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588)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588화(588/920)
#588
일기당천 왕자님 (1)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거대한 모선의 복도는 의외로 좁고 어둑했다.
“이쪽입니다.”
-또각, 또각, 또각······
바카리 자작가의 사용인들이, 구십 도 가까이 허리를 숙여 가며 예서 왕자를 깊숙한 선실로 안내했다.
그의 앞에서는 약혼 당사자인 데지레 바카리 소자작과 데비 앙드레 공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들의 부모는 황태자를 비롯한 귀빈 접대를 위하여 무도회장에 머무르기로 했다.
어찌 보면 왕자님이 잘 떼어낸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나는 그의 짐가방과 애물단지들을 챙겨서 조용히 뒤를 따랐다.
-꼬꼬꼬꼭―!
“아, 깜짝이야!”
-끼아!
이따금 어느 귀족의 토끼나 닭 등이, 복도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놀란 페리는 뒤로 물러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반려동물이 출입할 수 있는 행사라서 여기저기 변수가 많은 편이었다.
왕자님의 곁을 지키던 황실 근위대 기사가 다정히 신수를 일으켜주었다.
나는 페리를 안아 올리며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아이가 놀라서······.”
-낑
“괜찮네, 그럴 수도 있지. 쥘리에트에 강아지가 들어왔다더니 이 녀석들인가 보군.”
“······예.”
“참으로 귀여운 생명을 거두셨습니다, 왕자님.”
그녀가 사람 좋게 말을 붙이자, 왕자는 고운 눈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친밀감과 친숙함이 향수처럼 맴돌았다.
나는 너무 긴장하지 않으려 애쓰며 젊은 기사를 할끔거렸다.
“오늘은 어찌 크리스텔 영애와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도 아름답게 꾸미고 오셨던데요.”
“몸이 조금 좋지 않아서요. 조용히 시간만 보내다 가려고 했는데, 신경 써 주신 자작님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다 싶어서.”
“과연, 제국의 어둠까지 밝히는 신국의 달님다우십니다.”
“너무 놀리지 마세요, 무테 경.”
“하하하하.”
호쾌한 웃음소리에 두 눈이 질끈 감겼다.
그녀는 외간남자 앞에서 제 친우의 약혼녀를 언급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당장 5분 후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 염통이 쫄깃쫄깃해졌다.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지만, 어떻게 여기서 엘리자베트 경이 등장할 수 있냐고.
변수가 너무 크다 못해 사람 잡아먹기 직전이잖아요!
세드리크 리에스테르, 이 어디서나 눈치 빠른 놈아!
“귀빈실은 이곳입니다, 왕자님. 부족하거나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저희를 불러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다만 주신의 은총으로, 진심 어린 기도와 축복을 내리는 데는 많은 자원이 들지 않습니다.”
“오······.”
“아아······.”
사용인들이 크게 감명받은 표정으로 다시금 절을 올렸다.
부지런히 따라 걷던 데비 공자는 감동해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이윽고 기사들이 방으로 들어가서 사방을 샅샅이 확인했다.
공간이 아담하고 동글동글했던 커튼 너머 휴게실과 달리, 이곳은 욕실에 응접실까지 제대로 갖춘 스위트룸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우리는 출입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이곳의 엘리자베트 경 역시, 똑 부러지는 부근위대장님이었으니까.
“그럼 들어가실까요?”
“죄송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저와 이 아이만 있으면 될 듯합니다.”
“예?”
기사가 눈을 깜빡였다.
예서 왕자님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낯으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말씀드렸다시피, 기도와 축복에는 큰 품이 들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하고 신성한 환경과 깨끗한 물만 있으면 됩니다.”
“아하.”
“페네티안 왕실에 전해 내려오는 특별한 의식을 진행하려고 하니, 도와주는 손길과 지켜보는 눈길은 하나면 충분합니다.”
“오오······?”
엘리자베트 경이 웬일이냐는 표정으로 인중을 늘렸고―누가 봐도 이 동네 가인 씨한테 배운 거였다―데지레 소자작과 데비 공자는 긍정적인 의미로 놀란 기색이었다.
그리하여 왕자님이 소자작으로부터 성유물 보석함을 건네받는 데는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공공연히 ‘신국의 난봉꾼’이라 불리는 남자였고 이곳까지 오는 내내 수많은 추파를 받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의 신성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듯했다.
평소에 이미지 관리 진짜 잘하시나 보다······. 나도 그런 것 좀 신경 써야 했나.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금방 다시 뵙죠.”
“예, 왕자님.”
“형 후딱 나올게. 무테 경하고 착하게 있을 수 있지?”
-끼응!
‘달카닥!’ 그렇게 우리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레아가 문틈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 기척이 이어졌다.
왕자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 걸음 정도를 더 걸어갔다.
동시에 나의 입도 서서히 벌어졌다. 방금 말씀하신 건 진짜입니까?
“정말로 그런 게 있습니까? 왕실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궁극의 기도문······.”
