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630)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630화(630/920)
#630
색깔 맞추기 (4)
······이건 또 뭔 소리래?
지금껏 멀쩡했던 목구멍이 갑자기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요한 경은 나의 호흡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서 재빨리 수통을 건네주었다.
고개를 꾸벅한 뒤 꿀꺽꿀꺽 깨끗한 물을 잔뜩 들이켰다.
어째선지 물을 마셨는데도 고구마가 속에 얹힌 것 같았다.
별 이유도 없는데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 이건 예감이 아니라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거 형이 안 썼어?”
내가 입가를 닦으며 소곤거렸다.
요한 경을 따라온 데미는 불안을 읽은 것처럼 내 품을 파고들었다.
보랏빛 창엔 계속해서 또박또박한 글씨가 쓰였다.
【말했잖아, ‘전부’ 내가 쓴 건 아니라고. 일부는 형이 작성했는데 나머지는 아니야.】
【정확히는┃】
【┃】
【 ┃】
【┃ 】
【┃┃┃┃┃┃】
“헉······.”
그리고 상태창이, 오류라도 난 것처럼 여기저기서 커서를 깜빡이기 시작했다.
나는 등줄기에 짜르르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양손을 맞잡았다.
무어 대단한 게 나온 것도 아니건만, 묘한 공포감이 정수리를 꾹 짓눌렀다.
텅! 무릎에서 떨어진 수통은 몇 방울 남은 물을 똑똑 떨어뜨리고서 불온하게 말라붙었다.
요한 경이 나를 돌아보는 차분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동시에 그런 생각도 머리를 반짝 스쳤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또 있나?】’
“궁주님?”
“아, 죄송합니다. 손이 미끄러져서요.”
서둘러 수통을 줍고는 활짝 웃어 보였다.
다만 그의 눈이 마주 웃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내 말을 믿어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사이 상태창에는 다시 내가 읽을 수 있는 문자가 쓰였다.
익숙한 언어를 보니 그제야 호흡이 좀 트이는 듯했다.
【······역시 안 되네. 쯧.】
아, 놀라게 하지 마!
【정예, 이것도 형이 검토하고 확인해본 부분 중 하나야. 어쨌든 너도 알고는 있어.】
“뭐?”
나는 천하의 멍청이처럼 눈을 끔뻑였다.
속 편한 데미와 페리가 이따금 앞발을 휘저어 상태창을 쑥쑥 통과하고 놀았다.
레아는 역시 조금 겁이 나는지 구구들 사이에 코를 박고 있었다.
요한 경은 말없이 계속해서 나를 관찰했다.
여기서 표정 관리를 못 하는 건 아무래도 나뿐인 듯싶었다.
아니, 안 그래도 바깥이 무지개다리 때문에 난린데 이건 또 무슨 과제야?
뭐를 알고 있으라고? 지금 나만 흐름 못 따라가······?
【당연하지만, 내가 전지전능한 존재일 수는 없다는 거.】
······아.
【너한테 정보 하나 제대로 전달 못 하는 꼴을 봐라. 누구 말마따나 지금은 ‘쓸모없는 상태창’이지.】
“아이, 그건 그냥 농담······.”
【틀린 말은 아니야. 너는 내가 대필 작가이고, 그렇다면 주신의 일부이리라 생각하니까. 당연히 형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솔직히 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라 믿었고. 잘만 하면, 널 집까지 데리고 오는 것도 아주 무리는 아니리라 자신했고.】
【그런데 그게 아니야.】
【내가 이 파일에, 네 일행이 만들어나가는 세계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
정현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꼭 이어질 문장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나 역시 글을 이루는 ‘요소’가 된 거다.】
【수천, 수만 가지의 조각 중 하나.】
······정말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숨 쉬는 방법조차 잊은 채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고, 두 발이 붕 뜨는 감각이었다.
잠깐이었지만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멀리 여행을 왔을 때나 이따금 밀어닥치는, 불편한 귀소 본능.
【세 가족이 사는 서울 아파트에 앉아서 이 시간에 혼자 키보드를 붙들고 있는데. 나는 네가 있는 세계를 직접 본 적도 없는데······. 이렇게 됐지.】
“그런 게 가능해?”
생각보다 너무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괜히 헛기침하며 수통을 만지작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할 요한 경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그는 별말이 없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어느 정도는 예견된 바 아니겠냐.】
【나는 네게 수많은 정보를 전해주었지만, 또 어떤 정보는 처음부터 입력조차 할 수 없었어. 그러다 보니 이야기의 전개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지 못했고. 오히려 새로운 무지개를 만들어낸 건 너와 네 친구들이었지.】
【······주신의 분신은 결국 ‘분신’일 뿐, 주신이 아니라는 거야.】
“······.”
나는 마지막 문장을 망연히 바라보며 내가 아는 것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형이 초반에 스스로 자신감을 지녔던 것처럼, 나 또한 형의 등장에 든든함을 느꼈던 게 사실이었다.
