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682)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682화(682/920)
#682
겁쟁이와 카타콤 (5)
-푸르릉
알리손이 투레질했다. 아이의 목에 달린 방울 리본도 딸랑거렸다.
-찰랑찰랑······
그러자 웅덩이의 물이 푸르르하고 흉내 내듯 수면을 떨었다.
친구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비켜 봐. 내가 해볼 테니까.”
시선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내 동그랗게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던 일행이 흩어지고, 물낯에는 지브릴 디오프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가 짧은 지팡이를 휘두르자 무기 끝에서 칼날처럼 번뜩이는 빛이 튀어나왔다. 파지짓!
-찰랑, 찰랑찰랑!
수면이 경련하듯 극심하게 바들거렸다.
다시 모두의 머리가 오르르 한가운데로 모여들었다.
“······주신 맙소사. 물이 마치 고통을 느끼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 움직임을 좀 보십시오!”
“네, 작은 거품도 보이네요. 신기해라. 이게 어찌 된 조화일까요?”
“저는 진짜 모르겠습니다. 제 에테르는 아닌데, 그렇다고 다른 에테르가 느껴지지도 않아요. 뭐 이런 게 다 있대?”
프랑수아, 이자벨, 가인 씨가 차례로 말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아름하르트와 도리아와 샤를마뉴도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마침내 가장 높은 곳에 불쑥 솟아 있던 세드리크의 입술이 움직였다.
“물이 이동하는군.”
-차르랑, 차르랑······
세상에. 진짜였다.
자의식을 가진 것처럼 춤추고 까불던 옹당이는, 이내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스르륵스르륵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 소름 끼친다!
“하······. 한번 따라가 보죠.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지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당연한 수순으로 삑사리가 났고.
“이번엔 궁주 의견에 동의. 이걸 이대로 방치했다가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지, 진짜로 생명이 있는 것 같아서 무섭습니다. 괜찮을까요? 예에?”
쫄면 3호 산트 역시 불안해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디오프의 말대로 물 속성 에테르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도, 이것이 적군의 함정이나 덫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분명한 정체나 의도를 파악해둘 필요는 있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운이 좋다면,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바람일 뿐이지만, 이 녀석의 불가사의한 움직임이 실마리가 되어서······.
-히히힝
“허어엉······.”
“······이제 괜찮습니다. 뚝 하세요.”
아이고, 저 사람 또 우네.
나는 생각을 멈추고 한편에 나동그라진 라소 공작을 일으켜 주었다. 영차.
정작 공갈을 당한 알리손은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세드리크 리에스테르는 절대로 동물을 괴롭힐 녀석이 아니다―아이 아빠라는 사람이 이렇게 눈물이 많으니 딱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요한 경이 다가와 나 대신 그를 부축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출발할까요?”
“네. 해가 지기 전에 뭐라도 수확이 있으면 좋겠네요. 수색이 지연될수록 우리가 적군에 발각될 가능성도 커질 테니까요.”
내가 걱정스레 덧붙이자, 추기경은 나를 보며 ‘바라시는 대로 이루어질 거예요.’하고 격려해 주었다.
언제 들어도 마법처럼 힘이 되는 말이었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웅덩이의 인도로 거대한 바위 앞에 도착했다.
-휘이잇, 휘이잇!
“와아······.”
절로 입이 쩍 벌어질 만한 덩치였다.
일행을 따라온 홍관조 가족도 놀라서 날개를 퍼덕거리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즈음 우리는 수풀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따라서 천로 어귀의 싸움이나 골짝 너머의 전투 소음은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이른 시각인데도 주변이 어두울 만큼 산림이 울창한 지역이었다.
-푸릉
“그러게. 이렇게 큰 돌은 처음 봐.”
아름이와 내가 바위를 올려다보며 속살거렸다.
과장 좀 보태서 황실 마차만 한 부피도 부피였지만, 암석은 수백 년 이상을 그 자리에서 지낸 것처럼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꼭대기 부분에는 물기를 머금은 암녹색 이끼가 머리털처럼 빽빽이 자라나 있었고, 표면은 온통 얼룩덜룩하고 울퉁불퉁하여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모진 풍파를 겪어낸 듯한 인상을 주었다.
가까이에서 자란 전나무와 잣나무들도 바위를 호위하며 우러러보는 모양새였다.
