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61)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61화(61/920)
#061 즐기시게 놔둬 (2)
그래.
놀랄 필요도, 황당해할 필요도 없다.
나는 황자에게 인사를 하고, 그가 나를 무시하는 동안에도 침착한 낯을 유지했다.
피하려고 해도 같은 공간에 거주하니 마주침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러 가족이 한 집에 살면 필연적으로 온갖 사건이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당장 미디어에 나오는 이야기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한지붕 세가족>, <거침없이 하이킥>, <기생충>······.
“왕자님.”
“네, 후작.”
예식 시작을 준비하던 프랑수아 뒤엠 후작이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황자 전하의 전언이 있으셨습니다.”
전언? 나는 멀찍이 서 있는 세드리크 황자를 흘끔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재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황자와 나는 증인으로 온 신관 하나를 가운데 세운 채 떨어져 있었다.
‘쌍성의 맹약’을 맺기로 한 당사자들을 중앙에 두고, 세 증인이 둥근 호(弧)를 그린 모양이었다.
“이곳에 증인으로 서 달라는 청을 먼저 받은 것은 나야.”
“······.”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0초 전에요.”
“누구 물어보신 분?”
아차,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별 말 아니었던 척 잽싸게 마른세수를 했다. 후작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예?”
“아뇨, 아닙니다. 제 말은 전해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가 연분홍색 눈동자를 부드럽게 휘며 물러났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와 황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황자의 등장에 당황했던 마음이 싹 가라앉았다.
먼저 초대받았는데 뭐 어쩌라고?
그런 유치한 말을 전하라는 놈이나, 전하란다고 진짜 전하는 놈이나.
“그럼, 쌍성의 맹약을 시작하겠습니다. 이것은 두 인간의 결합이 아니라, 두 그릇이 하나의 제구(祭具)를 이루는 과정입니다. 증인들이 계약자들의 신앙을 보증할 것이며, 주신께서 계약자들의 신앙을 시험하실 것입니다. 먼저, 주신의 딸 앙투아네트 뒤엠이 앞으로 나와······.”
후작이 매끄럽게 진행을 시작했다.
성스러운 의식의 서두이니 지어내는 말은 아닐 텐데, 종이 한 장 보지 않고 외우는 게 새삼 대단해 보였다.
나는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후작의 동생, 앙투아네트의 성약을 지켜보았다.
곧 후작의 시종 하나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와, 계약자들 사이에 꽃 한 송이를 내려놓았다.
눈에 확 들어오는 보라색 튤립이었다.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장면이 있었다.
‘곧 튤립 철이라 황실 정원사들이 아주 바쁩니다. 신국에서 오셨으니, 기왕이면 보라색 튤립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그게 아마, 여기 빙의하고 나서 일주일쯤 됐을 때였다.
쥘리에트 궁의 정원사가 몹시 안타깝다는 얼굴로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넘겼었는데, 이제 보니 보라색 튤립에 종교적 의미가 있어 성약에 쓰이는 듯했다.
성약은 페네티안 신국에 없는 리에스테르만의 관습이었다.
정원사가 튤립을 보여주고 싶어 한 것도 이해가 갔다.
“주신의 의지 앞에 맹세하십시오.”
후작이 말했다.
그러자 앙투아네트가 신관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고, 신관은 둘만이 들어가는 작은 성소를 전개했다.
두 계약자는 네 살 때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라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성약을 맺으면서도 눈만 마주치면 시시덕거렸다.
볼꼴 못 볼꼴 다 본 사이에 격을 차리려니 우스운 모양이었다.
“흠, 흠. 뒤엠 후작가의 첫째 공녀, 앙투아네트 파트리크 뒤엠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성약을 청합니다.”
앙투아네트가 아몬드 꼴의 눈 끝을 씰룩거렸다. 부끄럽고 민망한 표정이었다.
성약 때 중간 이름도 밝히는구나.
“당신은 저의 수호성인이 되고, 저는 당신의 영혼과 무한히 같은 길을 걸을 것입니다.”
‘으악!’ 그녀가 입모양으로만 괴로움을 토했다.
경청하던 신관 역시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고통스러워했다.
확실히 절친한테 저런 이야기를 하고,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쪽팔리고 민망할 법했다.
괜히 나까지 웃음이 나왔다.
“······잠들지 못하는 밤, 달리지 못하는 낮에도.”
“크흡.”
맹세를 받은 신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웃지 마, 마리엘!”
“아, 못 참겠어.”
신관, ‘마리엘’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뒤엠 후작도 파안하며 다음 순서를 이어나갔다.
성약은 무척 신성한 예식이라고 들었는데, 두 사람이 진지하질 못하니 분위기가 꽤 가벼웠다.
