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504)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504화(504/920)
#504
고해와 묵시 (4)
물방울이 뛰노는 하얀 손가락이, 수평선 끝의 붉은 핏방울을 가리켰다.
판판한 얼음 조각으로 빼곡한 북해는 마치 적룡(赤龍)의 비늘 같았다.
-쏴아아아······!
“어어, 뜬다! 해 뜬다! 하이네켄 님, 저기요!”
가인 씨의 분홍 머리카락이 붕붕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짝꿍을 보며 밝게 웃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해돋이 보는 걸 좋아했다고 했다.
한 해의 마지막 해님, 첫 번째 해님. 혹은 언니와 그녀의 생일에 떠오르는 해님.
그런 장관에 넋을 놓고 있으면, 잠시 괴로움이 잊히고 오늘도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단다.
이런 순간을 같이하게 되어 기뻤다.
-삐삐삐?
“응, 일 년의 첫 번째 태양이야. 우리 인간들은 이걸 소중하게 생각해.”
-삐삐삐르르!
어깨에 앉은 뚝심이가 유쾌하게 지저귀었다.
내 품에 숨은 도마뱀은 이따금 꼬리를 실룩거렸다.
우리는 털옷으로 온몸을 꽁꽁 싸맨 채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타니슬라스 전하와 지브릴 디오프 공자도―좀 절뚝거리긴 하지만 놀랍게도 멀쩡했다―이 시간만큼은 함께였다.
무관학교 3학년 학생들 역시, 우르르 밖으로 나와 성력 1615년의 첫 일출을 구경했다.
나는 슬쩍 옆자리의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황태자의 칠흑 같은 머리칼이 바닷바람을 맞아 갈래갈래 흩어져 날았다.
그는 어제오늘 유독 말수가 적었다.
-휘우우우······
“태자님, 괜찮으십니까? 어디 불편하신 것 같아서요.”
“······그대가 신경 써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니야.”
조용조용 속삭였더니, 그런 답이 돌아왔다.
불씨를 심어놓은 두 홍채가 심해에 잠긴 듯 어두웠다.
나는 뭐라고 대꾸를 하려다가 침묵을 택했다. 찬바람이 씽씽 불었다.
입술이 얼어붙을 것처럼 추워서, 아무래도 지금은 얌전히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휘이잉, 휘이잉, 홰애애앵······!
“흐아아악! 진짜 춥다!”
“하나도 안 추워! 버틸 수 있어, 이길 수 있어!”
학생들이 조금씩 터오는 햇살을 맞으며 소리소리 질렀다.
무모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엔 헛웃음이 났다.
분명 자정이 넘어갈 때만 해도 날씨가 나쁘지 않았는데, 동틀 즈음이 되니 최북단의 명성에 걸맞은 칼바람이 들이닥쳤다.
추위를 별로 타지 않는 나지만, 패딩도 패딩 부츠도 없이 이런 날씨에 서 있으려니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하얀 입김이 태어나기 무섭게 허공으로 빨려들어 갔다. 진짜 장난 아니네.
-삐삐이?
“와, 너무 추워.”
-쌔애애앵······!
내가 중얼거리며 어깨를 구부렸다.
밤에야 학생들이 없어서 친구들의 신력을 마음껏 누렸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았다.
무엇보다 연말연시의 새로운 북풍을 맞는 것이 이 행사의 핵심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냥 꾹 참아야······.
“미련하게 버티는군.”
다시 옆에서 그런 말이 날아왔다. 나는 녀석을 흘겼다가 재빨리 낯을 수습했다.
접때 표정 관리를 못 한다는 지적을 받았던 게 생각나서였다.
그래도 내가 한참 형인데.
-부스럭, 부스럭
“······.”
세드리크 놈은 가가방에 멋대로 손을 쑥 집어넣더니, 빨간 마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나는 결국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샐쭉 웃어 버렸다.
이건 상급 중에서도 최상급 발열 마석이라, 에테르 없이 마나만 주입해도 하루 넘게 열기를 뿜어냈다.
사내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일별했다.
그러고는 펄럭이는 로브 소매 아래서 은밀하게 마력을 흘려 넣었다. 사아아아······.
“감사합니다.”
“이렇듯 손이 많이 가서야.”
“······.”
“누구라도 그대가 궁주인 것을 알겠어.”
아니,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지 않냐? 넌 추위를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나는 속으로만 궁시렁대며 고분고분 마석을 받았다.
불꽃 에테르를 담은 성석보다 뛰어나지는 않지만, 뜨끈뜨끈한 기운이 손에 퍼지자 기분 좋은 한숨이 흘렀다.
