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639)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639화(639/920)
#639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1)
“읏.”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물컹거리는 바닥이 몹시 거슬렸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아래를 더듬어 보았다.
우리가 떨어진 자리는 완벽하게 동그란 형태였고, 세상의 모든 빛과 색을 집어삼킨 것처럼 새카맸다.
젤리같이 말랑한 바닥재는 누가 보아도 이 세계의 것이 아니었다.
온몸이 밑으로 푹푹 빠지는 감각 또한 심상치 않았다.
“······중력이 여전히 너무 강한데.”
로메로 폐하의 힘이 사라지지 않은 걸까. 역시 우리가 잘못된 곳으로 떨어져서?
어쩌다 이런 오류가 생긴 거지?
“궁주님, 이게 무슨―”
“네놈들은 누구냐고 물었다.”
“쉿. 쉿.”
어린 음색엔 타고난 권위가 있었다. 나는 황급히 입술 위로 검지를 갖다 댔다.
어스름에 눈이 익는 것은 순식간이었고, 가인 씨는 나의 심각한 표정을 보자마자 입을 합 다물었다.
그녀는 매우 지친 기색이었지만 천만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드넓고 평평한 공간은 온통 캄캄하여 사람이 사는 곳 같지 않았으나, 귀를 기울이면 미약한 숨소리가 흘렀다.
나는 ‘그 아이’가 이쪽으로 접근하기 전에 허겁지겁 우리의 사정부터 살폈다.
추기경이 황태자의 머리를 무릎에 누이고서 벽에 기대어 있었다.
반쯤 감긴 민트색 눈동자로, 힘없는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요한 경.”
“······.”
온몸의 피가 급속 냉동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추기경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나는 남자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았다.
그는 이미 이블린에서부터 방주와의 대치로 다량의 에테르를 소모한 상태였고-물론 그전에도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이후에는 무지개다리를 여느라 또 엄청난 힘을 쏟았다.
주인이 없는 구구를 도운 것도 그였다.
그 뒤에는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한 몸으로 성간을 맨손으로 깨부수었으며, 나를 들쳐 안고 전속력으로 달리기까지 했다.
아무리 추기경이라도 버티기 힘든 상황의 연속이었다.
“걱정 마시고 조금만 더 힘내 주십시오. 우린 꼭 돌아갈 겁니다.”
“운철 조각이에요.”
남자가 칠흑 바닥 한곳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서 그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과연, 우리가 뒹군 자리 한가운데 엄지만 한 쇠붙이가 박혀 있었다.
은은한 빛을 뿜는 모습엔 언뜻 오래된 위엄이 비쳤다.
“보검 뒤랑달의 재료인데······. 주신이 하늘에서 내린 자재라고 하시더군요.”
“아······.”
그렇구나.
막연히 예상한 대로, 아직은 로메로 폐하의 의지가 우리를 인도하고 있었다.
나는 요한 경의 팔뚝을 한 차례 꾹 잡은 뒤 쓰러진 그의 제자를 살폈다.
한두 시간 전까지는 나도 제법 피곤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눈앞이 그저 쨍하니 맑았다.
나라도 정신 줄을 단단히 붙들어야 했다.
“태자님. 태자님?”
【이 녀석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 방금까지는 눈을 뜨고 있었는데······.】
불사조가 그의 곁에 앉아 소곤거렸다. 가인 씨는 작게 혀를 찼다.
나는 사내의 창백한 뺨과 이마에 차례로 손등을 대보았다.
다행히 예전처럼 열이 펄펄 끓지는 않았고, 아이로 변할 듯한 조짐도 없었다.
에테르를 그렇게 쏟아냈는데도 이 정도라니 몇 년 사이 놀라운 성장이었다.
접촉을 느낀 황태자가 파르르 눈꺼풀을 떨었다.
곧이어 나를 담아낸 홍채는 어둠 속에서도 불색으로 일렁거렸다.
“······여기는.”
“아직은 아닙니다. 하지만 금방 우리가 있던 곳으로 갈 거예요.”
빠르게 속살거리고서 형에게 두 사람을 부탁했다.
고개를 까닥인 불사조가 태자의 몸통을 날개로 살살 쓸어주었다.
특유의 자장가처럼 낮은 속삭임도 이어졌다. ‘괜찮아. 전부 괜찮아질 테니까 잠깐 눈 좀 붙여라.’
그리고 어쩌면 그런 말도 들린 것 같았다.
