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547)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547화(547/920)
#547
콜드부팅 (1)
-휘이이잉―!
“하아······.”
정현서(鄭玄瑞)는, 까마득한 십이 층 아래를 내려다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돌고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일면 당연하고 다행하게도, 창밖에는 어떠한 변고도 없었다.
온 아파트 단지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든가, 1층에 난리가 났다든가 하는 드라마틱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남자의 티셔츠와 잠옷 바지만이 하릴없이 펄럭거릴 뿐이었다.
동시에 어떤 강렬한 예감이 그의 뇌를 짜릿짜릿 관통했다.
‘정예서는 집에 없다.’
왜?
‘그곳으로 떠났기 때문에.’
그곳이 어딘데?
‘퇴사했더니―’
“아니. 아닐 거야. 설마, 아냐······.”
날렵한 턱이 바삐 허공을 그었다.
싸늘한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닥쳤으나, 그의 식은땀을 말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월 말 서울의 새벽공기는 몹시 매서운데도 그랬다.
양손으로 굳게 쥔 베란다 난간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남자는 추위의 치읓 자도 느끼지 못했다.
형광등을 켠 타일 위로는, 자잘한 흙먼지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바람에 화분이 넘어진 것이리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은서의 잔디 인형이 바닥을 뒹굴고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현서는 그것이 하나뿐인 남동생의 운동화에서 나온 흔적임을 알아보았다.
어떻게 알았냐고?
“······정예서, 미친 새끼야. 너 진짜 또라이지?”
현관엔 녀석의 신발이 없었으니까.
슈퍼싱글 침대는 텅 비어 있고, 붙박이 옷장도 활짝 열려 있고, 접때 승진 선물로 사준 명품 카디건은 감쪽같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으니까.
막내가 아웃렛에서 집어온 거라고 거짓말했더니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멍청이가 바로 그의 큰동생이었다.
현서는 가끔 은서보다 걱정스러운 제 호적 메이트를 떠올리며 심호흡했다.
안경을 벗고 잠시 마른세수했다가, 다시 긴 콧숨을 내뱉었다.
“후우······.”
내가 너 언젠가 대형 사고 칠 줄 알았다.
평생을 범생이로 살았으니, 한 번은 크게 속 썩일 줄 알았다고.
“그래······. 우선 진정하고. 진정하고. 진정하고······.”
일단 벌벌거리는 손으로 방충망을 닫았다.
손가락이 두어 번 미끄러졌으나, 거슬리는 소음 없이 문을 원상복구 한 것은 지금의 그에겐 대단한 업적이었다.
유리로 된 바깥 문까지 닫은 뒤엔 냉랭한 베란다에 우두커니 서서 폰을 꺼냈다.
요양병원에 먼저 전화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아니, 어쩌면 저주받은 컴퓨터를 살리고자 무당부터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당장은 더 급한 일이 있었다.
빠르게 전화 앱을 열고 동생 놈의 이름을 찾았다. ‘톡, 톡톡.’
‘정예’.
‘전화’.
-달칵
즉시 짧은 소음이 들렸다. 순간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
제길. 혹시나 해서 시도해 보았건만 폰이 아예 꺼져 있었다.
하기야 정말 ‘거기’로 갔다면 통화가 되는 게 이상할 것이다.
충전도 못 할 테니 시간이 흘러 방전되는 쪽이 자연스럽겠지. 아니······.
“그래도 그렇지, 말이 되나······. 이게 맞아?”
거기로 가는 게 가능하기는 하냐고.
그래도 돼? 도대체 무슨 원리로?
“하, 미치겠네.”
어느새 잠이 싹 달아난 눈동자엔 날카로운 빛이 깃들었다.
안 그래도 납작하게 눌린 머리가 그의 손짓 몇 번에 까치집으로 변했다.
현서는 쓰레빠 한 짝을 꿰고 거실까지 들어와―확실히 나사 하나가 빠져 있기는 했다―막내의 방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혹시나 은서가 깼을까 봐 절로 가슴을 졸이게 됐다.
만약 녀석이 화장실 간다고 일어났다가, 제 작은오빠의 부재를 알아차리기라도 했다면.
이제 몇 초 안에 저 문을 벌컥 열고서 울며불며 자신을 찾는다면.
그러면 저는 뭐라고 설명을 해야······.
“커어엉······. 커헝! 킁!”
“······.”
힘찬 코골이가 문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제야 남자의 눈꺼풀이 스르륵 내려갔다.