물론 형이 우리 남매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는 데서 나오는 일말의 서운함과 기이한 배신감도 없지는 않았지만―그보다는 고맙고 죄스럽고 반가운 마음이 압도적으로 컸다.
무슨 일이 있든 우리는 서로가 제일 소중한 가족이었다.
형이 있으니 우리는 무조건 무사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리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그런데 형은 지금,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럼. 그러면······.”
이제껏 형에게 주도권이 있다고 믿었던 일련의 시간이, 사실은 그조차 거대한 흐름으로 편입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고.
정현서의 영향력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어쩌면 그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첩보조차 누군가의 감시 아래서 철저히 검열되고 있다고.
그들은 하얀 원고지를 수놓는 모든 씨줄과 날줄을 날카롭게 지켜보며, 무엇이 흐름에 방해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까다로이 감독한다고.
나는 온전히 현실로 받아들이는 이곳을, 우리에게는 생생한 삶의 터전인 이곳을 오로지 자의적인 기준으로 교정해 나가며.
‘보제나’.
“······그 세 자매가, 형의 권한까지도 손대는구나. 형을 노골적으로 편집하고 있어.”
글의 여백에 숨어 우리를 지켜보면서.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싸움이었지.】
【한낱 글쟁이가 위대하신 개연성을 어떻게 이기겠냐.】
형의 자조적인 목소리가 고막까지 생생하게 와닿는 듯했다.
나는 애써 웃는 입 모양을 만들었다.
형이 느끼고 있을 무력감이나 두려움을 나 또한 잘 알았다.
어쩌면 나는, 이대로 왕자님을 구하지 못하고 크게 실패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이대로 영영 이곳에 남아서 두 번 다시는 가족들을 만날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의문을 단 한 번도 품어본 적이 없다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나도 사람이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때로는 끝없는 그늘에 잠식당했다.
그런 악몽은 영혼 치료로도 말끔히 낫게 할 수 없었다.
아마 형도 비슷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도 포기는 안 해.”
내가 번쩍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게 조금은 믿음직하게 느껴졌는지, 애물단지들이 나를 동시에 올려보았다.
“형이 말했잖아. 우리 세상은 원작과 완전히 다르다고. 온갖 버려진 설정과 잊힌 설정을 가져다가 뻥뻥 뚫린 구멍을 메우면서 만들어 가는,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세계선이라고.”
【······.】
“누군가에게는 개연성을 지키며 써 내려가야 하는 이야기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아니야. 우리한테는 그냥 하루하루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진짜’야. 이젠 형한테도 그럴 거고.”
나는 턱에 뿌드득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형도 너무 충격받고 힘들어할 필요 없어. 그 세 자매가 무슨 목적으로 ‘개연성’을 챙겨가며 무슨 짓을 하든, 우리 목표는 우리 현실에 맞출 테니까. 그들의 뜻이 아니라.”
무사히 우리 세계로 돌아가서, 전쟁을 끝내고, 왕자님을 구하고, 집으로 돌아갈 거야.
그리고 다시 친구들을 만날 거야.
【······너희 현실 하니까 생각났는데.】
【이 형님이 웹 소설의 법칙 하나 설명해 드릴게.】
나는 그제야 헛숨을 터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형의 장난스러운 눈빛이 손에 잡힐 듯했다. 농담할 기운은 있나 보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옆을 돌아보았다가, 빙그레 웃는 요한 경과 눈이 마주쳤다.
구운 오징어가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그는 배부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한테도 네 이야기는 치열한 실제 상황이지만, 적어도 그 개연성 할머니들한테는 이게 잘 쓰인 소설이어야 하거든.】
【그리고 소설은 보통 기승전결의 짜임새를 갖춘다. 이건 기본이니까 알지?】
끄덕끄덕. 나는 흘낏 바깥 상황을 살피며 고개를 주억였다.
하얀 빛기둥, ‘무지개다리’가 여전히 절벽에서 신성한 기운과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자잘한 땅울림은 이제 적응이 되어 아무렇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쿠구구궁······
【그러니까 저런 게 소환된 거다.】
“어?”
무지개다리 말이야?
【이게 지금 네 상황이니까 푸념이 나오는 거지.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주인공 일행이 열심히 사방을 쏘다니면서 무지개를 모았어. 넌 다음 내용이 너무 궁금한 독자님1이고.】
“응.”
【중간중간 지루해도 꾹 참고 결제하면서 읽었더니, 마침내 딱! 주인공이 마지막 보라색까지 손에 넣었어.】
“응.”
【그런데 그 일곱 개의 무지개가 쪼끄맣게 반짝반짝, 그냥 이러고 끝이야. 주인공들이 겨우 확인할 수 있을 만큼만 빛나고 픽 꺼져버렸어. 그럼 기분이 어떨 것 같냐.】
“아······. 결과가 조금 심심하네. 기대했는데 아쉽다?”
