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64)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64화(64/920)
#064 북부 대공의 영지 (1)
시원하다.
“왕자님? 이제 좀 괜찮니?”
쾌적하고 기분 좋은 온도였다. 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일어났구나. 프레데리크, 이 아이 눈 좀 봐.”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면서 유난스럽긴.”
낯선 천장이었다. 아니, 이번엔 진짜로.
나는 이상하게 가까워 보이는 천장을 응시하며 눈꺼풀을 끔뻑이다가, 이내 그것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기분이 묘했다.
분명 침대에 누워 있는데 천장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밖에선 말발굽 소리와 마부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헉.”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서느런 재질의 이불과 함께, 내 배 위를 뒹굴던 세 마리의 레서판다가 밤송이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끼이잉
-끼이잇
-끼우우
“아이고, 미안하다. 너희가 있는 줄 몰랐어.”
나는 사과하며 동그랗게 말린 신수들을 다시 곱게 펼쳐주었다.
깨어난 내가 반가웠는지 데미가 폴짝폴짝 뛰어 품을 파고들었다.
녀석의 뜨뜻한 몸과 꼬리를 길게 쓰다듬고 있으니, 컨디션이 좋아졌다는 실감이 났다.
더는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이곳은 이동 중인 마차 안이었다.
“나와 추기경이 있는 줄도 모르는 것 같은데.”
재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얀 침대 옆, 긴 벨벳 소파에 앉은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를 꼰 채 삐딱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프레데리크 황제와, 안도한 얼굴로 미소하고 있는 부티에 추기경이었다.
나는 식겁하며 최대한의 예를 차렸다.
왜 내가 이들과 같은 마차에 타고 있는지, 왜 나만 누워 있고 높으신 분들은 앉아 있는지 등이 머릿속에서 동동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상에 강림하신 태양과 추기경 전하를 뵙습니다.”
“인사는 됐다. 몸은 어떻지?”
“더 멀쩡할 수 없을 정도로 멀쩡합니다······. 황은에 감사드립니다.”
내 대답에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대충 ‘알면 됐다’는 의미인 듯했다.
이어 추기경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냉기 보존 마법을 건 특수 마차란다. 당장 쓸 수 있는 게 한 대밖에 없어서, 왕자님과 우리가 같은 마차를 타게 됐어. 이해해 주렴.”
“아뇨, 저야말로 고귀하신 분들께 폐를 끼쳤습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어컨과 침대가 딸린 프리미엄 황실 마차라는 거군. 나는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제 슬슬 기억이 났다.
그러니까, 피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뒤엠 후작과 함께 황제를 만나러 갔다가······.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청을 드리고자 합니다.’
‘허한다. 말해 봐.’
청을 올리고 싶다는 내 이야기에 황제는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말을 하면서도 이게 이루어질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그녀가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나를 믿어서라기보다는 내가 그녀의 아들, 세드리크 황자를 도운 걸 고려해 크게 베푸는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뱅자맹, 이건 제 금고에 넣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왕자님.’
나는 더위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황제가 즉석에서 내어준 ‘생일 선물’을 내 방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쓸 곳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안심하고 의식을 잃었던 듯싶었다.
“어떻게 마차에 올랐는지는 기억하니?”
“‘르고 종합 무역소’로 간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맞아. 거기서 황실 전용 포털을 타고 이블린으로 넘어왔어.”
포털 멀미약을 붙여 주던 후작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갔다.
“황실 전용이라면······.”
“나와 프레데리크, 세드리크만이 이용할 수 있는 포털이야. 이블린 직행이거든. 시종의 동행도 신분이 보장된 측근까지만 허용한단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컨대 나는 정신을 반쯤 잃은 채 포털을 탔고, 이곳은 이제 황도가 아니라 제국의 북쪽인 이블린이었다.
슬쩍 고개를 빼서 창밖을 살피니, 키 큰 침엽수로 가득한 숲길이 시야를 꽉 채웠다.
융단처럼 펼쳐진 초록 너머에는 거대한 산이 하나 솟아 있었는데, 머리에 하얀 눈 모자를 뒤집어쓴 모양새였다.
쨍하니 파란 하늘에선 털구름 몇이 햇볕을 피해 숨바꼭질 중이었다.
시선을 뒤로 옮기자 따라오는 마차 두엇이 보였다.
아마 저기에, 뱅자맹과 가나엘을 비롯한 시종들이 타고 있을 터였다.
“저 때문에 일찍 출발하신 거군요. 번잡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유감의 말이 흘러나왔다.
‘전용 포털’은 탑승이 허가된 사람이 반드시 자리에 있어야만 작동되는 마법식이었다.
황제와 추기경이 나를 이블린으로 올려 보내기 위해, 일부러 그 시간에 포털을 탔다는 뜻이었다.