지형 자체가 협곡이니만큼 오는 길에도 여러 바윗돌을 보았지만, 이렇게나 비현실적인 크기는 처음이었다.
무슨 <인디아나 존스>나 <내셔널 트레져> 같은 데 나올 법한······.
어라, 잠깐만. 저게 뭐지?
“설마······.”
-찰박찰박! 찰박찰박!
“아, 대박. 얘가 진짜로 지하 통로를 찾아냈나 봐요! 어머니!”
“어머, 정말 그런가 봐. 이 바위 아래 커다란 틈이 보여. 이건 주신의 뜻일까?”
“이럴 수가······. 신앙의 후견인 에스테르시여.”
그러자 샤를마뉴마저 의외라는 듯이 갈기를 흔들었다.
나는 서둘러 안장에서 내려와 바위 표면을 살펴보았다.
요한 경이 빠르게 내 곁으로 다가와 주었다.
“경, 이것 좀 보십시오. 누가 암석에 글씨를 새겼습니다. 아주 오래된 흔적 같은데······.”
“신어(神語)로 조각했네요. 추기경이었을 겁니다.”
“그럼 뜻을 알아야겠습니다. 분명 지하 공간에 관한 단서가 될 테니까요. 이게 알파벳 엔, 아니 엠인 것 같고······.”
나는 오돌토돌 파인 부분을 손으로 더듬으며 부지런히 필기했다.
그사이 친구들은 말들을 쉬게 하고 주변을 경계했다.
문장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morte tua surripere.’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라틴어는 너무 어렵다. 이건 정현서가 와도 못 읽을 거다.
“‘당신의 죽음을 훔치기 위하여.’ 직역하자면 그런 의미예요.”
“죽음을 훔친다고요?”
“의역하자면······. ‘당신이 죽음을 면할 수 있도록.’ 정도가 되겠네요.”
“······.”
나는 멍한 얼굴로 추기경을 올려다보았다.
입꼬리를 올리는 남자의 낯빛 또한 썩 밝지 않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추리대로라면 천로의 지하 통로는 릴리아너 페네티안 선왕의 사적인 건축물이고, 그녀의 야욕을 위해 쓰인 공간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와 관련된 구절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느닷없이 죽음이라니.
이건 혹시 시체처럼 보였다던 그 시대의 군사들과 연관이 있는 건가?
-찰랑찰랑찰랑! 찰랑찰랑찰랑찰랑!
깜짝이야!
“어어, 그래. 잘했어. 고마워.”
손을 흔들며 칭찬해 주자, 옹당이는 스스로의 능력치를 뽐내며 상하좌우로 마구 씰룩거렸다(이건 진짜 실제로 봐야 안다).
자연스레 조금 전의 상황이 떠올라 헛웃음이 났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요 정체불명의 물은 가벼운 몸(?)을 이끌고 침엽수림 여기저기를 실뱀처럼 누비더니, 별안간 아주 깊은 곳까지 파헤치고 들었더랬다.
그게 아마 녀석을 뒤따르기 시작한 지 삼십 분쯤 되었을 때였다.
의심 많은 세드리크와 디오프가―당연히 그래야 하는 위치이기도 하다―물을 그냥 수증기로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가인 씨는 은근슬쩍 여기에 힘을 보태려던 찰나였다.
그걸 말린 게 다름 아닌 나였다.
‘잠시만요, 여러분.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친구들의 불안과 적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어쩐지 이 웅덩이가 우리를 돕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누가 조롱해도 할 말은 없지만 그때는 참말 그랬다.
그래서 눈, 코, 입은커녕 행동 원리조차 헤아릴 수 없는 존재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진짜로 이 웅덩이가 지하 통로 입구를 찾아내다니······.
“하하하.”
이게 대관절 어찌 돼먹은 흐름인지 모르겠다.
나는 아이처럼 촐랑대는 물 덩이를 내려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두 명의 전투 마법사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어쨌거나 고생 끝에 소득이 있다는 점엔 만족하는 눈치였다.
“이자벨, 하난 폐하의 힘으로 이 바위를 살짝 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입구가 어느 정도 보일 만큼만요.”
“맡겨주시니 영광입니다, 궁주님.”
“고맙습니다.”
