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675)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675화(675/920)
#675
천로 역정(力征) (4)
-지이이잉!
-콰아아아아!
“으아아아아······!”
“······.”
거대한 마법식이 전개되는 소리.
그리고 비행선이 아가리를 벌려 추악한 마나를 내뿜는 소음. 군사들의 비명.
그 모든 것들이 꿈결처럼 멀어졌다가 지옥 같은 현실로 와닿기를 반복했다.
시시때때로 커지고 작아지며, 눈앞은 흑백이 되었다가 다시 빛깔을 띠었다.
유일하게 감각하고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존재뿐이었다.
양다리, 양팔. 불행하게도 뜨여 있는 두 눈과 피 냄새를 들이마시는 코.
참혹한 절규를 담는 귀. 꾸역꾸역 습기를 내뱉는 입.
엘리서 페네티안은 말없이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후광을 두른 듯했던 금발이 흙먼지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은빛 갑주 또한 생채기투성이였다.
황금 창을 쥔 손에서는 샛노란 불씨가 뚝뚝 떨어졌다. ‘치이익······.’
-콰과과과광―!
“······무엇을 불태우신다고요, 고우신 전하?”
“······.”
‘콰지직, 콰드득!’ 그녀가 발을 내딛는 곳마다 바위가 부서져 내렸다.
아드리아나는 왕세녀의 텅 빈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헤실헤실 입만 웃었다.
상처 입은 기사들이 어쩔 줄을 모른 채로 왕세녀의 명령을 기다렸다.
정체불명의 비행선 출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 상황인 데다, 천로 바닥에는 까닭 모를 사망자가 벌써 수천에 달했다.
게다가 조금 전의 땅울림과 충격파로 부상자까지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벌써 다리를 절룩이거나 한쪽 팔을 못 쓰게 된 기사도 여럿이었다.
대부분의 망루가 무너져, 기존 작전 수행에도 차질이 불가피했다.
신국은 혼란에 빠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
엘리서는 허공을 보며 지긋한 숨을 내쉬었다.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전하······. 왕세녀 전하!”
“······.”
귀에 익은 부름에, 창백한 얼굴이 느릿느릿 돌아갔다.
가장 뜨거운 불꽃을 품은 눈동자가 어느 병사를 시야에 담았다.
엘리서는 환영을 보았다.
‘페네티안엔 너희와 같은 인재가 필요해. 부끄럽고 슬픈 일이지만 다른 귀족은 신뢰하지 못하겠구나.’
‘맡겨 주십시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저희만 믿으십시오, 전하!’
······때 묻지 않은 얼굴로 환하게 웃던, 순박한 그녀의 병사들.
너무 어리고 젊었던 사람들.
‘내가 왕위에 오르면 종교세는 폐지할 것이야. 오랜 악습이 아니냐.’
‘세상에······.’
‘그게 참말이십니까?’
‘말이 퍼져 좋을 게 없다. 너희 셋만 알고 있거라.’
‘와아!’
작고 푸른 희망을 품었던 나날들.
‘전쟁이 끝나면 너희에게는 마땅한 명예가 내려질 것이야.’
‘또한 자식의 교육과 가족의 안전을 약속하마. 내 동생들에게 맹세코 그리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성은이 망극합니다.’
밤그림자 속에서 은밀한 꿈을 꾸던 순간들이 흐리게 번져나간다.
‘역시 영리하구나. 고맙다.’
‘에이, 뭘요.’
‘전하께 말버릇이 그게 뭐야, 킴!’
‘둘 다 조용히 해!’
그 아이들 덕분에 조금은, 아주 조금은 웃으며 지낼 수 있었다.
‘킴! 전하 말씀하실 때 끼어들면 안 돼!’
‘너야말로 언성 높이지 마, 쿠만!’
‘그만 되었다. 사이가 좋으니 보기 흐뭇하구나.’
예서가 죽은 뒤로, 그런 날은 오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
저에게 그런 것은 영영 허락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주는 것도 없이 너무나 많은 선물을 받았다.
지도자로서 턱없이 모자라고 부족한 저에게, 매일 향유와도 같은 믿음이 부어졌다.
‘저 볼품없는 존재들을 데리고 어디까지 가실 수 있다 믿으십니까?’
······아직 보답을 하지 못했는데.