가인 씨는 이제 요한 경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발개진 귀 끝과 한껏 벌어진 입술이 그녀의 흥분을 여실히 증명했다.
나는 슬며시 짝의 눈치를 살폈다가······.
“혹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
“어젯밤에 가인 씨나, 저나, 요한 경이 말했던 것처럼요.”
태자에게 그렇게 소곤거렸다. 그러자 보석 같은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 모습엔 설핏 입꼬리가 올라갔다. 난 또 뭐라고.
“그게 마음에 걸리시는 거면, 괜찮습니다. 저희는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요.”
“······.”
“얘기하고 싶으실 때 얘기하시면 됩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아요. 부담 가지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
사내는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쌩하니 고개 돌려 태양을 바라보았다.
나 또한 피식하고서 눈앞의 장관에 다시 집중했다.
마침 가인 씨가 할아버님과 디오프 공자에게 큰 소리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소원! 새해의 첫 태양을 볼 때는 꼭 소원을 비셔야 합니다. 지금요!”
“뭐야, 그게? 어차피 이루어질 것도 아니잖아.”
“말 쉽게 하네? 이루어지면 오만 프랑 줄 거?”
그녀는 이제 대놓고 말을 놨다.
공자도 그게 썩 마음에 드는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꼭 한마디 더 얹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만 프랑 좋지. 그럼 이따 석양을 보면서 빌어도 상관없겠네?”
“아! 시비 걸 거면 그냥 학교로 가, 좀!”
그녀가 성난 강아지처럼 펄쩍 뛰어오르자, 요한 경이 뒤에서 부드럽게 양팔을 잡아 말렸다.
번개 마법사는 할아버님 전하께 달랑 덜미를 잡혔다.
‘큿, 할아버님!’ ‘숙녀에게 너무 짓궂구나, 아가.’ 점잖은 타이름이 이어졌다.
아까 천막에서 있었던 일은 가인 씨와 나밖에 모르는데, 저놈이 비슷하게 당하는 모습을 보니 아주 고소했다!
“짜증 나, 진짜!”
“어서 소원을 빌고, 천막으로 돌아가 뚝심 님의 설명을 들어보죠. 날씨가 심상치 않으니까요.”
마침내 헤릿 아버지가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나는 네 사람을 보며 킥킥대다가, 마석 쥔 양손을 맞잡고 새해 소원 빌 준비를 했다.
뚝심이가 의아해하기에 ‘이건 우리 동네에서 주로 하는 거야.’하고 알려주기도 했다.
보통은 주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덧붙이자, 꼬마는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똥그래진 눈망울이 몹시 깜찍했다. 하하하.
“흐아아아아―!”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그리핀은 우리가 죽인다!”
“와아아아······!”
학생들의 용맹한 고함을 들으며, 나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 너머로 태양의 붉은 빛이 아른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내 소원은······.
······제발.
“무엇을 빌었지?”
깜짝이야. 나는 눈을 번쩍 뜨며 태자를 올려보았다.
얘 갑자기 말수가 많아진 느낌인데?
“어, 비밀입니다. 이런 건 원래 비밀이거든요.”
“황족에게도 말 못 할 소원이 있나?”
······넌 진짜 폐하 아들로 안 태어났으면 어쩔 뻔했냐.
나는 입술을 비죽이며 대충 대답했다.
“필스너르 님이랑 똑같은 소원 빌었습니다.”
“······.”
그랬더니 녀석의 눈이 크게 뜨였다.
순간 내가 무슨 못 할 말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설마 좋은 황제가 되게 해달라고 빌었나?
나 이대로 역적 되는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도 하이네켄 님이랑 같은 소원 빌었는데!”
불쑥! 시야에 가인 씨의 장밋빛 뺨이 가득 담겼다.
오늘 유독 들떠 있는 그녀를 보니 호흡이 탁 트이며 눈끝이 휘었다.
태자 놈은 헛숨을 내뱉고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우리 셋이 같은 소원을 빈 셈이라고 지적하려는데―
“에델바이스 샘은요? 무슨 소원 비셨어요?”
“저도 우연히 제자님과 같은 소원을 빌었네요.”
“대박, 무려 넷이 같은 걸 빌었어. 이거 로또로 치면 벌써 4등이에요!”
‘시작이 좋다!’ 그녀가 파안대소하며 할아버님께 달려갔다.
로또 3등을 노리는 움직임이 분명해서, 나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눈이 마주친 태자 녀석에겐 오늘도 새로운 문장을 하나 알려주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쏴아아아······!
발치까지 밀려온 하얀 포말이, 크게 한 차례 들썩였다.
사내는 내가 내뱉은 문장을 여러 번 곱씹었다. 먼 기억을 더듬듯이.
