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48)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48화(48/920)
#048 황자는 잠 못 이루고 (1)
“할 말은 그게 전부인가?”
“네, 전부입니다.”
황자의 퉁명스러운 물음에 크리스텔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꼭 쿨 거래를 마친 중고나라 회원들 같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낭만적인 분위기는 아닌데······.
아무렴 모태 솔로인 나보다는 로판의 두 주인공이 더 잘 알겠지 싶었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세드리크 황자가 가볍게 턱짓했다.
크리스텔은 재빨리 절을 올리고 마차에서 멀어졌다.
함께 돌아갈까 하다가, 나 역시 황자에게 용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나는 크리스텔의 작아지는 뒷모습을 확인한 뒤 마차에 가까이 붙었다.
“황자님,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말없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정말 보디랭귀지에 능한 놈이었다.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부티에 추기경 전하께서 전해주셨겠지만, 그래도 제 입으로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황자는 내가 자신에게 협력하기로 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유의미한 보탬이 될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나는 그가 ‘마수 대토벌’에서 우승해 ‘화성의 혜검’을 얻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말한 적은 없었다.
이번 기회에 내 동기와 의사를 확실히 밝히는 게 좋을 듯싶었다.
나는 일단 황자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시종, 다비드의 눈치를 살폈다.
“세이디와 관련된 일인데, 다비드가 함께 들어도 괜찮습니까?”
“콜록, 콜록! 콜록! 컥!”
다비드가 격하게 기침을 시작했다.
그는 몹시 당황한 얼굴로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입을 가리고 계속 기침했다.
“다비드, 괜찮으십니까? 태의를 불러드릴까요?”
중년인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자 절로 걱정이 됐다.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저으며 힘겹게 말을 뱉었다.
“침에, 콜록! 사레가 들렸습, 콜록콜록! 신경 쓰지 마십, 쿨럭!”
“다비드는 알고 있으니 의식할 것 없어.”
황자가 나직하게 말했다.
하긴, 황자를 오랫동안 보필했다는 사람인데 사생아가 있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좌우를 살폈다.
다들 출발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고, 황자의 마차 근처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다.
내 목소리가 더욱 작아졌다.
“저는 명목상 고해 신관으로 마수 대토벌에 참여하지만, 황자님이 혜검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 신물을······. 세이디를 위해 쓰실 테니까요.”
그가 즉시 미간을 찌푸렸다.
황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표정이었는데, 정확히 무엇을 어디부터 짚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나는 괜히 불안해져 질문을 보탰다.
“제 말이 틀립니까?”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지.”
그가 한참 만에 낮게 대답했다. 맞으면 맞는 거지, 이론적으로 맞는 건 또 뭔데.
나는 그의 불성실한 대답에 혀를 차며 가장 중요한 문장을 말했다.
“그럼 저도 어떻게든 돕겠습니다. 황자님의 아드님이 더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지금 뭐라고,”
“예서 왕자님?”
그때, 멀리서 나를 찾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정말로 떠날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또 나 때문에 늦어졌다는 말을 듣고 싶진 않았으므로, 나는 서둘러 황자에게 묵례하고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본 다비드는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있었는데, 정말로 일없는 건지 마음이 조금 불편하긴 했다.
*
“왕자님, 저기 영주성이 보입니다!”
-끼이
가나엘이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창문으로 기어오르는 데미의 까만 배를 받쳐 바깥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뱅자맹도 가나엘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와······.”
“황궁과는 많이 다르지요. 뒤엠 후작가의 성은 무척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입니다.”
뱅자맹이 자상하게 설명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경이었다.
은은한 안개를 망토처럼 두른 프랑수아 뒤엠 후작의 영주성이, 고고하고 위엄 있는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갈회색인 성(城) 뒤로는 짐승의 송곳니를 닮아 뾰족하고 거대한 산맥이 보였다.
꼭대기에 조각구름 몇 점을 걸친 모양새가 꼭 웅장한 병풍 같았다.
뤼카 마을을 떠나 3일을 달린 끝에, 우리는 드디어 뒤엠 후작령에 도착했다.
“황도는 대체로 평지던데, 동쪽엔 산이 많네요.”
“예. 국경으로 가는 방향에 큰 산맥이 있습니다. 강이 흐르는 제국 남단을 제외하면, 동부는 대부분 이런 지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뱅자맹은 마치 숙련된 여행 가이드 같았다.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때마다 즐거운 기색이라, 나도 궁금한 게 있으면 그에게 물어 답을 얻곤 했다.
“혜검은 저기쯤에 꽂혀 있을 겁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군요.”