수많은 약속 중에서 단 하나도 이루어주지 못했는데.
‘전하, 전하―!’
-키기기기기!
“엘리서 전하!”
-콰아아아앙!
깜빡. 왕세녀는 굉음의 무덤에서 시체와 같이 깨어났다. 이곳은 전쟁터였다.
하늘에는 다시 먹구름이 드리우고, 길을 잃은 바람은 사방으로 우짖으며 달음질치는 땅이었다.
그리고 턱밑에는 급한 숨을 몰아쉬는 기사들이 서 있었다.
“······쿨럭,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카밍하 님께서 앞으로의 전략을 다시 논의하기를―”
“왕세녀.”
익숙하지만, 여느 때처럼 덤덤하지는 못한 노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부하들이 재깍 고개를 숙이며 두어 걸음 물러났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적갈색 눈동자가 오롯이 엘리서를 담고 있었다.
왕세녀는 대공을 발견하자마자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피투성이 입술 사이로 사막을 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알고 계셨습니까.”
빌헬미나 스네이더르의 끔찍한 계획을.
지나치게 잔혹하고 참담하여 차마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신국에 대한 그녀의 ‘봉사’를.
‘승리’에 대한 그자의 야망을.
“······알았더라면 이리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당연한 말이었다. 카밍하 가문은 왕실의 그늘을 목격하고서 달아난 왕족이었다.
누군가는 살아남아야 했고, 그로써 그 비밀을 후대에 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왕세녀의 증조모인 릴리아너 페네티안 국왕이, 아홉 개의 신물을 모아 주신을 살해하고자 했다는 것.
그리고 빌헬미나 스네이더르가 주신의 권능을 현세에 실현하여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한다는 것.
더불어 그자의 ‘생체 실험’과 신앙을 능멸하는 미래까지도.
대공은, 왕세녀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제공했다.
-콰아앙! 콰아앙! 콰아아앙······!
“아아아악······!”
“······.”
필요한 가르침은 모두 주었고 배움에 필요한 시간까지도 벌어 주었다.
다만 오늘의 비극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는 범인(凡人)이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는 악행이었으므로.
-콰아앙! 쿠웅! 쿠우웅! 쿠우우웅······!
“······왜 저입니까?”
초점 없는 시선이 그렇게 물었다.
왕세녀의 뒤편으로 적색과 녹색의 마나가 마구 뒤엉키고 있었다.
여기에 찢어지는 고함과 절규가 어우러져 무참한 지옥도를 그렸다.
이따금 대지가 오열하며 온몸을 바들거렸다. 유딧 카밍하는 깊은 탄식을 삼켰다.
왕세녀의 낯에는 이미 어떠한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째서 직접 왕실을 치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전장의 사치였으나, 언젠가는 반드시 주고받아야 했던 고해였다.
“나 역시 노쇠한 왕족이오. 카밍하가 페네티안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은 그저, 방계로 이어지는 또 다른 신성 왕가를 낳는 꼴이 되었겠지.”
“······.”
“페네티안의 재건은······. 그대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소.”
-콰가가강! 콰가강! 콰강······!
다만 그 과정에 이런 불행이 닥치리라고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탄탄대로까지는 아니어도, 의지와 노력의 왕도를 걷던 왕세녀 앞에 이런 악로(惡路)가 펼쳐질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유딧은 침통한 심정으로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과연 스네이더르 공작의 배포는 광기에 맞닿아 있었으며, 그녀의 한 수는 상대의 열 수를 마비시키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자가 다수의 흑마법사를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았다.
그자의 영향력이 몰락한 암시장까지 닿아 있다는 사실도, 새로울 것이 없었다.
한데 그것을 당당하게 양지로 끌어올릴 것이라고는―
“전하······. 두 분 전하! 이제 그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군사들이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기어이 왕세녀의 정신을 부술 것이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공작은 왕세녀가 자신의 세력을 압도하기 전에 완전히 꺾어버리는 쪽을 택했다.
이런 식으로 왕실의 신성을 무너뜨리는 방법은 아마 스네이더르만이 고안할 수 있을 것이다.
위기에 몰린 기사들이 목이 터지도록 간청했다.
“전하! 스네이더르 공작이 비행선을 엄호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허나 저희는 저것에 관해 들은 바가 없습니다. 저것의 정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보병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왕세녀 전하! 제발 명을 내려주십시오!”