막내 전선은 이상 없다.
그렇다면.
“여보세요. 예, 선생님. 정현서입니다······.”
마지막 이성의 끈을 붙잡은 현서가, 즉시 요양병원의 이종희 요양보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목소리는 한껏 죽인 채 빠른 걸음으로 제 방까지 돌아왔다.
정은서는 자다가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돼지 인간이지만, 혹 모르니 잽싸게 문을 걸어 잠갔다.
천만다행히 엄마는 당장 예서와 통화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라고 했다.
울다가 탈진해서 겨우 잠드셨는데, 많이 지치셨으니 아침까지는 이대로 쭉 주무실 것 같다는 설명이 잇따랐다.
남자는 컴퓨터 의자에 몸을 구기며 안경을 벗었다.
그러고는 목 받침대에 머리를 누이고서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아이고. 월요일 새벽부터 너무 고생하셨어요, 보호자님. 오늘도 글 쓰셔야 하는데 피곤하셔서 어떡해.
“······아닙니다. 선생님이 더 고생이시죠. 이번 주말에 애들 데리고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좋아하시는 한라봉이랑 딸기도 사 갈게요. 하루 쉬었다 들어오세요.”
그건, 현서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과도 같았다.
정예서는 무조건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엄마와 은서는 이 악몽 같은 사태를 절대로 몰라야만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남자의 새카만 눈이 떼구루루 굴러 모니터를 향했다. 여전히 멀쩡한 경고창, 그리고······.
-사아아아······
끊임없이 작아지는 한글 스크롤이 보였다.
저장한 적도 없는 파일명이 창 꼭대기를 선명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그는 제목을 지워버릴 것처럼 매서운 눈초리로 화면을 노려보았다.
‘□□ □□□ □□□□ □□□ □.hwp’
“······.”
-싸아아아······!
신묘한 보랏빛을 뿜어내는 본체와 상서로운 황금빛을 뿌리는 화면은, 이제 아주 그를 잡아먹을 기세였다.
하지만 진짜로 잡아먹지는 못했다.
게다가 이것도 자꾸 보니 적응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까보다는 염통이 멀쩡했다.
그가 평소 공포영화에 큰 감흥이 없는 성격인 것도 한몫했다.
경고창에는 남자의 아픈 손가락 이름이 선명했다.
‘퇴사했더니 이계 공녀’
‘만든 날짜: 2019-01-01 오전 11:11’
“······예, 예. 감사합니다. 네, 푹 쉬세요. 들어가십시오.”
뚝. 전화가 끊기자마자 현서는 마우스를 잡고 움직였다.
당장 경고창을 끌 수 없다면, 저 이름 모를 파일이 대관절 무슨 얘기를 풀어나가고 있는지라도 확인해야 했다.
어째서 ‘퇴계공’의 친구들을 언급하던 정예가 완전히 다른 파일에서 촉새처럼 떠들고 있는지도 알아내야 했다.
그가 마우스 휠을 굴리자, 페이지는 파들파들 떨더니 위로 쭉쭉 올라가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작아지는 스크롤보다 그의 속도가 몇 배는 빠른 탓이었다.
침착해, 정현서. 네 동생 놈을 꺼내 오려면 우선 침착해야 하잖아.
분명 무슨 수가 있을 거다.
어디 보자.
「······반짝이는 커서(cursor)였다.
글로써 세계를 빚은 사람이, 가공간 바깥에서 창조를 이어나간 흔적이자 현재였다.
바로 그래서 내가 세계수를 바수었을 때 잉크 내음과 전자기기 냄새가 났다.
바로 그런 까닭에, 내가 신성한 뿌리를 내리찍었을 때 전깃불 같은 스파크가 튀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진실이건만 모든 것을 끼워 맞추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홀로 전율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원작과 다른 세계선이라고 해도, 버려진 공간은 아니다.
처음부터 알고 있지 않았던가. 당연히 주신은 어딘가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음?”
어느 지점에 도달한 현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커서’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박힌 탓이었다. 불현듯 어떤 가설이 떠올랐다.
제가 이런 식으로 쓰이는 글을 실시간으로 읽을 수 있다면, 편집 또한 가능할까?
내용을 완전히 삭제하고 덧붙이거나 고쳐 쓸 수도 있을까?
비록 경고창을 닫거나 누를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이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는 눈에 보이는 문장에 커서를 고정한 뒤 백스페이스 버튼을 연타했다. ‘탁탁, 탁탁탁, 탁탁탁탁!’