“먼저 욕실로 가서 수도꼭지를 여십시오, 세레니테 씨.”
“아, 헉. 네!”
그럼 그렇지, 그것도 전부 뻥이었구나!
나는 후다닥 욕실로 가서 시끌벅적하게 물을 튼 뒤, 허겁지겁 왕자님이 기다리는 침실로 들어섰다. 콸콸콸!
“자, 성유물을 확인해 보세요.”
“대박······. 감사합니다!”
재빨리 보석함을 받아 들고, 가가방 안에 들어 있던 다이아몬드 귀걸이 한쪽을 꾹 눌렀다.
이건 프랑수아 후작이 접때 협찬해 주었던 통신용 마도구인데―그게 아마 베레니스 공녀를 처음 만났을 때였다. 황태자를 납치하던 밤에도 써봤고―한 쌍으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있으면 단거리 무전이 가능했다.
하지만 목걸이 쪽은 가인 씨가 일전에 경계의 신전에서 산산조각을 냈다고 들어서······.
‘이 귀걸이만으로는, 다른 한쪽의 위치를 추적하는 정도만 할 수 있겠군.’
‘통신은 힘들다는 거군요. 최대 추적 반경은 얼마나 될까요?’
마도구만 보면 유독 눈알을 반짝이는 세드리크 태자는, 귀걸이에 여러 마법을 걸어보더니 마침내 선언했다.
그의 붉은 마나가 춤추듯 하늘거렸다.
‘이 호수를 벗어나기는 힘들어.’
‘으음······.’
요컨대 귀걸이만으로는, 가까운 다른 쪽을 찾는 일만 할 수 있었다.
태자 녀석이 마력을 잔뜩 담아주기는 했는데 그의 진단으로는 귀걸이의 내구력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라고 했다.
그야 내가 항상 가가방을 메고 다니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 집에서부터 줄곧 함께한 친구 같은 물건이거든.
그 귀걸이는 내가 가방 바닥에서 운 좋게 찾아낸 유물이고.
“일회용 GPS 전원 켰고······. 이제는 형이 나설 차례야.”
정현서, 보고 있지?
나는 허공을 향해 중얼거린 후, 보석함의 뚜껑을 활짝 열어젖혔다.
진귀한 녹색 팔찌가 눈부신 광채와 함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와······.
-사아아······
“뭐지, 에메랄드인가?”
“그보다 더욱 귀한 보석입니다. 이만한 크기의 녹색 다이아몬드는 왕족이라도 만나기 쉽지 않거든요.”
곁으로 다가온 왕자님이 부드럽게 설명했다.
나는 상황이 급한 것도 잊고 잠시 성유물을 구경했다.
약칭 ‘비완’이라고 불리는 이 보물은, 사후에 성인으로 추대된 어느 백작 부군의 유품이었다.
이번 <격주간 리에스테르> 호외에서 읽기로, 부군은 황궁에서 일하는 신관이었으며 당시 황제였던 발레리 리에스테르의 신임을 한 몸에 받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즈음 발레리 선황은 오래된 부정부패로 악취를 풍기던 제국 은행을 대대적으로 솎아내기 시작했는데, 당연지사 여기에는 여러 거물급 상단과 대귀족이 엮여 있었다.
이는 곧 황제와 정재계의 피 튀기는 대립을 의미했다.
하지만 발레리의 세력은, 아직 완연히 여물지 않은 판국이었다.
그녀가 황태녀였던 언니의 요절로 갑작스럽게 군주가 된 둘째 황녀였기 때문이다.
은행 숙청 건을 두고 선황의 측근은 정확히 반반으로 갈라졌다.
절반은 그녀가 좀 더 힘을 기른 후에 청소할 것을 청하였으나, 나머지 절반은 그리하면 부패 세력이 더욱 세를 공고히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선황은 후자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대규모 압수수색과 세무조사가 시작된 지 한 달여.
그녀가 언제나 즐겨 마시던 홍차에, 상급 마수의 맹독이 떨어졌다.
“황제의 독을 대신 마시고 죽었다는······. 바로 그 신관의 패물이군요.”
“예. 다만 성유물의 능력은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합니다. 바카리 자작가에서 오랫동안 대중에 공개한 적이 없기도 하고, 그전에는 전쟁통에서 활약한 적이 있지만 사관의 기록은 황실 서고에만 남아 있답니다.”
“열심히 공부하셨네요, 예서 씨.”
왕자님이 보석 같은 미소로 칭찬해 주었다. 조금 쑥스러워서 코끝이 간질거렸다.
나는 더 망설일 것도 없이 냉큼 팔찌를 쥐었다. 덥석!
-사아아아······!
-파지직! 파짓파짓! 지지직!
성유물이 빛을 쏟아냄과 동시에, 허공에서 보라색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반가움에 입매가 헤벌씸 벌어졌다. 왕자님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파아아앗······!
우리 형이었다!
-파스스······
“······음?”
