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780)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780화(780/920)
시간의 씨앗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6)
3월 21일 15시.
페네티안 신국 왕도 중심부, 카인 대로 한복판.
‘타락자 근거지 소탕 궐기 대회’
크고 누런 천에 피처럼 시뻘건 글자를 적은 깃발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꼬마 예프가 그 너머를 가리키며 두 눈을 뚱그렇게 떴다.
“누나, 저기 봐. 사람들이 더 와!”
“당연히 더 오지. 우리가 엄마한테 딱 얘기했으니까 이제 더 오는 거야.”
“우리가 하인 누나 말 믿어주자고 해서?”
“당연하지.”
“예쁜 아저씨가 보면 놀라겠다. 그, 판테온에. 신관 아저씨.”
“당연히 놀라지.”
도로테아 발렌틴이 야무지게 대꾸했다.
그러자 찻간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나직이 목을 울렸다.
손을 꼭 맞잡은 두 아이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궁정백의 아들인 디데릭 로세하르더는 즉시 표정 관리하며 사과했다.
“이것참, 귀하신 분들 앞에서 실례했습니다.”
“웅. 숙녀의 말에 소리 내어 웃으시다니요?”
“맞아요!”
“하하하.”
그가 잠깐이나마 즐거워하는 사이, 발렌틴 남매는 다시금 창문 바깥의 광경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둘의 눈동자에 비치는 장소마다 사람, 사람, 그리고 또다시 양떼구름처럼 몰려든 사람이 가득가득했다.
발렌틴 자작가는 부유한 가문이었고 영지 또한 철광을 비롯한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인구가 많은 땅이었지만, 채 여덟 살도 되지 않은 두 아이는 한곳에 이렇게나 빽빽이 모인 인파를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그중 절대다수는 무기를 소지한 자들이었다.
창, 칼, 활, 도끼······. 심지어는 텃밭을 일굴 때 쓰는 삽이며 괭이를 쥐고 나온 이들도 있었다.
대부분이 기사나 병사였던 자경단에, 평범한 백성들마저 본격적으로 합세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아직 달이 없는 시각에 이토록 많은 인원이 모였다는 사실부터가 크나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멀찍이서 용맹하게 검을 치켜들고 연설하는 헤라르다 발렌틴의 모습이 창문에 맺혔다.
“······하고! 타락자들의 근거지를 찾아내어 발본색원하는 것이오!”
“······.”
그녀를 지켜보는 신관의 이마에는 짙은 그늘이 졌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곧 왕도가 뒤집힐 것이다. 전쟁으로 인하여서든, 혹은 내부의 격변으로 인해서든.
디데릭은 차분히 남매의 도시락을 마저 먹이려고 노력하며 숟가락을 움직였다.
본래는 유모나 시종이 하는 일이었으나 그는 헤라르다의 자녀들과 꽤 친밀한 편이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내는 그녀를 언제나 흠모하고 존경해 왔지만, 어쩌면 이번에는 너무 위험한······.
-똑똑똑
그때였다.
“작은 도련님, 디데릭 도련님!”
로세하르더 백작가의 하인이, 다급히 마차를 두드렸다.
디데릭은 낯빛을 더욱 굳히며 문을 열었다.
동시에 거리의 함성이 좁은 찻간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와아아아······!”
“타락자를 무찌르자! 무찌르자! 무찌르자!”
“근거지를 공격하자! 공격하자! 공격하자!”
“아아아아······!”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음에 놀란 아이들이 귀를 막았다.
곧 남자의 손에는 반듯한 편지 한 통이 쥐였다.
“엣자르트 주인님께서, 아버님께서 도련님께 보내신 서신입니다. 통행로가 완전히 막힌 것을 아시고 어떻게, 사람 편에 어렵사리 연락을······.”
“고맙네, 그렇지 않아도 연통을 기다리던 참이야.”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한 공자가 재빨리 서신을 열어보았다.
최근에는 항구와 가까운 왕도 동편의 창고 거리 근방에서 다수의 타락자가 추가 발생하였고, 이후 수도 바깥에서 각종 구호품을 실어 오기는 몹시 힘들어졌다.
달이 뜨는 밤에나 모든 이동이 가능하였는데 그마저도 요사이 왕도에 도적이 출몰하기 시작하면서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응당 그를 가장 절실히 여기는 백성들이 가장 먼저 알았다.
백성이란 본디 변화에 민감하였고, 그중 극소수는 무척 반사회적인 방식으로 이에 저항하여 생존을 도모하곤 했다.