「······나는 눈부신 섬광 틈으로 율리터의 망크란스를 일별했다.
횃불이 넘어져 불타는 집, 반절 가까이 무너진 신전.
거대한 고목 옆에서 와르르르 쓰러지는 건물. 힘없이 부러지는 울타┃」
아. 지워지긴 하네. 경고창은 클릭 못 해도 이건 된다?
“잠깐, 이거······.”
함부로 지워도 되는 건가? 찰나 심장이 바다에 빠진 것처럼 출렁거렸다.
늘 냉하던 얼굴은 오늘따라 극심한 감정의 풍파를 맞고 있었다.
현서는 동생을 무사히 구출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생각이었고, 반대로 그 녀석이 다칠 만한 짓거리는 추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그는 동생이 빨려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의 내용을 일부 삭제했다.
게다가 그는 작가였다!
“빌어먹을.”
남자는 한 문장의 소실이, 전체적인 이야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퇴사했더니 이계 공녀>처럼 특별한 프로젝트에 힘을 보태게 된 이후로는······.
“뭐야, 실행 취소는 또 안 돼?”
지운 것을 복구하려고 단축키를 누르니, 이번에는 커서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현서는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 일정한 집필 권한을 주면서도, 어느 수준 이상의 간섭은 허용하지 않는 모습이 꼭······.
“······.”
-드르륵, 드르륵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스크롤은 계속해서 올라갔다.
「······솔직히 말해, 내 몸으로 건너올지 모른다는 예상은 어느 정도 했다.
딱히 근거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편한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에바 아닌가?
아무리 ‘정석적인’ 빙의가 아니라지만 언어 장벽까지 생긴다고?
【속은 똑같은데 이렇게 불친절해져? 집에 가면 무조건 별점 1개 남긴다.】」
“야, 그러지 마라.”
현서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느릿느릿 미소가 맺혔다가 그늘로 가라앉았다.
머리통이 삽시에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하······. 그럼 이놈을 어떻게 데려온다.”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지?
*
아, 일단 속부터 비우고 보자. 진짜 죽겠다!
“우웨에에엑!”
“아이고, 우리 궁주님 어떡해. 이러다 살 다 내리게 생겼네.”
“커흑, 콜록!”
턱, 턱턱! 등을 두드려주는 가인 씨의 손길이 몹시 야무졌다.
나는 커다란 고목 하나를 붙든 채, 허리를 90도쯤 꺾고서 위장의 내용물을 모조리 쏟아내고 있었다.
달밤에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다행히 자고 일어나서 먹은 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험한 꼴은 면할 수 있었다(물론 황태자 놈은 멀찍이 떨어져서 혀를 차는 중이다).
식도가 타들어 갈 것처럼 뜨겁거나 아프지도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헉, 쿨럭. 아으······.”
“궁주님, 미지근한 물 드릴까요? 입 한번 헹구시겠습니까?”
“예, 예에······. 부탁드립니다······.”
우리 형이, <퇴사했더니 이계 공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배신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쇼킹하고 울렁거리는 감각은 평생 잊을 수 없을 듯싶었다.
그 생각만 하면 속이 뒤집히고 눈앞이 노래지는 게, 그냥 딱 기절할 것만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엉망진창인 박자로 숨을 몰아쉬었다.
한편으로는 지금껏 내가 무시했던, 또는 모르고 지나쳤던, 혹은······.
“여기, 물이요.”
“감사합······. 우우욱!”
“어머. 물 냄새도 못 맡으셔, 진짜 어떡해?”
알고도 못 본 척했던, 그런 수많은 장면이 빠르게 눈앞을 스쳐 갔다.
꼭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저 어릴 때 꿈이, 폭군 전룡 되는 거였습니다.’
“하아, 읏······.”
일곱 살 정은서와 같은 장래 희망을 품고 있었던, 우리의 주인공.
‘진짜 대박 사건. 황실 마차에 외부인을 태우셨으니, 하나도 빠짐없이 다 얘기해주셔야 해요!’
그 애와 말투까지 비슷한 나의 공주님. 그리고······.
“우웨에엑.”
“저러다 내장까지 뱉겠네. 그냥 기절시켜야 하는 거 아냐?”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지브릴 디오프가 빈정거렸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서 놈을 있는 힘껏 째려보았다.
괜히 시비 걸지 마라, 난 지금 빙의 첫날부터 한 장면 한 장면 뜯어보느라 죽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