*
그다음으로는, 다시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하루였다.
우리는 잠깐 눈붙일 틈도 없이 뚝심이의 진행에 몸을 맡겨야만 했다.
서로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산더미였기 때문이다.
막사 입구는, 비딱한 디오프 공자와 뒷짐을 진 요한 경이 든든하게 지키고 서 있었다.
“어흠! 다들 집중해 주세요. 내가 안에서 정리를 싹 해왔다 이 말씀이야.”
리에스테르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이자, 헤릿 헤인스 군 손글씨 1급 통역사, 아스 남작가의 가주이시며, 위대한 신물의 간택을 받은 냉담자(冷淡者) 조안 드 아스 님께서 발표하셨다.
이어서 그녀는 방주에서 챙겨 나온 두루마리를 멋들어지게 펼쳐 들었다.
할아버님 무릎에 앉아 있던 헤릿이 신나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차르르륵!
“이거 봐,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해봤지.”
“우와······!”
나는 모포에 싸인 도마뱀을 어르다 말고 입을 떡 벌렸다.
저쪽에서 디오프가 휘파람을 불었고, 할아버님은 ‘과연 주신께서 내리신 재능이로구나!’ 하며 감탄하셨다.
언뜻 보면 대강 그린 것 같은데, 색색의 연필로 칠한 풍경은 당장이라도 종이를 찢고 나올 것처럼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새하얗게 얼어붙은 북해, 그 중심에서 솟아오른 붉고 장엄한 용.
겁에 질려 사방으로 달아나는 파도. 검푸른 하늘에서 재앙처럼 쏟아져 내리는 마수 떼와······.
“어때, 한눈에 알아보겠어?”
그 중심의, 흉측하고 거대한 그리핀.
도마뱀이 내 손가락을 꾹 붙들었다. 나는 꼬마의 등을 쓸어주며 조안에게 물었다.
“이 애가 뚝심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겁니까?”
“어, 그렇대. 헤릿 말로는.”
화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신의 그림을 가인 씨가 들도록 했다.
그러고는 색연필 꽁무니로 용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 친구가, 여러분이 지금 보시는 그 도마뱀 꼬마야. 이름은 ‘사룡’. 다른 신물들과 마찬가지로 대륙이 창조되던 시점에 이 땅에 내려왔대. 그리고······. 잠만.”
그녀가 와락 인상을 구기더니, 품을 뒤적뒤적했다.
“미안. 내가 공부 머리가 없어서 다 못 외웠어. 적어놓은 것 좀 보면서 설명할게요.”
“편하게 하세요.”
우리는 침착히 통역사님을 기다렸다.
조안은 자신의 글씨를 보더니 더욱 오만상을 썼다.
“뭐라고 쓴 거야, 이거······. 아! 여깄네. 사룡은 본래 신국 남방을 수호하는 존재였는데, 자신이 내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화산이 폭발했대. 대충 이천 년 전?”
“헉, 화산이요?”
“엉. 그 영향으로 초승달의 꼬리는 어마어마하게 비옥한 땅이 됐다네? 하지만 화산이 터지고 난 뒤로 사룡은 갈 곳을 잃고 말았대. 당시에는 불 속성에 대한 인간들의 공포와 분노가 엄청났거든. 아무튼. 그래서 헤매고 또 헤매다가 바다에 닿았는데······. 한눈에 반했다는 거야. 푸르고 너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거기서부터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용 전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룡은 제 속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물로 가득한 영역을 지키고자 마수 떼에 맞섰다.
전선이 계속해서 차디찬 북쪽으로 밀려나는데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리핀 일족의 우두머리는, 기어코 신물을 파괴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며 집요하고 악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끼루루루룩―!’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존재처럼.
“아무리 마수라지만, 신화급이라면 지능이 상당할 텐데요. 정말로 이기지도 못할 신물을 ‘파괴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단 말씀이십니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러자 도마뱀이 냉큼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와아, 엄청 귀여워.
“진짜 그랬대! 왜냐하면, 사룡의 약점은 다른 신물들과 달리 완전히 바깥으로 드러나 있었거든. 그러니 마수 놈들이 지치지도 않고 동해에서 북해까지 쫓아 올라왔다는 거 아니겠어. 아주 만만하게 여긴 거지.”
톡톡, 화가가 화룡(火龍)의 주둥이 부분을 색연필로 두드렸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어?”
잠깐만, 이제 보니 용의 턱 아래에······.
“여의마니? 맞나? 뭐 그런 이름이라더라.”
조안이 이마를 긁으며 해설했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여의마니(如意摩尼).
다른 이름으로는 ‘여의주’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