이를테면 노략질, 강도질. 유괴와 납치.
디데릭이 자택으로 돌아가지 못한 지도 벌써 나흘이 지났다.
-부스럭
“······.”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처럼 복잡한 시류에 아버지의 서신 또한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도련님, 안 좋은 일이 생겼답니까? 이설 아기씨와 왕녀 전하께 무슨 변고라도······.”
“······그런 일은 아닐세. 마음 놓게.”
아니, 마음을 놓아도 되는가? 신관이 마른세수하며 한숨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별안간 ‘신물’이라니. 그는 구겨진 편지를 다시 펼쳐보았다.
‘네가 짐을 싣고 떠난 직후, 대륙에서 가장 신성한 귀빈께서 우리 가문의 장미밭을 방문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요구를······.’
대관절 이게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또한 주신의 사랑 받으신 코르넬리서 왕녀 전하와 이설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으나, 멤피스 너머의 라소 공작령을 지나온 산트가 어젯밤 우리 저택을 찾았다. 그래, 장미원을 떠났던 너의 동생 산트 말이다. 네 어머니와 유모들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으마.’
이건 또······. 맙소사.
‘그 아이는 제국군 소속의 이자벨 랑부예라는 귀족 성기사와 그녀가 섬기는 어느 사령을 데리고 왔다. 또한 그들의 일행으로는―네 동생은 전쟁 포로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였지―의식이 불분명한 신국의 전투 신관 하나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아비가 익히 아는 사람이더구나. 신께서 그녀의 영혼을 생의 길로 이끄시기를.’
꿈 이야기를 하시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축복받으신 왕세녀 전하의 오른팔인, 용맹한 마르티어 제일스트라 경이었다.’
-구구궁······!
“어어어······!”
바로 그 순간, 마차 외벽에서 기이한 진동이 느껴졌다. 아주 먼 곳에서 땅이 울리는 듯한 소리였다.
대로에 빼곡히 모여 있던 궐기 대회 참가자들이 큰 소리를 내며 술렁거렸다.
차체가 흔들릴 정도의 지진은 아니었으나 에테르 보유자인 디데릭은 즉시 불운을 포착해냈다.
그는 서둘러 하인을 찻간에 태운 뒤 문을 닫아걸고, 창가에 붙은 두 아이를 제자리에 앉히고서 작은 성소를 전개했다.
황금빛 보호막 아래 놓인 남매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대로변의 구석에 숨은 마차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장면이 있었다.
-구구구궁······!
“세상에, 저기 봐! 멤피스 방향!”
“어어어어······!”
어지러운 비명과 혼란 너머, 그 자리의 모두가 똑똑히 목격했다.
“장미 아저씨, 저게 뭐예요?”
“······.”
아득한 멤피스 산맥의 세 봉화대가, 일제히 잿빛 연기를 피워올리는 끔찍한 장관을.
그 뒤편으로 산산이 터져 나가는 폭약은 마치 땅에서 하늘을 향하여 쏟아지는 핏빛 유성우 같았다.
아이들은 이를 폭죽놀이로 착각하여 즐거워했다.
디데릭은 심장이 나동그라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마차 지붕을 두드렸다.
만일에 대비하여 헤라르다 공녀와 미리 얘기해 둔 바가 있었다.
-탕탕, 탕탕탕!
“마부! 발렌틴 자작저로 가주시게, 어서!”
그들은 달아나야 했다. 지금 당장.
*
-휘이이이······
“전하, 이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곧 모래 폭풍이 온다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쥘리에트 궁의 시종 총괄인 뱅자맹이, 거대한 기둥 옆으로 와서 예를 차렸다.
어느덧 리에스테르 본영을 떠나 경계의 신전에 다다른 오렐리 부티에는 고요히 사막의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나먼 동녘 하늘로 시커먼 먹구름과 어둠이 모여드는 모양새였다.
모래의 빛깔을 닮은 눈동자가 단안경 아래로 서늘히 가라앉았다.
사자의 혀처럼 거칠한 바람은 신전 이곳저곳을 불길하게 훑고 지나갔다.
“······전하. 충분한 휴식을 취하셔야 내일의 여정을······.”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야 할 것 같네.”
‘황실과 귀족원에 그렇게 전해줘.’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를 황궁까지 보필하는 임무를 맡은 뱅자맹은 예상치 못한 말에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뒤쪽에서 다과를 내오던 가나엘 역시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오렐리는 둘을 돌아보지 않은 채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로날트 뤼퍼르트 총대리. 아무래도 그를 가까이에서 감시할 이가 필요하거든.”