이자벨이 아름답게 웃음 지어 보이자마자, 콰가강······! 문제의 바위 옆에서 불길하고 음침한 기운을 뿜는 넝쿨들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홍관조 곁에 모인 다른 새들까지 삐삐 울며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위는 갑작스러운 이사 소식에 조금 저항하는 듯했지만, 이내 깊은 울림을 내며 궁둥이를 비켜주었다. 쿠웅!
-쿠구구궁······
“어어, 진짜다. 어어어! 궁주님!”
‘저기 지하 통로가 보여요. 계단까지 있어요!’ 가인 씨가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며 좋아했다.
이자벨도 마침내 얻어낸 수확에 얼굴을 활짝 폈다.
지하로 통하는 입구는 썩 널찍했다.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높았으며, 너비도 무척 넉넉해 보였다. 다만······.
-휘이이이······
“어우······.”
“오오······.”
“으아······.”
“허어······.”
층계 너머는 지옥처럼 새까맣다는 점이, 쪼끔 무섭긴 했다. 진짜 쪼금.
-제아무리 음산하여도 이 몸의 무덤만 할까.
흠칫! 쫄면 세 그릇과 곱빼기 한 그릇(외국인)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나긋한 이자벨이었던 성기사가, 우리를 둘러보며 청동색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내고 있었다.
씩 올라가는 입술 끝은 지독히도 스산하여 주변 온도가 내려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폐하······.”
-앞장서마. 따라오거라.
*
주신의 핏줄과 그가 사랑하는 것들이, 긴 방랑 끝에 지하 통로 너머로 사라진 후.
천로의 숲은 한동안 고요했다.
그곳은 다시금 인간을 모르고서 태고의 평화를 누리는 자연처럼 보였다.
고작 몇 년의 전쟁으로는 누구도 이 침엽수림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할 듯싶었다.
아침 먹이 사냥을 끝낸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고주알미주알 자랑을 늘어놓았고, 축축한 그늘에 숨은 이슬은 청설모나 다람쥐의 음료가 되어 주었다.
그들의 사회는 거짓말처럼 일상을 되찾았다.
-휘이잇, 휘이잇, 쪼쪼쪼쪼······
아니, 잠시간 그런 것처럼 보였다.
어느 홍관조가 나무 꼭대기에서 ‘친구’를 부르기 전까지는.
-휘이이잇, 쪼쪼쪼쪼, 휘이잇, 쪼쪼쪼······!
교황청의 신관처럼 차려입은 새가 목청 높여 울기 시작하자, 다른 모든 생명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숨을 죽였다.
바람에 옷자락을 흔들던 수풀도 일제히 가지를 멈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홍관조가 날아와 파드닥 옆자리에 앉았다.
이 녀석은 어느 모로 보나 조금 특이하게 생긴 홍관조였다.
-사아아아······
변신이 스스로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부름을 받고 온 새는 금방 모습을 바꾸었다.
작은 몸통에서 연보랏빛 광채가 쏟아지며 신성한 변모 과정을 뽐냈다.
평범한 홍관조들은 조류를 관장하는 존재 앞에 양 날개를 활짝 펼쳐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드디어······.
-삐―뽀!
우렁차게 터져 나온 꼬마 새의 울음에, 수풀 전체가 술렁거렸다.
이어 저쪽 덤불 사이에서 여러 동물의 꼬리가 볼쏙볼쏙 솟아났다.
몹시 탐스러운 광경이었다.
*
······응? 뒤에 뭐가 있나?
“궁주님, 청컨대 자꾸 돌아보지 말아 주십시오······. 이러다가는 제가 일등으로 기절하는 수모를 겪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서로 이러지 않기로 했죠, 참.”
나는 즉시 쫄면 연합의 간부에게 사과했다.
그 또한 연분홍빛 눈동자를 정중하게 깜빡여 보였다.
뒤에서 디오프가 우리를 (거듭) 비웃었지만 못 들은 척 넘어갔다.
-뚜벅, 뚜벅, 뚜벅······
-또각, 또각, 또각······
마음 같아서는 빨리빨리 이동하고 싶은데, 지하로 들어온 뒤부터는 영 속도가 붙지 않았다.
일단 통로가 문자 그대로 칠흑처럼 어두운 것이 한몫했다.