나는 한창 좋아하다 말고 서서히 낯빛을 굳혔다.
이제까지 형이 나타날 때는 가로로 긴 빛줄기가 생기면서 두루마리 같은 상태창이 쏟아졌는데, 지금의 스파크는 어째 밀가루 반죽처럼 쑥쑥 자라고만 있었다.
말하자면 납작한 이차원이 아니라 입체감이 있는 3D 형태였다.
어쩐지 묘한 예감이 들었다. 이거 갑자기 왜 이래?
무지개 찾기에 성공하면 이런 식으로 뜨는 건가······?
-꿀렁, 꿀렁꿀렁······
“예서 씨.”
-파아앗!
“허억!”
빛 덩어리는 순식간에 덩치를 큼직큼직 불려 나가더니, 난데없이 양옆으로 커다란 날개를 펼쳐 보였다.
펄럭펄럭! 펄럭펄럭!
“이게 무슨······. 뭐야? 뭐야, 이거?”
-끼루루루―!
“예서 씨?”
‘끼루루루’······?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울음소리에 잠시 멍을 때렸다.
울음뿐 아니라 생김새도 너무나 눈에 익었다.
왕자님에게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도 지금 상황을 제대로 모르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밥보처럼 멍하니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펄러덕펄러덕, 펄러덕!
자줏빛이 도는 진홍색의 몸통, 금색과 녹색과 적색이 뒤섞인 꽁지깃.
웬만한 대귀족의 머리장식보다 화려한 청색의 장모.
연보랏빛 크리스털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듯한 두 눈······.
첫눈이 내리던 12월의 클레르 광장에서, 분명코 본 적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때는 뚝심이가 변신한 모습이었지만.
“······불사조?”
-끼루룩!
녀석이 힘차게 대답함과 동시에, 눈앞으로 익숙한 화면이 떠올랐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릇 조각이(가) 비접속 모드입니다.】
【그릇 조각은(는) 현재 다른 세계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분신 시스템을(를) 불러옵니다.】
【불러오는 중······.】
······뭐, 부재중이라는 건가?
나는 손에 잡히는 것마다 왕창 힘을 주며 불사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아무래도 좋다는 양 부리로 자신의 날개털을 정리할 따름이었다.
머릿속 계산기가 온갖 버튼을 미친 듯이 팍팍 눌러댔다.
그러니까, 당장은 형이 다른 세계선을 보고 있어서 직접 답변할 수가 없다?
일분일초가 중요한 이 시점에 감히 딴짓 중이다?
설마 그런 뜻이야?
“심각해 보이는데, 괜찮은 겁니까?”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왕자님. 저희 정보원이 썩 친절하지는 않아서요.”
내가 애써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대답했다.
다행히 우리의 정보원은 달팽이가 아니라 불사조였다.
반응 속도만큼은 빠른 편이었다.
-끼루루―!
【마지막 대화에서 불러오는 중······.】
【87%】
【92%】
【96%】
【99%】
【♡히든 퀘스트 달성 현황♡
빨강: 획득 완료
주황: 획득 완료
노랑: 획득 완료
초록: 획득 완료 (NEW!)(세부 정보)
파랑: 획득 완료
남빛: 획득 완료
보라: 미획득 (더 보기)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우와아악!
“됐습니다, 왕자님! 이 성유물이 초록색 무지개가 맞았습니다!”
나는 잔뜩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가, 지금껏 빨래처럼 쥐어 짜대고 있던 것이 왕자님의 옷자락임을 깨닫고 식겁하며 물러났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그는 오히려 작게 소리 내어 웃었는데, 그 표정이 진심으로 만족스러워 보여서 덩달아 기분이 들떴다.
그 기세를 몰아 잽싸게 ‘세부 정보’ 버튼을 눌렀다. 꾹!
-끼루루룻!
【이름: 성 퐁필리 부군의 비완
분류: 성유물
유형: 착용형, 저주형
이명: 저주받은 시인의 비환
상세: 이 팔찌에는 놀라운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의 신물이 제공할 수 없는 상상 밖의 초능력을 발휘할지 모릅니다. 오래된 울분과 금지된 사랑이 뒤섞여 만들어낸······.】
“······잠깐. 잠깐만요?”
나는 불사조의 설명을 읽다 말고 멈칫했다.
왕자님이 목을 기울이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니······. 이게 좀 싸해서요.
단어들이 왜 이래?
*
잠시 후.
-달칵!
스위트룸의 문이 열리고, 왕자님과 나는 다시 복도로 걸어 나왔다.
잔뜩 흐트러진 침실과 물난리가 난 욕실을 정돈하는 데만 십 분이 넘게 걸렸다.
단정히 서서 기다리고 있던 엘리자베트 경과 데지레 소자작, 데비 공자가 열렬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유감스러운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소자작.”
우리의 왕자님이, 준비한 대사를 읊었다. 그의 음색은 몹시 침착하고도 정갈했다.
“이 성유물은 가품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