그가 덧붙이며 손가락으로 영주성 앞 평야를 가리켰다.
갈대 비슷한 식물들이 바람의 박자에 맞춰 너울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까워지는 영주성을 열심히 구경했다.
역시, 은서와 형이 같이 봤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까지 영주성에서 푹 쉬시면 됩니다, 왕자님. 오늘 뒤엠 후작이 주최하는 환영연(歡迎宴)이 있기는 합니다만, 황자 전하께서 사람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니 규모는 작을 겁니다. 마수 대토벌은 모레 오전에 시작됩니다.”
가나엘이 조곤조곤 일정을 일러주었다.
“황자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가 약간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요 며칠 좀 이상하시지 않습니까?”
내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이걸 나만 느꼈을 리가 없다고.
“평소에도 그렇긴 한데, 한 사흘 전부터 유독 냉랭하신 것 같아서요. 머무는 여관마다 주인들을 달달 볶으시고, 밤낮으로 뜰에서 검을 휘두르시지 않았습니까.”
“음.”
“글쎄요······.”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뤼카 마을에서 겪으신 일이 있으니, 다른 마을의 여관 장부를 훑으시거나 주인들을 압박하신 부분은 이해가 됩니다.”
뱅자맹이 침착하게 답했다. 그 점이야 나도 동의했다.
훗날 황제가 될 사람으로서 클로딘 그린 사건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테고, 같은 악행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도 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황자의 언행은 평소보다 훨씬 차가운 데가 있었다.
밥이 입에 안 맞나?
“그리고······.”
가나엘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황자 전하께서는 원래 그러셨습니다, 왕자님.”
“응?”
“그러고 보니 왕자님께서 입궁하신 즈음부터는 많이 누그러지신 것 같기도 하네요.”
그게 누그러진 거라고? 내 표정을 본 뱅자맹이 부연했다.
“전하께 간단한 말이라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흔치 않았지요. 황제 폐하와 추기경 전하, 엘리자베트 경과 다비드 님 정도였을 겁니다. 뒤엠 후작조차도 전하 앞에선 얌전해지곤 했습니다.”
“<격주간 리에스테르>에서 전하께 붙인 별칭도 있습니다. ‘빙점하의 귀공자’였나······.”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아무래도 이상한 별명 만들길 좋아하는 벨리아르 경의 작품이지 싶었다······.
“때마침 저기, 뒤엠 후작이 보이는군요.”
뱅자맹이 손짓했다. 나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연분홍색 눈동자를 벚꽃처럼 반짝이며, 화려한 팔놀림으로 인사하는 남자가 있었다.
저 사람은 여전하네.
*
“다시 한번, 제 성에 오신 황자 전하와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황자 전하 만세!”
“건배!”
프랑수아 뒤엠 후작이 시원하게 외치며 와인 잔을 치켜들자, 우레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레크리에이션의 귀재인 후작은, 대답 한 마디 없는 황자를 주빈으로 두고도 밝고 떠들썩한 분위기를 조성해냈다.
저런 인싸는 태어나서 처음 봤다.
가나엘의 말대로 환영연에 초대된 이는 많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황자 일행, 후작가의 사람들과 그 측근까지 대충 50명 안쪽인 듯했다.
연회장 맨 앞의 기다란 귀빈석 끝에 앉은 나는, 구석자리의 여유를 누리며 포식 중이었다.
내 왼쪽엔 엘리자베트 경이 앉았다.
귀빈석 우단(右端)에는 뒤엠 후작과 크리스텔이 자리를 잡았는데, 둘은 벌써 술을 말고 있었다.
맥주에 와인을 섞네······.
“기본적으로는 산에서 보물찾기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엘리자베트 경, 마수는 보물이 아닌데요.”
“하지만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점수가 올라가고, 최고점을 받으면 우승하니까요. 보물과 다를 게 없습니다.”
부근위대장이 활짝 웃으며 셰리를 홀짝였다.
후작령에 도착해 마침내 퇴근한 엘리자베트 경은, 봄 무도회 다음날만큼이나 개운한 얼굴로 음주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황실 근위대에 소속된 뒤로 마수 대토벌을 관전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제국의 귀족답게 대회 규칙과 방식은 달달 외우고 있었다.
“오면서 커다란 산맥을 보셨을 겁니다. 그중 가장 낮은 봉우리에 큼직한 동굴이 있는데, 저희는 그곳을 ‘뒤엠 던전’이라고 부릅니다.”
던전······. 진짜 있을 건 다 있는 세계관이네.
