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735)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735화(735/920)
월광의 멤피스 (3)
“······.”
“······.”
“······.”
반지하 주방에는 한동안 끔찍한 침묵이 맴돌았다.
티테는 겁에 질린 것처럼 나의 가슴팍에 코를 박은 채 가만가만 숨 쉬고 있었고, 데미와 레아는 프랑수아의 품을 파고들었다.
나는 천년의 세월을 견딘 교황의 문서를 내려다보며 차분해지려 애를 썼다.
적막을 깨뜨린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집주인이었다.
“그럼······. 그렇다면 혹시, 페네티안의 신물들이 한자리에 붙박여 있지 않았던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소? 소환진, 소환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자?”
“······.”
레오폴트 라소가 파리한 낯으로 물었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우리는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구구들마저 식탁 밑으로 숨어버리자 지브릴 디오프가 한숨을 터뜨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가인 씨는 어느 오크 통에서 따라온 술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크아아.’ 뺨까지 줄줄 흐르는 액체를 소매로 문질러 닦은 그녀가 잔을 내려놓았다.
-딱!
“그러니까 요약해 보면. 빌헬미나 스네이더르는 릴리아너 페네티안보다 더한 인간 말종이다, 이거네요. 맞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선왕은 자기 사생아를 조종해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신이 되는 것에 진심이었고, 수만 수십만의 목숨을 전쟁터와 거리로 내모는 것도 개의치 않았던 쓰레기였고. 그러던 인간이 막판에는 결국 포기를 했다. 왜냐?”
“본인이 잃을 게 너무 많아서였겠죠.”
내내 조용하던 요한 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이자벨을 돌아보며 어떠한 감정도 비치지 않는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자는 일국의 왕이었어요. 나라가 존재하지 않으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다는, 분명한 심리적 저항선이 있었을 겁니다. 로메로 선황의 잠들지 않는 광기도 미처 예상치 못한 변수였을 테고요.”
“왕족으로서의 위기감이 야욕을 이긴 경우예요. 하지만 스네이더르는 잃을 게 없습니다.”
내가 한 글자 한 글자 덧붙였다. 동시에 친구들의 시선이 내게 꽂혀 들었다.
“이 나라는 아직 스네이더르의 것이 아니에요. 페네티안 왕족은 그들의 정치적 행보가 어땠든 간에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왕좌를 지켜왔습니다. 스네이더르의 시선으로 보면 이건 어느 쪽이든 그자에게 유리한 판입니다. 이번 전쟁에서 페네티안이 다시 한번 나라를 지킬 수 있다면, 그녀로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면서 차근차근 계획을 진행할 수 있으니 좋겠죠. 빌어먹을 생체 실험도 어디선가 몰래 이어갈지 모르고요. 그리고 만약 페네티안이 패전하거나 멸망한다면······.”
“그 또한 기회로 삼겠군.”
황태자가 커다란 손으로 문서를 짚고서 말했다.
나는 그와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차피 본인의 나라가 아니니까요. 정세가 나빠질수록 사이비는 판을 치기 마련이고, 그 역시 스네이더르에게 유리합니다.”
“기가 차는군. 도대체 그딴 사고방식은 어디서 배워 오는 거야?”
“넌 애매하게 엘리트 교육받은 난봉꾼이라 상상도 못 함.”
짜증스러워하는 디오프를 두고 우리의 주인공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하난 폐하께서는 힘없는 몸을 후추통에 기대어 가누셨다.
-하아······. 짐이 그날 천 번을 고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유리의 목을 베었어야 했다.
“우리에겐 신물이 있습니다. 적어도 화성의 혜검과 창해의 축복, 그 두 보물이 아군의 전력이라는 건 신국군도 압니다. 크리스텔 경이 빙잠의 보관을 사용하는 모습도 노출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신물이 왕도로 몰려드는 것 자체가, 주신을 노리는 스네이더르에겐 호재인 셈입니다.”
“저어, 궁주님. 하지만 교황의 문서에 쓰인 바로는······. 주신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속성의 신물이 모두 필요한 것 아닙니까?”
산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침착히 그의 말에 동의했다.
“맞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역풍의 예기와 이란의 영령은······.”
거기까지 이야기하는데 문득, 우리가 헤쳐온 난관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행운을 빌어, 꼬마 달. 네 왕관도 잊지 마!’
‘고맙습니다. 영령님도 어서 건강해지시길 바랄게요.’
‘-으응. 어여쁘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예리호 암시장에 갇혀서, 흑마법사들에게 오래도록 고문받고 힘을 약탈당해왔던 영령님.
사이 좋은 키나와 빌럼 남매. 깊은 상처와 에테르를 품고 있었던 모르한 씨.
북부 해안에서 만났던 바다용 무관학교의 인연들. 활을 잘 쏘는 테스 선생님.
겉모습은 무섭지만, 알고 보면 섬세한 교장 선생님인 셈 공자.