“감시라 하심은······.”
“끝이 보이는 듯하니······. 나 또한 어떤 식으로든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
“······전하?”
가나엘이 두려워하는 음색으로 되물었지만, 답을 돌아오지 않았다.
자줏빛 머리카락이 바람을 받아 거세게 휘날렸으나 추기경은 미동 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날 밤의 달은 이지러지는 형상이었다.
*
3월 22일, 디데이.
일몰 직전.
“맙소사, 드디어 여러분이 떠나네요. 그야말로 전쟁 같은 하루하루였어요. 이건 전시 판테온에서 일하는 신관이 하는 말이니 믿어도 좋아요.”
힐다 씨는 짐을 챙긴 우리를 보며 반쯤은 속 시원하다는 투로, 그리고 나머지 반은 퍽 섭섭하다는 투로 인사했다.
‘그간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는 씩 웃고서 그녀와 악수했다. 그러자 가인 씨도 냉큼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신수들은 힐다 씨 앞에서 신력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으므로―평범한 반려동물 연기도 쉽지 않았다―꼬리만 바짝 세워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으로 세드리크와 디오프 공자가 짧게 눈인사했고, 요한 경은 별다른 말 없이 그녀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자 힐다 씨가 어깨를 으쓱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요한. 신관으로서의 난······. 여전히 너한테 사과는 못 해.”
“······.”
“너를 감시하고 네 일상을 보고하는 게 나의 임무였어. 그리고 나는 아직 교황청 소속이라······. 그때의 일을 부정할 수는 없어. 그러자면 내 과거를 통째로 부정해야 할 테니까.”
“······.”
“하지만······.”
힐다 씨가 살짝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했다.
잘하고 계세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끼리 얘기한 대로만. 진심을 담아서요.
“하지만 임무를 해내기 위해 너를 속인 거. 네 신뢰를 이용한 거······. 그건 분명 큰 잘못이야.”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때 네가 했던 말이 맞아. 난 널 배신한 거야. 총대리 전하께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나는 게 싫고······. 사막으로 돌아가 구박받기 싫다는 얄팍한 이유로. 입으로는 너를 좋아한다면서 결국 너를 도구 삼았어. 그러니까······.”
그러자 가인 씨가 두 눈알을 크게 뜨며 디오프를 돌아보았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 입으로 훅 바람을 불어 머리카락이나 올리고 있었다.
“우리가 친구가 아니었다는 네 말도, 전부 맞아. 늦었지만 진심으로 미안해.”
“······.”
“······용서해 달라는 말은 아니야. 네게 그런 걸 조를 만큼 염치없지는 않아.”
말을 맺은 힐다 씨가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요한 경은 그녀를 보면서도 한참이나 묵묵했다. 나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
“그럼, 이만 출발할까요?”
“넵.”
“그러지.”
“잘 생각했어.”
세 남녀가 재깍 앞장섰고, 나는 데미를 품에 안고서 걸음을 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한 경이 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로 걸으며 낮게 물었다.
“제가 힐다를 용서해야 할까요?”
“아뇨.”
“······.”
그 답이 이상하게 들렸는지, 남자가 조금 커진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바보 같은 실소가 흘렀다. 나는 신수의 목덜미를 쓸어주며 천천히 부연했다.
“힐다 씨가 정식으로 사과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 거잖아요, 그렇죠? 그동안 요한 경은 줄곧 상처를 품고 지내셨을 테고요.”
“······.”
“그렇다면 아마, 오늘 뿌린 사과의 씨앗이 열매를 맺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다.
“충분히 숙고해 보시고, 힐다 씨의 진심을 헤아려 보세요. 혹은 당분간 아예 생각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냥······.”
“때가 되면요?”
“네, 요한 경이 느끼기에 적절한 때가 되면요. 오늘의 사과로 언젠가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지면, 그날부터 천천히 용서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무도 경에게 강요하지 않을 거예요.”
“······.”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을까. 추기경의 입꼬리가 설핏 올라갔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소리 없이 마주 웃었다.
그즈음 우리는 판테온 로비와 커다란 방명록의 벽을 지났다.
그리고 육중한 문이 열리면······.
-히히히힝!
“저기, 헤라르다 공녀님이다!”
“공녀님이 스네이더르 공작저에서 죄인을 잡아 오셨대!”
“야아아아······!”
때늦은 피란 행렬과 부서진 집기들이 어수선하게 뒤섞인 광장에서는, 마침내 대격변이 시작되고 있었다.