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614)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614화(614/920)
#614
대양을 향해 쏴라 (4)
우리가 그렇게······. 음.
‘그런 방식’으로 이블린으로 넘어오고 나서, 벌써 이틀이 지났다.
-부우, 부우, 부우
-탁, 타닥, 타닥······
밤을 맞은 부엉이가 우리를 구경하며 때때로 울었다.
너른 숲 가운데 피운 모닥불이 성화(聖火)를 머금은 채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친구들은 바닥에 폭신한 덤불을 깔고, 황태자의 불꽃을 중심으로 둥글게 누워서 쿨쿨 잠들었다.
키가 껑충한 북부의 나무들은 털 난 이쑤시개처럼 잎이 북슬북슬하고 풍성했다.
일행의 모습을 감추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천만다행인 점 또 하나는, 이블린이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막아둔 땅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곳에는 영지민이 없었고 당연히 변변한 마을도 없었다.
그러니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여름별궁을 지키는 황실 병력뿐이었다.
지금쯤이면 이블린의 모든 사용인에게 경계령이 떨어졌을 테니, 무조건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그새 추가 병력이 왔을지도 모르고.
-서걱, 서걱서걱······
나는 로브를 덮고 홀로 앉아 수첩에 글자를 끼적이던 참이었다.
괜히 깨어 있는 것은 아니고, 경계도 설 겸 형에게 중요한 정보도 얻어낼 겸 해서 첫 번째로 불침번을 맡겠다고 했다.
요한 경은 내게 불침번 맡기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그가 노골적으로 호불호를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으니, 그건 진심으로 싫다는 뜻이다―내가 고집했다.
“그리고 또······. ‘차원을 베는 힘’······. 이건 진짜 신기하다.”
형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열심히 필기했다.
중간중간 곁자리에 누운 예서 왕자님의 고른 호흡이 들렸다.
요즈음 나는 그를 가장 걱정했기에, 이건 정말로 안심되는 소리였다.
볼펜 소음보다 작게 속살속살 물었다.
“······그럼 신물 이름도 죄다 형이 붙였다는 거지? 그럴 거라 짐작은 했어.”
전부 한자어, 그것도 무협지에나 등장할 법한 이름들이잖아.
실제로 무협에서 쓰이는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원작자님이 지어주신 이름도 몇 개 있긴 했는데, 너무 길고 신물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더라. 며칠 고민하다가 내가 붙였어. 글자 수도 맞추고 첫 자음도 통일하고, 그런 식으로.】
와······. 나는 품속에서 잠든 구구를 내려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사룡의 심장’이라는 이름이 몹시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이 정도면 그냥 대필 작가가 아닌데······. 형이 주신이 아니라는 게 신기해. 그래서 불사조인가 봐.”
【뭐······. 주신이 작가라고 친다면, 주신보다는 ‘주신의 분신’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 불사조라는 별칭은 여전히 어색하다만.】
“또 뭐 없어? 형만 아는 중요한 거나 원작자님 수첩에 적혀 있던 거. 전쟁통에 꼭 알아야 하는 정보면 더 좋아.”
나는 바로 왼편에서 잠든 가인 씨와, 그 옆자리에서 잠든 태자를 바라보며 가만가만 속삭였다.
예전에는 둘이 나란히 자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요즘은 2미터쯤 거리를 두기는 해도 곧잘 눈을 붙였다.
두 사람 모두 숙면할 때가 제일 예뻐서 미소가 걸렸다.
나와 왕자님 사이에는 애물단지들이 똘똘 뭉쳐 잠들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의 보온엔 아주 톡톡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평화였다.
【있어, 기다려 봐. 너 혹시 페네티안의 발렌틴 자작가는 알아?】
“······잠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갑자기 떠올리려니까 기억이 안 난다.”
뭐였지? 그게 언제였더라?
【잘 받아적어. 발렌틴은 스네이더르 공작가와 사이가 별로고, 정치적으로는 카밍하 대공 쪽에 가까운 집안이야. 옛날에 발렌틴의 선조가 제국으로 망명해서 작위를 받았는데, 이름이 에마뉘엘 칼라마르라고······.】
“아! 맞다, 가나엘네!”