【바로 그거지.】
현서창이 큰 가르침을 주었다는 듯 모서리를 으쓱거렸다.
나는 뒤늦은 깨달음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 얼굴을 본 데미가 수염을 꼼질거리며 함께 방긋거렸다.
【어쭈. 웃냐? 지나간 일들 한번 돌이켜 봐. 꼭 이번만이 아니라더라도 숱하게 있었을 거다. 원래 클라이맥스는 적당히 터뜨려드리는 게 예의야. 그 못된 할머니들도 비슷한 큰 그림을 그렸을걸.】
“알았어, 알았다고.”
어이가 없어서. 나는 킥킥거리며 상태창을 흘기고는 레아를 안아 들었다.
몽실한 엉덩이를 손으로 받쳐주자, 아이는 앞다리를 움직여 곧바로 어깨에 매달렸다.
잠들기까지는 채 몇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너희 저 무지개다리 타고 바로 안 가냐? 이럴 경황 있어?】
“그건 형이 말하는 ‘웹 소설의 법칙’대로 진행했을 때나 나올 전개지.”
나는 곁자리의 요한 경을 일별했다가, 신전 내부에 각기 자리 잡은 이들을 둘러보았다.
프랑수아와 슈 님이 무언가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이 보였다.
엘리자베트 경은 고해소의 왕자님과 함께 느릿느릿 배를 채우는 중이었다.
가인 씨와 크리스텔, 세드리크와 황태자는 보이지 않았다.
앞서 두 아가씨는 같이 나가는 모습을 목격했으니, 아마 따로 나눌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사람 일이 그렇게 딱딱 무 자르듯이 돼?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인사는 나누고 가야 하잖아.”
【아니······.】
“형은 작가님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일단 입 맞춰둬야 할 부분이 한둘이 아니고. 이렇게 형이랑 논의할 시간도 필요했고. 샤를마뉴하고 죽창이가 내려갔으니 잠깐 여유는 벌었을 거야.”
【그런 문제가 아니라】
“우리야 떠나면 그만인데, 여기 일행들한테는 앞으로가 큰 문제니까.”
【많이 힘들 거라니까?】
“물론 그렇겠지. 사고 친 규모가 있는데 아무렴 수습이 쉽진 않겠지. 그러니까 우리가 더더욱 협조를―”
【정예서!】
형이 다급히 내 말을 끊었다.
요한 경은 분명 상태창을 볼 수 없을 텐데도, 묘한 감을 잡았는지 목을 갸웃했다.
【슬슬 애들 모아서 떠날 준비해. 무지개다리 저거, 그냥 올라타면 끝이 아니다.】
······어?
【저게 왜 ‘무지개다리’인 주제에 하얀색인지. 아직 추리 안 해봤냐?】
*
빼꼼.
“······이거 진짜 나 가져도 된다고?”
빙빙 주변을 맴돌던 크리스텔이, 고개를 들이밀며 다시 물었다.
무지개다리 앞에 앉아 집중하고 있던 가인은 피식하고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선물 처음 받는 사람도 아니고. 지금까지 좋은 거 많이 누려봤을 텐데 왜 그렇게 몸 둘 바를 몰라.”
“아니, 안에 든 게 신관님 에테르라며. 나는 성기사도 아닌데 오히려 너한테 더 필요한 거 아냐? 소중한 물건 같은데.”
크리스텔이 가리킨 것은, 자신의 분홍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맨 성석 머리끈이었다.
하늘하늘한 손수건으로 만들어서 긴 모발에 썩 잘 어울렸다.
언젠가 궁주님이 가인에게 선물한 수제품이었다.
성기사는 한참이나 그것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다시 열 손가락 끝에 물방울을 만들어냈다. 역시나 별것 아니라는 투였다.
“······나는 또 받을 수 있는데, 너한테는 언제 어떤 식으로 필요할지 모르니까. 쓸 일 없으면 그게 제일 다행이지만.”
“······.”
“나 돌아가면 너 예전처럼 가끔 외롭다는 생각 할 거잖아. 그러지 말라고. 기념품.”
그 말에 크리스텔이 와락 오만상을 썼다.
남들이 보면 받는 사람 태도가 왜 저러느냐고 수군거릴 낯짝이었지만, 가인은 분명히 알았다.
저것은 자신이 무척이나 감동 받은 순간에만 나오는 얼굴이었다.
그 고마움과 미안함을 말로 표현하기가 정말 민망하고 부끄러울 때, 그럴 때나 짓는 표정.
“······나는 줄 것도 없는데 뭐 하러 이런 보물을 두고 가. 그냥 가져가.”
“아, 됐어. 궁주님도 이미 아셔. 잘했다고 그러셨어.”
가인이 턱을 휘휘 내저으며 자신만의 실험을 계속했다.
그때였다.
-저벅, 저벅, 저벅!
“얼씨구.”
저쪽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두 명의 황태자가 보였다.
어째 몹시 심각한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