바닥의 석재는 올톡볼톡하고, 이따금 포장 없는 길이 불쑥 나타나 혼란스럽기도 했다.
오 분에 한 번씩 갈림길이 나타나는 점 또한 골치 아픈 문제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것은······.
“아, 속 안 좋아. 진짜 토할 것 같아요.”
“괜찮아, 우리 딸. 엄마가 있으니까 괜찮아······.”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부패한 마나의 악취가 코를 찌를 듯이 강력해진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극심한 멀미를 겪고 있었다.
겁쟁이와 카타콤 (6)
정확히는, 각자의 능력치에 따라 증세가 천차만별이었다.
“으음······.”
마나 감응력이 0에 수렴하는 나로서는 부패한 마나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요컨대 흑마법 면역이 99% 이상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사방에서 곰팡내와 음식물 쓰레기 냄새 같은 게 나기는 했지만, 가인 씨는 이것이 단순한 ‘악취’의 개념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화르륵······
“······.”
세드리크가 붙여준 횃불 아래서, 나는 친구들의 면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지나치게 넓고 캄캄한 통로에서 여러 불그림자가 아른거렸다.
평생을 일반인으로 살아온 산트는 가벼운 울렁거림과 어지럼증을 호소했고, 하난 폐하의 화신이 된 지 오래지 않은 이자벨도 상태는 비슷해 보였다.
다만 그녀는 조금 전부터 두통이 더해졌다고 했다.
가인 씨와 요한 경으로 가면 상황은 좀 더 심각해졌다.
마나 감응력이 좋은 두 사람은, 시루떡처럼 허옇게 질린 얼굴로 약간의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포로인 레오폴트 라소 공작은 특히나 멀미가 심해서 물조차 넘기지 못했다. 내가 줄곧 성지를 전개한 채로 걷고 있는데도 그랬다.
그리고 마나 감응력이 지나치게 뛰어난 우리의 마법사들로 말할 것 같으면······.
“제기랄······.”
“어어! 공자, 조심해요!”
기어코 발을 헛디뎌 비틀거리는 남자를, 내가 허겁지겁 멱살잡이로 끌어올렸다.
붉은 눈이 흐리게 뜨이더니 짜증스레 나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면전에 독설을 쏟아낼 것처럼 날 선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사람이 아프면 예민해지지. 아니, 원래도 그런 성격이긴 하지만······.
“아, 이대로 침대까지 가고 싶은데······.”
-푸르릉
“전쟁이 끝나야 집에 가죠. 그러자면 정신 바짝 차리셔야 하고요.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나는 취한 사람처럼 볼멘소리하는 공자를 겨우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뒤쪽에서 아름이가 ‘입 닫고 걸어.’ 하듯이 그의 허리를 신경질적으로 밀어댔다.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지,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쓸어넘기는 모습이 퍽 불안정해 보였다.
대단하신 8급 전투 마법사 지브릴 디오프마저 이 지경이라니······.
아무래도 이쯤에서 우리의 노선을 바꾸어야 할 것 같았다.
프랑수아는 이미 나에게 반쯤 업혀서 가는 중이었다.
다만 그는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는데(가벼운 농담도 가능했다), 이건 역시 그동안 단련된 정신력 덕분인 듯했다.
‘대귀족 뒤엠 후작’으로서의 그는 우리보다 한참 어른이니까.
······아무튼, 이대로 강행군은 무리야.
“잠깐 쉬었다 갈까요? 십 분이라도 눈을 붙이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모두에게 직접 에테르를 드리겠습니다. 아이들도 약초를 좀 씹어야 할 것 같고요.”
“저, 제가 돕겠습니다!”
보다 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자, 산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양손을 번쩍 들었다.
‘돕겠습니다, 돕겠습니다, 습니다!’ 사제의 비끗거리는 목소리가 높다란 아치형 천장을 몇 번이나 울렸다.
그러자 앞서가던 세드리크는 귀신처럼 창백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더니······.
“······쥘리에트의 고견에 따르지.”
입관 직전에 스틱스강 수변공원에서 살아 돌아온 듯한 저음으로, 그렇게 선언했다.
그새 살이 내린 듯한 얼굴에 저절로 턱이 쩍 벌어졌다.
“세상에.”
세이디, 너 그러다 진짜 기절하겠다!
*
그리하여 사실상 모두가 복도에 널브러졌다.