접때 그 애가 벳하니 약종상에서 ‘발렌틴 공자’라는 가명을 썼었지!
【그래, 아네. 아무튼 그 집안하고 카밍하가 중요해. 잘 기억해 둬. 특히 카밍하는 페네티안 왕족이면서도 왕실과는 궤를 달리하는 집안이야. 보아하니 너희 세계선에서는 흑마법이나 생체 실험이 아주 대세인 모양이던데······.】
“윽······. 말도 마. 진짜 끔찍해서 토할 뻔했다고. 어떻게 그런 설정을 쓸 수가 있어?”
나는 상태창을 길게 흘기며 타박했다.
성기사를 창조해 보겠다고 산 자를 끌어들여 실험 제물로 쓴다니!
그 과정에서 유괴나 협박도 서슴지 않고, 죽은 자의 시신을 능멸하는 짓도 주저하지 않는다니.
거기다 사람의 생명력을 갈아 마나로 쓴다니.
그걸 위해 살인까지 하고, 가엾은 신물을 붙잡아 괴롭히고, 암시장에 숨어서 참혹한 짓거리를 대대손손 이어간다니······.
【죄송한데 제가 쓴 건 아니고요. 물론 퇴계공에서도 전쟁 후반부에 그런 요소가 등장할 예정이긴 했어. 아무튼, 카밍하와 발렌틴이······.】
스네이더르 공작을 떠올리는 순간, 소금 늪의 시체들과 스타티아 바위 성의 밀실이 연달아 머릿속을 물들였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억누르고자 기를 썼다.
그리고 형이 내가 몰랐던 이야기를 차근차근 한둘씩 꺼낼 때마다, 상태창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꼼꼼하게 세 번 네 번 읽고 받아썼다.
다행히 공부를 시작하자 정신이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우리 세계선으로 돌아가면 또 전쟁을 치러야 하니, 이런 식으로 정현서를 만날 수 있을 때 최대한 정보를 많이 뽑아놔야 했다.
가서는 분명 한 글자 한 글자가 전부 아쉬울 테니까.
-사각사각, 사각사각······
【그나저나 세 자매의 정체가 ‘개연성’이라니······. 생각해 보니까 진짜 그럴듯하네. 어쩐지 내가 억지로 너희를 돌려보내려고 하면 커서가 꿈쩍도 안 하더라.】
【글씨를 아예 입력할 수가 없었어. 퀘스트 하날 급조하니까 그제야 내용이 줄줄 쓰이던데. 인제 보니 ‘그 정도의 개연성 없이는 곤란하다’는 뜻이었군.】
【그건 또 어떻게 추리해냈는데?】
형의 묻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볼펜으로 턱을 짚으며 대답했다.
“그냥. 다 빼고 침착하게 헤아려 보면 그거밖에 없잖아. 신은 아닌데 신적인 힘으로 그녀를 보좌하면서, 한 소설의 여백을 채우는 존재. 이름도 백스페이스, 스페이스, 엔터. 거창한 의미보다는 명백히 글의 ‘만듦새’에 집중하는 느낌이고. 동시에 그리스 신화 모티프도 살리는 설정이고.”
【확실히 신촌 애들이 똑똑하긴 똑똑해. 안암에선 동기 놈들 밤낮 술만 처마셨는데······.】
음, 형 친구들이 대체로 애주가이시긴 하지. 취해서 은서 용돈 챙겨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나는 벌써 잘 나오지 않는 볼펜으로 무의미한 동그라미를 그리며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우리 집 셋째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난 1년 내내 퇴계공을 들여다보며 울고 웃던, 어리고 바보 같은 표정도.
어쩐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정은서는? 좀 어때?”
【어떻고 자시고 할 게 있냐. 침전에서 주무신다.】
“아······.”