‘······미안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궁주님, 저쪽에서 태자 전하와 같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훨씬 약해요. 진짜 훨씬.”
이어서 가인 씨가 속삭속삭 말했다.
나는 그녀의 손끝이 짚은 곳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아까 어린애 목소리도 그렇고. 설마······.”
“이번에는 과거로 떨어진 것 같습니다.”
“네?”
물색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나는 최대한 소리를 죽여 대답했다.
“여기는 아마······. 로메로 궁의 지하실일 테고요.”
문장은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고, 언젠가 스승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그날 이곳에 갇힌 요한 경을 만나러 왔었다.
그의 소중한 아들 헤릿이, 머지않아 제국으로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그 흔한 액자 한 점, 조그만 창문 한 칸도 없었던 호사스러운 복도의 끝방.
‘-끼이이익······’
‘세드리크가 아주 어릴 때.’
흐르지 않는 밤처럼 새카만 문을 열면······.
‘에테르 흐름이 불안정해 폭주를 일으키면, 구속구를 채워 이곳에 가둬야만 했어.’
실내는 아이의 악몽보다도 검고 외로웠다.
‘빛, 색. 온기와 소음. 그런 것들은 영혼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거든.’
‘지금은요?’
나는 그것이 무례한 질문이라는 사실도 잊고서 물었다.
‘지금도 그래요? 남몰래 여기 오셔야 하는 겁니까?’
‘이곳을 쓰지 않은 지 12년이 됐어.’
“······.”
“아니, 애가 왜 지하실에 혼자 있어요. 무서울 텐데.”
-부스럭!
성기사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는 찰나, 멀지 않은 데서 인기척이 났다.
우리는 한껏 몸을 수그린 채 그쪽으로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절대로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되지만, 혹시나 그럴 경우를 대비해야 하기에 머릿속이 핑글핑글 돌아갔다.
바로 그때였다.
-끼아!
-끼우!
-끼허!
-애욱!
-웨엥!
“윽!”
주신 맙소사! KTX를 타고 가면서 들어도 애물단지들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나는 그야말로 경악실색하며 부랴사랴 몸을 일으켰다.
꼬마들이 뒤늦게 이쪽으로 함께 옮겨진 것이 분명했다.
가인 씨가 즉시 나를 호위하려 했지만, 양손을 내저어 말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도 그럴 것이 낯선 어른이 둘이나 접근해서는 곤란했다.
지금 이곳 어딘가에 있을 소년은 열두 살도 안 된 어린아이였다.
그것도 몹시 아프고, 잔뜩 겁먹은 데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불만으로 가득 찬 아이.
“이건······. 이건 뭐지······? 마수인가?”
신수를 맞닥뜨린 아이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마수는 아니고. 요정?”
나 또한 소리 높여 답하자, 어둠 건너편에서 놀라는 인기척이 났다.
앳된 호흡은 가엾게도 벌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조그만 마법 조명조차 없으니,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안심시킬 수가 없었다.
지금쯤 아이가 느끼고 있을 공포가 얼마나 클지는 감히 헤아리기 힘들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정신을 집중했다.
······아주 조금이라면 괜찮을 거야. 난 버틸 수 있어.
“후우.”
-사아아아······
이윽고 손가락 끝에서, 금빛 에테르 알갱이가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미미한 현기증이 일었지만 이 정도는 견딜 만했다.
캄캄하던 실내가 그윽하게 밝아지며, 바닥에 널브러진 아이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나를 발견한 주황색 눈동자가 쏟아질 듯 커졌다.
“너······. 헉, 너는······.”
“괜찮아. 아저씨는 신관이고, 너를 해치러 온 게 아니야. 안심해도 돼.”
부드러운 투로 말하며 나릿나릿 자세를 낮추었다.
‘끼이이!’ 손을 내밀기가 무섭게 소년의 곁을 뒹굴던 신수들이 호드득 내게로 달려왔다.
로피는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티테의 목덜미를 입으로 물어 질질 끌고 있었다.
다급한 손놀림으로 아기를 받아 안고서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티테와 꼬맹이들은 긁힌 곳 하나 없이 무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런 중얼거림이 반사적으로 흘러나왔다.
“······그것들은 뭐지? 네놈은 황궁 신관이 아니야.”
“응, 아저씨 친구들. 요정. 잠깐 헤어져 있었는데 다시 만난 거야.”
“······.”
그렇게 답변하자, 어린 황자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계속해서 에테르를 뿜어내며 아이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척척하게 젖은 머리카락과 땀이 흐르는 이마, 발갛게 부은 눈가.
