
소녀가 또랑또랑 대답하자, 멀리서 숨죽이고 듣던 병사들마저 크게 술렁거렸다.
기사들은 벌써부터 혼사 이야기를 묻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기색이었다.
소공작은 내년이면 열여덟이니 혼담이 오가도 썩 어색하지 않은 시점이었다.
블랑케르는, 명실상부 리에스테르 최고의 귀족 집안 중 하나로 꼽혔다.
특히나 작년에는 4대 가문 가운데 가장 명망 높았던 사르네즈가 자멸하고, 블랑케르의 후계 구도가 재편되면서 세간의 관심이 온통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에바가 본격적으로 동부를 벗어나 황도에서 활약하기 시작하자 사교계에는 그야말로 태풍이 불었다.
그동안 사르네즈의 공석은 부티에, 디오프, 멘디, 카퓌송, 지라르댕, 랑부예, 시세 가문 등이 경쟁적으로 채워 나갔다.
여기엔 황실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세레니테 후작―당대 쥘리에트 궁주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와 가깝게 지내면 중앙 권력에 발가락 하나라도 담글 수 있다는 것이, 현재 리에스테르 정계의 중론이었다.
비록 그는 정치나 사교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저어, 살롱 드 빅투아르의 입장권이 밀거래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것 또한 참입니까?”
“예. 우리 쪽에서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문제이고, 조만간 강력한 조치가 있을 것입니다. 살롱은 모든 사람에게 열린 공간이니, 입장할 권리가 함부로 매매되는 것을 좌시할 수는 없지요.”
“허어, 과연······.”
“소공작님. 혹시 살롱을 확장 이전할 계획은 없으신지요?”
“모두 한가해 보이는군.”
그때, 엄숙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찔러 들었다.
충격과 공포가 삽시에 복도를 잠식했다.
기사와 병사들은 썩은 목각 인형처럼 삐걱삐걱 목을 움직였다.
“고, 고, 공작님.”
“블랑케르 공작님!”
주신의 사자와 같이 무서운 분이, 그들을 꾸지람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인파가 우르르 허리 굽혀 절을 올렸다.
에바 역시 모친을 발견하고는 새파랗게 질렸다!
“어, 어머니.”
“폐하께서는 동부 진출과 북부 작전에 골몰하느라 온종일 다망하신데, 경들은 유복하게도 일이 없는 모양이야.”
“그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공작님!”
“허면 어서 동쪽으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나. 아니면 나와 함께 이곳에 남을 계획인가?”
“허어억,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저는, 저희는 이제, 카롤린 변경백님의 명을 받아서―”
“그건 더욱 이상하군. 경들이 그분의 성정을 모르지 않을 텐데.”
살기등등한 경고에, 입술이 딱 붙은 기사들이 썰물처럼 복도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예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놓는 이들도 있었다.
일반 병사들은 진작 초식동물 떼처럼 달아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기사는 소공작을 잠깐 돌아보더니, 밀가루처럼 허연 얼굴로 예를 차리고는 황급히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휘우우우······
어느덧 회랑에는 세실과 에바 모녀뿐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기사들의 공무를 방해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어머니.’ 덧붙은 호칭은 새소리처럼 작았다.
겁에 질린 소녀는 고개를 떨군 채 양손을 꾹 맞잡았다.
무서워도 용기를 내고 싶었다.
예서 궁주님은 제가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으니, 지레 꺾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누가 봐도 혼날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래. 잠시 이야기 좀 하자.”
“예. 예?!”
커다란 흑갈색 눈동자가 번쩍 올라왔다.
여기가 아니라, 따로 불려가서 야단맞는 걸까?
“······그리 놀랄 필요 없다. 마탑 관리에 관한 논의를 하려는 것이니.”
“······.”
‘또각, 또각, 또각.’ 곧장 방향을 돌린 세실이 느릿느릿 앞장서기 시작했다.
에바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네, 네! 어머니!”
금세 함박웃음을 피우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후계자’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