“전하!”
“······나를 따르는 이들에게 알린다.”
마침내 왕세녀가, 메마른 음성으로 말하며 시선을 내렸다.
내내 그들의 대화를 듣던 아드리아나가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즈음 먼 하늘에서 천로를 지키는 비행선은 끔찍한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끊임없는 악취가 흘러나왔다.
“빌헬미나 스네이더르 공작은, 아군 수천 명을 살해하여 흑마법의 제물로 이용하는 대죄를 저질렀다. 그 결과로 저 비행선이 하늘에 나타나게 되었다. 알비나 방백은 ‘병기’라고 일컬었으나, 내 눈에 저것은 살인자의 잔악한 흉기일 뿐이다. 저 무도한 존재는 능히 신국을 파멸로 이끌 것이며 지금도 그리하고 있다.”
“······.”
“따라서 우리는 저것을 격추하고, 왕도의 스네이더르 공작저를 친다.”
“아······.”
“이 시각부터 이 나라의 주적(主敵)은 리에스테르 제국이 아닌 스네이더르 가문이다.”
기사들의 면면이 백지장처럼 희게 질렸다.
유딧은 안대에 가려진 눈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공작의 모든 가솔을 사로잡아 인질로 삼는다. 공작을 따르는 자는 신민에 대한 반역자로 간주하여 무조건 즉결 처분한다. 이는 국가적인 토벌이 될 것이며, 뜻을 함께하는 자가 없다면 나 혼자서라도 행할 것이다.”
“······.”
“공작이 만백성 앞에 스스로 나아와 죄를 인정할 때까지. 또는 이 몸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전, 전하!”
“강요하지 않겠다.”
-쌔애애액! 콰아아아앙······!
그 순간, 황무지 방향에서 맹렬한 후폭풍이 불어왔다.
소드마스터의 검기를 감지한 기사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일부 병사는 납작 엎드려 머리를 감싸고 벌벌 떨었다.
휘몰아치는 전장의 먼지 구덩이 속에서, 푸른 눈동자만이 재앙의 중심처럼 어둡게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페네티안을 화장(火葬)한다. 그것이 나의 소명이다.”
-쿠우우웅!
절벽이 우르르 부서지는 충격파와 함께, 왕세녀가 창을 쥐고서 도약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좇던 군사들이 서둘러 검을 들었다.
아드리아나는 황홀한 표정으로 유딧을 돌아보았다.
*
-지금!
[템페스타스tempéstas.]-쌔애애애앵―!
콰콰콰콰······! 새하얀 주신의 화살이 요한 경의 손을 떠나기 무섭게, 살촉을 감싼 나선형의 폭풍이 온 땅을 처참하게 뒤집었다.
우리는 그의 후방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허리를 낮추어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었다.
제33기병대 뒤쪽으로는 리에스테르 제국군이 둥그런 포위 진형으로 비행선을 감싼 모양새였다.
한편으로 나는 널찍한 성지를 개방해서 성기사들을 준비시켰고―비행선 바로 우측에 붙은 하난 폐하께서는, 맹독을 뿜어내는 꽃대와 넝쿨로 그 빌어먹을 날것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요컨대 비행선 하나 때문에 모든 전술이 꼬이고 뒤틀려, 대군의 전열까지 완전히 바뀐 판이다!
-쌔애애애······!
간다, 날아간다, 맞힌다, 제발!
-콰아아앙!
“명중! 명중이에요, 쌤! 대가리를 정면으로 뚫었어요!”
“우와아아아······!”
가인 씨의 환성과 군사들의 아우성이 하늘을 찌르는 순간,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마법사들이 다음 방어전 대비에 집중하는 사이 검사들은 총공격을 벼르고 있었다.
제일선의 엘리자베트 경과 무테 변경백님, 황제 폐하의 모습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내로라하는 전사들을 보며 나는 긴장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괜찮아. 우리에겐 뒤랑달이 있잖아. 보검 뒤랑달만 있으면 마무리는―
-쌔애애애액!
어?
눈꺼풀이 한 차례 깜빡이는 사이, 태양이 뜨는 방향에서 황금빛 광선이 날아들었다.
-콰콰콰콰쾅―!
그러고는 단숨에 비행선을 꿰뚫었다.
턱이 바닥에 닿을 만큼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