불도마뱀으로 뿔뿔이 흩어져 바다를 지키고 있었던 사룡(蛇龍).
“······.”
“······궁주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천사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디 바라시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알레인 씨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츠마의 밀실에서 진행된, 성기사 창조 실험의 참가자였던 알레인까지.
그녀는 끝끝내 그곳에서 살아남아 공기 속성의 기사로 각성했다.
각성열(覺醒熱)에 시달리는 그녀를 우리가 직접 돌봐주었던 기억이 났다.
“······스네이더르는 이미 두 개의 신물을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프랑수아는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었다.
“······그렇군요. 이란의 영령과 사룡의 심장은 이미 공작의 손아귀에 있었고, 어쩌면 엘리서 페네티안 왕세녀가 역풍의 예기를 길들인 것마저 그자에게는 호기(好機)였을 겁니다.”
“게다가 베르너르 페네티안은 시몽 드 사르네즈 공작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습니다.”
“······.”
“······.”
내 말을 이해한 친구들의 낯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곧바로 이자벨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그녀의 입술이 작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설마.’
“물 속성 신물인 빙잠의 보관이 없어도, 빌헬미나는 아랑곳하지 않았을 겁니다. 신국의 세작 집안이었던 사르네즈가 ‘창해의 축복’을 지키고 있었으니까요.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 부분이라 여긴 게 틀림없습니다.”
“세상에.”
“오, 신이시여······.”
“그랬다면 스네이더르는 성공에 무척 가까워져 있었겠군요. 구체적인 작전이 어땠는지는 몰라도요.”
요한 경이 고개를 기울이며 나의 말을 받았다.
새로운 술잔을 어머니에게 밀어준 가인 씨가―이자벨은 즉시 받아마셨다―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네요. 영령은 암시장에 가둬놨지, 사룡은 피시스만 빼돌려서 이미 실험 중이지. 왕세녀는 알아서 예기를 잡아 왔지. 자기가 몰래 부릴 수 있는 놈이 물 속성 대체재도 하나 갖고 있지······. 그림 자체는 완벽했네. 신이 되겠답시고 허파에 바람 들 만했네.”
“그런데 그 판을 당신이 깡그리 엎었고.”
디오프가 나를 향해 눈짓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저 혼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고요. 문제는 스네이더르가 이런 와중에도 신국의 내란을 주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 쉬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요.”
-끼아
프랑수아가 손끝으로 턱을 받치며 말했다.
그의 등에는 이제 페리까지 업혀 있었다.
“왕세녀 전하와의 대립으로 정확히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지, 지금의 우리로서는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녀의 신물을 탐내고 있다면 오히려 원만한 관계를 추구하는 쪽이 현명할 테니 말입니다. 한데 스네이더르는 이 나라를 사실상 양분하고 있습니다.”
“으음.”
“소환진의 발동만을 노리고 저지른 일이라면, 다소 무모하지요. 완벽한 성공이 보장된 작전이 아닌데 반역자가 되기를 감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스네이더르의 성향과는 맞지 않는 행보입니다. 증거란 증거는 모조리 파괴해버리는 그자가 왕세녀에게 빌미를 주다니요.”
내가 칭얼거리는 티테를 어르며 대답했다.
순하디순한 아기는 에테르 구슬 하나를 물려주자 금세 잠잠해졌다.
나는 까무룩 감기는 티테의 어린 눈망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웅
“······.”
······뭔가 찜찜해. 빌헬미나 스네이더르에게 다른 작전이 있는 거야.
소환진 말고도 다른 꿍꿍이가.
“그거야 알 길이 없어. 당장 우리는 첩보전에서 고립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비렴의 방주는 고사하고 전서구도 없다고.”
“전서구라면 내가 준비해 보겠소, 제비 공.”
“그놈의 제비 소리는 언제까지 할 건데?”
“정말 고맙습니다, 레오폴트. 그래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음. 나의 말을 잘 따르는 비둘기들이 있으니, 대륙 횡단은 힘들어도 천로까지는 닿을 수 있을 것이오.”
공작이 멋쩍게 미소하며 말했다. 천만다행이었다.
다시 한번 황제 폐하께 소식을 전할 수 있을 듯해서 진심으로 마음이 놓였다.
아무렴 뚝심이만큼 빠르고 안전하지는 못하겠지만, 우리는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주신을 살해하겠다며 온갖 연구와 실험을 거듭해온 미친 집단이 있는데, 심지어 그들의 뿌리는 페네티안의 초대 국왕이었다.
요컨대 나라의 주춧돌부터가 완전히 썩은······.
“그런데 천사 공, 이 문서가 그토록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면······.”
공작이 친구들을 돌아보며 문장을 흐렸다.
반지하의 낮은 창틀 너머로, 긴 달빛이 내려와 식탁의 양피지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재깍 남자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의 심란해 보이는 표정도.
“네. 평범한 장물일 리가 없습니다.”
“······.”
‘왕실! 스네이더르! 소환진! 그중 하나도 모르는 네놈이! 이 가문을, 어, 어찌 지키겠다고!’