“아으, 이제 좀 살 것 같습니다. 진짜 궁주님 에테르가 저의 아아고 제로 콜라예요······. 아깐 진심 부침개 부치는 줄 알았다니까······.”
“하하하.”
“웃어?”
가인 씨가 힘없는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나는 속절없이 무너지며 다음 환자분을 맞았다.
요한 경이 희미하게 미소하고는 나에게 먼저 팔을 내밀었다.
이런 일은 과거에 몹시 드물었지만, 요즘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기쁘게 손목을 받아들고서 에테르 보급을 시작했다.
-사아아아······
“하······.”
낮은 한숨과 함께, 민트색 눈동자가 스르륵 눈꺼풀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안정을 취하는 것을 보며 또 한시름을 덜었다.
아직 제대로 된 실마리의 시옷 자도 못 찾았고, 통로의 반대편으로 빠져나가려면 최소한 하루는 더 걸릴 테지만―그렇다고 우리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기에는 차선책이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지하 통로의 입구가 있다고 해도 그걸 찾으려면 또 한참을 헤매야 할 테니 말이다.
오히려 그러다가 스네이더르 세력에게 발각되거나 큰 전투에 휩쓸릴 가능성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야 괜찮겠지만, 지금은 비전투 인력 세 명에 포로까지 딸려 있으니 그건 너무 큰 도박이었다.
요컨대 여기서 해결해야 했다.
뭐가 됐든 여기, 이 지하에서.
우리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싸르르르······
요한 경 다음은 세드리크였다.
그는 의젓하게도 자신의 짝꿍과 스승에게 차례를 양보한 참이었다.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잠깐만, 너 열 있나 보자.”
“······.”
벽에 기대어 앉은 황태자가 얌전히 이마를 내주었고, 나는 그의 체온이 정상인 것을 확인한 후에야 한숨을 돌렸다.
부상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가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성기사 친구들은 내가 접촉을 통해 에테르를 공급해준 것만으로 많이 좋아졌다.
그래도 여전히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불쾌감과 역겨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가인 씨는 그에 더하여 ‘횡단보도 흡연자들의 담배 연기를 온종일 쐬고 있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비유에 와락 인상을 쓰고 말았다.
얼마나 힘들까.
“자, 깨끗한 물도 한 모금 드시고요.”
“싫어.”
“왜 싫어. 형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깁니다. 이제 어느 정도 속이 가라앉았으니 괜찮을 거예요. 받으세요.”
“······.”
태생이 불 속성인지라 몸이 안 좋을 땐 물이 당기지 않는 모양인데, 그래도 건강을 생각해서 수분을 섭취하게 했다.
그는 뭐라고 더 반박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순순히 수통을 받아 마셨다(가인 씨가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낄낄거렸다).
‘빵 사이에 육포랑 치즈도 끼워서 드세요.’ 나는 그렇게 덧붙이고서, 사내가 눈을 흘기는 것을 확인한 뒤 곧바로 옆자리로 이동했다.
“······처, 천사 공.”
그리고 바라건대, 오늘의 마지막 환자.
“괜찮습니다. 포로라고 아픈 걸 방치하지는 않으니 팔목 이리 주세요.”
“······.”
그러자 라소 공작이 앞으로 꽁꽁 묶인 양손을 머뭇머뭇 내밀었다.
이쪽은 아까부터 메스꺼움이 심해 보였다.
나는 친구들과 시선을 교환한 뒤, 확실한 허락을 받고서 그의 손을 풀어주었다.
걸핏하면 혼자 넘어질 만큼 운동 신경이 없는 데다, 에테르 구속구를 차서 무장까지 해제된 상태이니 다들 봐주는 것 같았다.
그가 놀라든 말든 손목 안쪽을 가볍게 쥐고서, 나는 스승님께 배운 대로 맥을 짚었다.
쿵덕쿵덕 뛰는 핏줄에 에테르를 직방으로 부어주는 느낌.
그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고 하셨으니까.
-싸아아아······
“와아······!”
“신관 에테르 처음 받아봅니까? 공작씩이나 되는 분이 왜 그렇게 놀라세요.”
온몸에 퍼지는 기운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별안간 입을 헤 벌리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러자 공작은 쑥스럽다는 듯이 다른 손바닥으로 뺨을 문질렀다.