“앙투아네트 뒤엠. 당신은 맹약의 주인으로서, 수호성인의 안녕을 위하여 지성을 다할 것을 약속합니까?”
“당연한 말씀. 내가 지금까지도 마리엘의 주린 배를 채워 온 것을!”
“앙투아네트?”
“약속합니다.”
앙투아네트가 입술을 잘근 물었다.
뒤엠 후작처럼 극적인 말투를 쓰기에, 성격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수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벌건 낯으로 아무 말이나 하는 게 웃겼다.
성약을 맺는 두 계약자 중 신관 쪽을 수호성인, 줄여서 수성(守聖)이라 부른다고 읽었다.
황족과 그 방계는 맹약의 주인이라 맹주(盟主)라고 불렸다.
아무래도 권력이 황족에게 기울어진 관계이다 보니, 간판도 그쪽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신관의 승낙 없이는 계약 자체가 성립하지 않고, 계약자 간의 거리가 멀어지면 고난을 겪는 것은 맹주뿐이라고 했다.
묘하게 밸런스가 맞았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두 사람은 눈을 감고······.”
어느덧 성약이 막바지였다. 짧게 걸릴 거라더니 정말로 겨우 20분쯤 지난 것 같았다.
축의금 안 내도 되고 피로연도 없고, 깔끔해서 좋았다.
“이로써 두 사람이 종교적 반려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주신께서는 이들을 축복하소서.”
후작이 기쁜 얼굴로 선언했다.
이어 신관 마리엘이 자신의 성소 위에 화악, 에테르를 풀어냈다. 그러자,
-사아아아······
보라색 튤립이 작디작은 빛 알갱이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오늘 본 것 중 가장 놀라운 광경이었다.
신관은 성기사와 달라 에테르로 생명체를 살해할 수 없고, 생명체가 아닌 것에는 신탁조차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방금, 싱싱한 튤립 한 송이가 성소 안에서 사라졌다.
나는 승천하는 황금색 입자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럼 이건······.
“주신께서 너희의 맹약을 인정하셨구나. 축하한다, 내 동생. 마리엘.”
후작의 다정한 목소리가 두 계약자를 감쌌다.
깨달음에 ‘우와’ 하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주신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저 튤립이었다.
‘퇴계공’ 세계관엔 의심의 여지없는 유일신이 있고, 그녀의 권능은 대륙 전역의 에테르를 통해 매일같이 발현된다.
하지만 그렇게 알고만 있는 것과, 보이지 않는 절대자가 튤립을 받아줌으로써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도 다르게 느껴졌다.
뒤늦게 소름이 돋았다. 진짜 새삼스러운 생각인데, 진짜 주신이 존재하는구나.
나는 그런 감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주신교의 상징인 아래쪽 화살표 무늬가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기서 만나는 것은 처음이군.”
그때, 익숙한 미성이 귓가를 스쳤다. 나는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돌렸다.
뒤엠 남매와 마리엘이 서로를 꼭 끌어안고 서 있었고, 증인이 되어준 다른 신관은 벌써 인사를 올린 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상엔 나와 황자만이 동그마니 남았다.
오렌지 맛 환타 같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네, 그렇······.”
아니, 아니잖아.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분명 다 큰 모습으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나는 이곳에서 여러 번 ‘세이디’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걸 아는 인간이 헷갈리게 왜 저런 소릴 하는지는······.
뻔했다. ‘황자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내 말을 시험하는 것이겠지. 징한 놈.
“그렇죠. 신전에서 뵈어도 감회가 새롭진 않군요.”
“······.”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상을 떴다.
황자가 주먹을 쥐는 것 같기도 했지만 착각일 터였다.
신전에서 폭력은 절대 금지였다.
“왕자님, 오늘 성약의 증인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뒤엠 후작가는 영원히 왕자님의 은총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뒤엠 후작이 감격한 낯으로 내게 예를 차렸다.
앙투아네트와 마리엘도 깊이 몸을 숙여 절했다.
두 친구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던데요. 두 분······. 행복한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름대로 열심히 답을 골라 내놓았다.
신자석에서 기다리던 뱅자맹과 가나엘이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신기한 구경을 했고, 세 사람이 기뻐하는 것도 봤으니 주말 오전은 충만하게 보낸 것 같았다.
나는 반대편 신자석에 앉은 황자의 시종들, 특히 다비드를 향해 가볍게 눈인사한 후 신전을 벗어났다.
*
“성기사, 성기사, 성기사······.”
나는 황실 서고에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 책꽂이를 뒤졌다.