나는 부드러운 오리구이를 씹으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육즙도 육즙인데, 곁들인 비가라드 소스가 너무 맛있었다.
“던전의 마수들은, 일 년 중 이맘때가 되면 밖으로 나와 영주성과 주변 도시를 공격합니다. 매년 다른 종류의 마수가 출몰하기에 결계를 쳐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중 몇 놈은 반드시 산을 탈출하니까요. 산에서 시작하는 대회가, 결국 영주성 평야에서 끝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건 나도 알고 있었다.
황족과 귀족이 떼로 덤벼도 틈을 타 달아나는 마수가 있는데, 놈들은 반드시 한 번은 화성의 혜검에 접근한다고 했다.
신물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마수를 많이 잡은 사람도 유리하지만, 보통은 가장 크고 흉포한 마수를 잡은 사람에게 가산점이 붙습니다. 양보다는 질이죠.”
“그렇군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엘리자베트 경 좌측에 앉은 황자를 흘끔 살폈다.
잘난 얼굴에 웃음기라고는 1도 없었다.
원래도 저기압인 놈이 남쪽으로 오더니 열대성 저기압이 되어 가는 모양새였다.
“황자님이 우승하실 수 있다 보십니까?”
“물론입니다.”
엘리자베트 경이 즉답했다.
“인정하려니 속이 쓰리지만, 현재 전하를 무력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황제 폐하뿐일 겁니다.”
“요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셔서 말입니다.”
“전하께서요?”
그녀가 회색 눈동자를 똥그랗게 뜨며 자신의 왼편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느낀 황자가 우리를 응시했다.
여전히 눈빛이 사나운 게, 아무리 봐도 우승에 대한 압박감으로 긴장한 낯이었다.
그게 아니고서는 요사이의 날선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주황색 눈길을 가볍게 무시하며 오렌지 주스로 목을 축였다.
자식, 스물넷인 티를 내네.
*
“······나를 내 아들이라고 믿고 있던데.”
“악! 드디어 알았냐! 하하하하!”
엘리자베트가 웃음과 비명을 동시에 내질렀다.
그녀는 귀빈용 응접실이 떠나가라 가가대소하다가, 다비드가 급히 쥐어준 소파 쿠션에 얼굴을 박았다.
소리가 너무 크면 뒤엠 후작이 무슨 일이냐고, 같이 웃자고 건너올지도 몰랐다.
엘리자베트는 거의 울다시피 하며 옆에 선 다비드의 팔뚝을 철썩철썩 때렸다.
시종은 오랜 세월 튼튼해진 맷집으로 그녀의 손을 버텨냈다.
“다비드 님, 어떻게 참으셨습니까. 이 재밌는 걸 왜 혼자만 알고 계셨어요.”
“소백작님, 제 인생 최대의 난관이었다고 자신합니다.”
“아! 어떡해! 예서 왕자님!”
“조르주.”
세드리크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중간 이름을 불렀다.
적당히 하라는 뜻이었으나 엘리자베트는 참지 못하고 쿠션에 다시 고개를 묻었다.
예서 왕자가 그런 오해를 했을 때도 웃다가 기절할 뻔했는데, 드디어 당사자가 전말을 알았다니 배가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이건, 이건 정말 과했다. 기어코 눈물이 나왔다.
“내가, 흑, 내가 말했지. 나 같으면 그런 오해 받느니 사실대로 고백한다고.”
“······왜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지?”
“그건 또 무슨 소린데! 차라리 들키고 싶다는 거야?”
엘리자베트가 이제는 삿대질을 하며 흐느꼈다.
황자는 복잡한 심경으로 친우를 내려다보았다.
실은 지난 3일 내내 심정이 소란스러웠다.
이런 오해를 지금까지 숨긴 엘리자베트에게 화를 내야 할지, 자신에게 감히 사생아가 있다고 추측한 왕자를 매몰차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힌트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건 자신이었고, 왕자의 호의에 판돈을 건 것 또한 자신이었다.
이토록 불확실한 부정형의 상태라니.
이래서야 어린아이로 변했을 때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흠, 흠. 그런데 왕자님도 이해되지 않아? 에테르 고갈 증세가 다양하다지만, 네가 겪는 건 유일무이한 경우잖아. 책에도 없어.”
엘리자베트가 가까스로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게다가 네가 에테르를 쓰는 건 비밀이니까. 다른 사람이라고 믿는 것도 일리 있지.”
“결국 내 탓이라는 거군.”
“으흐흐, 흐흐. 흐흑.”
소백작이 다시금 쿠션에 눈물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황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