‘자고로 라소는 이렇게 살아야 해! 숨소리도 내지 않고! 납작. 납작 엎드러져서! 마수나 팔고! 돈이나 만지고!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맨손으로 레이피어의 날을 잡은 채, 팔뚝을 타고 피가 쏟아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비명을 질러대던 노파.
아들을 죽이고자 문자 그대로 혈안이 되어 있었던 선대 라소 공작.
그 자리에서 그녀의 말을 직접 들었으니, 이제는 모르려야 모를 수도 없었다.
“페네티안의 왕실 방계로서, 라소 가문의 선조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직계 왕족이 주신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요. 그러니까 그렇게 거창한 대피소까지 지은 거겠죠.”
-어찌 왕족이란 자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제 목숨을 구하기에만 급급하단 말이냐? 모조리 짐과 순장하는 편이 옳다.
“솔깃하네요, 폐하.”
요한 경이 눈웃음치며 답했다. 세상에.
“라소만 알았을까요? 솔직히 다른 왕족들도 알음알음 알았을 것 같은데. 린, 뭐 기억 나는 거 없어?”
가인 씨가 의자에 앉아 음식을 주무르던 아기에게 물었다.
하기야 린도 이세니아였던 시절에는 왕족이었다.
세드리크는 자못 부드러운 손길로 빵을 빼내며 아이를 제지했다. ‘너, 식사 예절을 다시 배워야겠군.’
“우움. 없는데.”
“역시 그런 기억까진 안 남아 있나······.”
“근데, 언니이. 저거 사막에서 왔어.”
“저거? 아, 교황의 문서? 그렇지, 보통은. 교황님이 직접 쓴 거니까 사막에서 왔겠지.”
“아니이. 으우······. 그 사람이 뺐어. 그 사람이 빼서······.”
‘뭐였지?’ 린이 조그만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제야 숨을 조금 틔우고 웃을 수 있었다. 어느덧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잠이 덕지덕지 묻은 눈가를 보니 일단 아이들부터 올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자의 목덜미에 매달린 로피도 그렇고, 다들 무척 졸린 기색이었다.
나는 가인 씨에게 티테를 부탁한 뒤, 부드럽게 에테르를 풀어내며 린을 안아 올렸다.
“영차, 린. 자러 가자. 신수들하고 같이 코하러 가자.”
“아니이, 그거······. 뭐지이······? 이룸. 뭐지?”
“괜찮아. 급한 일 아니야. 아기는 몰라도 돼.”
“아냐, 아냐, 린 알아! 이레너!”
······.
“이레너! 웅! 그 사람이 뺐어. 저거 보냈어.”
“······.”
감히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
“······뭐?”
아기는 칭찬을 바라는 분홍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소시지처럼 동그란 손가락이 식탁의 양피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전신으로 소름이 번지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돌아본 세드리크와 가인 씨의 동공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자벨과 프랑수아는 다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산트와 레오폴트는 지나치게 충격을 받은 나머지, 유의미한 반응 자체를 보이지 못했다.
이걸 누가 빼냈다고?
“······.”
“마지막 교황이었던 이레너 스네이더르가, 이 문서를 교황청에서 빼돌려 스네이더르 공작가로 보냈다는 건가. 맞아?”
디오프 공자가 보석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린의 오동통한 뺨이 그를 향해 돌아갔다.
“웅.”
“꼬맹이 너,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 그 말에 책임질 수는 있고?”
“공자.”
“책임 아니고 진짠데.”
아기가 씩씩하게 대꾸했다. 심장이 자꾸만 쿵쿵 뛰었다.
“나아, 많이 기억 없어도 그거는 아는데.”
“······.”
“성게. 성궤(聖櫃)에서, 이레너가 꺼냈어. 집적.”
“‘직접’이겠지.”
“······.”
나는 눈꺼풀을 천천히 내리감았다.
어느 날의 기억이 마침내 자리를 찾은 퍼즐 조각처럼 빠르게 달라붙는다.
하늘에 하얀 줄이 그어지고, 병영은 혼란에 빠져들었던 그날의 대화가 선명해진다.
가나엘의 다급한 목소리가 알람처럼 귓전을 울린다.
‘헤릿이 성궤를 열었고, 거기까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그 내용물을 보고 받아적을 때까지도 모든 게 정상이었는데······.’
‘어쩌다 종이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게 닿자마자 세계수 뿌리가 ‘파지직!’’
‘무시무시한 빛을 터뜨렸답니다!’
요한 경의 아들인 헤릿이, 이미 성궤를 열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정현서의 ‘설정집’ 외에 특별한 것이 없었다.
스승님과 에르베 경은 아이들을 데리고 헛걸음을 하신 셈이 되었다.
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과연. 그래서 그곳이 비어 있었군.
“······.”
교황 이레너 스네이더르가, 앞서 마테이스 로세하르더의 문서를 빼돌렸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