내가 볼모임을 고려하면 극진한 처사였다.
“대단한 건 아니야. 어차피 오늘 저녁에 오려고 했는걸.”
추기경이 우아하게 웃으며 내게 차가운 유리병을 내밀었다.
얼음을 띄운 금빛 찻물이 찰랑거렸다. 황제가 뭐라고 꿍얼거렸다.
“산사나무 열매로 끓인 차야. 새콤해서 입맛이 돌 거란다.”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목이 마르던 차였다.
뚜껑을 열고 꿀꺽꿀꺽 차를 마시니, 호기심을 느낀 레서판다들이 내 팔을 붙잡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작게 웃으며 세 녀석의 코끝을 한 번씩 문질러주었다.
이건 또 예상치 못한 동행이었다.
“엘리자베트 경이 왜 이 녀석들을 두고 갔나 했습니다.”
“내가 데리고 가겠다고 했거든. 북부의 신물은 이블린에 있으니, 무테 백작령보다는 훨씬 가까워.”
추기경이 설명했다. 나는 ‘낑’, ‘깡’ 하며 뒹구는 세 신수를 구경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신물이 이블린에 있다는 건 몰랐네요.”
‘퇴계공’에 빙의한 지 두 달이 훌쩍 넘었지만, 나는 여전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압도적으로 많았다.
오직 은서에게 주워들은 단편적인 정보와 책으로만 세계관을 배우고 있는 데다, 그조차도 벼락치기로 익힌 게 대부분이었다.
처음 왔을 때는 포크와 나이프 쓰는 순서부터 외워야 했을 지경이었다.
“‘비렴의 방주’가 제국 북부에 있다고 읽었지만, 그게 이블린이라는 설명은 없었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건 이블린 대공이 쓴 <와장창! 이브의 대모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
‘우리 집 뒷마당에도 신물이 있어요, 이브.’
‘개소리 그만하랬지, 니키.’
‘정말이에요. ‘비렴의 방주’라고 불리는 주신의 날개랍니다.’
음. ‘우리 집 뒷마당’이 영지를 뜻하는 거였나? 그럼 할 말은 없는데.
“이블린은 비교적 최근에 구획된 곳이거든. 혹시 이블린 대공에 관해 알고 있니?”
추기경이 의뭉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블린 대공이 쓴 동화책은 읽어봤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동화책?”
베이지색 눈동자가 똥그랗게 변했다. 그녀는 곧장 옆자리의 황제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체리색 눈매가 슬쩍 찌푸려졌다.
“설마, 이브의 대잔치니 뭐니 하는 그건가?”
“맞습니다. ‘이브의 대모험’ 시리즈인데, 황실 서고에 꽂혀 있었습니다.”
“하하하하.”
그러자 추기경이 소리 내어 웃었다.
황제는 그런 그녀를 한번 흘겨보더니, 다시 내게 눈길을 돌렸다.
동화책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책은 됐어. 이블린 대공이 누군지 모른다고?”
“네. 송구합니다.”
“송구할 것까진 없다. 어차피 그 이름은 영지에서만 썼으니까. 신국의 왕자가 아는 것도 이상하지.”
황제가 그렇게 말하며 크라바트를 완전히 풀어냈다.
나는 두 사람에게서 들은 정보를 입체 퍼즐 맞추듯 요리조리 끼워 보았다.
이블린 대공은 황족이지만, 그의 영지가 생긴 건 오래되지 않았다.
‘이블린 대공’이라는 호칭은 이곳에서만 썼다고 하니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름은 따로 있을 터였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 동화책을 집필했는데, 황제와 추기경은 그것에 관해 아는 게 있는 듯싶었다.
······역시 모르겠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았다.
제국의 황실 방계와 귀족 인구는 넓게 잡으면 백만 단위라고 했다.
예서 왕자의 가계도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황실 가계도까지 파악할 여유는 없었다.
“그럼 이블린 공작이 누구인지도 모르겠군.”
황제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하지만 공작이라면 대공의 자녀이겠군요.”
“그래.”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크리스텔이 눈을 빛낼 때와는 다른 의미로 조금 불길했다.
레서판다 세 마리가 꽃다발처럼 내 품에 안겼다.
“공작은 지금쯤 영지 외곽을 돌며 해적 나부랭이들을 잡고 있을 거다. 며칠 뒤면 만날 수 있겠지. 볼만하겠군.”
뭐, 뭐가 볼만한데요.
“프레데리크, 순진한 애를 놀리지 마.”
“놀린 적 없어. 진짜 놀리는 건 이런 거지.”
황제가 은빛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나른하게 웃었다.
구겨진 크라바트는 추기경의 손에 쥐어준 채였다.