【여긴 아직 네가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새벽이야. 원래 시차가 그 정도 나는 것 같던데.】
“어, 어. 그랬어.”
나는 어색하게 중얼거리며 다시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별표를 다섯 개나 친 ‘엣자르트 로세하르더 궁정백’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작금의 사정도 막막하기는 별다른 바 없지만, 본래 세계선의 상황을 생각하면 솔직히 두려운 마음도 있었고 가끔은 부담감이 들었다.
친구들이 큰 의지가 되기는 해도 근심이 아예 없다고 하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들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 또한 여전히 깊었다.
가족들이 보고 싶고, 이따금 만났던 친구들과 집안 어른들이 그리웠다.
이렇게 형과 이야기하고 있으니 마음이 붕 뜨는 기분이라······.
어쩐지 좀 그랬다.
한군데 집중해서 뭔가를 해내야 하는데, 가슴 한구석에 묘한 덩어리가 생기는 느낌.
거기다 이러면 안 된다는 죄책감까지.
【천천히 해, 천천히. 급하게 오다가 넘어진다.】
그 순간, 정현서가 내게 말했다. 나는 제비꽃색 창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네가 지금 하려는 게 하루이틀 사이에 해결될 일이냐? 누가 봐도 아니잖아. 소설로 치면 앞으로 최소 몇백 화는 더 필요하겠는데.】
“······.”
【무사히 오기만 해. 넌 그거면 돼.】
【여긴 형이 있으니까 조급해할 필요 없어. 시차도 크니까 차라리 잘됐지.】
【죽고 못 사는 짝꿍들이 있는데 뭘 혼자 걱정하냐.】
나는 반사적으로 두 남녀를 돌아보았다.
와중에도 가인 씨를 등지고 자는 태자와, 겉옷을 죄다 걷어차고 누운 가인 씨를 보니 헛웃음이 났다.
살살 로브를 끌어와 그녀의 배를 다시 덮어주었다. 형은 계속해서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귀하신 궁주 마마 노릇 많이 해라.】
【‘본궁을 무얼로 보고! 이만한 그릇으로 내 위장이 차겠느냐? 당장 코코 리슬링 두 솥단지를 끓여 바치도록 해라! 아니면 내 당장 황상께 네놈들의 방자함을 고해바칠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전부 솥에 던져 넣을 테다!’】
“그건 좀······. 중국 드라마 적당히 봐.”
나는 형이 순식간에 쭉쭉 뽑아내는 대사에 질색했다.
하지만 그사이에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차원의 벽을 넘어, 정현서가 바로 눈앞에 있는 기분이었다.
형의 각진 안경과 깊은 눈매가 훤히 보이는 듯했다.
“형 처음에는 진짜 쓸모없는 상태창인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괜찮은 면도 있네.”
【충분히 욕으로 들린다.】
“하하하하.”
소리가 커질까 봐 잽싸게 소매로 입가를 가렸다.
그 순간 오른편의 왕자님이 뒤척거렸다. 기어코 잠을 깨웠나 싶어 철렁했다.
이분하고 슈 님은 불침번도 아닌데.
온종일 숨어서 걷느라 피로하셨을 테니 푹 쉬셔야 하는······.
“으음, 예서 씨.”
“헉.”
하얀 눈꺼풀이 첫눈을 맞은 겨울새처럼 파르르 떨리고, 이어서 보랏빛 홍채가 느릿느릿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허겁지겁 수첩을 덮고 볼펜을 끼워 가가방에 찔러 넣었다.
형도 잠시 조용히 있으라는 의미로 상태창을 휙휙 저었다(그러자 불사조가 ‘별꼴이야’ 하듯이 날갯짓했다).
왕자님은 부스스 웃으며 그런 나를 구경했다.
따스한 주홍빛 불티가 그의 뺨에 그림자 모양으로 어룽거리고 있었다.
“공부하고 계셨습니까?”