파들파들 떨리는 어깨······.
그리고 아주 두툼한 겨울옷.
“그건 선물로 받은 거야? 크고 예쁘네.”
“······.”
“주신 강림 대축일이 얼마 안 남았나 보다.”
고운 열 손가락이 목숨줄처럼 틀어쥐고 있는 것은, 금색과 자색 줄무늬를 입은 큼직한 양말이었다.
안에는 자잘한 장난감이며 주전부리 따위가 그득했는데 나는 그것이 튤립 과자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언젠가 리에스테르 황궁에서도 저런 장식물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제국의 모든 거리가 황금과 보라로 꾸며지는 시기는, 일 년 중 고작 이 주일뿐이었다.
“국서 전하께서 챙겨주셨을 거야. 그렇지? 몰래.”
“흣······.”
놀란 소년이 딸꾹질 비슷한 소리를 냈다. 내 입가엔 쓴웃음이 걸렸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종종 보았던 세이디보다 조금 작은 것 같은데, 여섯 살 생일은 지났을까.
“······괜찮아.”
“나는······.”
“너는 괜찮아질 거야, 세이디. 혼자가 아니니까.”
모르는 아저씨의 진부한 위로일 뿐이건만, 지친 소년의 눈망울은 축축이 젖어 들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하얀 이마를 살포시 짚었다.
그러고는 더욱 많은 양의 에테르를 느릿느릿 흘려보냈다.
고맙게도 아이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불필요한 촉감이나 훈기가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털 로브를 입히고 과자와 장난감을 챙겨서 들여보낸 분의 마음을 알 듯싶었다.
가슴이 미어져 많이 우셨겠지. 당신의 아드님처럼.
“궁주님, 이제 슬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아······.”
“블랙홀 같은 게 다시 작동하려나 봅니다. 진동하고 있어요!”
그즈음, 뒤편에서 가인 씨의 경고가 들렸다.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신수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나는 작은 대장을 내려다보며 부탁했다.
잠시간 눈앞이 아찔하며 흐려졌으나 어떻게든 힘주어 몸을 가누었다.
“······형제들 데리고 먼저 가, 데미. 형도 금방 따라갈게.”
-끼응
신수가 꼬리를 반짝 들고는 콩콩 뛰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착한 꼬마들이 서둘러 뒤를 쫓았다. 황자는 나를 올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어둠에 숨은 자는······. 방금 그자는 누구지?”
“저쪽도 친구 요정님.”
‘맑고 푸르른 요정.’ 조그맣게 덧붙이자, 붉고 뜨거운 소년은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들었다는 양 미간을 찌푸렸다.
그 얼굴이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어서 웃음이 났다. 이제 슬슬······. 인사를 해야겠지.
나는 아이에게서 손을 떼며 이를 악물었다.
-파아아아······!
별안간 휘황한 성소가 모습을 드러내자, 소년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안심시키고자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푹 자고 일어나면, 몸이 아주 가벼울 거야. 아저씨 에테르는 대륙 최고의 에테르라서 당분간은 끄떡없을걸. 믿어도 돼.]“너······.”
[그리고 너는 우릴 기억하지 못할 테고.]“무슨······!”
주저앉아 있던 아이가 울컥하고 반응했다.
나는 오랫동안 가가방을 헤매던 물건을 꺼내어, 마침내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당장은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미안했다.
-싸아아아······!
[고해소에서 보자.]그 대신 활짝 웃어 보였다. 이건 약속이었다.
[새해 복 많이 받아!]“궁주님! 제 손! 저 잡으세요!”
한 팔로 티테를 꼭 안은 채, 나는 즉시 몸을 돌려 암흑 속으로 뛰어들었다.
희고 차가운 손이 나를 덥석 붙들었다.
동시에 시꺼먼 어둠이 바닥에서부터 분수처럼 솟구쳐 우리를 집어삼켰다.
-콰아아아―!
“큭!”
-끼아아!
“악, 또 시작이야!”
이번에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스르륵 쓰러져 잠드는 황자의 모습이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
-둥―실!
“으허어억!”
-웨오옹!
그리고 이번에는 아래서 위로 솟구쳤다!
“아이고, 아야. 내 허리······.”
몇 번을 데굴데굴 구르고 나서야, 치받아 오르던 힘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묘하게 낯익은 풀밭에서 눈을 떴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지만 으등부등 근성으로 버텨냈다.
호수의 물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