“지금 이 시간부터, 누구도 예서 왕자에게 이블린 대공이나 공작에 관해 알려줄 수 없다. 이는 황명이다.”
*
“크리스텔 공녀! 왼쪽입니다!”
“네!”
크리스텔이 큰소리로 외치며 말을 달렸다.
건너편에서 흩날리는 엘리자베트의 암녹색 머리칼은 꼭 이곳의 일부 같았다.
머리 위로는 나무, 발아래로는 갈색 솔잎만이 가득한 북부의 숲을 두 사람이 바람처럼 가로질렀다.
사냥감 하나가 그들 사이에서 젖 먹던 힘을 다해 질주하고 있었다. 마수였다.
-삐에에에에!
언뜻 보면 평범한 엘크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쇠로 된 뿔은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웠다.
놈이 괴성을 지를 때마다 일반 병사들은 두 귀를 막으며 고통스러워했다.
8급 검사인 엘리자베트와 견습 성기사 크리스텔이 나선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마수는 워낙 빨랐고, 거슬리는 음파를 쏘아 사람의 신경을 긁어댔다.
백작령의 명궁들이나 엘리자베트의 단검, 크리스텔의 물줄기조차 한 번에 놈을 맞히지 못했다.
남은 방법은 몰이뿐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도리아, 언니가 곧 물을 쓸 거야. 놀라지 마.”
크리스텔이 다정하게 속삭이며 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이 적응할 수 있도록, 귓가에 작게 물소리를 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간지러운 찰랑임에 준마 ‘도리아’가 머리를 슬쩍 팔랑거렸다.
크리스텔은 다시 정면을 노려보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북해가 시야에 들어왔다.
코앞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공녀, 저는 뒤로 빠지겠습니다!”
“네, 맡겨 두세요!”
엘리자베트가 서서히 말을 늦추며 마수의 퇴로를 막았다.
‘헛!’ 크리스텔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질렀다.
마수는 소백작이 자신의 왼편에서 사라진 것도 모르고 더욱 속도를 높였다.
위협을 느끼고 잔뜩 흥분한 기색이었다. 주둥이에서 잿빛 침이 뚝뚝 떨어졌다.
-삐에엑, 삐에에에에!
화악! 숲이 끝나며 드넓은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란 마수가 두 앞발을 번쩍 들어올렸다.
뾰족한 발굽으로 잽싸게 방향을 틀려는 순간,
-촤아아아악!
눈사태 같은 파도가 마수를 덮쳤다. 피할 곳은 없었다. 순식간이었다.
-크흥, 삐에에에엑!
-쩌저저저적!
크리스텔이 허공에 채찍을 내리치자, 바닷물이 그 방향을 따라 도미노처럼 얼어붙었다.
마수는 약간의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거대한 얼음 덩어리로 변했다.
이렇게 하면 삽시에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놈의 체액이 지표면으로 스며들거나 주변에 퍼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
불 속성의 기사만큼 확실한 처리법은 아니지만, 크리스텔은 이 마무리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공녀! 이번에도 깔끔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엘리자베트 경도 애쓰셨어요.”
금세 말을 달려 다가온 소백작이 환하게 웃었다.
크리스텔은 가슴이 뻥 뚫리는 해방감을 느끼며 마주 희소했다.
탁 트인 바다, 시원하고 짭짤한 바람, 은은한 솔향기와 좋은 친구.
빙의하고 나서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많지 않았다.
저 멀리, 뒤늦게 말달려 오는 백작령의 기사들이 보였다.
사르네즈 공작가의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그녀를 싸고돌기 바빴고, 그중 절반은 아직도 그녀를 안쓰러운 눈길로 보곤 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은 기억이 거의 없는 ‘함가인’에게 그런 관심은 기꺼우면서도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주변의 모든 이가 마치 짜고 친 것처럼 상냥하고 살가워, 가끔은 무섭고 오싹할 때도 있었다.
꼭 어느 연극 무대에 끼게 된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다가도 부자연스러웠고, 무명의 친절함 속에는 묘한 건조함이 도사렸다.
그런 이질감을 주지 않는 사람은 소수였다.
예컨대 여기 서 있는 엘리자베트 경과, 그녀의 어머니인 무테 변경백.
프레데리크 황제. 부티에 추기경. 자신의 ‘사제(師弟)’인 세드리크 황자.
청아한 에테르를 지닌 예서 왕자······.
그중에서도 황자와 왕자는 아주 특별한 케이스였다. 말하자면,
-콰앙!
굉음이 터졌다. 크리스텔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상황을 파악한 것보다, 소백작이 고함을 지르는 것이 더 빨랐다.
“해적이다! 당장 변경백께 소식을 알려라. 병사들을 모아 해변으로 집결시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