슬슬 날이 더워지는 것 같아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고, 소매는 완전히 접어서 걷어 올린 채였다.
대륙의 신물 정보는 <와장창! 이브의 대모험>으로 충분히 얻었으니, 오늘은 성기사에 관한 책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퇴계공의 두 주인공이 성기사로 각성한 마당에, 이 부분을 모른 체하고 살 순 없었다.
“그냥 가나엘한테 부탁하는 게 빠르겠네. 자료가 너무 없네.”
내가 한탄했다.
황실 서고에는 수많은 책과 방대한 양의 정보가 있지만, 그중 내 필요를 만족하는 것은 많지 않은 듯싶었다.
서고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여기가 리에스테르 제국이기 때문이었다.
제국엔 최근까지 단 한 명의 성기사도 태어나지 않았고, 신관은 과장 좀 보태 또 다른 권력 집단이었다.
거기에 페네티안 신국과의 단교가 어언 30년이었다.
성기사의 교육과 성장, 성기사와 신관의 관계 등을 다룬 책은 눈 씻고 봐도 찾기 어려웠다.
가나엘이 어렵사리 구해다 준 <에테르 자소서 – 성기사 6주 완성>도, 신국에서 40년 전에 발간된 책이었으니 말 다했다.
“하······.”
나는 대충 바닥에 구겨져 앉았다.
사서에게 도와달라고 할까 여러 번 고민했지만, 역시 내 관심사를 황제궁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2시간은 뒤진 것 같은데. 어디서 뿅 하고 비급이라도 안 떨어지나.
-툭!
“헉.”
깜짝해서 고개를 들었다. 발밑에 얇은 책 한 권이 떨어져 있었다.
내가 방금 소리 내서 말했던가?
“동화책······.”
가까이 들여다보니, 책은 아주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것을 주워들었다.
<와장창! 이브의 대모험 – 이브 블랑케르와 불사조 성기사단>
부제가 왜 이래? 표절작이야?
‘이블린 대공이, 사랑하는 그의 아이를 위해 쓰다.’
뒤표지의 빼어난 필기체는 여전했다.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대강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아이를 배려해 큼직하게 써넣은 글씨, 꼼꼼하게 색칠한 앙증맞은 삽화들.
신물을 다루었던 책과 똑같은 구성이었다. 다만 이번 작품은,
‘이브, 성기사에겐 신관 짝꿍이 필요해요.’
‘개소리.’
‘아뇨, 정말이에요. 짝꿍이 없으면 에테르가 부족해서 힘들 겁니다.’
성기사에 관한 내용이었다!
표절 의혹을 제기한 것이 조금 미안할 정도로 부제에 충실한 이야기였다.
나는 재빨리 눈을 돌려 동화책이 꽂혀있던 틈을 살폈다. 내가 이쪽을 안 훑어봤던가?
“안녕하세요, 왕자님.”
“악!”
심장이 자이로드롭을 탔다.
나는 식겁해서 뒤로 물러났다가 반대편 책장에 머리를 박았다. 쿵!
“억!”
“아이고, 많이 놀라셨나 보다.”
크리스텔이 몹시 안타까워했다.
당연히 놀라지, 이 사람아! 책장 건너편에 파란 눈이 있는데!
“죄송합니다. 이렇게 경기하실 줄 모르고······.”
“경, 경기 안 했습니다.”
“네, 왕자님 말씀이 맞습니다. 성기사에 관한 책을 찾으시는 것 같아서, 추천 도서를 밀어드린 거예요.”
그녀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애써 숨을 가다듬었다.
역시 TV에 나오는 로맨스 영화는 믿을 게 못 됐다.
도서관에서 이런 식으로 주인공을 만나 두근거리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냥 심정지가 올 뻔했다.
“공녀도, 흠. 황실 서고에 출입하실 수 있는 겁니까?”
“지난 월요일부터요. 폐하께서 좋은 성기사가 되어보라며 허락해주셨습니다.”
크리스텔이 책장을 돌아 다가오며 답했다.
도넛처럼 동그랗게 말아 올린 분홍색 머리칼은 꼭 모자 같았다.
청회색 눈동자가 오늘도 상쾌하게 반짝거렸다.
나는 황실 서고라는 타이틀에 흥분한 나머지, 내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음을 깨달았다.
이곳엔 나뿐만 아니라 황자, 이제는 크리스텔까지 마음껏 드나들 수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식사는 하셨어요?”
“네. 공녀도 식사하셨습니까?”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서로의 위장에 안부를 물었다.
책에 관한 대화는 그 뒤에나 이어졌다.
“성기사에 관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저와 전하의 수업을 한 번도 참관하지 않으셔서요.”
······말에 뼈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