“네? 네. 아무래도 신물, 아니. 성유물을 갖게 되었으니까요. 마지막 보라색 무지개에 관한 단서가 아직 하나도 없어서······. 그걸 찾아야 뭐라도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나는 빠르게 속닥거렸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현서와 ‘무지개 찾기’에 관한 토론도 했지만, 유의미한 내용은 못 건졌으니까.
형은 아무래도 우리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단서를 줄 수 없는 듯했다.
“정말 성실하신 분이네요. 피곤하실 텐데.”
“아뇨, 아뇨.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입니다. 다른 분들은 전부 몸으로 힘들게 싸워주시니까······.”
“예서 씨는 성지를 열어서 저를 지켜주실 수 있는걸요. 신탁도 내리실 수 있고, 아마 치유력도 쓰실 수 있겠죠. 모두가 예서 씨에게 심신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
“······거기다 궁주이시니 저보다 많은 권력을 지니고 계실 겁니다.”
그가 모닥불의 옛이야기보다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나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왕자님은 예전처럼 어떤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신수들을 쓰다듬는 손길은 곱고 다정하기만 했다.
그의 눈가엔 아직 잠기운이 묻어 있었고, 이어진 속삭임은 꼭 꿈결처럼 들렸다.
“······고맙습니다.”
“······.”
“죽은 저를 잊지 않아 주셔서요.”
쿵.
“······네?”
순간적으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충격적인 말을 들은 탓에, 나는 그 명제를 차마 부정하지도 못했다.
지금껏 형과 나누었던 대화가 깡그리 잊히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예서 페네티안은 내내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그게······.
“왕자님, 그게 무슨······.”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
“당신은 당신의 세계가 이곳과 완전히 닮은꼴이라고 했고, 그렇다면 그곳에도 제가 있을 텐데. 누님과 코르넬리서 이야기를 했을 때 알아들으신 것을 보면 분명 그럴 텐데······. 아무도 그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아서요. 마치 없는 사람처럼.”
“······.”
“그런데도 무슨 수를 써서든 저를 지켜주려 하고, 저에게 좋은 기억을 선물해 주려 하고, 제가 웃을 때마다 유독 기뻐하는 얼굴이······. 어쩐지 애틋해 보여서.”
“······.”
“정답이었나 봅니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무릎으로 떨어뜨렸다. 이토록 쉽게 들켜버렸다.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고 싶은데,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눈빛엔 왕족 특유의 기백이 있었다.
나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었다.
내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난감해하고 있자, 남자는 낮게 목을 울려 웃었다.
역시 나와는 발성부터가 다른 목소리였다.
“괜찮아요, 예서 씨. 정말입니다. 저는······.”
“······.”
“저는 이미 리에스테르를 선택했어요. 아마 그곳의 저도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곧바로 망연한 표정이 되었다. 돌아본 눈길이 마주쳤다.
왕자는 잔잔한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제 삶은 처음부터 위험했으니, 제국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외제니 케시에 대주교의 뒤를 캐거나 이 나라의 대귀족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이······. 제게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
“오히려 조금은 긍정적으로 변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예?”
“고향에 있을 때는, 의미조차 없던 삶이라서.”
“······.”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질린 채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몇 분이나 흐른 후에야, 남자의 시선이 잠든 가인 씨에게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순간 목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뭐라고 말을―
-부스럭!
“헉!”
그때, 멀찍이 떨어진 수풀 틈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나는 즉시 성소를 전개했다. 동시에 세 명의 성기사가 번쩍 눈을 떴다!
“궁주님, 왕자님. 제 뒤로.”
“네.”
재빨리 왕자님을 일으켜 세우고, 비몽사몽 하는 슈 님과 신수들을 챙겨 요한 경의 배후로 숨었다.
그사이 가인 씨와 태자는 무기를 꺼내 들고 수풀 사이로 납작 몸을 낮추었다.
언제 다르랑 잠들어 있었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들이었다.
나는 왕자님의 앞을 가로막은 채 마른침을 꼴딱 삼켰다.
“······.”
“······맙소사.”
멀리, 붉은 옷을 입은 기사들이 보였다.
‘그랑 루주(Grand Rouge)’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