“처, 처음은 아니지만. 자주 있는 일도 아니다 보니······. 공은 예닐곱 번째 정도인 것 같소. 아, 물론 보라색 눈동자가 제일 신비하다오! 봄날의 은하수처럼 아름답소.”
“······방금 뭐라고 하셨죠?”
“아름답다고······.”
“아뇨, 그 앞에 하신 말씀요.”
내가 잘못 들었나? 그런 거겠지? 나는 망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커다란 눈동자를 깜빡이며 어깨를 웅크렸다.
“아니, 어쩌면 다섯 번째일지도······. 앗, 나, 나에게도 에테르를 주어서 고맙소. 그러고 보니 감사 인사를 잊어서······.”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혹, 지금까지의 에테르 보급 경험이 다섯 번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옆자리의 이자벨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녀는 하난 폐하의 회복력과 산트의 도움으로 벌써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그리고 역시나, 랑부예답게 상황 파악이 빠르고 핵심을 짚을 줄 아는 분이셨다.
공작은 우리를 번갈아 보며 입술을 달싹달싹하더니, 이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렇소.”
“아니······. 어떻게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기가 막혔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나이도 어리지 않은 사람이고 심지어 왕족 성기사인데, 태어나서 순수 에테르 보급을 다섯 번밖에 안 받아봤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에테르 각성 때는 각성열에 시달렸을 테고, 성흔을 얻었을 때는 폭주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 반드시 그런 심각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몸이 좋지 않은 날이나, 마음이 힘든 순간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신관의 순수 에테르였다.
꼭 치유력을 쓸 필요도 없고―
“어머니가······.”
“······.”
“나는, 어머니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소.”
“······.”
우리는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서 공작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부연 설명은 없었다.
남자는 그저 빛이 닿지 않는 그늘에 슬쩍 얼굴을 감출 따름이었다.
그러니 나 또한 뭐라고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냥 팔목을 좀 더 세게 눌러주는 것밖에는······.
“어?”
······잠깐만.
“여기, 이건 왜 이럽니까? 화상흔인가요?”
어째 느낌이 싸했다.
나는 그의 팔뚝 깊은 곳, 정확히는 팔꿈치 안쪽까지 점점이 박힌 하얀 흉터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건 절대로 전쟁터에서 부상한 흔적이 아니었다.
그리고 군대 후임들이 아토피와 대상포진을 앓아서 아는데, 피부병은 더더욱 아니다.
제법 오래된 자국이고.
“아, 이런. 별것 아니오.”
잔뜩 당황한 공작이 서둘러 팔을 빼냈다.
잘 받고 있던 에테르조차 거부하는 몸짓이었다. 놀란 내가 몸을 떨어뜨리는 찰나―
“별거 아니긴.”
덥석! 어느새 다가온 가인 씨가, 포로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남자는 대경실색하며 반대쪽 팔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는 시늉을 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담뱃재로 지진 거잖아. 딱 봐도 티 나는데.”
“헉······.”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언뜻 무심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라소는 느릿느릿 팔을 내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나의 머릿속마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자벨은 여느 때처럼 부드럽고 우아한 투로 말했다.
“크리스텔, 원할 때 이야기하실 수 있게 하자.”
“누가 이랬어. 너희 아빠?”
“······아버지는 일찍이 돌아가셨소.”
“그럼 너희 엄마가 이랬겠네.”
그의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가인 씨의 표정을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불꽃을 등진 그녀의 얼굴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감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바보같이 당하고만 살았냐?”
“크리스텔.”
이자벨이 엄하게 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어린 성기사가 흠칫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하얀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고, 상처 가득한 팔뚝이 무력하게 풀려났다.
“크리스텔.”
내가 한 번 더 불렀지만, 가인 씨는 이미 스스로의 언행에 크게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마침내 청회색 눈동자에 성화의 빛이 깃들었다.
그런데 이자벨을 똑바로 담은 홍채는, 어째서인지 폭풍을 만난 바다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두려움. 그리고 또다시 두려움.
“······잠깐 산책 좀 하고 올게요. 중간에 뭐라도 있으면 건져오고.”
“잠깐만요, 크리스텔!”
그녀는 순식간에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내 목소리가 몇 번이고 돌벽을 울렸지만, 돌아오는 기척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